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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또롱 님의 서재입니다.

젤 쉬운 게 제약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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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또롱
작품등록일 :
2020.11.06 08:56
최근연재일 :
2020.12.18 12:20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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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63
추천수 :
420
글자수 :
359,540

작성
20.11.0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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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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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
20쪽

8화. 도전(3)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졸작이지만 즐겁게 읽어주시길...




DUMMY

“역시 수컷들의 등수 집착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야. 그놈의 승부욕이 뭐라고 이 난리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정수아가 전경준과 김우진에게 다가갔다.


“너네들, 참 치졸하단 생각 안 드니? 한쪽은 신발 하나로 우쭐대고, 다른 한쪽은 기침 한 번 한 것 같고 걸고 넘어지고... 여기가 유치원 어린이집이니? 우쭈쭈, 참 잘했어요, 해줄까봐. 그래야 사탕 먹는 애들처럼 조용해질 것 같아. 너네들 고등학생이 아니라 이제 성인인 건 알지? 게다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도 못 들어가서 지금 재수하는 상황이고. 그런데, 지금 이럴 정신이 있니? 김우진 너! 지디포스 신으면 서울대 들어가니? 패션에 대한 너의 그 열정을 학업에다가 쏟으면 어때? 그럼 지디포스가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나중에 맘껏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시기에 학원까지 신고 와서 자랑질하지 말고 말이야. 그리고 전경준 너! 배려라는 말 모르니? 기침 한 번 한 걸 갖고 트집 잡을 거면 뭐 하러 학원에 나와서 공부하니? 차라리 가정교사 두고 집에서 공부하지. 성인답게 배려하지 못한다면 널 앞으로 유치원 코흘리개쯤으로 불러도 상관없겠지?”


그러면서 들고 있던 볼펜으로 반 아이들을 가리켰다.


“이 애들을 봐. 너희 둘 때문에 지금 피해를 입고 있잖아! 다른 애들 생각도 해야지, 찌질하게 이게 뭐하는 거야? 한심하다, 증말. 아무튼 신발, 기침, 그딴 싸구려 같은 이유로 어디 싸워봐. 지금 여기에서 싸운다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두 남자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


그리고는 정수아는 어때, 지금도 싸우고 싶어? 라는 표정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붉어진 김우진이 이번에는 정수아를 잡아먹을 것 같이 노려보다가,


“씨팔! 으, 남자인 내가 참는다 참아!”


순간 자리를 뜨면서 재수 없는 년! 침을 탁 뱉었다.


“어머, 남자라서 이래야 하고 여자라서 이래야 한다는 말을 제일 경멸하는데! 남자라서 참아야 할 필욘 없다구. 어때, 나랑 한 판 뜰까? 이래봬도 나 태권도 4단이야.”


정수아는 김우진을 보며 대결 자세를 잡았다.

정수아의 표정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러자 정수아를 노려보며 부르르 떨던 김우진이 으아, 비명을 지르며 나가버렸다.


이번에는 정수아가 그대로 서 있는 전경준을 바라보았다.


“전경준! 넌 어때, 이번에는 나하고 싸워볼 거야? 아님, 그깟 기침 같은 어쭙잖은 핑계 그만 대고 조용히 공부할래?”

“아, 알았어!”


전경준은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등동물들! 이래서 엄마가 사내새끼들은 죄다 애라고 한 건가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정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흐트러짐 없이 의자로 다가가 제 자리에 앉은 정수아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또 다시 머리를 박고 태연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야, 무림 지존들을 한 방에 때려눕히는 은둔고수 같잖아. 존멋캐(존나 멋있는 캐릭터)네.’

‘근데 또 저렇게 나 몰라라 공부만 하고 있는 걸 보면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아이 같기도 하단 말이야.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도 않고...’


이 반에서 전경준이나 김우진의 무리에 끼지 않는 사람은 나와 정수아가 유일하다.

평소에는 누가 무얼 하든 정수아는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이었고, 그 공부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지나칠 정도로 주위를 무시했다.

마치 너희와는 애초부터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이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런데 전경준과 김우진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정수아를 보면서 나는 어쩐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딱 부러지게 할 말을 하는 그녀의 다부진 모습도 마음에 들었고, 주먹만한 얼굴 비율에 맞게 작은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도 꽤나 귀여웠다.

무엇보다 반 애들과는 다른 성숙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칭얼거리는 애들 투정만큼이나 짜증나는 것도 없으니까.


아무튼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공부지?

일련의 사태가 진정되자 나는 마음을 다시 잡고 공부에 매진했다.



***



다음 날, 아침부터 부담임의 영어수업이 시작되었다.

어제 학원장의 호출을 받고 나간 후로 처음 본 것이었는데, 어쩐지 부담임의 표정이 어두웠다.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했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해보였다.


to부정사와 동명사를 구분하는 문법 강의에 이어, 회화를 통해 수능에 나온 어휘를 보강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A : 한국음식 잘 드시네요.>

<B : 네. 제 ⓐ입맛에 잘 ⓑ맞거든요. 그래서 한국음식도 종종 만들어서 먹어요.>

<A : 그럼 이것도 한 번 ⓒ드셔보실래요? 소고기 뭇국이에요.>

<B : 이거 참 맛있네요. ⓓ레시피를 알려줄 수 있어요?>

<A : 소고기랑 무, 간장 2 큰술, 다진마늘...>


간단한 표현들이어서 다들 손쉽게 따라갔다.

그런데 ⓓ레시피에서 문제가 생겼다.

레시피 앞뒤에 a와 for가 붙은 형태, 즉 a ~ for(...을 만드는 법)을 얘기할 때였는데, 판서를 하던 부담임이 레시피 영단어를 쓸 때 멈칫거렸다.


“다들 레시피, 레시피 하는데 원 발음은 레서피죠. 자, 여기서 문제. 그럼 레서피 스펠링이 어떻게 될까?”


레서피는 매우 익숙한 단어지만 의외로 철자가 까다롭다.

그래서인지 반 아이들 중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반 아이들이 모두 조용히 있고, 쌤도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은 모양인지 초조해했다.


이 단어를 몰라?

반대로 난 의아했다. 며칠 전에 외웠던 단어다.


‘헐, 서울대 지원하는 놈들도 모르는 게 있군. 쌤도 그렇고. 좋았어!’


난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쌤이 나를 쳐다보며 다소 놀라워했다.


“...이형우 학생.”

“알이씨아이피이(recipe)입니다.”


순간 반 아이들이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렇죠! 잘했어요, 이형우 학생. 여러분, 영어는 기본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서 점수가 갈려요. 그러니까 이형우 학생처럼 어느 때라도 방심하지 말고 쉬운 단어라도 명확하게 숙지해놓도록 하세요. 에, a recipe for가 ...를 만드는 방법이니까 a recipe for cooking하면 요리하는 방법, 간단하게 요리법이 됩니다...”


난 기분이 좋아졌다.


‘꾸준히 영어 어휘를 외운 효과가 나타나는군.’

‘공고 나온 놈이 이런 단어를 외우고 있으니 다들 의외라고 생각했겠지? 좋았어! 기분이다. 오늘은 30개 외우자!’


확실히 영어는 어휘를 알고 나자 훨씬 수업내용을 따라가기가 쉬워졌다.

못하던 독해도 단어들을 조합하면서 무슨 뜻인지 감이 왔고, 느리긴 하지만 한 문장씩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처음으로 공부에 대한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 서울대에 들어가겠다고 맘을 먹었을 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회의감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한 지 2달여가 지난 지금, 조금씩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자 기운이 솟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코웃음을 칠만한 수준이겠지만.

나는 그럼에도 조금씩 늘어나는 성취에 큰 의미를 부여했고,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더더욱 수업에 집중해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느덧 나는 이 반의 아이들과 수업 분위기에 동화되어 있었다.


영어 수업이 끝난 후, 부담임이 진학 상담을 진행했다.

일 진도표를 살피며 한주일 동안 학업 진행을 체크하고 진학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시간이었다.

두 명이나 세 명씩 같은 과를 지원하는 학생들끼리 짝을 지어 상담실로 향했다.


나는 정수아와 함께 불려 나갔다.

같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목표로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정수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왜, 놀랐어? 나 같은 놈은 서울대 경영학과에 지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확실히 놀랍긴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거나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냐. 오히려 목표를 향해 도전해가는 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공업고등학교를 나왔고 졸업한 지 2~3년이 지난 다음에 그렇게 도전한다는 거 결코 쉽지 많은 않은 일이야. 나도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을 걸?”

“나에 대해서 잘 아네.”

“뭐, 이 학원에서 넌 아주 유명한 사람이니까. 널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중학교 책을 봐서 좀 놀라긴 했어. 근데 전경준이나 김우진처럼 겉멋만 들어 있는 애들보단 니가 훨씬 낫다고 생각해. 게다가 죽었다 깨어나도 서울대는 못 들어가, 라고 지레짐작 하는 건 아주 나쁜 거야. 난 그러긴 싫어. 니가 잘 되길, 그래서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랄게.”

“고마워,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없던 힘도 막 솟구치네~~~ 근데, 너 계속 반모(반말모드)다. 너보다 나이도 많은데 니가 뭐냐? 오빠라고 불러!”

“흥, 학원 동기생끼리 그러는 게 어딨어? 이제껏 반모였다가 갑자기 존모(존댓말 모드)하면 되레 이상한 거 모르시나봐?”

“이상하긴, 당연히 할 건 해야지!”

“칫, 나중에 나이 많다고 꼰대짓하려고?”

“헐, 얘가 그새 날 꼰대로 만들려고 하네. 좋다, 넌 특별히 반모 인정해줄게.”

“헤헤, 그럼 나도 좋아, 인심 썼다! 모르는 거 생기면 물어봐. 너무 귀찮게 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알려줄게.”


정수아가 방그레 웃음을 지었다.

정수아의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화장기 없는 하얀 피부에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지는 모습이 싱그러웠다.

난 정수아와 얘기하는 게 즐거워 투닥거리면서 상담실로 들어갔다.


부담임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날 상대했다.


“이번 주 목표 진도를 어디까지 달성했지?”

“수학은 목표로 했던 2학년 과정까지 끝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3학년 정규반 수업을 정상적으로 따라가면 될 거 같아요. 영어는 매일 어휘 20개씩 외우고 있어요. 지금까지 외운 어휘가 700개는 넘을 걸요.”

“잘 하고 있네. 지금처럼만 하면 진짜 목표했던 대학에 갈지도 모르니까 열심히 해봐. 나도 곁에서 도와줄 테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처음이었다.

선생들 중에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난 기분이 좋아져서 호기롭게 소리쳤다.


“공고생도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제가 직접 증명해보일 거예요. 그러니까 쌤도 안 되는 쪽에 내기 걸었다가는 큰코다칠 걸요.”


언젠가 선생들 사이에서 내가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느냐에 대해서 내기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 휴게실에서 새어나온 말이 학원생들 사이에 떠돌았고, 그 말이 내 귀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부담임은 내 말에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서울대가 네 말처럼 그렇게 쉬운 곳은 아니다만, 그래 어디 한 번 기적을 만들어보자!”

“네. 흐흐.”


정수아에 이어 부담임도 나를 인정해주는 듯한 투로 얘기하자, 난 한껏 기분이 업됐다.

앞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 느껴지는 것도 좋지만, 어색했던 학원생활이 점차 재미있어지는 것도 좋은 일이다.

게다가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까지...


난 징조가 좋다고 생각했다.

자그마한 징조와 그날그날의 분위기, 공부 과정에서의 긍정적인 편린들이 한데 모이고 뭉쳐서 나를 채찍질하는 동기부여가 되어주었고, 나는 기세를 몰아 더 열심히 공부했다.

시속 0km에서 100km까지 끌어올리는 건 힘들지만 100km에서 200km에 도달하는 건 훨씬 쉬운 일이다.

나는 갈수록 속도가 붙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쯤이었다.

부담임이 내 편이 되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 것은.


반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을 들은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부담임이 여자원생 한 명을 성추행해 여학생의 신고로 경찰관이 학원에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틀 전 자습시간에 부담임이 여자원생의 어깨와 가슴을 만졌고, 이에 학생이 즉각 담임쌤에게 항의를 한 후 경찰까지 불렀다고 한다.

여자원생은 같은 E반 학생으로 평소 밝고 쾌활하게 지내는 아이였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가 강의실에서 보이지 않았다.


처음 이 소문을 들었을 때, 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내가 앉은 자리에서 훤히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E반은 나를 포함한 10명이 한 클래스를 구성하고 있는데, 강의실 가장 뒤쪽 창가자리가 내가 앉는 좌석이다.

그리고 자습시간에는 항상 부담임이 제일 뒤쪽에 놓인 책상에 앉아 감독을 하기 때문에, 내가 앉은 좌석과 일직선에 위치해 있어서 부담임이 무엇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관리감독은 앞에서 하는 것보다 뒤에서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뒤에서 감독을 하면 앞좌석의 학생들은 선생이 보이지 않으니 어디에 있고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걸 알려면 뒤를 돌아봐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신의 행동이 노출되어서 자연스레 행동의 제약이 따른다.

그래서 부담임은 평소처럼 뒷좌석에 감독을 하던 중이었고, 예의 그 여학생이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기 위해 부담임을 찾은 것이었다.


마침 여학생이 물어본 부분은 나도 잘 몰라 궁금했던 터라 나는 부담임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설명을 끝낸 부담임은 이해했는지를 여학생에게 물어본 후 살짝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파이팅 하라는 의미에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학생의 주장은 달랐다.

팔을 고의적으로 가슴에 대고 눌렀고, 어깨를 노골적으로 만져서 성적 수치심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담임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고, 급기야 원장의 귀에까지 들어가 원장이 부담임을 호출한 것이다.


‘요즘 부담임 표정이 안 좋더니만 이것 때문이었군.’

‘부담임이 성희롱을 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내가 잘못 봤나?’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억 속의 부담임은 분명 자연스럽게 넘어갈만한 행동을 했지, 무언가 어색하거나 의도가 느껴질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사건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여학생이 부담임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부담임이 사과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응하지 않자, 화가 난 여학생이 급기야 부담임의 해고와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여학생은 피해를 입었다고 눈물로 호소했고, 선생은 그런 일이 없다고 극구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을 상대하는 선생이니만큼 늘 조심하고 문제가 생길만한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1차적으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선생의 책임이 크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학생의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학생이 수치심을 느꼈었을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만큼 치욕을 느꼈다면 그 아이한테는 그게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여학생의 수치심이 중요한 만큼 부담임의 의도 또한 중요하다.

부담임이 정말 성추행할 의도가 있었는지 하는 것 말이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자주 어깨를 부딪치곤 하는데, 예를 들어 외국 사람이 한 국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고 하자.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만 외국 사람들은 아니다.

그것은 예의가 없는 행위이며 그에 대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적 차이를 알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한국 사람들로 인해 많은 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다.

그렇다고 조심하지 않는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반대로 별일 아닌 것 같고 화를 내는 외국인들을 타박할 것인가.


문화차이가 존재하듯 성별의 차이도 존재한다.

개개인의 차이가 존재하고, 학력, 인성, 사고방식에 따라 무수히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때문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인식 하에서 사건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돌이켜봐야 한다.

이 사건의 경우 어느 한 쪽을 편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느낀 학생에게 왜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수치심을 느꼈냐고 비난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피해 학생이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에 선생이 성희롱을 한 것이라고 무조건적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수치심 같은 심리나 마음까지 보장해줘야 한다면 상대방 역시 그때의 감정과 심리까지 보장해줘야 한다.


물론 수치심이라는 건 주관적인 감정일 뿐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상대방 즉 부담임의 행위가 정말 성희롱의 의도로 한 것인지, 아님 순수한 의미에서 한 터치였는지도 증명할 수 없다.

당시의 상황진술과 주장만 있을 뿐 객관적인 증거도 없고, 주장이 맞는지 확인할 근거도 없다.

그런데 사건은 점점 피해 학생이 수치심을 느꼈기에 부담임이 성희롱을 한 것으로 단정 짓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학원의 명성에 흠집이 갈 것을 우려한 학원 측에서 선생을 해고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처음으로 날 인정해준 부담임이 떠난다고 생각하자 나는 어쩐지 아쉬웠다.

더구나 내 기억으로는 분명 여학생에게 성희롱을 가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문득 아그나 생각이 났다.


‘아그나, 미래가 아닌 과거의 일은 언제든지 알려주잖아. 그럼 내가 본 과거의 일을 화면 같은 걸로 재생해서 보여줄 수 있어?’


『네. 이형우님과 동기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럼 부담임과 여학생이 있었던 당시의 일도 보여줄 수 있겠네?’


『네. 지금 추적하겠습니다... 내측두엽 내 해마와 측두엽 피질을 스캔합니다... 간뇌의 시상 앞핵과 시상 등가쪽핵, 시상하부 유두체를 스캔합니다... 추적을 완료하였습니다. ◆ 결과 : 2020년 2월 9일 오후 8시 43분의 영상을 재생하겠습니다.』


순간 내 앞에 화면 하나가 띄워졌다.

부담임과 피해 여학생이 마주 앉은 채 무언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1인칭 시점으로 펼쳐졌다.


‘헐, 꼭 CCTV화면을 보는 것 같네.’

‘이런 것까지 가능한 걸 보면 정말 아그나는 대단해!’


새삼 아그나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나는 화면을 주의 깊게 살폈다.

부담임이 설명을 끝내고 여학생이 막 일어나기 직전, 선생이 어깨를 잡았는데 그 전에 살짝 가슴께를 팔로 스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여학생이 움찔했다.


여학생의 주장대로 가슴을 스친 것은 맞지만, 일부러 가슴을 누르거나 한 것은 아니다.

어깨를 잡기 전에 실수로 팔이 닿은 것 같은데.


‘아그나, 이 영상을 좀 더 느리게 해서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네. 0.5배속으로 진행합니다.』


부담임의 팔이 여학생의 가슴을 스치는 순간, 먼저 여학생이 움찔한다.

그리고 거의 찰나의 다음 순간에 미미하지만 부담임도 움찔하는 게 보였다.

의도적이라면 부담임이 움찔할 이유가 없다.

확실했다.

부담임은 일부러 그녀의 가슴을 만진 것이 아닌 것이다.


‘아그나, 나한테 이 영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보여줄 수 있어?’


『안 됩니다. 동기화가 되어 있는 이형우 님에게만 보이는 영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음... 직접 보여주는 건 안 되나 보군. 그럼 부담임의 무죄를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다른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렇지!


‘아그나, 이 영상을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다운받을 수는 없어?’


『그건 가능합니다. 인간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체 신호는 전기(전극)적 신호와 호르몬을 통한 신호로 이루어지는데, 이형우 님이 요청하신 영상은 전기적 신호이기 때문에 디지털 신호로 변환이 가능합니다. 그럼 기억 영상의 생체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겠습니다... 변환을 완료하였습니다. 900MHz 대역의 휴대폰 주파수(cellular phone frequency)에 맞추어 데이터를 전송합니다... 전송이 완료하였습니다.』


핸드폰을 열고 찾아보니 방금 본 영상이 들어와 있다.

좋았어!

난 그길로 담임쌤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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