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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또롱 님의 서재입니다.

젤 쉬운 게 제약재벌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이또롱
작품등록일 :
2020.11.06 08:56
최근연재일 :
2020.12.18 12:20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32,844
추천수 :
420
글자수 :
359,540

작성
20.11.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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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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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글자
20쪽

1화. 만남(1)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졸작이지만 즐겁게 읽어주시길...




DUMMY

어머니 지인 몇 분에게 문자로 부고를 알렸지만 장례식장 시설 임대와 식사비용 등 대여 금액이 비싸서 빈소를 마련하지는 않았다.

병원비를 제하고 나면 당장 몇 십 만원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화장장에서 어머니를 화장하고 유골을 용기에 담는 분골을 한 후 납골당으로 모셨다.

납골당은 지자체에서 싸게 운영하는 곳이 있어서 다행히 수중에 있는 돈으로도 해결이 가능했다.


모든 절차를 마무리한 후, 술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방안.

싸늘한 건 집인데 몸 안에서 한기가 돌았다.

나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휴우, 이제 어떻게 하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전혀 대책이 서질 않는다.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기 보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떻게 ‘살까’를 좀 더 걱정했었다.

그만큼 어머니의 투병생활은 길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막막하다.


이젠 나를 뒷바라지 해줄 가족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다.

친척이 한 분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연락처도 모르고 그간 왕래도 없어서 있으나마나한 친척이다.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격증이라도 딸까?’


공고 전기과를 나와서 전기기능사 자격증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가려면 전기산업기사나 전기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것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위험물관리기사 같은 자격증도 따놓으면 기계나 설비시설 관리나 장비 유지보수직으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테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하겠다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해야겠다는 강한 의지도, 또 그렇게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번아웃 증후군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하기가 싫다.


나는 지난 일생을 떠올려 보았다.

이곳 천안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초등학교 때는 나름 재미있는 친구였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에 접어들 무렵부터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과묵하고 친한 친구도 없다 보니 학교에서는 섀도우 취급을 당했다.

어디에서든 앞에 서는 법이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는 그런 생활...


어머니가 하시던 장사가 잘 안 돼 어쩔 수 없이 폐업한 후 식당 허드렛일, 요양보호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경제 사정은 갈수록 나빠졌다.

그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1등도 곧잘 할 만큼 공부를 잘 했지만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공부에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어 알바를 시작했다.


편의점, PC방, 택배 상하차, 전단지 배포...

일찍 뛰어든 사회는 비정했다.

남을 밟고 일어서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 보며, 나 역시 비정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말수가 줄어든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중학교 때 친했던 오진석과 기은재가 생각난다.

셋이 트리오로 자주 어울렸었지.

진석이네 집에서 모여 공부도 하고, 은재네 컴퓨터로 게임도 하고, 3년 내내 모든 걸 같이 했었다.

친구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유일한 사람들... 아무 시름도 없이 평온했던 나날들... 하지만 그런 즐거운 시절이 내게 다시 오지는 않겠지?


언젠가 길에서 만난 중학교 동창을 통해 진석과 은재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집도 잘 살고 머리도 좋으니까 다들 어려움 없이 살아가겠지? 이제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달라.

고등학교를 공고로 진학하고, 하교 후에 매일 밤늦게까지 알바를 뛰면서 난 평범이라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그때서야 알았다.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담탱이 뒷담화를 까며 낄낄거리고, 중간고사를 보고 나서 PC방으로 직행하던 또래 애들을 볼 때면 무언가 있어야 할 곳에서 튕겨 나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밀리고 튕겨 나와 지구 한 쪽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듯한 기분.


그래도 일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절박했으니까.

절박해지지 않고서는 하루 생활이 어려웠으니까...


어머니까지 안 계신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절박하게 살아야하는 이유도 더 이상 남아 있질 않다.


이제 어떡할까...


‘아, 걔네 둘 다 서울에 있다고 했지. 나도 걔네들처럼 다른 곳에서 한 번 살아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순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열망이라는 것이 몸속에서 꿈틀대는 것이었지만 술기운이 한 몫을 한 것도 있었다.


‘그래, 어머니도 없는 이곳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살자! 더 이상 책임질 가족이 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보는 거야.’

‘어디가 좋을까, 서울? 그래, 서울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새로운 마음으로!’


지극히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나가겠다는 통보를 했고, 부동산에도 집을 내어놓았다.

낡은 집이지만 입지조건이 좋아 일주일 만에 집이 나갔다.


일주일 후,

마지막으로 짐 정리를 했다.

필요한 몇 가지만 남기고 모두 버릴 예정이었다.

낡은 사진첩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그 중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꺼내 지갑 속에 넣었다.

그리고 어머니 옷가지며 집안 살림들을 모두 다 버렸다.

마지막으로 엄마 유품이라고 될 만한 것들을 챙기는데 이상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서랍장 가장 안쪽에 들어 있었는데, 칠흑의 검은 빛을 띤 정육면체의 네모난 상자였다.

길이와 너비, 높이가 정확하게 일치해서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무척 정교하게 만든 물건이었다.

또 표면은 아주 매끄럽고 차가워서 맨들맨들한 조약돌을 만지는 것 같았다.

손으로 들어보니 상당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런데 이 물건의 용도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본 물건도 아닐뿐더러 어머니한테 이런 물건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 안에 뭐가 들었지?’


어디 뜯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서 상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살펴보았다.


그런데 문득,


우웅우웅-


정육면체의 상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 진동보다 좀 더 강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갑자기 상자를 만지는 손이 발판처럼 착 흡착되어 떼어지질 않았다.


어?


손을 거꾸로 해서 탈탈 터는 대도 상자가 떨어지질 않는다.


제길, 찍찍이 본드가 묻었나.


힘을 주어 떼어 내려고 하는데,


그때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지원자를 인식하겠습니다... 인식을 완료하였습니다. 동기화를 진행합니다... 동기화를 완성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이형우 님. 이형우 님의 인생을 바꿔드릴 라이프플래너 아그나입니다. 당신의 비서가 되어 행복하네요.』


상냥한 여자 목소리였다.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목소리.


“이게 뭐야?”


그제야 물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물체는 주사위처럼 바닥을 구르다가 딱 멈춰 섰다.

그러나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를 계속 이어졌다.


『이형우 님은 지금부터 자신의 소원에 따라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운명 변환과 관련된 소원은 총 1,923,258,745,624,338,210가지 경우의 수로 나눠집니다. 어떤 소원을 선택하든 그 결과는 오로지 이형우 님의 몫이고 때에 따라서는 독이자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형우 님의 인생을 변화시킬 운명 변환 프로그램을 진행하겠습니다. 시작하시겠습니까? ‘예’를 선택하시면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이후에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니오’를 선택하면 모든 기회를 잃고 현재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간절히 바꾸길 원하신다면 도전하십시오. 그럼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눈앞에 화면 하나가 주르륵 펼쳐졌다.

거기에는 ‘예’와 ‘아니오’가 허공에 박히듯 선명하게 떠 있었다.


환각이 보이나 싶어 손을 뻗어 휘휘 저어보았다.

홀로그램이 띄워진 것처럼 손이 그대로 통과할 뿐 화면과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뭐 이런 개황당한 일이...’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 또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선택하기가 어렵다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면 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들리는 거지? 운명 변환 프로그램이란 건 또 뭐고?’


『목소리는 아그나의 사고와 의지를 인간의 언어에 맞게 변환시킨 것입니다. 인간의 육성이 아니기 때문에 뇌리로 직접 전달이 됩니다. 운명 변환 프로그램은 개인의 특정한 삶을 변화시키는데 특화된 프로그램입니다. 즉 이형우 님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아니 내 생각을 읽는단 말이야?!’


『네. 동기화가 되었기 때문에 이형우 님의 생각을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동기화?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뇌리 속에서는 새로운 말들이 계속 흘러들어왔다.


『이형우 님의 인생에서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대로 실현시켜 드립니다.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기를 희망한다면 ‘예’를 누르시고 그렇지 않다면 ‘아니오’를 선택하세요.』


‘원하는 대로 사는 인생이라... 무슨 신박한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네. 게임이라면 튜토리얼 같은 게 있을 텐데...’


『운명 변환 프로그램은 튜토리얼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삶은 친절히 설명하며 진행해주는 튜토리얼이 생길 수 없으니까요. 대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아그나가 친절히 말씀드립니다.』


‘하긴 그렇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이형우 님은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시나요?』


어떤 인생?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내 미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겠다거나 하는 계획을 세워본 적은 없다.

돈 없고, 백 없고, 변변찮은 공고에 대학도 나오지 않은 내게 과연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이라는 게 있나.

결말이 뻔한 드라마처럼 결말이 빤히 그려지는 인생...

그래서 나는 눈앞에 닥치는 대로 살아왔었다.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을지 고민하는 행복한 다른 사람들과는 처지가 다르니까...

그런데 인생을 선택하라고?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냐고?


후후...

나는 웃음이 나왔다.


“어떤 인생을 살게 해준다는 것이지?”


『어떤 인생이든 가능합니다.』


“그래? 그럼 날 세계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줘!”


『네. 2018년 현재 기준 포브스 선정 최고 부자는 아마*의 CEO인 제프 베이소스로, 자산 가치는 1310억 달러입니다. 이 자산 가치를 기준으로 산출하겠습니다. 최단 경로를 탐색합니다... 최단 경로를 확인했습니다. 오차범위를 최소화합니다... 오차범위를 조정했습니다. ◆결과 : 이형우 님이 이를 뛰어넘는 시기는 적중률 99.2%, 오차범위 0.34% 이내로 142년 10개월 3일 후입니다. 총 7번의 위기를 겪고 3번의 기회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를 실행할까요? 실행을 원하시면 ‘예’를, 그렇지 않다면 ‘아니오’를 선택하세요.』


“하하하, 142년? 죽은 다음에나 가능하겠군.”


『최단 경로입니다.』


“그럼 국내 최고의 부자는?”


『네. 2018년 기준 포브스 선정 국내 최고 부자는 삼*그룹의 이건희 회장으로, 자산 가치는 169억 달러입니다. 이 자산 가치를 기준으로 최단 경로를 탐색합니다... 최단 경로를 확인했습니다. 오차범위를 최소화합니다... 오차범위를 조정했습니다. ◆결과 : 이형우 님이 이를 달성하는 시기는 적중률 99.8%, 오차범위 0.21% 이내로 107년 2개월 24일 후입니다. 총 4번의 위기상황을 이겨내고 5번의 기회를 잡으셔야 합니다. 이를 실행할까요? 실행을 원하시면 ‘예’를, 그렇지 않다면 ‘아니오’를 선택하세요.』


“엥? 1310억 달러 대 169억 달러인데 햇수로 별 차이가 나지 않는데?”


『도달할 수 있는 최단 경로는 그래프 상 ‘S’자 곡선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흐음...”


처음에는 농담이나 장난쯤으로 생각했는데,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이 아그나 라는 물체의 대답이 꽤나 구체적이다.

더구나 인생을 바꿀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준다니, 그 사실만 놓고 보면 꽤나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


나는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붉은 빛이 감도는 화면에 두 개의 버튼 모양이 꽤나 친절하게 놓여 있었다.


‘그래도 107년이나 걸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혹시 좀 더 쉬운 소원이라면 빠른 시간 안에 되려나?’


“아그나!”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되고 싶은 인생을 나중에 알려줘도 돼?”


『네.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나면 횟수나 시점은 상관이 없습니다.』


‘횟수나 시점이 상관없다면, 내가 하고 싶은 때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다는 얘기 아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지금과는 다른 인생이라...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는 삶이라면 얼마나 신이 날까! 좋아, 한 번 해보자. 이런 구질구질한 인생을 바꿀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


어쩐지 놓치면 안 되는 커다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스럽던 마음은 어느덧 놀라울 정도로 침착해져 있었다.

나는 머뭇거림 없이 ‘예’라고 쓰여 있는 부분에 손을 갖다 대었다.


『이형우님은 ‘예’를 선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운명 변환 프로그램을 시작하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해주세요.』


음...

난 뭐가 하고 싶지?

아그나의 말을 따라 얌전한 수험생처럼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얼 하고 싶은지 떠오르지 않았다.


참나, 하고 싶은 것도 없다니 나도 참 인생 막 살았군.


문득 내일 짐을 싸서 서울로 가면 새로운 집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원도 좋고, 아무튼 싸고 좋은 집을 구해야 할 텐데. 아르바이트도 구해야 하고.


“아그나, 내일 서울로 이사 가는데 새로운 집을 구할 수 있을까. 싸고 가성비 좋은 곳으로 말이야. 아르바이트도 구할 수 있으면 좋고. 이런 소원도 가능해?”


『네. 최단 경로를 탐색합니다... 최단 경로를 확인했습니다. 오차범위를 최소화합니다... 오차범위를 조정했습니다. ◆결과 : 집과 아르바이트는 적중률 100%, 오차범위 0.02% 이내로 25시 21분 후, 27시 03분 후에 각각 이뤄집니다.』


가만 지금이 오후 4시 11분이니까, 25시 21분 후면 내일 오후 5시 32분에 된다는 거네. 아르바이트는 7시 14분에 이루어진다는 거고.

진짜 아그나의 말처럼 될까?


나는 긴가민가했다.

이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바보가 어딨어?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혹시? 하는 일말의 기대심이 솟았다.

왠지 로또 한 장을 사들고 집에 돌아올 때의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부디 기분 좋은 내일이 오기를 바라며 나는 마지막 짐정리를 서둘렀다.


다음날 아침, 개운한 기분으로 텅 빈 방안을 둘러본 나는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받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천안에서 서울로 가는 지하철이 있긴 하지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다 버스터미널이 훨씬 가까워서 그곳으로 간 것이다.


서울로 향하는 첫걸음은 상쾌했다.

하늘도 무척 맑았고, 모든 것이 선명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서울을 가본 적이 없구나!

나는 가벼운 흥분에 휩싸였다.

새로운 곳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버스 안에서 잠을 자려고 시도해봤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분당 옆을 지나갈 때부터는 아예 창가에 꼭 붙어 구경했다.


마침내, 강남버스터미널에 입성!

첫 서울 땅을 밟았다.

하차장은 사람들로 붐볐고,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표소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부터 죽 늘어선 상점들까지 걸음을 옮기며 첫 해외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버스터미널을 지나 지하철역으로 향할 때쯤이었을까,

나는 그제야 무언가 허전함을 깨달았다.


캐리어를 두고 온 것이다!


정신이 쭈뼛 곤두섰다.

돈은 다행히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지만 통장과 옷, 어머니의 유품까지 모두 캐리어에 들어 있다.

아그나도.


나는 곧바로 뒤돌아 뛰어갔다.

하차장에 도착했지만 내가 타고 온 버스는 이미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근처 버스 기사에게 물어 차고지를 알아낸 다음, 그곳으로 달려갔다.

천안-서울 간 고속버스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지만 비슷한 차들이 너무 많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텅 빈 버스에서 막 내리는 버스 기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헉헉, 아저씨! 천안에서 온 버스 어디가면 찾을 수 있어요?”


버스 기사가 손을 들어 가리킨다.

그곳으로 달려가자 그때서야 내가 탔던 버스를 찾을 수 있었다.


“아저씨! 짐칸에서 짐을 안 내렸어요.”

“주인 없는 짐은 이미 사무실로 보냈는데. 거기로 가 봐요.”

“거기가 어딘데요?”


기사의 말을 되새기며 위치를 파악한 후 곧장 사무실로 달려갔다.

자그마한 수화물 대기실 옆에 사무실이 위치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파티션으로 사무공간이 배치되어 있고, 그 옆 통로에 내 캐리어가 턱 하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휴우-!


못 찾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그곳 사무실 직원에게 두 번 세 번 인사를 하고 나서 사무실을 나섰다.


벤치에 앉아 흐르는 땀을 닦았다.

시작부터 일이 꼬이긴 했지만 액땜한 것이라고 치지, 뭐.

어머니가 늘 하던 말을 그대로 중얼거리며 나는 스마트폰에서 방을 찾아주는 앱을 켰다.


천안 집을 정리하면서 받은 보증금 천만 원이 갖고 있는 전 재산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아껴 써야 했다.

그래서 보증금이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낮고 월세가 싼 집.

그런 곳이 내가 생각하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되도록 넓고 깨끗한 집이면 더욱 좋겠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런 집을 구하기는 힘들고 고시원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날, 휴대폰 앱을 통해 이미 10군데의 고시원을 알아봐놓은 상태.


나는 강남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곳부터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환승할 때 조금 헤매긴 했지만 네이* 지도와 길 찾기를 검색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살펴본 고시원은 너무 비싸거나 너무 구렸다.

창문이 있어서 채양이 잘 되고 깨끗하며 평수도 넓은 방은 아무리 못해도 40만원 이상이었다.


“학생, 여기 방 대부분이 60만원 이상이야. 이방이 직사각형으로 떨어지지 않고 기둥이 공간을 잡아먹어서 가장 싸게 내놓은 거야. 이 방도 40만원 이하로는 안 돼요.”


그나마 싼 곳은 30만원 선이었는데 하나같이 창문이 없어서 빛도 하나 들어오지 않은 꽉 막힌 곳이거나 너무 낡았다.

공간은 또 어찌나 좁은 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가격에 이런 방 구하기 힘들다, 다른 사람이 조금 전에 알아보고 가서 빨리 결정지어야 한다, 이런 식의 멘트를 찾아간 고시원마다 들었다.

애초에 너무 낮은 가격의 고시원을 알아본 것이 화근이었을까,

10군데 중 7군데를 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고시원은 나타나질 않았다.


‘젠장, 좋은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구나. 집 구하기가 전쟁이라고 그러더니 그 말이 진짜였네.’

‘휴우, 죄다 비슷비슷한데 그냥 가장 싼 곳을 골라 들어갈까...’


신림동의 한 고시원을 나와 잠시 쉬면서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캐리어까지 끌고 많은 고시원을 돌다 보니 다리가 아파서 대충 퍼질러 앉을 데가 있나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문득 할머니 한 분이 고시원 옆 전봇대에 무언가를 붙이고 계신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 내놓읍니다. 큰 방 1, 거실 1, 욕실]


무엇보다 눈에 번쩍 뜨이는 문구가 있었다.


[보증금 100/20]


20만원? 진짜야?

방금 보고 나온 고시원도 33만원을 불렀다. 그런데 20?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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