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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또롱 님의 서재입니다.

젤 쉬운 게 제약재벌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라이트노벨

이또롱
작품등록일 :
2020.11.06 08:56
최근연재일 :
2020.12.18 12:20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32,860
추천수 :
420
글자수 :
359,540

작성
20.11.08 14:00
조회
1,242
추천
16
글자
21쪽

7화. 도전(2)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졸작이지만 즐겁게 읽어주시길...




DUMMY

학원에서 수업을 들은 지 반나절 만에 난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선생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공고를 나온 주제에 감히 서울대를 진학하기를 원하는 또라이이면서 학원비로 무려 1억 2천만원을 선불로 낸 개호구라는 것을.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쌤들 사이에서 은따가 되었다는 것을...


군대로 따지면 관심사병이 되었달까,

선생들은 의도적으로 내 쪽으로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고, 강의실 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면서도 한 번도 나에게는 물어보거나 하질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별종으로 보였고, 1~2달 하다가 말겠지 하는 생각을 깔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난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선생들이 나를 신경 쓰지 않으니 수업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내 뜻대로 할 수 있었다.

또 나는 전투심에 불타올랐다.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더해졌고, 선생들의 태도는 내게 강한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학원을 다닌 지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 나는 이곳의 강의가 내게는 너무 높은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학은 수업을 아무리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어떻게 하지?’


수학문제 하나를 갖고 끙끙대다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때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여자애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수업마다 쌤이 물어보는 질문에 종알종알 빼놓지 않고 열성적으로 대답하는 애였다.

뒤에 앉아서 얼굴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옆얼굴이 상당히 갸름하고 오똑한 콧날이 인상적이었다.


“저, 뭐 하나 물어봐도 괜찮을까...?”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런데,


“안 괜찮아. 물어보지 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지 않은가!

남이 어렵게 꺼낸 부탁을 이렇게 쉽게 거절하다니 꽤 차가운 년이네.


문득 든 생각에,


“알았어. 그럼 두 개 물어봐도 돼?”


라고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다시 물었다.


“미친~ 물어보지 말랬잖아!!!”


여자애가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는데, 순간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러자 여자애가 눈이 커다래지며 멈칫거리더니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자애의 귀밑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공, 공부해야 하니까 내 시간 뺏지 말고 쌤한테 물어보라구! 이 다음 시간이 클리닉 수업 시간이잖아!”

“알아. 그런데 난 쌤 눈 밖에 나서 물어보기가 그래서 말이야.”

“그럼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지 왜 나한테 물어보려는 거야?”

“그야 네가 여기 있는 애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잖아. 수업시간에도 가장 열심히고.”

“...”


내가 주위를 둘러보라는 시늉을 하며 그냥 있자 눈을 흘기며 나를 보던 그녀는 마침내 말했다.


“알았어, 1분 줄게! 난 남이 날 귀찮게 하는 걸 젤 싫어해,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이야!”


그녀는 내가 내민 참고서를 받아서 펼쳤다.


“어디야?”

“이거.”

“이걸 모른다고?!”


순간, 그녀가 원시인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니?”

“장난 아냐. 난 지금 진지하다고. 왜 함숫값이 이렇게 나오는지 모르겠어.”

“휴... 이건 lim F(X)가 ∞로 수렴하니까 이렇게 해서 하면 이렇게 되고...”


어쩌구 저쩌구...

윽, 알려줘도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대충 응응, 만 하다가 힘없이 되돌아왔다.

의자에 앉으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기초가 부족하면 먼저 고등학교 1,2학년 과정을 먼저 복습하고 나서 3학년 과정을 다시 공부하는 게 좋아. 그리고 하나 더, 앞으론 나한테 물어보지 마!”


그녀는 다시 매몰찬 표정으로 지으며 책으로 눈을 돌려버렸다.


‘어떡하지? 무언가 공부를 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기초를 잡아야 할 필요도 있고...’

‘아그나는 무엇이든 대답도 잘 해주니까 아그나한테 한 번 물어볼까?’


『네, 가능합니다. 물어보세요.』


문득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건 아그나 목소리인데? 정말 아그나야?’


『네. 그렇습니다.』


아그나는 대치동 집 서랍에 잘 모셔두고 있다.

그런데 아그나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아그나,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대화가 가능해?’


『네.』


‘워키토키 무전기도 아니고, 이것 참 신박한데? 아그나, 그걸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


『저를 부르지 않으셨으니까요. 이형우님과 동기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 있든 대화가 가능합니다.』


‘동기화가 그런 뜻이구나! 그럼 언제든 아그나를 소환하면 되겠네.’

‘좋아! 그럼 아그나, 수학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어? 이대로는 서울대는커녕 3류대도 못 들어가겠어ㅠㅠ’


『이형우 님의 현재 수학 레벨은 전국 총 지원자 548,734명 중 501,233등으로 최저등급인 9등급에 해당합니다. 9등급에서 1등급으로 최단기간 내 등급을 상향시킬 방법을 검색합니다... 과거 25년 동안 모든 수학 만점자의 공부방식과 패턴, 비결을 조합합니다... 조합을 완료하였습니다. ◆ 결과 : 단기간 내 실력을 급등시킬 최적의 방법으로 중학교 1학년 과정부터 수학을 다시 공부하시기를 추천합니다.』


‘뭐야, 중학교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네. 이형우 님은 응용력과 수학적 사고력, 풀이 능력도 부족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기초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초실력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응용력과 사고력을 키워야 합니다.』


‘흐음... 기초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아까 수학문제를 물어본 여자애와 비슷한 대답을 하네. 걔도 부족한 기초를 채우기 위해서 고등학교 1,2학년 과정을 먼저 공부하라고 했었지?’

‘좋아, 하지 뭐. 군에서 특급전사가 되기 위해 3km 뜀걸음을 9분대로 주파하기도 했는데 이 정도야 껌이지. 독종 중의 독종이라고 불렀던 놈인데, 이까짓 수학 하나 정복 못하겠어?’


수많은 수포자들이 들으면 ‘ㅋㅋ정복? 겁대가리 상실한 넘’, ‘여기 망상충 하나 추가요!’, ‘ㅂㅅ 수포는 진리다’ 며 시끌시끌했겠지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난 수학을 포기한 놈이 아니니까. 수학 만점으로 당당히 서울대에 입성할 놈이니까!


난 수업이 끝난 후 그길로 서점으로 달려가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 과정 참고서를 구입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수업시간에 중학교 수학책을 펴들고 공부를 시작했다.

22살 먹은 놈이 강의는 듣지 않고 중학교 책을 펴들고 공부하고 있으니, 담당쌤부터 같은 반 학생들까지 웅성거렸다.

쌤 중에서는 기가 막혀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같은 클래스의 학생 하나는 벌레 보듯 날 쳐다보았다.

맨 앞줄에 앉은 여자애, 정수아는 힐끔 내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하지만 난 상관없었다.

쪽팔린 것이 아니다. 모르는 부분은 알 때까지 하면 된다.

차근차근 하나씩 정복하는 거다.

내 식대로 한다!

그게 나의 모토였다.


소인수분해부터 최대공약수, 최소공배수, 유리수 등등...

공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학교 때 들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조합하며 새롭게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쌤이 수업시간에 하는 강의소리가 시끄럽지 않았냐고?

천만에!

난 오히려 화이트노이즈(백색소음)같아서 집중이 잘 되고 좋았다.

게다가 나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바로, 아그나!

간단했다.

공부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머릿속으로 아그나를 불러서 물어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아그나는 그 어떤 과외 선생보다도 친절하게, 게다가 내가 이해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반복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게다가 아그나에게는 신박한 기능이 하나 더 있었다.


처음에는 아그나의 답을 듣고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 있었다.

도표나 도형, 그래프 같은 경우에는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아그나가 그림을 그리듯이 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알겠습니다. 시각 형태로 화면을 구성하겠습니다.』


순간 눈앞에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곤 그래프가 그려지고 그걸 따라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은가.

꼭 인강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그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해?’


『동기화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습니다.』


‘오오~ 그렇단 말이지!!!’


문득 아그나의 기능이, 아그나가 어디까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그나, 미래를 보여줄 수 있어?’


『안 됩니다.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소는 발설할 수 없습니다.』


‘못한다가 아니라 안 된다고... 그럼 가능한데 안한다는 얘기네... 흐음...’


그럼 이런 건?

이건???


재미있어서 아그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실험해 보았다.

그 결과 미래를 알 수 없지만 과거는 얼마든지 알려준다.

지나간 과거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과거의 한 요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니까. 즉 추억같은 것이었다.

또 있었다.

소원에 영향을 미치는 않는 부분이거나 소원 안에 귀결된 부분이라면 현재의 일이라도 얼마든지 답해준다.

소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이라면 말해줘도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없고, 귀결되는 부분이라면 그 역시 예측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아그나에게 묻고 대답을 듣고 책을 보며 파악하고, 또 다시 물어보고 책을 보는 시간이 계속 되었다.

혼자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것이 누가 보면 딱 이상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수업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를 만큼 초집중해서 공부를 이어갔다.


하루 딱 네 시간의 수면과 식사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시간을 수학 공부에 할애했다.

다만 한 가지 빼먹지 않은 것은 영어.

영어는 공부를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꾸준히 해야 하는 과목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 할 분량을 정하고 숙어를 포함한 영단어를 딱 20개씩 외웠다.

수학을 하다가 머리가 아프거나 지겨워지면 영어 어휘를 외웠고, 매일 아침 학원에 왔을 때 전날 외운 20개 단어를 적어보는 셀프 테스트를 했다.

매일 20개씩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가 늘었다.

오늘 20개, 내일은 전날 20개를 포함한 40개, 그 다음날은 60개...


솔직히 지겹고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자괴감에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고 있는 일이 잘 진행이 되어도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는데, 하물며 지겹고 답답한 공부를 하면서 이가 몸에 달라붙은 것처럼 온몸이 근지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다행히도 나에게는 오래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는 끈기와 누가 어떻게 말하든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5주간의 재수 선행반 수업이 끝나갈 무렵, 난 고등학교 2학년 수학과정까지 끝낼 수 있었다.

700개의 영어 어휘도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정규반 16주 과정이 시작됐다.

개념부터 심화과정까지 과목별로 수능 전 과정을 학습하는 시간으로, 시간표는 월수금 오전에는 국어와 영어, 사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외 시간은 모두 수학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각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쌤에게 질문을 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클리닉 시간이 주어졌다.

담당쌤은 일 관리표를 나눠주며 날마다 학업 진행사항을 체크했고, 학생들의 개별 수준에 따라 맞춤형으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규반이 막 시작할 무렵,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내가 속한 E반의 소위 1등과 2등과의 다툼 때문이었다.


학원도 기본적으로 학교와 다르지 않다.

누구네 집이 무슨 아파트에 사는 부자고, 누구네 부모가 뭘 하고... 부모의 권력과 재력에 따라서 자연스레 자녀의 등급이 나눠진다.

부모가 권력이나 돈이 많은데 자식이 공부까지 잘하면 최상위 클래스다.

부모가 중소기업 임원이나 대기업 중간관리자면 2류, 교사나 공무원 등 공직에 있다면 3류, 일반 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면 4류, 식당 등 자영업을 운영하면 5류...

연소득 10억 이상이면 1류, 5억 이상이면 2류, 1억 이상이면 3류, 5천 이상이면 4류...

등급이 나눠지는 판단기준은 주로 소득이다.

마치 소득구간에 따라 과표(과세표준)가 결정되는 것처럼, 부모의 소득에 따라 자녀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 아이가 뭘 잘 하고, 품성이 어쩌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개소리.


사실 재수 선행반이 운영될 때부터, 쟤는 무슨 고등학교를 다녔고, 몇 등을 했고 하는 일반적인 사항부터 사는 곳은 어디고, 부모는 무슨 일을 하는지 등의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학생들 줄세우기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1등이 전경준, 2등이 김우진이었다.

1등을 한 전경준은 강남의 유명한 A고등학교를 나온 수재로, 부모가 이름도 알만한 고위공직자였다.

2등을 한 김우진도 자사고 출신에 대대로 판사를 역임한 법률가 집안.

나머지 학생들은 전경준이나 김우진 라인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집단을 형성했다.

그리곤 두 집단끼리 은근한 견제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재수 선행반이 끝날 무렵, 1등인 전경준이 구찌 스니커즈 신상을 신고 왔다.

새하얀 색에 구찌 로고가 옆 라인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운동화였는데, 한 눈에 봐도 명품임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경준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렸다.


“개멋있다!”

“라인 쥑이네.”

“경준아, 이거 백만원 넘는 거 아냐?”

“짜식, 알아보는 눈이 좀 있네.”

“플렉스한 거야?”

“이정도 갖고 뭘, 나야 생활 자체가 플렉스잖냐. 그냥 심심해서 걍 한 번 질렀지.”

“개부럽, SNS에 올려. 댓글 순식간일 걸.”

“지금 올려볼까?”


하면서 의자에 앉아 무심한 척 발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는 한 컷 찍어서 그대로 SNS에 #최애템, #플렉스 인증, 해시태그를 붙였다.

그걸 보면서 또 다들 한 소리.

전경준 패거리들이 전경준을 칭송하며 시끄럽게 떠들자, 옆에 있던 김우진이 배알이 뒤틀리는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은근히 2등 신세인 게 못마땅한 김우진으로서는 기분이 더러웠을 터.

그런데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을까.


며칠이 지나 정규반 수업이 시작하는 첫날, 김우진이 멋들어진 신발을 신고 나타났다.

일명 지디포스라고 불리는 에어포스1 파라노이즈 운동화.

나이키가 지드래곤과 협업해 한정판으로 만들어낸 그 지디포스를 신고 온 것이다.

순식간에 온 반이 웅성거렸다.


“우와, DRAW 응모에 당첨된 거야?”

“슈레이스(shoe lace) 좀 봐. 엄청 크고 멋지다!”


굵은 스티치가 섬세하게 박음질되어 있고, 굽 옆 라인이나 뒤쪽에 자연스럽게 붓으로 터치해놓은 모습이 한눈에 봐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순간 김우진이 신발 뒤쪽을 툭 치며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야! 지디의 친필사인도 있어! 이건 초 레어템인데?”

“대박이다! 이걸 진짜 어디서 구했어?”

“이건 리셀(되팔기)가격으로 천만원이 넘는다구!”


모여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김우진은 얼굴 전체로 으쓱해하며 슬쩍 전경준을 바라보았다.

전경준은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김우진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이런 게 진짜 인싸템이지! 돈이 있으면 뭐하냐? 웬만한 놈은 돈이 있어도 이런 건 못 구한다구!”

“그럼 그럼.”

“지디가 다음에는 지방시(Givenchy)랑 협업한다니까 그때도 멋진 걸 구해서 보여주지.”

“갓우진!”


김우진의 말에, 주위에 있던 애들이 다들 엄지를 치켜세웠다.


쯧... 돈도 없는 것들이 과시놀이나 하고 있고. 난 저런 거 한 트럭도 사겠네. 어린 것들이라 역시~

나는 내심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전경준이나 김우진의 부모가 가진 재산보다도 내가 가진 재산이 많을 것이다.

물론 저 물건들도 부모의 손을 빌려서 산 것이겠지?


곧 수업이 시작해서 소란은 사그라 들었지만, 어쩐지 수업 내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김우진 패거리들은 쌤들의 강의에 호응을 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지만 전경준 패거리들은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데, 오후가 되자 더욱 심해졌고 급기야 그날 학습한 내용을 복습하는 자습시간이 돌아오자 결국 일이 터졌다.


시작은 기침 소리였다.

김우진이 기침을 요란하게 했는데, 그게 전경준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을까.

김우진의 기침이 끝나자 전경준 쪽에서 파락~! 하고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엔 김우진 쪽에서 볼펜을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가!


한 번이라도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해본 사람은 안다.

기침 한 번이 커다란 민폐가 될 수 있음을.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순간 공공의 적이 되어, ‘저기요,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심하게 거슬려요. 자제해주세요!’ 같은 포스트잇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하물며 여기는 일반 도서관이 아니라 재수생들이 모여 있는 재수반이다.

이 1년으로 평생의 삶이 달라지는데 예민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순간 집중이 흐트러져 짜증이 나고, 보통 때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작은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린다.

기침과, 신경질이 달라붙은 페이지 넘기는 소리에 이어, 볼펜 똑딱이는 소리는 강의실 전체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렸다.

그런데 다시 파락! 하고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핑퐁처럼 한쪽이 똑딱, 하면 다른 쪽이 파락, 하고 책장 넘기는 소리로 응수한다.


이럴 때 보통 어느 한 쪽이 조심하거나 나가버리면 그걸로 끝이 난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게 되질 않았다.

어느 한 쪽도 물러서려고 하질 않았고, 말 한 마디 없음에도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보통 때라면 담임이나 부담임이 제지를 하겠지만,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하필이면 감독관이던 부담임이 학원장의 호출을 받아 강의실을 나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튼 일이 점차 커져서 급기야,


쌍!!!


김우진이 먼저 폭발했다.

볼펜을 냅다 집어던지더니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경준! 시끄럽잖아!!!”

“내가 시끄럽다고? 시끄럽게 한 건 너잖아. 빙신아!”

“이 새끼가 정신줄을 놔버렸나. 파락파락, 책장 넘긴 게 누군데 지랄이야!”

“덜 떨어진 새끼! 어흠어흠켁켁, 세상 드럽게 기침한 놈이 누구더라. 입에 모터 달렸냐? 가래나 뱉어라 새끼야!”


김우진이 벌떡 일어나 전경준을 노려보았다.

끼이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전경준은 일어선 김우진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이죽거렸다.


“그리고 볼펜 똑딱이는 걸 보니까, 너 불안장애 있지? 정신병자 새끼, 병원 가서 약이나 처먹어라.”

“훗, 이 새끼 찌질이네. 너, 오늘 내가 신고 온 지디포스 때문에 발린 게 속 쓰려서 그러지? 히히, 내가 모를 줄 알고? 애들 다 있는데서 좆나 발렸으니 이제 어떻게 하냐? 저번에 보니까 니네 집 주공이(주공아파트에 사는 집안)처럼 개허접이던데, 앞으로 발린 거 복구할 수도 없을 테니 미칠 지경이겠네. 하하!”


김우진이 웃자 참을 수 없었는지 전경준이 벌떡 일어나 김우진에게 다가갔다.


“이 새끼! 뭐라고? 다시 한 번 얘기해봐.”


전경준이 머리로 김우진을 박으며 으르렁거렸다.


“빙신아, 너 이제 좆됐다고! 그걸 못 알아 처먹냐? 찌질이에, 빙신 맞네. 귀까지 먹은 빙신.”


김우진이 지지 않고 이마를 들이밀며 전경준을 노려보았다.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코뿔소 두 마리가 서로 대결하는 장면을 보듯 전경준과 김우진이 서로 이마를 맞댄 채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사내 자식들이 뭔 말싸움이야, 시원하게 한 방 날려야지.

그나저나, 으이그 이 핏덩이들. 머리를 쥐어박을 수도 없고...

지켜보는 난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이놈들 보다 2년이나 나이가 많긴 하지만 굳이 나서서 두 사람을 나무라는 꼰대짓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난 이 반에 있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놈이다. 그러니 이런 놈들의 으르렁거림이야 어린애 투정보다 어설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데, 어째 사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만큼 피 같은 내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고, 자리를 비운 부담임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휴... 내가 나서야 되나.’


금방이라도 주먹질이 오갈 만큼 상황이 급박해지자, 난 마지못해 일어섰다.

그런데, 순간


톡톡-


옆에서 볼펜으로 책상을 치며 주위를 환기시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소리 나는 방향을 향했다.

나 역시 시선을 돌리는데,


정수아가 조용히 일어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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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화. 새로운 시작(1) +2 20.11.10 1,196 14 19쪽
10 9화. 도전(4) +2 20.11.09 1,214 18 18쪽
9 8화. 도전(3) 20.11.08 1,191 18 20쪽
» 7화. 도전(2) 20.11.08 1,243 16 21쪽
7 6화. 도전(1) +4 20.11.08 1,417 17 23쪽
6 5화. 투자(2) +1 20.11.07 1,432 17 19쪽
5 4화. 투자(1) +1 20.11.07 1,554 20 16쪽
4 3화. 만남(3) +1 20.11.07 1,546 18 15쪽
3 2화. 만남(2) 20.11.07 1,682 21 15쪽
2 1화. 만남(1) 20.11.07 1,962 20 20쪽
1 프롤로그. 그대 떠나고 나면 +6 20.11.07 1,938 23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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