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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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차가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허접하길 바랐건만 그래도 있는 집안 자식들 결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분위기 좋고 화려한 웨딩홀이었다. 하필이면 그 웨딩홀이 내가 그렇게 가보고 싶던 남산을 배경으로 깔고 있어서 더 배가 아팠다.
남자에 이어 결혼식장까지, 내가 바라는 건 전부 저 여자가 가지고 갔다.
근데 나보고 어떻게 용서를 하라고.
" 주차하고 금방 갈게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
" 네. "
이 웨딩홀의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풍경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주차장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다. 그래서 백도훈은 날 입구 근처에서 내려주고 걸어서 족히 10분이 걸리는 머나먼 여정을 떠나야 했다.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는 부사장님께 또 이런 시련을 선물해준 거 같아 미안했다. 앞으론 충성을 다해서 재미있게 해드려야지.
굳은 결심과 함께 드디어 신랑 신부의 낯짝을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로비를 울릴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나에게 집중됐다.
이런 관심은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난 고개를 빳빳하게 들려고 애쓰며 나의 변화를 과시했다.
지금 내 몸에 걸친 것만 다 합해도 1억은 넘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도 꿀릴 필요가 없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가 앙망하는 사람이 된 거다.
" 어, 하은아! 오랜만이다! "
그때, 홀 근처에 있는 안현수가 날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래. 바로 저 다정함이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이었다. 안현수는 저 다정함으로 애써 평온했던 내 마음을 떨리게 만든 후에 집에 돈 많은 백조를 타고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정식으로 사귄 사이는 아니라 뭐라 원망할 수도 없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남들이 보면 그냥 나 혼자 김칫국 마시고 지독하게 짝사랑 한 거라 오해할지도 몰랐다.
" 어, 그래. 오랜만이네. "
난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고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별것도 아닌데 왜 난 이 얼굴 바라보기가 입사 시험처럼 어렵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보니 그렇게 잘생긴 거 같지도 않고.
미안하지만 요즘 내가 만나는 남자가 무려 백도훈이라 안현수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잘 지내서 보여서 좋다. "
안현수가 다소 의외란 얼굴로 내 행색을 훑으며 말했다.
녀석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난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직장마저 없었던 취준생 신분이었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 사는 처지에 꾸미는 데 돈을 투자할 여력이 없어 늘 편하고 저렴한 옷들만 입고 다녀야 했었다. 제일 비싸게 주고 산 정장이 7만 원을 넘지 않았으니 내 차림은 늘 궁색하기만 했다. 그런 내가 남들은 사기도 힘든 명품을 전신 갑옷처럼 두르고 금의환향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 어. 열심히 살았더니 하늘에서 로또를 내려주셨네. "
난 의아한 그를 위해 내게 떨어진 행운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줬다.
그 날, 백도훈을 만난 건 내 인생에 로또나 다름없었다. 그리 아름다운 만남은 아니었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땐 살인마로 오해 받았던 것마저도 감사했다.
" 그래? 너 한국 그룹 계약직으로 취직했다며? 네 능력에 정규직도 가능했을 텐데, 아깝네. "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린다 했더니 안현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려던 내 어깨를 꾹 눌러줬다.
온몸에 1억을 두르고 있어봤자, 난 대기업 사원들의 반도 안 되는 값싼 임금을 받는 계약직일 뿐이었다. 이 옷도, 이 가방도, 이 액세서리도 전부 내 것이 아니라 그저 몇 시간만 빌린 거였다. 그런 마당에 혼자 부자 놀이에 심취해 있던 걸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졌다.
" 계약직이라고 다 같은 계약직이 아니죠. 성하은씨는 내 낙하산이거든요. 급이 틀려요. "
내 고개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축 늘어지려는 순간 주차를 마친 백도훈이 백마 탄 왕자처럼 멋지게 등장해 날 구해줬다. 낙하산이란 허위 진술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닥으로 떨어졌던 내 자존심은 용수철 튀어 오르듯 다시 용솟음쳤다.
내 옆에 백도훈이 있다. 이거 하나면 끝이었다.
" 누구..? "
당황한 안현수가 놀란 눈으로 내게 물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창피하지만 내 옆에 다른 남자가 있는 걸 본 것도 아마 안현수에겐 처음일 거다. 근데 그 남자가 날 낙하산까지 태워줬다고 하니 천지가 뒤바뀌는 충격을 받았을 거다.
미안하지만 살다 보니까 너보다 멋진 남자가 있긴 하더라. 네가 날 필요 없어서 버렸듯이 나도 이젠 너 따윈 필요 없었다. 안현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오늘 백도훈의 동행을 기꺼이 허락했던 거다.
자, 이제부터 내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들어봐. 배가 아파서 결혼식 도중에 폭풍 설사 하면 더 좋고.
" 우리 회사 부사장님이셔. "
" 너네 회사면 한국 그룹...?! "
더 말할 것도 없이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날 바라보는 안현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변화를 맞이했다. 이제야 그에게도 나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 안녕하세요. 전 하은이 대학 동기 안현수 변호사라고 합니다. "
또 무슨 콩고물을 주워 먹으려고 그러는지 안현수는 묻지도 않은 변호사라는 신분을 여과 없이 공개했다. 평소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데 오늘따라 안현수가 너무 찌질해 보였다.
" 변호사시다? 근데 우리 하은씨랑은 무슨 관계에요? 그냥 친구? 아니면 친구로 위장한 어장 관리? "
내 편인 줄만 알았던 백도훈이 갑자기 기어를 잘못 걸어 안현수와 나를 동시에 들이박았다. 덕분에 나조차도 알고 싶지 않았던 잔혹한 현실과 마주할 기회가 생겼다.
안현수는 왜 그 동안 나한테 친구 이상의 친절을 베풀며 잘해줬던 걸까.
꼭 한 번은 허심탄회하게 물어보고 싶던 질문이기도 했다.
" 당연히 대학교 동기죠. "
안현수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기가 찬 답변을 내놓았다.
그런 사람이 생일에 향수 선물을 하면서 여자한테 처음 향수 선물 해본다고 이빨을 깠다고?!
거기다 나한테 자필로 편지까지 써줬다고?!
이게 친구끼리 할 수 있는 행동이라면 난 그 우정에 똥물에 퍼부어주고 싶었다.
" 오늘 그 말, 절대로 바뀌지 않아야 할 거에요. 난 분명 경고했어요. 얼굴 도장은 확실히 찍은 거 같으니까 이제 가만 가죠. 내가 맛있는 데 예약해뒀어요. "
" 예. "
나도 별로 먹을 기분이 아닌지라 백도훈의 리드에 따라 들어온 지 20분도 안 돼 결혼식장을 빠져 나왔다.
절대로 오고 싶지 않았던 결혼식이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잘 온 거 같다. 덕분에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던 미련이란 녀석이 한 순간에 거품처럼 사라졌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안현수보단 백도훈이 내게 훨씬 좋은 카드였다.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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