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망가트려 줄게
***
잠시 후, 백도훈은 성하은이 있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고작 다섯 테이블 밖에 없는 작은 노상 술집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가장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서 만취한 성하은이 어깨를 들썩이며 흑흑 울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그녀의 청승 맞은 짓을 구경하고 있었다.
' 다들 눈 깔아라. 확 뽑아버리기 전에. '
그들의 시선이 불쾌했던 백도훈은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그녀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 무슨 일인데 여기서 혼자 울고 있어요? "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 새끼가 결혼한대요. 결혼! "
결혼이란 단어에 성하은은 다시 한 번 대성통곡을 하더니 퉁퉁 불은 우동 면발을 입에 처넣기 시작했다.
" 그 새끼가 누군데요? "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백도훈이 갸우뚱하며 물었다.
회사에서 그렇게 견제를 한다고 했는데 그새 날파리들이 꼬였나.
" 내 대학교 동기 전 썸남이요! 성공하면 뜨겁게 연애해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웬 금수저랑 만나서 결혼을 한대요! "
뿌에에엥. 그 뒤로 분명 그런 소리를 들은 거 같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작별했던 그 유치한 소리를 성인이 돼서 다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장이 경기를 일으켰다.
" 썸남인데 결혼을 한다고요? 그 새끼가 바람을 핀 거에요? "
" 그건 아니고요. 그냥 썸남 탔어요. 썸만... "
" 그럼 그냥 썸에서 끝난 거네. 고작 썸 가지고 뭘 그렇게 처량하게 울어요. "
" 그냥 남자가 아니라 나한테 진심으로 잘해준 남자였단 말이에요! 신발끈이 풀어지면 손수 묶어주고 매일 예쁘다 해주고! 또 여친한테도 안 쓰는 편지를 나한테만 쓴다고 추파를 던졌다고요! "
" 어장이네요. "
" 아니야!! "
그 사실이 믿고 싶지 않았던지 성하은이 이제 막 깐 소주를 입에 콸콸 털어 넣었다. 눈앞에서 수도꼭지가 열린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 백도훈은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고 저지시켰다.
" 그만 마셔요. 세상에 널린 게 남자야. 옆에 그 새끼보다 백만 배 더 괜찮은 남자가 있는데 뭘 우울해 해요. "
" 남자가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여자가 너무 짜증나서 그래요! 보니까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인생 편하게만 살아온 여자더라고요. 게다가 백수 주제에 난 한 번 밖에 못 가본 외국엔 맨날 놀러 가고! 내가 진짜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도 가로채고! 세상이 나한테 어쩜 이래!! "
가만히 듣다 보니 성하은의 비난의 화살은 안현수가 아닌 그의 애인에게 향해 있었다. 자신이 꿈꾸던 남자를 집안만 좋지 내세울 거 하나 없는 허접한 여자가 낚아채 가서 기분이 상했던 거다.
" 그럼 내가 그 사람들 망가트려 줄까요? "
내 말에 울먹이던 성하은이 뚝 그치고 날 바라 봤다.
" 성하은씨 꿈을 빼앗아간 그 여자가 잘사는 꼴 보기 싫죠? 내가 도와줄게요. 그 결혼식 나랑 같이 가요. "
***
다음 날, 하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자신의 집에서 눈을 떴다. 어제 과음한 탓인지 조금만 움직여도 속이 울렁거리고 일어날 힘도 없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잘 찾아온 건 미친 귀가 본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취해도 난 매년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철새들처럼 집으로 잘 찾아왔다.
그때, 백도훈에게 전화가 왔다.
' 이 사람은 왜 아침부터 전화질이래. 또 뭘 자랑하려고. '
그 순간 끊겼던 기억의 부분 부분에서 날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는 백도훈의 얼굴이 그려졌다.
" 오, 쉣! "
어제 나 혼자 잘 찾아왔다고 자만했던 귀갓길에 분명 백도훈도 끼어있었다.
나는 어제 만취한 상태로 귀하신 부사장님을 밖으로 불러냈다. 거기서 어떤 꼴을 보였을지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은 죄가 많아 난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 여..여보세요. "
" 잘 잤어요? 오늘 회사 출근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병가 내줄까요? "
여전히 다정한 그의 태도로 보아 어제 별다른 실수는 하지 않았던 거 같았다. 하긴. 원래 내가 막 주사가 심한 타입은 아니었다.
난 또 괜히 쫄았네.
" 아니요! 저 완전 괜찮아요! 지금 준비하려고요! "
계약직 주제에 감히 병가를 내는 대역죄를 지을 수 없었어 난 다급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 그래요. 그렇게 씩씩하니까 보기 좋네. "
" 제가 언제는 안 씩씩했다고요. 그게 제 트레이드마크입니다. "
" 어제 썸남이 결혼한다고 울고 불고 하던데. "
이런 씨불.
부사장님을 불러서 뭔 짓을 했나 했더니 거기다 대고 나의 치부를 미주알 고주알 떠들었나 보다. 그게 뭔 자랑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까지 하고 다녔는지 나도 참 답이 없었다. 오늘부터 술을 끊던가 해야지 원.
" 제..제가요? 전 기억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
술 마시고 한 실수는 잊어주는 게 상도덕이라고 배웠으니 이럴 땐 기억 안 나는 척 배째라로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사실 기억나는 부분보다 안 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았기에 아예 없었던 일로 쳐도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 기억 못하시겠다? 그럼 다음주 결혼식에 나도 같이 가는 것도 까먹은 거네요? "
" 부사장님이요?! 거길 왜... "
빠르게 계산을 때려보니 그건 불행 중 땡큐였다. 사실 내심 안현수의 결혼식에 미치도록 멋진 남자를 데리고 가서 나도 너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남자가 백도훈이라면 안현수도 보자마자 기가 죽어서 날 놓친 걸 뼈저리게 후회할 거다.
만취한 상태에서 그런 과업을 달성하다니. 어쩌면 하늘은 아직 날 완전히 버린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안현수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금요일이 됐다. 그 동안 하지연은 자기가 이 회사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냥 날 노예처럼 부려먹었지만 지금은 그 여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일이면 난 내 운명의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의 결혼식에 가서 두 사람이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장면을 봐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옆에는 그들의 미래보다 더 찬란한 백도훈이 있을 거라는 거다. 일단 네임드에서부터 나의 승리였다.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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