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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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콩나물 버스에 몸을 싣고 도착한 곳은 한국 그룹 본사였다. 난 올해초부터 한국 그룹 인사팀에서 일하게 됐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왜 그런 위험한 동네에 사냐고?
그 대답은 내 목에 걸린 사원증만 봐도 알 수 있을 거다.
우리 회사는 정직원들에겐 파란색 목줄을 주지만 계약직 직원에겐 빨간색 목줄을 줬다. 이렇듯 세상은 우릴 색깔로 갈라치기 하며 차별하려 했다. 목에 빨간 줄을 건 나 역시도 이곳에선 차별의 대상 중 하나였다.
" 하은씨, 늦었네? "
내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목에 파란줄을 달고 있는 하지연이 지겨운 잔소리로 나를 반겼다.
" 아직 8시 55분인데요? "
난 시계를 가리키며 그녀의 말 같지도 않은 발언에 항의했다. 우리 회사의 공식 출근 시간은 9시였다. 8시 55분에 왔다고 지각이라 우긴다면 노동청에 고발할 사유였다.
" 어머, 하은씨. 사회 생활 안 해봤어? 선배들이 일찍 오면 당연 하은씨가 먼저 와 있어야지. 하긴. 그러니까 계약직이겠지. "
하지연은 오늘도 날 무시하며 자존감을 찾는 거 같았다. 어제 놈은 아무 죄도 없는 아저씨가 아니라 하지연의 집으로 찾아갔어야 했다. 그럼 이 세상에 필요 없는 해충 하나는 제거할 수 텐데.
하지만 슬프게도 하지연이 사는 동네에는 방범이 너무도 철저하여 놈이 활동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사방에 cctv가 깔려 있고, 주차된 고급 외제차들에 달려 있는 블랙박스가 하지연의 안전을 24시간 지키고 있었다.
" 아, 하은씨. 미안한데 나 밖에서 스타킹 하나만 사다줄래? "
" 네? "
난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되물었다.
" 스타킹 하나만 사다달라고. 급하게 나오다가 기스가 나버렸네. 근데 밖이 추워서 그냥 왔지 뭐야. 그리고 오는 길에 사거리에서 커피 한 잔만 부탁할게. "
하도 어이가 없는 부탁이라 웃음도 안 나왔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나보고 스타킹이랑 커피 심부름을 하라고? 얘가 날 그냥 만만하게 본 게 아니라 완전 핫바지로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학창 시절에도 안 해본 심부름 셔틀을 하려니 모멸감이 올라왔다.
" 뭐해. 시간 없는 거 안 보여? 지각 안 하려면 빨리 갔다 와야지. "
내가 멀뚱히 서 있자 하지연이 인상을 팍 쓰며 다시 한 번 날 재촉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완벽한 명령이었다.
나 같은 약자에겐 사람들은 늘 이렇게 명령조로 말해왔다. 하지만 더러운 건 내겐 거절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저런 갑질 유형의 인간은 자기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피가 마를 때까지 괴롭히는 악질이었고, 이 회사 사람들은 어차피 곧 사라질 나보단 같은 정규직인 그녀의 편을 들어줄 게 뻔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게 내가 지금껏 겪어온 현실이었다.
"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
어차피 가야 할 거 난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시간을 단축시키는 수밖에는 없었다.
***
스타킹과 커피를 들고 달리던 나는 잠시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서 멈춰 섰다. 하지연의 말대로 밖은 살을 에는 듯 추웠고, 아무리 빨리 달렸어도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 버렸다. 어차피 한 소리 들을 거 조금 더 늦는다고 해서 강도가 작아지진 않을 거다.
난 주차장 한 켠에 쪼그려 앉아 혹시 몰라 챙겨온 감기약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다만 이걸 마시고 하지연이 잠시라도 입을 다물었으면 했다. 그 여자만 없다면 비굴한 나의 계약직 회사 생활도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난 추워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캡슐을 까서 안에 있던 가루를 커피 안에 탈탈 털어 넣었다.
" 큭. "
그때, 어디선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들킨 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옆을 보니 키가 커다란 남자가 날 내려다 보며 웃고 있었다. 내 인생이 망해가는 곡소리가 귓가에서 울려퍼졌다.
" 약을 쓴다? 그거 별로 효과 없을 텐데요? "
"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요.. "
난 몰래 캡슐의 잔해를 주머니에 넣으며 오리발부터 내밀었다. 어차피 저 남자는 이 커피의 주인이 누군지도 몰랐고, 성분 검사를 해보지 않는 이상 여기에 뭐가 들어있는지 밝히긴 어려울 거다.
" 거기다 약 탔잖아요. 근데 그걸론 사람이 잘 안 죽더라고요. 그래서 난 좀 더 확실한 물리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눈 앞에서 바로 결말을 볼 수 있으니까. "
뭐라는 거야, 이 사람.
좋은 가르침은 감사헀지만 난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하지연이 좀 닥칠 수 있게 잠깐의 졸음을 선사하려던 거다.
이 남자는 도대체 정신 머리가 어떻게 박혀 있기에 사고 회로가 이딴식으로밖에 안 돌아가는 걸까. 가까이 해서 별로 좋을 게 없는 사람 같았다.
" 예.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시간이 다 돼서요. "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에 따라 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벌써 가려고요? 그럼 통성명이나 하고 가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 같은데. 난 백도훈에요. "
남자가 나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어딘가 굉장히 익숙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내가 분명 저 이름을 어디에서 들어본 거 같은데...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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