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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天
작품등록일 :
2011.02.18 23:24
최근연재일 :
2011.02.18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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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0.06.03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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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3화-인간일 수 밖에 없는것들(6)

DUMMY

아센 왕국의 델로아 공작령의 영주성 상테-드-델로아. 이 성의 서재에는 대형 책꽂이가 있었고 그 책꽂이의 책들은 델로아 공작만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장에는 책을 몇 권 뽑으면 열리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이젠 쓰지도 않는 오래된 수법이지만 델로아 공작만이 쓸 수 있는 책장이었기에 그곳에 방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사람 없었다. 이 성을 짓고 그 비밀 통로를 만들고 비밀 방을 만든 사람들은 이미 차가운 땅 속에 묻힌 지 오래였다.

이 비밀 방은 오랜 세월 청소하지 않아 먼지가 손에 묻어 날 정도로 쌓여 있었다. 몇 사람밖에 모르는 비밀한 방이었지만, 덮힌 회색 막을 걷어내면 어느 집의 응접실과 같이 꾸며져 있었다. 이 방은, 델로아 공작의 기억 속의 방과 같았다. 그 옛날,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는 아름다운 홀. 장중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하나 둘 원무를 그리며 펴져나간 그 아름다운 홀 옆에서, 아련히 들려오던 노랫소리 맞춰 함께 작은 원무를 그리던 작은 방. 그 기억속의 방.

지금 서 있는 방은 그때 그 장소가 아니건만 그때 그 방 같았다. 완전히 같은, 심지어 책상에 난 흠집마저도 같은 다른 방,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난 세월을 반증하듯 쌓인 먼지뿐이었다. 델로아 공작은 조심스럽게 방 한 가운데 섰다. 그때 그날처럼. 가볍게 손을 맞잡고, 조심스레 스텝을 밟아갔다. 방 안에 쌓인 먼지 위로 점점히 발자국이 찍혀나갔다. 옛날에는 둘이었을 발자국. 지금은 하나뿐인 발자국.

그리는 것은 이다지도 힘든 일이었던가.

"레일라."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러보았다. 예전에는 수줍게 마주보는 그녀가 있었지만, 지금은 하릴없이 허공만 울릴 뿐이었다.

"정말 혼자되는 거, 힘들어."

하나, 둘. 하나, 둘. 방 안을 점점히 수놓는 발자국.

"왜 날 떠나갔냐고 묻지 않아. 왜 내 곁에 없냐고도 묻지 않아. 다만,"

발걸음이 멎었다. 남은 것은 애상함 뿐이었다.

"보고싶어…"

델로아 공작은 방의 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에는 겹겹히 쌓인 먼지 위로 점점히 남은 발자국만 남았다.

델로아 공작은 서재로 나왔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며 한숨짓는 남자 아비스가 아니라, 델로아 공작 아비스였다. 그는 서재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낮게 말했다.

"보고하라."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괴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델로아 공작가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라기엔 조금 거리가 있을 정도로 괴이한 음성이었다.

"'얼어붙은 달밤'계획을 실행하실 겁니까?"

"다가오는 2월 14일, 계획을 실행한다."

괴이한 목소리의 주인이 소리 없이 멀어져갔다. 2월 14일. 그날은 아센 왕국의 건국기념일이며 동시에 한 해가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 날 수도 펠하임에서는 건국과 신년이 됨을 축하하는 건국제가 열린다. 건국제는 건국 기념일 이틀 전부터 시작하여 기념일에 절정에 이른다. 이 날에는 서민과 귀족의 구분이 없었고 유일하게 왕성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평민들이 참석할 수 있는 날이었다.

건국 기념일에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는데, 바로 신분에 관계없이 연장자에게는 무조건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통은 왕조차도 존중하는 전통이었기에 건국 기념일에는 모든 사람이 이 전통을 지켰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이기에 당연히 수도의 경비는 약해진다. 아센 제국은 지난 100년간 단 한 번도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고, 수도 펠하임이 공격당했던 것은 200년도 넘은 일이었다. 때문에 수도의 경비가 약해지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어붙은 달밤' 계획을 실행하기에도 적기였다.

이제 몇 분 후면 2월 12일, 건국기념 축제가 시작하는 날이다. 이틀 후면 2월 14일.

거사 개시까지 이틀하고도 약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아비스는 몰려오는 피곤함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똑똑

"공작 전하, 기침하실 시간이십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비스는 잠에서 깨었다. 아아, 벌써 아침인가. 그렇다면 건국 기념 축제의 시작일이겠군. 아비스는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집사장에게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문이 열리고 수년 간 델로아 공작가에서 봉사해온 집사장 필립이 들어왔다. 그는 깔끔하게 집사장의 예복을 빼 입고 있었다. 그의 예복은 그와 함께 늙어온 듯 많이 낡고 달아았었다. 아비스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노안의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옷이 그게 뭔가, 필립. 공작가의 집사장이면 집사장답게 단정하게 입어야지, 그렇게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서야 원… 쯧쯧."

아비스의 꾸중을 들은 필립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자신의 주인을 모셔온 것이 올해로 32년, 이제 이틀 후면 33년째 되건만 주인은 바뀐 것이 없었다. 32년 전, 꼭 이 날 처음 보았을 때도 자신의 주인은 자신에게 저 말을 했었다. '뭐에요, 공작가의 집사장이라면서 옷은 왜 이렇게 허름해요?'

"주인님께서 32년 전 절 처음 보셨을 때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그리고 전 그때 이렇게 대답했고요. '이 옷은 나와 함께 늙어가는 거란다.' 지금도 그렇답니다."

"하여튼 저놈의 고집은 어쩔 수 없다니깐. 알았네, 알았어. 내가 포기하지. 오늘은 일정이 어떻지?"

필립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들어오게 했다. 시종은 아비스가 씻을 물을 가지고 와 아비스의 앞에 두었다. 아비스는 세수를 하며 필립으로부터 일정을 들었다.

원래 귀족들의 아침은 이렇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는 것, 심지어 옷을 입는 것 까지도 모두 시종의 손을 거친다. 심지어 식사마저도 결코 홀로는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아비스는 달랐다.

아센 왕국의 귀족 제도는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게서 볼 수 없는 특수성을 자랑했다. 각 작위 간의 위계 질서가 확실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기본으로 하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 작위 간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작위는 다만 제후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차이만을 가질 뿐이었다. 영주들 간의 위계는 궁정에서 받고 있는 관직과 얼마나 강력한 몽드(Monde)에 속해 있느냐로 정해졌다.

이 몽드는 아센 왕국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집단이었다. 보통 다른 나라에서 몽드를 소개할 때는 사교세계라고 소개하긴 하지만 사교세계란 말로 이 몽드를 소개하기에는 너무 막연하다. 보통의 사교세계가 귀족들의 모임, 귀족들만의 독특한 집단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면, 이 몽드는 조금 다르다. 몽드는 우선 뜻이 맞는 몇몇의 귀족들이 모여 이룬 소그룹이다. 이 몽드에 모인 귀족들은 거의 운명공동체라 할 정도로 강력한 집단력을 자랑한다. 몽드는 거의 대부분 귀족들의 호텔(Hotel: 작위를 가진 귀족들의 집을 이르는 단어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귀족들이 열 수 있는 몽드의 범위를 이른다.)에서 모인다. 서로 돌아가며 무도회를 주최하기도 하고 간단한 다과회를 가지기도 하며 친목을 다지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력은 궁정에서의 권력 다툼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다. 당연히 이런 몽드에 들어가는 것은 중앙 귀족으로서의 필수 항목이었고 자신이 속한 몽드가 어디이느냐에 따라 그 귀족의 파워는 강력해지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센 왕국 관직의 인사권은 왕에게 있었다. 물론 전적으로 왕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모든 권리가 왕에게 있다고 보면 될 정도로 막강했다. 그렇기에 관직에 임명된다는 것은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소리가 되었다. 이것이 깨진 것은 다름아닌 15년 전 크로아 고성 전투 이후였다. 이 전투 이후 왕국의 공작은 두 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다른 한 공작은 왕실의 후계자가 태자 시절에 쓰는 성이었기에 사실상 왕국의 공작 가문은 델로아 공작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실정이었다. 이에 델로아 공작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공작이 왕권을 견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 하에 관리의 인사권을 왕과 공작 둘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만 인정되는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제 귀족들은 왕과 두 공작, 정확히 말해서 왕과 델로아 공작 둘의 눈치를 보아야 했지만 그래도 관직이 귀족의 순위를 매김하는 데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센 왕국의 귀족들은 이런 특정적인 조건들 하에 그 순위가 정해졌지만 예외가 되는 작위가 있었다. 왕국의 인사권을 조정할 수 있는 공작, 그리고 변경을 수비하는 변경백들이 그들이었다. 공작은 모든 귀족들보다 위에 있었다. 다른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군주(Lord)의 개념이라면 공작은 대군주(High Lord)의 개념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귀족들은 공작에게 존대를 했으며 왕 역시 함부러 대하지 못했다. 변경백들은 특별한 사교계와의 연이 없더라도 다른 귀족들이 존중해주었다. 국가를 수호하는 그들에게 보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적 존중인 것이다.

아비스는 왕국의 공작으로서 모든 귀족들의 존경을 받는, 대군주였다. 또한 그의 몽드는 왕국에서 유일하게 팔레(Palace: 왕 혹은 왕자, 대공들이 머무는 저택을 총칭. 이 소설에서는 왕 또는 공작이 열 수 있는 몽드의 규모를 나타내는 궁정용어적 범위를 칭하는 단어이다.)에서 열리는 몽드였기에 그의 아센 제국의 귀족적 위계질서상의 권위 역시 대단했다.

그렇게 대단한 아비스이지만, 그는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자신의 손으로 세수를 비롯한 간단한 일을 했다. 어렸을 적부터, 델로아 공작가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이전부터 해 왔던 일이기에 그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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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력한 필력이나마 재밌게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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