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_55 세상을 설계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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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홍은하의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본 김 회장의 목소리가 홍은하의 귀에 다시 들려왔다.
“그 후론 나와 내 남편은 검은 옷을 벗어본 적이 없어요. 마음도 까맣고 주변도 까맣게 보였지. 우리 두 사람에게는.”
이후 두 부부는 10년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
하늘이 그들을 측은하게 여겼던 것일까?
회사가 한창 잘 돌아가던 시절 성 사장은 공장 근처의 값싼 토지를 매입했었다. 당시 매가는 헐값이나 다름없어 엄청난 면적을 매입했지만 잊고 살았다.
토지가 주택 계획 단지에 편입되며 건설업자들이 주택부지로 수용한 후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보상액을 받게 됐다.
한동안 그들은 그 돈을 그냥 갖고만 있었다. 달리 쓸 곳이 없었다.
그때까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뉴스를 지켜보던 두 부부의 시선을 끄는 자가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주동자로 몰아 산송장을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기획의 우두머리가 장관 임명을 받는 뉴스였다.
그날 평소 폐가 안 좋았던 성 사장은 각혈로 하얀 이불보를 시뻘건 피로 물들였다.
두 부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보. 우리가 억척스럽게 아니 개처럼 돈을 벌면 지금 갖고 있는 돈을 얼마로 불릴 수 있을까?”
“내가 내일 사업하는 친구들을 만나 뭘 하면 돈을 불릴 수 있는지 물어볼게. 일단은 모아보자. 나중에 개처럼 모은 돈으로 저놈을 쳐죽일 수 있을지는 가 봐야 알겠지만.”
이후 그들은 사업을 하는 이들에게 사채를 놓는 일부터 시작했다.
사업가로부터 알게 된 또 다른 루트를 개척하며 편법으로 돈을 튀길 방법을 터득한 후부터는 슬슬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권력의 속성을 꿰뚫은 그들은 홍은하와의 만남 이전부터 이미 여기저기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죄다 매수한 상태였다.
겉으로는 동맹군으로 보였지만 돈으로 산 동맹의 결속력은 실상 그리 견고하지는 못했다.
다만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쉽게 배신할 수는 없는 복잡한 네트워크로 얽혀있었다.
누군가 둑에 작은 구멍을 만들면 함께 떠내려가는 구조를 잘 알고 있으니 서로의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는 결코 없었다.
운명의 날.
홍은하가 피투성이가 된 채 도주를 하는 모습이 녹화된 CCTV 장면이 지상파를 타고 대한민국에 전파되던 날, 두 부부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보, 저 불쌍한 형사 젊은이도 용민이처럼 억울하게 죽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배후가 악마 같은 악질 놈이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어.”
“내일 강 회장에게 부탁해서 저 형사 좀 찾아보고 도와주라고 해.”
두 부부는 이후 더는 긴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서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홍은하와 두 부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세 사람 사이에는 공동의 목표와 공공의 적이 존재했다.
그들은 홍은하에게 세상을 기획하는 설계자가 될 수 있는 돈과 힘을 줄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들의 제안을 들은 홍은하가 그 기막힌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애초에도 망설임이란 없었던 홍은하가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용민이의 마지막 편지를 읽는 순간 그의 결정은 화석처럼 굳어 그의 심장에 각인됐다.
그는 진정 그런 결심을 했었다.
“성용민. 네 부모님이 내 손에 모든 걸 쥐어주시겠대. 맘껏 깽판 칠 생각이야. 하늘에서 보고 있는 네 속이 시원해지도록. 오지게 한판 붙어 볼 생각이다. 네 원수와. 그러고 나면, 나도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일찍 너를 만나게 돼도 후회는 없을 거야. 이젠 당하고만 사는 등신이 아닌 미리 준비된 자. 그들처럼 나도 이 세상을 기획하는 자가 될 테니까.”
검은 옷을 입고 살아야만 했던 두 부부는 홍은하의 운명이었다.
칼자루를 쥔 홍은하의 칼끝은 성급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세상을 설계하는 자로 신중하고 치밀하게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그의 목표물에 다가갔다.
호텔 방안.
그곳에는 간간이 들리는 홍은하의 코 고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무척이나 고요했고 그 정적이 나의 심장을 뛰게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홍은하가 전해 준 그 모든 진실이 꿈결에 들은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마치 현대사를 다룬 영화 한 편을 관람한 기분이었다.
“홍은하. 수십 년 동안 세상을 자기 손에 놓고 쥐락펴락한 그 괴물 같은 설계자처럼 정말 당신도 이 세상을 설계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니? 그게 과연 가능할까?”
그에 대한 해답은 미래에 있었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어느 날 벌어질 공작들이다.
현재의 오늘에선 결코 알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미래형 사건들.
“당신이 기획한 그런 사건을 기대해도 되는 거니?”
머리가 아팠다. 무척 아팠다.
탁
진통제 뚜껑을 여는 소리가 정적 속에 제법 크게 들렸다.
소음에 홍은하가 잠시 뒤치락거리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다행히 깨지는 않았다.
복용 후 20분 정도 지나니 살 것 같았다.
“하아..”
졸음이 쏟아졌다. 일주일처럼 느껴지던 하루였다.
영원의 시간처럼 느껴지던 저녁 시간이었다.
“홍은하, 당신 믿어도 되는 거지.”
의심은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왔다.
마침내 스르르 잠이 들었다. 홍은하의 코 고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규칙적으로 잠결에 들려왔다.
다음 날.
홍은하가 검은 마녀에게 전날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부지런히 호텔을 나선 후 나는 마이키를 위해 맛있는 아점을 준비했다.
당연히 사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마이키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맛있는 거만 먹을 수 있다면 장땡인 거구였으니까.
마이키는 이제 숨어서 뜨개질하지 않는다. 당당히 내 앞에서 현란한 손놀림을 자랑질하며 고난위도의 화려한 패턴을 능숙한 바늘의 움직임이 안 보이도록 재주를 부린다.
“이쁘다. 이거 뭐 뜨는 거야?”
“가디건.”
“이렇게 뜨면 가디건이 돼?”
“바보야 뒤판 뜨는 거지. 나중에 앞판하고 붙여야지. 팔도 붙이고.”
“아.. 초록색 너무 이쁘다. 실이 고급인가 봐. 색상이 너무 고급져.”
“맞아. 비싼 수입 실이야.”
“올~ 갖고 싶당. 그 가디건.”
“갖고 싶으면 밥을 열심히 해, 앞으로. 세상에 공짜는 없어.”
“정말 밥 잘하면 그거 내 거 되는 거야? 제인 거 아니었어?”
사이즈가 여자용이라서 당연히 제인 거라고 짐작했다.
“누나는 초록색 안 좋아해.”
“난 초록색 좋아하는 데. 어엉? 그럼 이거 내 거야?”
“눈치는 어디다 흘리고 다니는 건지. 여자애가 눈치가 없어.”
“우헤헤헼. 완존 대박 개좋아. 이거 앞판은 완성된 거야?”
“그래 그러니까 부지런히 밥해. 출출할 때 먹게 만두부터 쪄놔.”
“넵! 우히히힉.”
정말 날아갈 듯 좋았다. 고급 손 뜨게질 제품은 값도 비싸지만, 그보단 마이키처럼 고난위도의 패턴으로 손뜨게 하는 고수들이 점점 사라지는 자동화 세상에서 그의 작품은 50만 원을 웃도는 명작이다.
사고 싶다고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그런 명작을 날 위해 저 곰탱이가 뜨고 있다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오늘 저녁은 뭘 해주지. 저 이쁜 곰탱이를 위해?”
곰탱이는 잡채를 좋아한다. 백여시에게 재료를 부탁했더니 30분 만에 들고 나타났다.
함께 지내다 보면 그가 왜 백여시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고마워요. 잡채 되면 부를게요. 맛있어야 할 텐데.”
“형수님 타고난 손맛이 있던데요. 꼭 불러 주십시오. 아이고, 우리 형님 또 뜨개질하시네. 명상 잘 하십시오 형님. 우리 형님에게 뜨개질은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이지.”
백여시가 곰탱이를 부추겨 세우며 내게 눈을 찡긋했다.
“저러니 백여시지. 꼬리가 아홉은 달렸겠네.”
1시간 후.
한바탕 잡채 파티를 마친 후 다시 고요함 속에서 곰탱이는 정말 명상을 하듯 뜨개질을 이어갔다.
검은 옷을 입고 사는 부부의 사연을 들은 후 난 그들이 클럽 메두사의 실소유주라 확신했다.
그러나 어쨌건 외관상으론 왕마담이 사장이었고 사실 매출과 관련한 부분은 그녀가 실소유주처럼 챙겨갔다.
궁금했다. 왕마담의 정체가.
“대체 실체가 뭐지? 김 회장과는 무슨 인연이길래 저렇게 믿고 맡기는 거지?”
슬금슬금 마이키에게 다가갔다. 그가 좋아하는 파인애플을 들고.
파인애플 한 조각을 먹으며 너무 행복한 표정이 된 마이키.
이때다. 바로 치고 들어가야 한다.
“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뭐? 이 파인애플 맛있게 달다. 앞으로 이 브랜드만 사.”
“그러게요. 국물도 맛있어요. 마셔봐요.”
후루룩
“아흐. 정말 적당히 단 게 맛있네. 국물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행복한 표정이다.
두 번째 찬스. 얼른 본론으로 훅 치고 들어가야 한다.
“왕마담 언니는 어떻게 김 회장님을 만났데요?”
그가 잠시 파인애플 씹는 걸 멈추고 날 응시했다.
꿀꺽
매서워진 그의 눈빛에 마른 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게 왜 궁금해, 네가?”
“어제 오빠에게 김 회장님 사연을 들었어요. 그냥 제인도 왠지 사연 있는 사람 같아요.”
후루룩
달콤한 파인애플 국물에 그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어. 다들 사연이 있지. 홍 형사님과 너. 다 사연이 깊은 거 아니냐?”
“그렇네요. 남들이 들으면 내 사연도 기가 막힌 사연이네.”
“누나가 대학생일 때 성 회장님을 만났어.”
“김 회장님 남편분이요?”
“응.”
마이키는 자기 사연을 털어놓듯 잠시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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