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_42 홍은하란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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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이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으니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탁
“어머!”
“조심해요. 국물 없는 짬뽕 먹게 하지 말고.”
“네에.”
맛있는 거 먹는다던 사람이 기껏 시킨 게 짬뽕과 탕수육이었다.
그의 통화 내용을 엿듣다 짬뽕 그릇을 놓쳤지만, 칭칭 감긴 랩이 나와 짬뽕을 살렸다.
“통화 내용 엿들었어요?”
“좁은 공간에서 통화하다 보니 저절로 들린 거지 제가 엿들은 건 아니죠.”
“그렇긴 하네. 비밀스러운 내용도 아니에요. 식사하면서 얘기해 줄게요.”
후루룩
참 시끄럽게 먹는 스타일이었다. 귀족처럼 생긴 자가 마당쇠와 같은 품격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
“혹시 이 호텔에 보람 씨 외에 장기 투숙객이 있나 후배 경찰에게 탐문 부탁했어요. 호텔 측에서 신원까지야 안 알려주겠지만 사건 조사를 위해 그 정도 정보는 확인해 주겠죠.”
“아..”
능히 그자들도 장기 투숙객일 수 있겠다 싶었다.
“미처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네요.”
이런 걸 적과의 동침이라고 해야 할까? 확인 결과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날 노리는 놈들과 한 지붕 식구였다니.
그때 새삼 깨달았다. 난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어쩌면 일반인인 내가 그런 추정을 못 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거겠지만.
하는 말마다 능글맞은 그는 의외로 말수는 적었다.
후루룩
호기롭게 국수 가락 넘기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흐흠”
답답함에 큰 숨을 내쉬던 찰나 그가 마침내 침묵을 깼다.
“은하 형님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잘린 전직 형사예요.”
속내를 쉽게 드러낼 것 같지 않던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또다시 침묵과 함께 남은 식사를 마무리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기껏해야 10분 정도였던 것 같은 데 그 짧은 시간이 마치 2시간은 지난 것만 같았다.
“난 운이 좋았어요.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그 얘긴? 다른 누군가는 죽었단 소린가?
“그때 함께 조사하던 수사관이 있었어요. 난 그 사건이 자살이라고 믿고 있어요. 술 취해서 객사할 만큼 술 먹고 주사 부리는 동료가 아니었으니까.”
내용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전개였다.
“당시 수사팀이 수사하던 사건의 내용은 단순히 부패한 몇몇 관료들의 개인 비리 차원을 넘어서는 부패 카르텔, 한 마디로 세금 도둑 떼 사건이었어요.”
어느 정도 규모이면 카르텔이란 말까지 사용하는 걸까? 그것도 모자라 도둑 떼라니.
“똑똑한 후배였는데 결국 그렇게 됐어요. 사람을 자살로 모는 것도 살인이에요. 그 세금 도둑 떼들은 비열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자신들이 저지른 죽음이 아닌 척하며 버젓이 아직도 나라 녹 먹고 있어요.”
그의 시선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적개심과 분노로 가득한 시선은 다행히도 곧이어 평정심을 되찾았다.
“나 형님에게 푹 빠졌어요. 너무 사랑하게 된 거죠, 푸훗. 형의 마법에 딱 걸려든 거지. 꼼짝없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홍은하란 늪. 풍운아, 홍은하와 사랑에 빠지면 기꺼이 나 자신을 내놓을 수밖에 없어요.”
그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그 사건을 겪은 직후에는 오히려 침잠을 선택했다.
강원도 평창의 어느 피망 재배 농장에서 한동안 근무하며 속세와 인연을 끊은 종교인처럼 살아오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건 내 남자, 홍은하였다.
“형이 당하는 동영상을 지상파 방송으로 본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래서 사람들이 복수를 꿈꾸나? 할 수만 있다면 형과 내 후배의 복수를 내 손으로 하고 싶단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요.”
예전 경찰 동료로서가 아니라 인간, 강천명으로서 인간, 홍은하를 응원했다는 그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종교인도 아닌데 밤마다 달을 보며 기원했어요. 홍은하 부디 무사히 도망쳐라. 홍은하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버텨내라.”
다 큰 성인 남자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방울을 보인 건 나였다.
“그리고 얼마후 내가 그토록 무사하길 기도했던 홍은하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무척이나 반가운 목소리였지만 당시 전화 내용은 그리 달갑지 않았던 게 사실이에요.”
그는 당시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피식 웃었다.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내게 형이 말하더라고요. 관심 없다는 이유로 또는 이젠 세상과 손 끊고 편히 살고 싶다는 이유로 형이 그리고 있는 시나리오에서 발을 빼는 건, 그간 우리가 상대했던 야비하고 비열한 나쁜 놈들과 다른 바가 없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는 덧붙였다. 홍은하의 유혹의 마법을 애써 부인하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커밍아웃했다.
“당시 나와 자살한 동료에게 겨눠진 칼끝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요. 우리 약점을 쥐고 있었어요. 그걸 아주 교묘하게 이용했어요. 야비하고 잔인하다고 느껴질 만큼 치밀하게 목을 조여왔어요.”
그는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약점이 무엇이었는지 그 후 어떤 방법으로 당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도 차마 그것까지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은밀한 사생활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자살한 동료를 짓밟은 자들은 방법을 알고 있었어요. 자신들의 사냥개가 되어줄 대상의 욕망을 자극하고 혼란을 조장하고 심리적인 굴복을 얻어냈어요. 상대가 알아서 길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꿰고 있는 자들이에요. 결국은 경찰 내부에 그들의 사냥개가 되어 움직인 세력이 있었어요. 우린 사냥개로 전락한 동족 경찰에게 당한 거고.”
그는 그들은 권력을 향한 욕망을 표현하고 싶어 안달 난 자들을 감별할 수 있다고 했다.
현재도 경찰 조직 내부에 그들의 그런 그물에 걸려들어 알아서 사냥개를 자처하는 야심가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과 삶은 전시예요. 그들의 눈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투로 간주 되죠. 우리만 전쟁이 아닌 것처럼 안일하게 사는 거예요. 지금은 전시인데 너무나 평온하게 매일 살아가죠,”
그의 말을 빌리면 사냥개의 주인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냥개를 유혹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그 방법의 실행 또한 현실적으론 야비한 권력의 일종이라고 했다.
권력, 인간의 본성이며 어쩌면 누구나가 꿈꾸는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냥개로 전락한 주변인들을 다수 목격한 그는 부인할 수 없는 힘이고 거부하려 하면 할수록 그 힘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참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간 결국 숨기지를 못하고 제 살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본성이기도 하죠.”
그는 요즘 그에게도 그런 본성이 있다는 걸 느낀다고도 했다.
그 말을 할 때는 눈빛마저 번들거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게 섬뜩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생각과 패배의식을 바꾸려면 교묘하고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형의 일차 목표는 여태껏 까이고 당하고만 살아서 패배주의에 찌든 주변인들을 설득하는 겁니다. 그들도 언젠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거죠.”
그것이 내 남자 홍은하의 야심 찬 첫걸음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삶과 경찰이라는 신분을 지키기 위해서만 이 모든 것과 투쟁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내 상상을 벗어난 엄청난 전투 전략을 짜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동료들은 무참히 짓밟아온, 미래에도 짓밟을 예정인 그가 악이라고 규정하는 권력과의 단판 승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과거와 미래의 격렬한 격돌.
그것이 내 남자가 꿈꾸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며 그가 패배감에 찌든 동족에게 제시하는 비전이었다.
강천명이 말했다.
“형이 제시하는 비전은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바로 형이 제시하는 미래예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고 말처럼 쉬워 보이지 않는 비전이고 미래였다.
‘홍은하.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내게 그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겁도 없이 최고 권력자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석은 토끼로 비쳤다.
“홍은하. 제발..”
띠링
그때 강천명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그래? 예상했던 대로네. 고맙다. 잡혀간 놈 소식도 좀 알아봐 주라. 그래. 수고.”
서당 개로 3년이 지나진 않았지만 난 이젠 제법 풍월을 읊을 수 있게 됐다.
‘예상했던 대로’라는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둔한 초짜가 더 이상 아니다.
“잡혀간 놈과 그 수상한 여자가 이 호텔 장기 투숙객이었나요?”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걸 눈 뜨고 있을 때 코 베어 간다고 하는 거구나.
바로 한 건물 안에서 날 지켜보는데 난 망원 카메라로 바깥 정경만 살피고 있었다니.
경찰은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가 한심스러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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