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_45 이이제이 以夷制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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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랐어요? 미안해요.”
“으음.. 몇 시야?”
시계를 보니 세상에나..
아무리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었다고는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었다.
“벌써 2시네요.”
“아후. 간만에 푹 잤다.”
“불면증 있어요?”
“요즘 신경 쓸 게 많아. 뭐 먹을래?”
“네?”
눈꼽도 안 떼고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찾다니.
‘징하다 정말.’
“지금 시켜야 배고픈 거 느낄 때쯤 음식 도착해. 육개장 시킨다?”
“네.”
역시나 3인분을 시켰다.
“오늘 밤 형님 잠깐 들르실 거야.”
“어느 형님이요?”
“뭐?”
피식
“네 말대로 주변에 형님이 빨랫줄에 주욱 널렸네.”
“은하 형님 업소에 오시는데 그전에 잠시 여기 들르신다고 했어.”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고 할 말을 잃었다.
“왜 그렇게 놀래?”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우리 같은 사람은 정문으로 다닌 적이 별로 없어. 여기도 뒷문 있더라. 좁은 골목이라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야. 잠겨있던데 열어 놓으면 되지.”
그는 일반인들 눈에는 띄지 않는 건물 구조를 세밀히 살펴놓았다. 비상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탈출로까지 내게 알려주었다.
“형님 만나면 심장마비 걸리지 말고 정신줄 챙겨라.”
“네”
‘그럴 수 있을라나?’
벌써 오지게 들썩이는 심장 때문에 온몸의 혈액이 전신의 핏줄을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벌써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지면 어쩌냐?”
“아. 빨개요? 내 얼굴?”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티 나도록 벌게진 줄은 몰랐다.
“하여간. 그놈의 사랑이 뭔지..”
소녀의 안쓰러운 눈빛이 잠시 내 눈동자에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매서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정신 차려. 저런 망원 렌즈 카메라는 좀 숨기고. 형님 걱정하니까.”
“네. 근데 몇 시쯤?”
“그건 모르겠다. 대략 10시쯤? 오늘 밤 방문 때문에 스카이 형님도 바쁘신 거야. 오늘 밤도 내가 불침번이야.”
“아.. 네. 저 때문에 고생 많네요. 지루하면 동화책이라도 읽어요.”
말과 함께 나의 시선이 그의 에코 가방에 꽂혔다.
쑥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을 보자 큰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겨우 목구멍 뒤로 삼켰다.
“동화책은 없고 내 취미가 좀 별나.”
‘알고 있다. 소녀여.’
“나도 별종이라 별난 취미 있어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지루하면 취미 활동해요.”
어르고 달랬지만 그는 차마 뜨개질 작업을 내 앞에서 개진하지 못했다.
‘그냥 해도 되는데.’
늦은 점심 식사 후 그를 위해 자는 척을 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코바늘로 뜨개질을 하는 그의 모습을 실눈을 뜨고 확인하는 순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우째 이런 일이.. 이거이 실화라니.. 갖고 싶다, 저 가방.’
무척 탐이 났다. 실눈을 뜨고 지켜보는 내내 눈앞의 상황까지 포함해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화장실이 급해 더 이상 잠든 연기는 불가했다.
“으음..”
뒤척이는 내 모습에 그가 황급히 뜨개질 소품을 가방 안으로 숨겼다.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너 이이제인이라는 말 알아?”
“네. 이이 뭐요?”
“이이 뭐라고 했는데. 제인하고 비슷한 말이었어.”
“이이제이?”
“아! 그래!”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저번에 한남동 다녀올 때 차에서 누님과 형님이 하는 얘길 들었는데 이이제이가 어쩌고 했는데 내가 무식해서 그런 네 글자 말은 잘 몰라.”
이이제이.
‘왜 갑자기 그는 그런 말을 꺼냈을까?’
수많은 추측을 불어 일으킨 네 글자에는 실로 엄청난 그의 계략이 숨어 있단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내 남자는 거대하고 단단한 철옹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공성 무기를 제작 중이었다.
공성 탑을 쌓으며 1층부터 꼭대기까지 적을 물리칠 무기로 한층 한층 채우는 전략은 바로 그가 꿈꾸는 이이제이로부터 기인했다.
그는 적을 이용해 적을 섬멸할 기막힌 전략을 치밀하게 세우고 있었다.
은밀하고 기척도 없이 먹잇감에게 다가가는 포식자의 대명사 뱀과 같이 소리도 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적진으로 한발 한발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경찰 조직 내 승진과 사건 수사권이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손에 틀어쥔다 한들 그를 죽음으로까지 내몰며 사건을 무마하려는 적폐들과 대적하고자 저지를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도 없었다.
그는 적들과 똑같은 권력을 갖춘 새로운 파트너가 절실했고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탐욕의 대상인 돈은 전략적 필수조건이었다.
그에게 그런 무기를 손에 쥐어준 이가 바로 검은 마녀였다.
검은 마녀의 인맥은 홍은하가 대치하고 있는 적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권력으로 맞설 수 있는 상대였고 그들의 욕망은 돈을 향해 있었다.
그녀에겐 그런 그들의 욕망을 채워줄 황금알도 넘쳤다.
단 그녀가 왜 위험천만한 홍은하의 숨은 뒷배를 자처했는지는 도저히 상식적으론 가늠할 수 없는 숨겨진 진실이었다.
무척이나 지루한 하루였다.
하늘에 걸려있는 해는 지면 아래로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호텔 무너지겠다. 한숨 좀 그만 숴라.”
“아.. 네에..”
내가 그랬나.
“시간도 그만 좀 체크하고. 이제 8시야.”
“네.”
“아무래도 너 또 날 밤새울 거 같으니까 미리 눈 좀 붙여.”
실제로 피곤해서 눈꺼풀도 푹 가라앉았다. 중병에 걸린 환자처럼.
“꼭 9시 30분에 깨워 줘요.”
“알았다니까. 걱정말고 푹 자,”
잠이 들려는 찰나에 슬쩍 곁눈질로 그의 동태를 살폈다.
소녀는 어김없이 분주한 코 바느질로 가방을 뜨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풍경이라 볼 때마다 매번 내 입가에 걸렸던 웃음기도 서서히 옅어졌다.
잠시 후면 내 남자를 다시 볼 수 있다.
그렇게도 홍은하의 흔적을 쫓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던 내게 드디어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어수선한 꿈을 꾸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9시 30분이야. 일어나.”
시간을 듣는 순간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던 지친 몸뚱이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오빠는요?”
“거의 도착했데. 15분 후에 도착할 거야.”
“어머! 그런데 왜 지금 깨워요?”
그의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부리나케 화장대로 향했다.
“형님 기껏해야 5분 정도 계시다 갈 거야. 그만 찍어 발라.”
‘제발 닥쳐.’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딩동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룸의 초인종이 울렸고 결국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며 발이 바닥에 들러 붙어버렸다.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는 날 대신해 마이키가 황급히 문을 열고 홍은하를 맞이했다.
“아니..”
‘정말 홍은하가 맞는 거니?’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는 분명 생김새는 홍은하였지만 그라고 믿기지 않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었다.
돈 칠 좀 한 게 분명한 남색 슈트를 빼입은 그의 모습은 기업의 간부 같았다.
“오빠..”
“얼굴이 왜 이렇게 엉망이야. 잠은 자는 거니?”
“잘자. 어젯밤에만 잠을 좀 설쳐서 그래. 차 한 잔 줄까?”
“정말 얼굴만 잠깐 보고 가야 해. 너 걱정할까 봐 잠깐 들른 거야.”
“새벽엔 잠깐 못 들리지?”
“들릴게. 몇 시가 될지는 모르겠다.”
몇 시가 됐든 시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새벽이든 아침이든 상관없어.”
“일단 눈 좀 붙이고 있어. 아무리 빨라도 3시 전에는 안 끝날 거야.”
“응.”
“흐흠. 얌마, 눈치 없이 왜 그렇게 버티고 있어. 잠깐 나가 있어.”
“아! 예. 형님.”
190cm의 거구가 나비처럼 날아 출입구로 향했다.
탁
그는 포옹은 생략한 채 예의 그의 장기인 집요하고 진득한 키스를 퍼부었다.
순식간에 정신을 마비시키는 홍은하 표 딥키스.
그 짧은 키스가 주는 여운은 새벽 4시, 그가 되돌아오기 전까지도 여진을 반복하며 내 심장을 뒤흔들고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그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가 경찰 홍은하로 비밀의 정원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파악 가능한 서당 개가 됐다.
“홍은하 대체 그런 복장으로 비밀리에 누구와 회동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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