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_31 어둠의 포식자들
내가 사는 세상의 빛이 사라졌다.
어둠.
빛이 없는 어둠으로 뒤덮인 세계.
처절한 생존을 향한 어떤 이들의 몸부림은 이제부터 어둠이 깔린 비밀의 정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어둠의 지배자들.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포식자들의 잔인한 본능.
그들의 냉혹한 본능이 꿈틀거리며 날갯짓하는 시각.
또각 또각
밤의 지배자들에게 향하는 복도 끝을 걷고 있었다.
적진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잔다르크의 심정이 이만큼 비장했을까?
떨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했건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은 꽉 움켜쥐고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눈 밑 살덩이가 파르르 진동하는 건 어찌 막을 방도가 없었다.
곰 같은 덩치에 여우 같은 감성을 지닌 건지 내 상태를 눈치챈 마이키는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게 청심환 한 알 먹으라니까.”
“나 초자 티 너무 나죠? 이러다 신분 뽀록나면 어쩌죠?”
“그러니까 입 다물고 있으라니까. 웃는 모습 이쁘니까 가끔 웃기만 해요.”
처음 만난 남잔데 그의 말이 사탕발림으로 들리지 않았다.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아군이라니. 인생.. 정말로 모를 일이다.
“혹시 오늘 만날 인사들이 어느 분야 종사자들인지 알고 있어요?”
“당연히 섞어찌개. 같은 분야 지인끼리는 이런 데 와서 돈 처들이고 술 먹을 일 없지.”
“아.. 그런가.. ”
“법조계 인사, 행정 쪽, 경제 쪽, 오작교.”
“오작교?”
“항상 중간에서 다리 놔주는 브로커 형님이 함께 등장하지.”
“오작교라.. 하긴 중간에서 엮는 중재자가 있어야 실타래처럼 서로 얽히고설키는 거겠지.”
찰칵
마침내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공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덜덜 떨리는 손끝은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 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어둠에 잠긴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순간.
마이키가 열어주는 문틈 사이로 은갈치 색 양복을 입은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보였다.
첫눈에 그자가 오작교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법조계 인사나 관료 출신이 은갈치 색 양복을 빼입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음으로 경제 쪽 인물이라는 자도 핀셋 뽑기가 가능했다.
그자가 걸친 허리가 잘록 들어간 슈트는 대놓고 명품 향내를 풍겼다.
같은 네이비 슈트라도 다른 두 남자가 착용한 정장과는 땟깔부터가 다르고 핏도 몸에 착착 붙는 것이 정교했다.
나도 새끼 마담 정도는 이미 가능한 걸까?
두 명 중 누가 법조계 인사인지도 단번에 눈치 깔 수 있었다.
같은 공무원일지라도 그들의 건조한 표정에는 차이가 있었다.
쪽 찢어진 가느다란 눈매 너머의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내 머릿속이라도 파먹을 듯 관찰하는 매의 눈을 가진 자가 법조계.
어둠의 시작과 함께 깨어난 진정한 포식자임을 알리듯 세상의 모든 빛을 삼켜버린 냉혈한 눈빛이었다.
이제 남은 한 명.
마지막 포식자는 포식자 중 제일 비겁하고 잔망스러운 관망자다.
신중한 관망 후 슬쩍 다가와 살점을 뜯어 먹는 야비한 포식자.
전형적인 지식인의 단아한 모습이었지만 일자 입매에서 느껴지는 꼬장꼬장함은 바로 그가 행정부처 관료라는 걸 암시했다.
현미경 관찰을 통해 안전성을 확보한 후 살점에 손을 대는 신중함과 비겁함이 공존하는 사냥꾼.
그것이 관료로 포장된 그 포식자의 본 모습이자 본능이었다.
‘이쯤 되면 나도 오늘 밥값은 벌써 한 거 아닌가?’
그런 소확행과도 같은 겸허한 자만조차도 밤의 지배자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일까?
탁
문이 닫힌 후 정적은 어둠마저 삼켜버렸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깨어난 네 명의 사냥꾼들은 신선한 먹잇감을 발견했다.
바로 나, 강보람.
먹잇감을 마주한 포식자들의 눈동자는 사냥 본능으로 예리하게 번들거렸다.
마음을 읽는 자, 왕마담 마저 포식자에게 노출된 먹잇감인 양 전전긍긍했다.
이유는 바로 나 때문일 것이다.
혹여나 그들의 뛰어난 사냥 본능에 걸려들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평소엔 밤의 지배자였던 그녀마저 포식자의 신분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먹잇감이 될 수 있단 불안감에 포식자들의 사냥터인 방안에 갇힌 내내 난, 제대로 된 미소조차 짓지 못하고 애처로운 약자의 모습으로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토지 용도 변경은 문제없이 진행될 겁니다. 문제는 신안은행에 이어 한아 은행도 타당성 조사를 한 후 포기 의사를 보내왔어요.”
“접촉 중인 외국계 은행이 있긴 하지만 별로 낙관적이진 않습니다. 결국 조은 은행에서 진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상대가 하는 대화 내용을 수집하고 정리 중인 포식자는 다름 아닌 법조계 인사.
그가 바로 이 사냥터의 최고 지배자였다.
‘누구지?’
대화 내용을 종합해 보면 건설을 추진 중인데 불법이든 편법이든 토지 용도 변경이 필요했다.
행정 관료가 오늘 밤 이 숲속에서 사냥을 나선 이유는 그것이었다.
최고 지배자에게 브리핑하듯 진행 상황을 보고 중인 경제 쪽 사냥꾼은 건설업자로 보였다.
오작교 은갈치 슈트가 나설 차례였다.
“외국계 자본이 빠그러지면 제가 조은 은행 쪽과 접촉해 보겠습니다.”
‘대체 저 은갈치의 정체는 뭘까?’
정계, 법조계, 재계, 경찰계, 행정부 관료까지 도대체 그가 입을 뗄 때마다 다리를 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문어발로도 부족한 대왕 문어발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냥터의 정찰병과 같은 존재였다.
‘내 눈엔 저놈이 신화적인 능력자로 보이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 사냥터의 본질은 물론 돈이다.
머니. 불법 자금을 모금 중이 아니라면 이런 은밀한 밤의 사냥은 불필요한 상황.
불법으로 용도 변경한 토지 위에 바벨탑을 쌓겠다는 거대한 계획에 유수 은행들도 겁을 먹고 손을 뗀 상태였다.
대체 어느 정도 규모의 불법이길래 그 은행들마저 몸을 사리는 걸까?
그런 대규모 불법 건설에 국영 은행인 조은 은행을 끌어들이는 건 내부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조직적으로 해 먹겠단 기획이다.
“시공사 문제는?”
“두 기업이 모두 시큰둥하네요.”
시공사 기획도 오작교 작품이었는지 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적 반응을 보인 후 서둘러 말을 이었다.
물론 최고 지배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대안을 제시했다.
“코스모 건설 사장과 접촉 중입니다.”
“현 사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알아듣게 얘기했답니다. 끝까지 버티면 결국 쓴맛을 보게 되는 건 그쪽인데 무작정 강짜를 부리며 버티겠습니까?”
“그래도 끝까지 버티면 차선책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행정부 관료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최고 지배자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건 알아서 처리해 주실 어르신 계시니까 그런 염려까지 사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고 지배자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고도 의심 많은 사냥꾼은 안심이 안 되는 눈치였지만 오작교의 쐐기에 이내 안도하는 모양새였다.
“크큽, 사장 정도는 갈아 치울 수 있는 어르신이니 가재눈 하실 필요 없어요.”
‘이 매서운 사냥꾼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어르신은 대체 누구일까?’
너무 대놓고 눈을 반짝인 건지 왕마담은 그런 내게 미간을 찌푸리며 주의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직원 중엔 나처럼 눈을 번들거리며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이는 분명 한 명도 없으리라.
본능적으로 이상한 낌새는 귀신처럼 알아채는 그들 앞에선 각별히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마침내 밤을 지배하는 포식자들의 사냥 계획이 막을 내렸다.
마지막 순간 오작교는 최고의 사냥꾼다운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어째 넌 여기 소속 같지가 않다..”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그가 던진 말에 오줌이라도 지릴 표정으로 경직돼버린 먹잇감을 대신해 베테랑이 나섰다.
“하여간 예리해. 무슨 심령수사도 아니고 크큽. 사실 직원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내가 대타로 모셔온 귀한 알바. 나 같은 스타일 대령 하라면서요.”
‘내가 리틀 왕마담 맞구나.’
내게는 심장이 멎을 만큼 위기로 느껴졌던 순간은 사냥꾼들이 대수롭지 않게 피식거리며 조용히 지나갔다.
식은땀이라도 맺힌 건지 이마에 송글송글 작은 물방울이 달릴 때쯤 사냥터의 밤은 빛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사는 빛이 존재하는 세상이 다시 도래하고 있었다.
그 은밀하고도 음습했던 비밀의 정원에 다시 빛줄기가 내비칠 무렵 난 진정한 안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철컹
왕마담과 다른 직원들이 VVIP들을 배웅하는 동안 난 왕마담의 방에 놓인 긴 의자에 쓰러져 누워버렸다.
누워 있는 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철컹
마이키였다. 적군임에도 그가 문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듬직하고 반갑던지.
“별 사고 없이 마무리돼서 다행이네.”
“그러게요.”
‘근데 저들과 내 남자 홍은하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근데.. 혹시..”
나는 황급히 입을 닫아버렸다.
엄연히 그는 아직 정체가 파악 안 된 적군일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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