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_53 새로운 얼굴마담의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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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쾅
나의 무의식에도 늘 불안과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벌떡 일어난 나의 발걸음은 반사적으로 소음의 근원지로 향하고 있었다.
창문의 커튼을 젖히자 눈이 부신 아침 햇살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힘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도 소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걸걸한 아저씨의 음성이 좁은 골목에 여명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아니 오른쪽만 보고 튀어나오면 어쩝니까!”
목소리 큰 가해자와 피해자가 싸움질하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익숙한 소리의 파장 그러나 너무나 뜻밖이었던 목소리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몸을 떨며 돌아섰다.
나의 홍은하가 넥타이를 맨 채 잠이 든 것인지 침대에 누워 상체만 들어 올렸다.
“단순 접촉사고. 내가 오빠 들어온 기척도 못 듣고 자고 있었나 봐?”
“너도 고단했겠지. 새벽까지 사무실에 갇혀 있었다며.”
“사무실 소파에서 쪽잠 잤었어. 얼른 다시 자. 오후에 약속 있다며.”
타이라도 풀고 재워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넥타이를 풀었다.
“점심 함께 먹게 1시쯤 깨워.”
“응. 얼른 자.”
내 어깨를 힘없이 툭 친 형키호테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고단한 얼굴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그때처럼 지친 얼굴은 처음이었다.
“정말 많이 힘들구나.”
양복바지가 구겨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이미 곯아떨어진 사람을 다시 깨울 수가 없었다.
“참, 여기에 스팀다리미가 있지.”
생각해 보니 이곳엔 다리미까지 비치돼 있었다.
이런저런 살림살이로 수납공간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점심으로 뭘 먹을까?”
뭔가 특별한 점심을 먹고 싶었다.
내가 잘하는 요리라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뿐이었지만 홍은하는 강보람 표 김치찌개를 무척 좋아했다.
오늘만큼 마이키의 비매너가 이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난 호텔 안에서 음식 냄새를 풍기며 요리를 해 먹는 마이키와 늘 티격태격했었다.
물론 간단한 음식이기는 했지만 내 기준으론 비매너이기도 하고 호텔직원이 눈치를 챌까 봐 늘 노심초사였다.
공기청정기를 구입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방에는 마이키 전용 1구짜리 인덕션이 있었고 간단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는 다목적 오목 후라이팬도 있었다.
냉장고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냉장고에는 늘 그가 간식처럼 종종 구워 먹는 삼겹살이 있었고 삼겹살 메이트인 김치는 당근 준비돼 있었다.
입맛도 까다로워서 김치는 늘 맛있는 김치를 어디에선가 공급받고 있었다.
그렇게 혐오하던 마이키의 음식 테러를 오늘은 내가 과감히 자행하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장기 투숙을 결심하며 웬만한 살림살이는 죄다 구비 해 놓았다.
라면에 꼭 밥을 말아 먹는 마이키는 햇반을 산처럼 쌓아놓고 지냈다.
테러를 자행하기 위해 시간을 계속 확인하던 나는 12시가 되자 김치 폭탄을 준비했다.
사실 화요일 아침이라서 주변 객실은 모두 공실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공기청정기를 틀고 거사를 시작했다.
삼겹살과 김치를 함께 투척.
찌이익
삼겹살 구워지는 소리가 내 귀엔 폭탄에 부착된 시계의 틱톡 소음처럼 들렸다.
폭발 직전의 폭탄처럼 부글거리는 김치 볶는 소리와 실내에 진동하는 김치 냄새.
맛은 끝내주지만, 냄새를 맡는 주변인에게는 고문인 김치 볶는 냄새 작렬.
지글거리는 소음과 냄새에 홍은하마저 잠에서 깨어났다.
거의 1시가 다 돼가는 시각이라 그리 미안하지는 않았다.
“너 뭐 하니?”
“오빠가 좋아하는 김치찌개 했어.”
“얌마 여기 호텔인데 그런 냄새나는 음식을.”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거리자, 평소엔 보이지 않던 엷은 쌍꺼풀이 눈꺼풀 위에 지자 그 모습이 을매나 섹쉬 해 보이던지.
“다 됐어. 먹고 씻어.”
“그래. 오랜만에 보람이 김치찌개 맛 좀 보자.”
상을 차리다 보니 김이며 계란 후라이까지 웬만한 식당 찬보다 수려했다.
이게 다 맨날 내게 욕을 먹는 마이키 덕분이기는 했다.
“매일 이렇게 여기서 요리를 해 먹니?”
“아니. 마이키 야식거리야. 하루에 다섯 끼를 먹나 봐.”
피식
“그 덩치 유지하려면 다섯 끼는 먹어줘야겠지.”
“오빠 샤워하는 동안 양복바지랑 셔츠 다려 놓을게. 다리미도 있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마이키가 새 양복하고 셔츠 가져올 거야.”
“아.”
그 말에 왜 순간 씁쓸한 건지는 나도 정확한 내 감정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마이키가 가져온다는 새 양복은 왕마담이 준비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홍은하를 사이에 두고 묘한 경쟁심이 꿈틀거렸다.
유치해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인류의 본심인 거고 되레 자연스러운 자연의 법칙이니까. 내 기준으론.
“왕마담이 오늘 새로 사놓은 거예요?”
그가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건 모르겠어. 마이키가 산 건지 제인이 산 건지.”
그가 그 여자를 왕마담이 아닌 제인으로 부르는 것도 거슬렸다. 왠지 그런 호칭은 너무 개인적이고 다정하게 느껴지니까.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아니에요.”
잠시 후면 중요한 인물과 약속이 있다고 들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 그런 철없는 화제로 산통을 깨고 싶지 않았다.
“맛있네. 언제 먹어도 네 김치찌개는 정말 맛있어. 립서비스 아니고.”
“나도 맛있는 거 알아. 그 말 립서비스 절대 아니지.”
“푸훗.”
그가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내 콧잔등을 툭 건드렸다.
귀엽다는 의미다.
그래서 난 그가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가슴이 뛰곤 한다. 내가 그에게 귀여워 보이는 순간이니까.
그러나 갑자기 그의 표정이 몹시 무거워졌다.
크게 한숨이 늘어진 그가 이내 고단한 시선을 내 눈동자와 마주했다.
“보람아. 본의 아니게 너를 여기까지 끌어들인 거 정말 미안하다.”
“그런 소린 듣고 싶지 않아.”
“씩씩하게 잘 버텨줘서 고맙다. 근데 앞으론 더 조심해야 해. 이제 저쪽에도 내 존재와 실체가 알려졌어. 더 이상 나와 접촉하기 위해 네 주변을 기웃거리는 게 아니라 네가 내 여친이라는 사실 때문에 예의주시하게 될 거야.”
“이미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고 있어. 그거 알아? 마이키 외에도 고릴라와 백여시라는 남자가 보디가드로 추가됐어.”
“필요 이상의 오바라고 생각하지 말고 각별히 조심해. 오늘 만나는 신용한 패거리는 사채도 하는 부류들이야.”
그들은 권력을 칼날처럼 휘두르는 악인 전의 주인공들과는 결이 다른 악인 전의 또 다른 장르였다.
때문에 홍은하는 그와의 접촉을 시도하며 내 신변에 유난히 예민해져 있었다.
쿵쿵
마이키의 노크는 늘 출입문이 흔들릴 정도로 거창했다.
나는 서둘러 출입문을 열고 눈을 흘겼다.
“살살 좀 두드려요. 그게 노크예요.”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쉰 그도 내게 눈을 흘기더니 이내 홍은하에게 걸음을 옮겼다.
오른손에는 슈트 커버와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셔츠 새 거라 접혀있어. 살짝 다림질해야 할 거야.”
“네.”
얼른 받아든 나는 다림질을 시작했고 홍은하와 마이키는 오늘 만나는 인물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다.
“신용한 회장이 직접 오지는 않고 집사 역할을 하는 실장이 온다고 합니다.”
“그렇겠지. 사업 타진을 하러 오는 거지 계약을 하러 오는 게 아니니까.”
홍은하는 어느새 경찰이 아닌 비즈니스 분야 전문가가 다 돼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중간 브로커나 로비스트라고나 할까.
실제로 그의 업무도 그런 일이었다. 검은 마녀의 돈은 투자처를 찾고 있었고 돈 냄새를 맡은 모사꾼들은 귀신처럼 그 냄새를 맡고 달려들었다.
그중에는 총선을 1년 앞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치인들과 현 실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고 막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미래 권력들도 그에게 의도적이고 노골적인 러브콜을 보냈다.
시간을 확인한 그가 셔츠를 챙겨 입었다.
표정은 결의에 차 있었고 눈매는 포식자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사실 김 회장님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쪽은 그쪽이라서 여유 있는 척 가오는 잡겠지만 형님 입에서 오케이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겁니다.”
마이키가 심각한 표정의 홍은하에게 계속 주절거렸다.
‘고만 좀 떠들지. 오빠 지금 생각 정리 중인 것 같은데.’
덕분에 오늘 면담 내용을 대충 감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이 벌리려는 사업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김 회장 즉 검은 마녀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편법으로 판을 벌이거나 사기를 치기 위해선 언제나 투자자들이 믿고 마음을 움직일 만한 얼굴마담이 반드시 필요하다.
언제나 빠지지 않는 얼굴마담이 실세 권력이고 추가로 쐐기를 박기 위해선 큰 손으로 소문난 투자의 귀재 검은 마녀, 김 회장 같은 인물이 이 사업에 함께 투자했다는 소문을 흘려야 한다.
해서 종로 큰 손으로 불리는 신용한은 자신의 이미지만으로는 신뢰를 얻을 수 없자 김 회장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홍은하는 그들의 손을 잡을 계획이다. 이유는 그들과 한패인 권력 실세의 실체를 까보기 위해서다.
각기 서로 다른 이유로 두 집단은 손을 맞잡게 될 것이다.
멋들어지게 슈트를 차려입은 홍은하는 이제 제법이 아닌 완벽한 로비스트로 변신한 후였다.
이젠 그 누가 그를 마주한다 한들 그를 이전의 꼬지지한 야상이나 걸치고 다니던 형사 나부랭이로 보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근데..”
나는 서둘러 입을 닥치기로 했다. 홍은하가 사라진 후 마이키에게 캐묻는 것이 더 효율적인 질문임이 틀림없어서다.
“다녀올게. 저녁은 이 실장과 먹게 될 거야. 오늘은 많이 늦지 않아. 밤에 보자.”
꿈만 같았다. 실종된 홍은하와 이렇게 자주 만날 수 있다는 현실이 현실처럼 인지되지 않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멋진 슈트발 남자는 내 홍은하가 분명했고 그는 내게 오늘 밤 돌아온다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마침내 나의 실종남이 서서히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가 클럽 메두사의 복도 끝에 자리한 은밀한 밀실에 들어설 때마다 들어야 했던 고정 대사가 있었다.
그가 마주한 상대에게 늘 들었던 같은 소리를 그날도 반복해서 들었다.
이 실장은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홍은하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에 심 의원님이 홍 형사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신 회장님과 난 즉시 믿지를 못했었는데 진짜라는 걸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도 바로 믿기질 않네.”
그는 눈앞의 남자가 홍은하가 맞는 것이지 확인하기 위해 재차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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