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xKaHaL 님의 서재입니다.

극랑전(極狼傳)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최근연재일 :
2024.05.29 18:00
연재수 :
266 회
조회수 :
117,822
추천수 :
2,402
글자수 :
1,791,531

작성
24.02.27 12:00
조회
229
추천
7
글자
17쪽

60화. 천우신조, 천우신조(天佑神助, 天紆神鳥) (1)

DUMMY

“뭐로부터 도망치는 거예요?”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대화의 시작은 그 질문이었을 것이다.


“뭐로부터 도망치다뇨?”

“도망치는 중이람서요.”


코나 귀를 후비적거리면서 말했다면 혹시 득구가 물어본 건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이라는 이 아가씨는 때때로 과도하게 사내답다. 아니, 사내보다는 왈패답달까.


“얼핏 할배 얘길 들었어요. 사람마다 도피할 장소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할배가 그 얘길 꺼낼 때는 꼭 개방도들을 천진(天津)에 있는 촌락에 보냈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 손병구란 사람도 개방도 어쩌구 했었는데.


“단두의 횡포로 불구가 된 사람이나, 혹은 착취에 못 이겨 도망치려다 잡혀서 목숨만 겨우 붙여 놓은 사람들···. 우리 할배가 또 그런 사람들 그냥 못 넘어가거든요.”

“뭘 어떻게 하는데요?”


그 질문에 제갈민이 보여준 미소는 지금까지도 가끔 생각날 정도로 섬뜩했다.


“뭐, 별거 아녜요. 단두가 건드린 처자들을 조사해서 친자가 있다면 쉽게 가고, 없다면··· 닮은 꼴을 하나 찾아오는 거죠.”

“···그리고요?”

“강제 세습? 말이 좀 이상하네. 어쨌든 갈아치우는 거죠.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적삼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단두를 갈아치운다─하니,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옛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달구 패거리의 시작이 바로 그와 꼭 같았다. 물론 달구 형님은, 종 단두 놈을 결딴낸 뒤의 일까지 미리 계산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지만.


“···역모잖아요.”

“역모죠. 걸리면.”


제갈민은 어깨를 으쓱, 들고서 말을 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 지경까지 간 상황에서 달리 방법이 있겠어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종 단두 놈을 담글 때의 심정이 그랬다. 그래, 어쩌면 그 할배, 천하삼절이라는 구정삼에게서 이유 모를 친근함을 느낀 것도 바로 그 심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여인, 아니 제갈민도···.


“그런 놈이 있었··· 죠.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 아니 식인귀 같은 놈이···.”


제갈민은 입을 다물고 진지한 눈으로 적삼을 쳐다보았다. 그가 알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눈, 다른 얼굴로.


“형님은··· 달구 형님은 아무 데도 못 써먹을 우리를, 나를··· 홍두를··· 놈에게서 구해줬거든요. 근데 나는··· 나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속에 있는 것이 툭, 하고 터져 나올 때, 적삼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꼴이 참 사납겠지만, 적삼은 그냥 울었다. 아마도 달구패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처음 보인 눈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때, 제갈민은··· 그래, 아무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출렁이는 강물의 박자에 맞춰, 자신의 등을 천천히, 천천히 쓸어내릴 뿐이었던 것 같다.


그때 적삼은 생각했었다. 다시, 달구 형님이, 고무래 형님이, 도끼 형님이, 그리고 홍두 놈이 보고 싶다고. 한 번만 더 형제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등을 쓸어내리는 이 손길에 부끄럽지 않은 사내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무도 뜻밖의 제안인 탓이다. 제갈민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적삼은 이맛살을 한껏 올리고 말했다.


“아니 뭐, 다른 사람이 없잖아요?”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애초부터 제갈 소저는 저를 보내려는 거 아녔어요?”


제갈민은 뜨끔한 표정으로 긍정했다.


“···맞아요.”


달리 사람이 없었다. 득구는 백련교도와 천가방 모두가 주목하는 제일표적이고, 도종인은 천하에서도 이름이 높은 유명인이다. 거기다 제갈민은 백련교와 천가방 말고도 제갈세가의 신기비연인가 뭐시깽인가 하는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이라 했다. 아마 이번에 붙들리면 그야말로 사지를 꽁꽁 묶인 채 세가로 끌려갈 거라고 말이다. 그나마 발가락이 운신의 폭이 넓긴 하지만··· 이 양반은 애초에 색목인이다. 생겨 먹은 것부터 특이하다 보니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남는 사람은 적삼과 진채염, 둘 뿐이다. 그러나 진채염은 ‘연화신산’을 모른다. 그뿐 아니라 한현보의 도련님이나 하오문의 왕초도 모른다. 따라서 남은 사람은 적삼 하나뿐인 게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전달할 수 없어요.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면 믿을 수 없는 이런 일들은··· 전달 도중 왜곡이 일어나기 마련이죠. 함께 겪어본 사람이어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갈민은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백련교의 호법이 실은 사람 몸에 빙의(憑依)하는 귀신이고, 막 아무 몸이나 갈아타서 다시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누가 믿겠어요? 사실이라도 믿기 싫지.”


득구와 적삼이 동시에 진저리를 쳤다. 소름 끼치는 놈들이긴 하지만, ‘귀신’이란 단어로 지칭하자 생리적인 거부감이 느껴진 탓이다.


그러나 계묘혈사를 직접 경험했던 도종인은 그와 다른 거부감, 아니 공포감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무 몸이나 갈아타서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오대호법이?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중원의 모든 문파는 백련교와 대적하기보다는 굴복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최소한,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아무래도, 무조건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실혼인을 만들기 위해서 멸혼산과 금침시술이란 조건이 필요한 것처럼···.”

“맞아요. 정말 아무 대가도, 조건도 필요 없다면 그들의 조심스러운 행보를 설명할 수 없죠. 그냥 호법들을 양산해서 중원을 정복해 버리지. 거기서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득구가 제갈민을 대신해서 말을 이었다.


“울 아가씨가 그 핵심 요소였단 거 아뇨. 제기랄.”

“···맞아요. 아마도··· 백련교의 ‘성화’란 존재가···.”


제갈민은 말꼬리를 흐렸다. 솔직히 혼비백산한 득구의 표정 때문에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현보의 꼬마 아가씨가 바로 그 백련교의 성화, ‘백련성화’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제갈민은 한껏 진지해진 얼굴을 적삼에게 돌렸다.


“백련교의 호법들이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고, 거기에 가장 중요한 열쇠, 성채 아가씨가 놈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이 사실을··· 적어도 하오문주님, 한 소가주님, 그리고 연화 언니, 이 세 사람에게만큼은 반드시 알려야만 해요. 그래야 놈들을 앞질러 갈 수 있으니까.”


적삼은 물끄러미 제갈민의 눈을 쳐다보았다. 득구랑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혹은 평소 털털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지만··· 이 여자는 제갈세가의 적손, 그리고 제갈세가의 신산의 이름을 이어받았다는 바로 그 여인이 확실하다. 그래, 이 눈이다. 이 눈이 달랐다.


아마도 형님이, 달구가 변한 까닭은 다른 누구보다 먼저 이 눈을 마주했기 때문이리라. 생기로 가득한 눈. 생명력으로 빛나는 눈. 팔 병신이 되고 바싹 말라비틀어진 자신의 마음까지도 들끓게 하는 이 넘치는 생명력을 마주해버리면··· 제기랄.


“정말 할 수 있겠어요? 못하겠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뇨. 그럴 필요 없슴다.”


적삼은 목을 좌우로 꺾었다. 우드득, 소리가 우렁차다.


“나름 잘 나갈 때는 공의나루 골패 판을 주름잡던 타신편(打神鞭) 적삼이 바로 접니다.”

“타신편? 그런 별명도 있었냐?”

“가서 돗자리 공씨 아저씨한테 함 물어봐라.”


아니꼬워하는 득구와 거들먹거리는 적삼이 서로를 보며 으르렁댔다. 자신이 나설 때임을 직감한 도종인이 물었다.


“타신편이라니, 봉신연의에 등장하는 법보(法寶) 아닌가?”


달구 패거리 시절을 떠올리자 적삼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골패 질로 여러 사람의 혼과 눈물을 쏙, 빼놓던 모습으로 돌아온 적삼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타신편이란 법보가 어떤 법보입니까? 칠 타(打), 정신 신(神)!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 법보가 바로 타신편 아니겠습니까? 제가 딱 그거지 말임다. 누구든 걸렸다, 하면 기냥 막 그냥, 확 그냥 예? 느낌 아시죠?”

“저거 또 약 판다, 또. 에라이, 타신편은 뭔 타신편이냐? 걍 야바위꾼이면 족하겠구만.”

“뭔 말만 붙였다 치면 주먹질밖에 모르는 아그는 좀 짜져 있어라잉. 골패엔 마, 인생이 담겼엄마. 이 몸으루다가 말하자면, 엉? 진리의 구도자라고나 할까?”

“지랄. 똥을 싼다, 똥을 싸, 옘병. 얼어 죽을 인생에 튀겨 죽을 진리여? 너는 뭐, 니 마누라도 개평 뜯어줄 거냐? 아주 저승길 종잣돈도 저당 잡혀봐야 정신 차릴 놈이여, 이놈.”


적삼은 저도 모르게 뜨끔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적삼이 달구를 속옷까지 벗겨 먹고 나면 달구가 늘 하던 말인 탓이다. 이내 그 대상이 달구가 아니라 미친개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삼이 얼굴을 확 붉히면서 짜증을 냈다.


“저잣거리를 굴러먹음서 마누란 무슨 마누라야, 미친놈아! 아주 꼭 쓸데없는 데만 달구 형님이랑 쏙 빼닮아서는··· 에이, 옌장. 오랜만에 기분 좋나 싶더니 다 잡쳤네.”

“이거 진짜 덜 맞았구만, 덜 맞았어. 기껏 인생에서 제일 잘 나가던 때가 골패 질이나 처하던 때냐? 에라이 등신아.”


도종인 때문에 차마 후려치지는 못하고 혀만 쯧쯧 차던 득구는 제갈민과 도종인이 한결 환해진 얼굴로 적삼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뭐여? 둘 다 골패 질에 관심 있었수?”

“그게 뭔 소 발바닥에 콧김 넣는 소리예요, 진짜.”

“뭐, 뭔데요, 그럼?”


제갈민은 코를 쓱, 훔치고서 말했다.


“적 소협이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은 거죠.”

“아니 이런 면이고 자시고, 원래부터 이런 놈이었는디?”

“적어도 내가 적 소협을 만난 이래로는 처음 보는 모습이로군.”


득구는 뻘쭘한 표정으로 적삼과 도종인을 번갈아 보았다. 적삼은 도종인의 말을 듣고서야 그간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를 반추하는 모양이었다. 뭐, 반추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달구 패거리를 그만두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음울하기 그지없는데.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에요, 소협.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유가 중요한 건 아니겠죠.”

“···뭐, 그렇습죠.”


제갈민의 말대로 그 이유가 무에 중요하겠는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이 다 이유인데. 한현보의 벙어리 꼬마 아가씨가 놀라운 강단을 보여준 것도 이유였고, 그 작은 아가씨를 손도 못 쓰고 빼앗긴 것도 이유였다. 저잣거리서 같이 굴러먹던 미친개가 어엿한 무인처럼 보이는 것도 이유였고, 저 화산제일검, 화검 도종인이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것도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니, 그건 굳이··· 생각하지 말자.’


적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인네 같지도 않은 여인네에게 반해버렸다고 어찌 쉬이 고백하겠는가? 이건 자존심 문제이다. 결코 오르지도 못할 나무라서 그런 게 아니라!



* * *



“소의당(昭義堂)의 당주로 내정된 한현보의 한설총 소협은 앞으로 나오시오.”


설총은 현문진인의 부름을 따라 앞으로 나섰다. 뒷골이 서늘하도록 시선이 느껴졌다. 짜릿한 살기부터 선망 어린 눈빛까지. 지난 20년 동안 설총이 받아왔던 그 모든 시선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만 같았다.


‘뒤통수에 땜빵이라도 나는 것 아닌지 모르겠군.’


설총은 뒷골을 쓸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털어내고 무릎을 꿇어 포권례를 취했다.


“정천맹 소의당 당주로 내정된 한설총이 정천맹의 맹주님을 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시오.”

“명을 받듭니다.”


현문진인이 손을 내밀자, 부맹주직에 취임한 산동벽수 황보문성이 청옥으로 된 굴대를 비단포로 감은 두루마리를 건넸다. 정천맹주의 인장이 찍힌 임명장 두루마리였다. 현문진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것을 펼쳐 들고 읽었다.


“무릇, 의를 밝게 함(昭義)은 만천하의 기틀을 다지는 일일지니, 오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에게도 몸과 마음을 낮춰 섬기는 이에게 합당할 것이다. 그대, 한현보의 한설총은 이 소의(昭義)의 책무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 내용에 담긴 뜨거움과 달리, 현문진인의 언어는 건조했다. 메마른 어조로 그저 쓰인 글을 읽을 뿐인 그 목소리는 마치 답을 해야 하는 설총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래, 그저 몸을 낮춰 바짝 엎드리고나 있어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비웃음에 설총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설총은 잠시 눈을 감고 묵상이라도 하듯 질문을 몇 차례 곱씹은 후 담담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직 의로움을 위하여 신명을 다할 것입니다.”

“소의당주의 의기가 만천하에 떨칠 것을 기대하오.”


현문진인이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설총에게 건네려는데, 상석에 앉아 임명식을 지켜보던 원종대사가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주, 갑작스럽지만 하나만 여쭙겠소이다.”

“말씀하시지요.”

“대명천하가 열린 이래, 천하지회에서 열린 비무회의 우승자가 천하십이본 밖에서 등장한 일이 혹시 또 있었소이까?”

“···없었지요.”

“허허, 이런, 이런. 200년 동안에 처음 있는 위업을 달성한 이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있거늘, 이를 기념할 만한 좋은 무명(武名)조차 없었구려. 이는 큰 실례가 아니겠소이까?”


들뜬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흥겨운 원종대사에 반해, 현문진인은 여전히 건조하고 메마른 음성으로 답했다.


“방장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허허, 역시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려.”


현문진인은 한숨을 내쉬는 게 아닐까 싶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면, 방장께서 그에게 마땅한 무명을 하나 지어주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 천하삼절의 일좌이신 방장께서 직접 지어주신 무명이라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듯합니다.”


마치 지겹도록 외운 대사를 대충 읊는 것과 같은 태도였지만, 원종대사는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허면, 이 늙은이가 한 번 지어보겠소이다. 소의당주는 괜찮겠는가?”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담담한 설총의 대답에 원종대사의 미소가 더욱더 깊어졌다. 잠시 수염을 쓸어내리던 원종대사가 무언가 떠오른 듯, 아하, 하는 탄성을 내더니 입을 열었다.


“소의당주는 그 갈고닦은 소양이 탁월함에도, 천하지회가 있기까지 스스로 삼가고 때를 기다리지 않았소? 내 듣자 하니. 신조(神鳥)는 날지도 아니하고, 울지도 아니하기를(不飛不鳴) 3년이나 하며 자기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하니, 소의당주의 기다림이 그와 같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외다. 허니, 이제 날개를 펼친 소의당주에게는 곤어(鯤魚)가 변하여 된 신조(神鳥)의 고사가 가장 어울릴 듯하구려.”


잠시 수염을 쓸어내리며 자신이 내뱉은 말을 음미하던 원종대사가 말을 맺었다.


“홀로 제 뜻대로 노닐던 곤어가, 붉게 달아오른 하늘을 미끄러지듯 날아간다(遊鯤獨運, 凌摩絳霄) 하니··· 하여, 소의당주의 무명은 이리하면 어떨까 싶소이다. 천우신조(天紆神鳥)! 어떻소이까?”

“굽이치듯 하늘을 누비는 신조라니···! 마치 비무회에서 소의당주가 보여준 검을 그대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려.”

“과연 방장이십니다! 방장의 지혜는 천하의 보물이 틀림없사옵니다!”

“소의당주가 부럽기 그지없구려!”


현문진인을 비롯해 참석자 전원이 원종대사에게 찬사를 던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틈바구니에서, 처음으로 만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설총은 가만히 자신의 별호를 읊조렸다.


“천우신조라···.”


설총은 웃었다. 기쁘지만, 입맛이 썼다. ‘그 서찰’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생에 이보다 더 기쁜 순간이 없었을 것이다. 하나, 만약은 만약. 지금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남제현을 숨겨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걸 뒤집어버린 원종대사의 행보를 생각하면··· 아마도 이것은 분명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냐는 조롱의 의미일 테다.


하지만, 허망하다 싶으면서도, 무문의 말예로 태어나 지금까지 바라던 일이었기에 웃지 않을 수는 없었다. 비록, 그것이 원종대사가 지어준 이름일지라도. 아니, 바로 그 원종대사가 지어준 이름이었기에.


‘신조(神鳥)인가, 신조(神助)인가···.’


언젠가 스스로 입에 담았던 신천옹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 바람이 불어올 하늘을 믿기에, 끝없이 빈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 새···!


어쩌면, 이 또한 운명이리라.


설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극랑전(極狼傳)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2 64화. 엇갈림 (4) 24.03.17 204 6 15쪽
211 64화. 엇갈림 (3) 24.03.16 191 8 16쪽
210 64화. 엇갈림 (2) 24.03.15 192 6 16쪽
209 64화. 엇갈림 (1) 24.03.14 203 7 15쪽
208 63화. 인과의 칼날 (4) +2 24.03.13 200 8 15쪽
207 63화. 인과의 칼날 (3) 24.03.12 203 8 15쪽
206 63화. 인과의 칼날 (2) 24.03.11 219 8 18쪽
205 63화. 인과의 칼날 (1) 24.03.10 210 7 15쪽
204 62화. 반격 (6) 24.03.09 212 8 13쪽
203 62화. 반격 (5) 24.03.08 219 6 13쪽
202 62화. 반격 (4) 24.03.07 217 5 13쪽
201 62화. 반격 (3) 24.03.06 229 7 13쪽
200 62화. 반격 (2) 24.03.05 235 7 14쪽
199 62화. 반격 (1) 24.03.04 246 8 14쪽
198 61화. 징조: 해(日) (3) 24.03.03 229 8 14쪽
197 61화. 징조: 해(日) (2) 24.03.02 236 8 17쪽
196 62화. 징조: 해(日) (1) +2 24.03.01 226 9 14쪽
195 60화. 천우신조, 천우신조(天佑神助, 天紆神鳥) (3) 24.02.29 218 7 15쪽
194 60화. 천우신조, 천우신조(天佑神助, 天紆神鳥) (2) +1 24.02.28 237 8 19쪽
» 60화. 천우신조, 천우신조(天佑神助, 天紆神鳥) (1) 24.02.27 230 7 17쪽
192 59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지요. (2) 24.02.26 236 7 14쪽
191 59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지요. (1) 24.02.25 251 8 14쪽
190 58화. 한성채 (3) 24.02.24 250 8 14쪽
189 58화. 한성채 (2) 24.02.23 235 8 14쪽
188 58화. 한성채 (1) 24.02.22 261 8 14쪽
187 57화. 호적수(好敵手) (2) +1 24.02.21 302 8 14쪽
186 57화. 호적수(好敵手) (1) 24.02.20 239 8 15쪽
185 56화. 거부할 수 없는 제안 (3) 24.02.19 252 6 15쪽
184 56화. 거부할 수 없는 제안 (2) 24.02.18 243 8 14쪽
183 56화. 거부할 수 없는 제안 (1) 24.02.17 242 7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