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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KaHaL 님의 서재입니다.

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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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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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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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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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63화. 인과의 칼날 (2)

DUMMY

“···맞든 틀리든, 이 한 수로 판가름하게 되리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식아!”


제갈민은 미간을 짚고 고개를 내저었다. 당최 저 주둥아리는 다물 줄을 모르는 건가? 한마디라도 지면 몸에서 두드러기라도 돋는 줄 아나 보다.


“아니, 나까지 쓸데없는 생각에 휘말려 들 때가 아니지. 집중하자, 제갈민! 집중! 흐압!”


양 볼을 짝, 소리가 나게 두드린 제갈민은 우선 품에서 금창약과 붕대를 꺼내 도종인의 팔을 응급처치했다. 빠른 손놀림이지만 꼼꼼하게 붕대를 감은 제갈민은 호흡을 가다듬고 기혈을 정돈했다.


“무엇을 하려는가?”


도종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직접 참전할 생각은 없어요. 무모한 짓을 하는 사람은 한 명이면 충분하잖아요?”


제갈민의 답변에 도종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도종인의 안색은 어두웠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팔을 당하는 바람에 그만··· 면목이 없군.”

“세상에 그런 초식을 펼칠 걸,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대협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녜요. 저 호법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거지.”

“확실히··· 아파라지타라는 이름도 그렇고, 저 대호법이 펼치는 수법도 그렇고··· 지난 계묘혈사 때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공일세. 아니, 무공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수준이로군. 저게 정말 시우십결의 원본이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인간의 육신으로 펼치는 무공이긴 한 건가? 무슨 원리로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몸이 벼락을 내뿜는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보신개, 구정삼이 펼치는 강룡신장이 그나마 근접한 느낌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지막지한 경력이 일으킨 충격파가 만들어내는 착시에 가깝다.


더군다나 도종인의 팔을 익혀 버린 그 마지막 한 수는 벼락조차 아니다. 그저 거대한 광선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다. 빛이 돌과 나무를 녹이고, 거죽에 상해를 입힌다는 게 정녕 말이나 되는 소린가? 빛이 내뿜어지는 순간, 이형환위에 가까운 속도로 득구가 날아오지 않았더라면 살갗이 데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으리라.


“확실히 그 수법은 이해하기 어렵죠. 계묘혈사 때 어째서 보이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도 생각해볼 만하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야 할 건 그게 아녜요.”

“···파훼법을 찾은 겐가?”

“그건 아녜요. 단지··· 한 소가주님이 전에 백련교의 호법 중, 군다리명왕을 자처하는 그 호법과 한 차례 접전을 벌인 후에 한 말이 있어요.”


한 소가주란 이름이 나오자 도종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무엇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기어검술을 펼칠 정도의 경지에 올랐으면서도 관석화균(關石和鈞)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관화? 설마···! 아니, 잠깐···.”


도종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왕태하에게 빙의한 쿤달리와는 도종인도 맞붙어 본 경험이 있다. 시우십결 외에는 귀음신후를 상쇄할 방도가 없었던 탓에 득구와 협공해야 했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서는 그다지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사독파파가 개입하기 전까지 도종인은 별 어렵지 않게 쿤달리를 압도하지 않았던가?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제갈민은 검지를 세워 들었다.


“호법들의 무공 전수가 수련이 아닌 빙의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이 있었죠. 가설의 영역은 한참 전에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 부분에서 일어나는 부작용 같은 게 아닐까요?”

“부작용?”

“생각해보세요. 전에 검귀와의 일전을요.”


검귀라. 소영암향무를 완성한 그 일전의 이야기다. 그때 도종인이 주목했던 것은 검을 쥔 검귀의 팔이었다. 그 팔이 검귀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게 승패를 가늠한 기준점이었다. 물론, 소영암향무를 완성한 시점에서 이미 승패의 저울은 기운 셈이지만 말이다.


“상식이 통하는 상대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만 놓고 보자면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놈들이 빙의한 육신을 완전히 지배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고 봐야죠.”

“일리 있는 말일세. 하나···.”


지금 눈앞에서 전신에 번개를 휘감고 있는 저 호법은 쿤달리와는 그 ‘격’이 다르다. 그야말로 무능승명왕의 화신을 자처할 만하다. 모든 호법에게 빙의에 따른 부작용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부작용을 허점으로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별 의미가 없는 일 아니겠는가?


“염려하시는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조금만 냉정하게 방금까지의 상황을 잘 되짚어 보세요.”

“···방금까지의 상황?”


도종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까지라고 해봐야, 아파라지타와 대치하고 있던 사독파파가 갑작스럽게 약왕서를 던져 놓고 사라진··· 사독파파?


“사독파파, 독?”

“맞아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던 도종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파라지타와 사독파파의 대전을 직접 지켜본 것이 아니라 불타는 객잔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공방이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접전에서 우위를 점한 사람은 사독파파였다.


그리고 그 사독파파가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독. 비록 지금, 아파라지타의 한 수 한 수가 중독된 이의 그것을 한참이나 넘어선 위력을 보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사독파파가 증명했듯이.


“하나만으로는 파훼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둘은 다를걸요.”


도종인은 제갈민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의 입꼬리가 같은 곡선을 그렸다.


“소리비도의 오의(奧義), 오리 다섯··· 에이, 젠장! 한 소협 때문에 입에 옮았어! 퉤퉤! 카악, 퉷!”

“···오리홍락을 말하는 겐가?”

“···맞아요.”


으흠, 헛기침을 내뱉은 제갈민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리홍락을 대성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안법(眼法)이에요. 지금의 제 경지로는 아직 오리홍락의 완공을 논할 수준은 되지 않지만··· 적어도 안법만큼은 제갈세가의 당주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도종인은 제갈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다.


“자네가 볼 테니 내가 전해 달라, 이 말이로군.”

“바로 그거예요.”


제갈민은 보법을 펼치며 땅을 뒤집는 번개를 피하는 득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내공이 부족해서 저 거리까지 전음은 무리거든요.”


도종인은 씩, 웃었다.


“내 기쁘게 자네의 입이 되어주겠네.”


제갈민은 씩, 웃었다. 이 얼마나 든든한지. 천무구품의 제이계, 좌조에 올랐다 불리는 사내다운 호탕함이다. 아니, 도리어 믿기지 않는 호탕함이다.


제갈민은 천하에서 백 명, 아니 천 명을 꼽아도 한 자리는 차지할까 싶은 무림의 말학이며, 강호초출의 까마득한 후배다. 물론, 안법만큼은 천무구품에도 이름을 올린 제갈세가의 당주급 고수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제갈민의 말은 허풍이 아니지만, 천하의 화검이 이토록 까마득한 후배에게 자신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며 시원하게 인정하기가 어디 쉬운 일일까?


‘어쩌면, 한 소협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좋은 스승을 잘 만나는 게 아닐까?’


사람의 인연이란 게 이런 것일까. 기껏해야 두어 달이 될까 싶은 만남이었을 뿐인데,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과연 어떤 인과가 작용한 끝에 있는 일인가?


앞에서는 그야말로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뒤집히는 말세의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제갈민의 가슴에는 따듯한 확신이 가득 차올랐다.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이길 수 있다. 믿음이 굳건한 심지가 되어, 먹먹하던 전망에 촛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촛불은 자신감이란 횃불이 되어 타올랐다.


“거두어서 일으키고, 하나로 짊어지고 간다. 기는 바다(氣海)로부터 시작해, 물이 갈라지는(水分) 강을 지나, 큰 집(巨闕)의 마루(玉堂)를 지나, 가장 깊은 방(紫宮)으로 들어간다. 용이 사는 못(龍淵)을 어찌 딛고 서겠는가? 음과 양이 각기 다르나 다름으로 말미암아 서로 발돋움하여 교류하니, 이로써 태양(太陽)이 정모(睛眸)를 밝히리라.”


구결을 한 구절씩 정성스레 읊으며 공력을 운용하던 제갈민은 반개한 채 내면을 관조하던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전보다 훨씬 밝았다.



* * *



“명암의 대극(對極)이 하늘과 땅에 다시없을 맹투(天地猛鬪)를 불러오리니, 준비하라!”


준비는 개뿔··· 똥이나 싸라며 빽, 소리를 한 번 질러주려는 찰나였다. 득구의 귀에 들린 것은 도종인의 목소리였다.


-아파라지타가 아니라 그림자일세!


움찔, 목구멍에 걸린 말을 꿀꺽 삼킨 득구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득구의 시선을 받은 도종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전음을 날려주었다.


-아파라지타를 직접 보지 말고, 그 그림자를 보게!


‘그림자? 갑자기 웬 그림자?’


자연스럽게 득구의 시선이 삼면육비의 모습이 된 아파라지타를 향했다. 과연, 눈에 비치는 모습은 가공할 기백으로 펼쳐 낸 일종의 환상인 모양이다. 아파라지타의 그림자는 평범한 두 팔이 검을 들고 있었다.


“···응? 잠깐···.”


뭔가 조금 이상했다.


“재앙의 춤을 추어라, 종언의 칼날이여(殃舞終焉刃).”


아파라지타가 다시 한번 땅에 검을 내리꽂는 순간, 득구는 그림자를 보라는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다. 눈에 보이는 아파라지타가 검을 꽂는 순간과 그녀의 그림자가 검을 꽂는 순간이 명백하게 달랐다.


한 호흡··· 아니, 눈꺼풀을 한 번쯤 깜빡일 정도의 차이가 난다. 아니, 그보다는─


‘마치 꼭두각시 같네.’


손이 먼저 움직이면 그 뒤를 인형이 따라 움직이듯, 아파라지타가 움직이면 그 뒤를 그림자가 따라서 움직인다. 보통 그렇던가? 그림자라는 건 보통, 그 사람과 동일한 속도로 움직이지 않던가?


‘너무 빨라서 그림자가 못 쫓아가는 건가? 아니면 빛이···? 아니, 잠깐만.’


엉뚱한 생각을 하던 득구는 드디어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금 두 눈에 보이는 아파라지타는 삼면육비의 괴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실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저것은 오직 흘러넘칠 정도로 막대한 기와 더불어 아파라지타의 기백(氣魄)이 펼쳐 낸 환상인 셈이다. 마치 기의 장막 속에 본신을 숨긴 채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득구는 이전에도 비슷한 현상을 몇 차례나 봤다. 쿤달리와 검귀. 그렇기에 이 현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었다. 보고도 모르면 바보지.


‘저건··· 즉, 빙의한 아파라지타 본인! 아니··· 본귀(本鬼)다!’


그렇다면 그림자 쪽은 실재하는 아파라지타의 육체가 움직이는 모습일 테다. 검을 휘두른다 치면, 저 삼면육비의 괴물 쪽이 아니라 그림자의 칼이 진짜인 셈이다.


-이해했는가?


도종인의 전음이 들렸다. 득구는 아파라지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다시 도종인에게서 전음성이 왔다.


-관화(關和)의 가르침을 기억하라는군. 연화신산의 전언일세.


순간, 득구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 가늘어졌다. 관화의 가르침이라면··· 그래, 범들을 잡고 난 다음이다. 생각해보면, 그때 설총은 이미 시우십결을 전수할 준비를 했었다.


‘놈들은 어설프다. 어차피 길게 설명해봐야 못 알아들을 테니, 이렇게만 말해두마. 다시 한번 백련교의 호법들과 대적하게 되었을 때, 그 점을 기억해라.’


대체 뭐가 어설프다는 건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어설픈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총의 검만이 아니라 도종인의 검을 본 지금이라면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득구의 턱이 도드라졌다. 꽉 깨문 어금니 사이로 이빨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 한 번만 검을 교차할 일이 있다면, 분명 그것이 역습의 기회가 될 것이다. 아까처럼 광선을 쏘아 멀리서 공격해댄다면 기껏 찾아낸 기회도 무용지물이 되겠지만···.


전에 없던 집중력으로 번개와 함께 튀어 오르는 용암 덩어리를 피해내면서도, 득구의 눈은 여전히 아파라지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파라지타가 땅에 꽂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우우웅!


미세한 진동음이 득구의 귀에 들렸다. 아주 미세하지만, 모든 신경이 오직 아파라지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데 쏠려 있던 득구는 그것을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득구는 본능적으로 눈을 하늘로 올렸다.


콰르릉!


때마침 벼락이 한차례 내리치고, 저 높은 허공에 신이라도 된 것처럼 떠오른 아파라지타가 땅 아래의 득구를 굽어보는 것이 보였다. 상당히 먼 거리에 있음에도 득구는 도리어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뭔가··· 커진 것 같은데? 아냐! 진짜로 커졌어.’


거리감을 왜곡하는 느낌의 정체는 바로 환영이었다. 아파라지타 본귀의 형상이 강대한 기백과 무지막지한 기의 흐름을 타고 환영으로 나타난 것이다. 찰나지간이지만, 득구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 셋, 여섯 팔. 신화 속의 괴물이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낸 광경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을 자아냈다.


‘···아니지! 그림자!’


퍼뜩 정신을 차린 득구는 입술을 깨물었다. 높이 떠올라 있는 탓에 환영과 실체를 분간하게 해줄 그림자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를 앙다무는 순간, 아주 익숙한 초식이 득구의 눈에 들어왔다.


‘저건··· 등단선릉의 제 칠보?’


한 발로 독립보를 서는 등단선릉의 제 칠보는 준비 자세다. 이 초식은 넓게 펼쳐두었던 기를 어기압정(御氣壓頂)의 수법으로 모아 비좁지만 단단한 제공권을 형성하고,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넘긴 뒤 반격을 도모하는 이정구사(以正驅斜)의 묘리를 담은 초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펼쳐둔 세 개의 만다라가 하나로 합쳐지며 아파라지타의 제공권이 급격하게 작아진다. 공격받을 일도 없는 허공에서 굳이 제공권을 좁힌다는 것은···!


‘─온다!’


득구는 독립보를 섰다. 그리고 빠르지만 급하지 않게 숨을 들이켰다. 스호오, 하는 기묘한 호흡성이 득구의 귀를 울렸다. 거의 동시에 도종인의 전음성이 들렸다.


-매화꽃이 성긴 그림자를 개울가에 드리울 때, 그림자는 성긴 그물과 같으나 흐르는 물을 잡지 못하네. 어스름밤의 달빛은 그윽한 향기를 더 짙게 하는 법일세!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득구는 씩, 이를 드러냈다. 무슨 말인지 알 턱이 있나. 그러나 도종인의 검은 이미 득구의 두 눈에, 그리고 뇌리에 새겨 놓은 바다. 즉, 그의 말은 곧 그의 검이 그리는 심상이다.


“내가 그 정도는 알지!”


“「옴 마하 파드메 훔─!」”


천둥처럼 귀음신후가 울려 퍼진다. 동시에 득구의 동공이 확, 좁아졌다. 초월적으로 가속한 의식의 흐름이 모든 것을 느리게 만든다.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아파라지타도, 그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벼락의 입자가 마른 나뭇가지 모양으로 퍼져나가는 것도 모두가 느리다. 물론, 득구 자신의 움직임도 느리다.


검을 쥔 오른손과 검결을 맺은 왼손을 서로 맞은편으로 길게 뻗는다. 그리고 천천히, 아니 실제로는 매우 빠르게 원을 그리며 거리를 좁힌다. 팔에 검을 더한 길이만큼의 공간이던 득구의 제공권이 머리통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괜히 손끝이 차갑다. 날붙이에 베인 것마냥 따끔거린다. 일대에 가득한 번개가 원활한 움직임을 막는다. 모든 것이 불리하고 불안하다. 주어진 기회가 오직 한 번뿐이라는 사실 또한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뭐?’


득구는 뱃속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던 숨과 함께 모든 불안을 토해내었다. 무심결을 수련한 사람은 공력을 잃어버리고 무력해진다는 점,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이 힘이 어쩌면 백련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득구를 공의현의 미친개라고 불리게 한 ‘재기(才伎)’ 역시 탐랑인가 뭔가 하는 것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점까지, 모두가 태어나 처음 맛보는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치대는 대로 치고, 바위든 나무든 들이받을 일이 있다면 마다한 적이 없다. 그게 득구의 삶이었고, 그래서 미친개였다. 그러다 죽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확신이 거짓부렁에 불과했다면?


‘그러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직 복잡한 건 잘 모르겠다. 뱃속에 불안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음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 대면해야 할 것은, 지금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그쪽이 아니다.


‘그림자!’


득구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빠르게, 빠르지만 느리게, 아니 그야말로 벼락같이 가까워지는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흐릿하다가 다가올수록 점점 검게 변하는 그림자 하나가. 그리고 그 그림자는 실제의 아파라지타보다 다섯 걸음이나 뒤에 있었다.


‘개울가에 드리운 성긴 그림자, 그윽한 향기와 함께 번져 나가는 달빛.’


머리통만 한 제공권으로부터 매화나무 가지가 뻗어나간다. 심상으로 빚어낸 꽃이지만 실제인 양 향기가 난다. 향과 더불어 빛깔이 고우니, 실제인지 허상인지 분간할 도리가 없다.


수라의 얼굴을 한 아파라지타의 머리통이 바로 지척이다. 눈에는 눈 대신 구멍이 있고, 그 구멍 사이로 도깨비불이 둥실 떠 있다. 득구의 눈이 그 도깨비불을 향했다.


“거 드럽게 못생겼네!”


뻗어 난 매화가지에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스팟!


작가의말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강호(?)의 오랜 격언이지요. 실은 정말 존경하는 이영도 선생님의 대작,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나온 명언입니다.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오래 남아서, 언젠가는 꼭 "셋이 하나를 상대하는" 장면을 써보고 싶었더랍니다. 


뭐, 소원성취했네요ㅎㅎ 늘 그렇지만,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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