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살궁의 사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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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이 자색 기류가 뿜어져 나오면 이기지 못할 상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번 엠버스피어에서 저 여우 가면에 도움을 받고 난 다음 더욱 그 힘이 막강해졌다.
성군에서 훈련할 당시 대련 상대가 없어 온종일 허수아비만 쳐야 할 때도 있었다. 불사왕과 처음 마주 할 때도 이런 꼴은 겪지 않았다.
세렌은 여우 가면은 고사하고 마테니에게도 농락을 당하는 중이었다. 도저히 검으로 잡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왼쪽 오른쪽 정신없이 움직여 대는 이 사내에게 검을 맞춘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테니는 대련이 아니라 그저 신이 나서 즐기고 있을 뿐. 자신도 놀란 것이 천마비행이 천마잠행과는 완전히 다른 경공이란 걸 성벽만 죽어라 뛰면서는 알지 못했는데 사람과 상대해 보니 과연 천마비행이 확실히 무서운 경공이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공격은 자고로 속도다. 누가 먼저 검을 상대에게 맞추느냐고 또는 상대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도 속도가 생명이다. 그것이 뒷받침해 주는 것이 발의 움직임, 검술에서도 검보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속도에서 상대를 지배하면 그것은 대결이나 싸움이 아닌 단지 장난질에 불과하게 된다. 지금 마테니와 세련의 대결이 그러하다. 확실히 세련의 검은 강력한 힘을 담고 있다. 2성의 자하신공과 7성의 마나가 어우러진 강한 검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천마비행으로 날아다니는 마테니를 세렌의 두 다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명으로 노예의 신분에서 당시 최고의 권력가 중 하나인 무려 후작의 신분인 레미 테일리아드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다. 그는 황태자의 외삼촌으로 망나니 황태자가 또 여자 하나를 잡아 와서 장난치는 줄 알고 처음에는 세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의 부탁이므로 마지 못해 세렌에게 마나 모으는 법과 검을 몇 수 지도해 주고 내버려 뒀다. 하지만 얼마 뒤 레미는 매우 놀랐다. 그것은 세렌의 가공할 지식 흡수력 때문이고 또 그 지식을 현실화시키는 능력이 어마어마한 정도를 넘어 레미 후작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망나니 황태자가 부탁한 여아라 콧방귀를 뀌었던 자신을 후회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기재였다. 그때부터 레미 후작은 정성을 들여 세련을 가꾸기 시작했다. 기사도의 정신과 기사의 모든 것을 가르쳤다.
무서운 흡입력이었다. 한번 가르쳐 주면 세렌은 잠도 자지 않고 단련하여 다음 날 만났을 때는 그것을 완벽히 구사해 냈다.
황태자의 애완견이 아니라면 물론 그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행동이 얼마나 망나니였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세렌이 가여울 정도였다. 이런 기재는 당장 자신의 제자로 삼고 테일리아드 가문으로 입적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미치광이 황태자의 물건에 손을 댈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림의 떡으로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레미는 자신의 검술 아낌없이 흡수하는 세렌이 더 없이 탐이 났다.
세렌은 계속 커갔고 자신에게 검을 배운지 2년 만에 어반마르스 기사 시험에 합격했고 단 삼 년 만에 성군의 입대 시험에 합격했다.
황태자의 애완견이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황태자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고 세렌은 세렌대로 커갈 수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같은 또래에서는 이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고 그녀의 상관도 눈치를 보며 그녀를 피해 다닐 정도였다.
테츠가 말한 천살궁의 천성을 그녀는 갈수록 억누르기 힘들어했다. 원 없이 싸우고 싶다. 약한 자를 원 없이 밟아 대고 싶은 욕망은 그녀를 갈수록 힘들게 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솔라리스에 오크가 창궐하여 성군이 출병한다는 소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출병자에 뽑히지 않으려 권력의 힘을 빌리거나 부모의 힘을 빌려 빠지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녀는 당연히 크게 기뻐하며 가장 강한 부대에 배속을 요구했다. 그래서 배정된 것이 성군 중에서 가장 이상하고 특이한 전술 부대인 불사왕 모건 백작이 이끄는 성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패배의 쓴맛을 봤다. 불사왕 그는 인간의 법주를 가뿐히 웃도는 능력의 실력자다. 소문으로 그가 성황 잉그람이 직접 거둬들인 제자 중 하나인 칠무신임을 알았고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이끌 자격이 있는 상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사왕으로부터의 밀명을 받고 엠버스피어로 잠입. 엘리웃의 서신을 가로채 오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때 저 여우 가면의 도움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이 내공이란 것을 몰랐고 단지 자하신공이 이전보다 월등히 강해졌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오크와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환장했다. 그녀는 전장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원하는 모든 것이 이곳에 있었다. 환희, 기쁨, 즐거움, 그 모든 것을 검과 함께 달릴 수 있는 곳.
천살궁인 그녀에게는 최고의 무대였다. 베고 죽이고 베고 죽이고 수많은 오크의 시체를 넘고 넘어도 그녀의 기쁨은 충족되지 않았다. 언제나 배고픔에 떨어야 했고 그런 그녀를 보는 주변의 기사들은 그녀에게 바이올렛의 유령이라는 별칭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건 백작이 이끄는 병력 중 최강이라는 1분대 기마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기쁨보다는 실망이 더 컸다. 1분대에는 부모의 후광을 등에 업고 단장이 되어 있는 모지리 한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1분대 단장 웨인이다. 어반마르스에서 알아주는 귀족 가문의 자제인 그는 그 부모의 후광으로 성군 최강의 기사 부대인 모건 백작의 부대에 들어 올 수 있었다.
솔직히 불사왕 부대에서 근무했다는 타이틀 하나만 있으면 정계 진출은 물론 모든 이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으니 기사들의 꿈이자 로망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만큼 힘들고 가혹한 곳이 이곳이라는 소리다.
웨인의 어눌한 지휘 덕분에 수 없는 고비를 넘겼고 한 번은 오크의 포위망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다. 저 여우 가면이 없었다면 자신의 유일한 친우인 아르펜을 영원히 잃었을 것이다.
고맙지. 정말 감사할 정도지. 몇 번이나 고맙다고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국이지. 하지만, 하지만, 이것들 도대체 뭐냐?
그동안 자신이 걸어왔던 무의 길을 한꺼번에 부정해 버리는 이것들은 정체가 뭐냐고!
수만 오크에 둘러 쌓였을 때도 눈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광분해 싸웠고 베고 또 베었다. 말발굽에 밟히는 오크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내가 되어 흘렀다. 그 진흙땅 속에서 당당히 숨 쉬며 살아 돌아왔다.
세상에서 내가 믿는 것은 바이올렛 하나뿐이다.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검뿐이다. 이 바이올렛을 들 힘만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나는···.
마테니라는 작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여우 가면 앞에서 볼썽사납게 고개를 숙이고 야단을 맞고 있었다. 그가 야단맞는 이유는 자신을 때려서다. 아하. 나를 때려서 야단을 맞는구나. 그렇네.
"이놈, 힘 조절도 못 하고 무얼 하는 거냐? 정말로 저 애를 패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죄송합니다. 마스터. 그녀가 저렇게 약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세렌은 입을 벙긋벙긋했다. 마테니의 말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약할 줄은 미처 몰랐다고?
여기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거지? 저거 나보고 한 소리 아닌 거지? 저렇게 약할 줄을 몰랐다고?
그녀의 천살궁이 불타올랐다. 그녀의 눈이 돌연 벌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힘으로 굴복하였어도 정당하게 굴복당하고 싶다. 이런 장난 같은 놀잇감이 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한 싸움이어야 하고 그래서 자신이 진다면 그것이 인정하고 싶은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야.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바이올렛이 비명을 토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했던 그 어떤 때보다 가혹할 정도로 자하신공과 마나를 끌어 올렸다.
"어? 천살궁이 폭발한다. 쯧쯧 저러다 지 성격 못 이기고 폭주할 텐데···."
-팟
세렌은 달렸다. 여우 가면과 마테니를 향해. 하지만 두 사람 눈에는 한 참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느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테니가 움직이려 하자 테츠가 제지했다.
"마테니 넌 잠시 있어. 기량 점검은 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고 정신 교육이나 시켜야겠다."
테츠의 손이 부드럽게 좌우로 움직였다.
"크억!"
세렌은 뛰어오는 자세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거 한방도 못 버티고 비명을 지르고 엎어져? 일어나!"
"익"
세렌은 입과 코에 몰려드는 흙먼지를 뱉어내고 바이올렛을 지팡이 삼아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진정시키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검도 없이 뭐로 공격하는 거지? 이 충격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법인가? 그렇지 않아 저들은 마나는 일도 없는걸. 이게 무슨 일이야? 세렌은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구 쏘아대는 아르펜을 힐긋 봤다.
"악"
그녀는 다시 가슴에 무엇을 맞고 뒤로 벌렁 누웠다.
"지금은 대련 중이야. 한눈파는 게 있을 수 있나?"
아! 하늘이 참 푸르다. 저건 뭉게구름이구나. 정말 푸른 하늘이야. 일어나기 싫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구나. 이건 모두 꿈이야.
"언제까지 누워 자고 있을래? 발딱 일어나지 못해."
그 꿈은 사정없이 깨져 버렸다.
테츠는 멍하니 누워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혀를 찼다.
"아이고 몇 방 때렸다고 천살궁의 흉성이 꺼진 거봐라. 이제 완전히 죽어 빠진 생선눈깔을 하고 있구나. 독기마저 빠졌어. 허."
그녀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악을 쓰고 살심을 일으켜도 도대체가 상대가 돼야지 검도 맞을 놈한테 휘두르는 거지 이딴 괴물 같은 놈들에게는 바이올렛이 백자루 있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어나기 싫다. 이건 말이 되지 않은 일이다. 세계 최강의 집단이 성황의 성군이라는 자부심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마교는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모인 집단이다. 이곳으로 좌천을 보낸 이유가 있었어.
그런 그녀의 하늘을 가리고 여우 가면이 떡 하니 나타났다.
"포기하는 거지? 그럼 이곳으로 좌천됐다니 뭐니 하는 소리는 때려치우고 이참에 우리 마교에 가입해라. 성군 따위 개나 줘버려. 그깟 성군이 뭐가 대단하다고 유세를 떨어?"
"성군을 욕하지···."
아! 이 사람은 그래도 된다. 성군을 욕해도 될 사람이다. 충분히.
"저와 아르펜을 이곳에 부른 진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르쳐 줄게. 지금 네가 본 힘을!"
세렌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성군의 일원입니다. 성군으로서 자부심만은 꺾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튼 고집하고는 마교에는 율법이 있다. 마교에 가입하지 않으면 절대 마교의 무공을 배울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 마교의 바탕을 이루는 가장 강한 규범이기도 해. 아르펜과 함께 마교에 가입하더라도 성군하고는 상관없지 않으냐? 내가 너보고 성군에 대한 의를 끊으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마교에 가입할 거냐?"
"하면 지금 이 기술들을 배울 수 있는 겁니까?"
"오냐, 내가 네 스승이 되어 모든 것을 가르쳐 주마. 천살궁에 어울리는 힘을 줄 것이다."
"왜죠?"
"후후, 네가 스스로 맹세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약속은 지켜야지?"
세렌을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자신은 성군으로서 이곳에 좌천된, 그렇다. 좌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곳에서 생활하라는 이야기다. 그와의 약속에서 자신이 지면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배우고 싶다. 이 말도 안 되는 힘을 이들이 무엇인지 모르나 성황이 직접 교지를 하사할 정도면 성황과도 관계가 있는 집단이다.
결코, 부자연스러운 곳이 아닌 자신을 이곳으로 보낼 때 불사왕이 지었던 미소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겠다.
"마교에 가입하겠습니다. 무공이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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