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
그랜드워드의 이름만큼이나 거대한 양수검 울릉바르는 푸른 예기를 뿜어냈다. 아무몰드 투기장에서 열 번째로 강한 투사라고 말하는 그랜드워드는 처음으로 긴장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여우 가면 그 공포는 극대화되었다.
뭐지? 이 압력감은?
저 평범한 여우 가면에서 활화산 같은 에너지가 불출 하다니
초자연적인 마왕을 사람 안에 가둬 놓은 것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에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이 상식을 뛰어넘은 압도적인 압력이 진정 사람이 뿜어내는 것인가?
지금까지 미치가 싸워 왔던 인물들은 대부분 수준 이하였기 때문에 미치의 강함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랜드워드는 달랐다. 그는 아무몰드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인물에 드는 만큼 상대의 기운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마주하고선 여우 가면의 능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그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향해 한꺼번에 밀려오는 공포감을 맛보는 중이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내가 감히 검을 들이댈 상대가 아니다.'
그랜드워드의 귀에 관중의 함성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제이미가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했다. 상대는 서로 노려 보면서 공격을 하지 않았다. 관중의 함성에 야유가 섞이자 제이미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미치형 공격해."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미치는 격투장 바닥 위를 수평으로 날았다.
그제야 관중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걸 보기 위해서 이곳에 왔단 말이야."
"저, 아름다움은 언제봐도 황홀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여우왕, 그는 진짜 물건이야."
미치의 움직임 자체가 이들 눈에는 예술로 보였다. 그것이 천마비행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이 전진하기 위해 불필요한 자세를 모두 제거한 완벽한 돌격형 경공이다.
그것이 천마비행의 가장 큰 핵심이자 요령이다.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한 마리 제비가 땅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멋진 비행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온다!'
그랜드워드는 눈에 불을 켰다. 여기서 저 압력에 밀려 뒤로 물러난다면 패배보다 못한 놈이 된다. 맞서 쓰러질지언정 절대 도망가서는 안 된다.
여기서 꼬리를 말면 평생 아무몰드에 설 수 없다. 1패를 안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등을 보이고 추한 모습으로 평생을 살 것인가의 선택에서 그랜드워드는 당연히 전자를 선택했다.
승패를 받아들이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우왕이 상대 투사를 해친 적은 없다. 대부분 기절시키거나 항복을 받아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가 상대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큰 용기가 되었다. 벌써 눈앞으로 성큼 날아들었다.
그랜드워드는 울릉바르로 여우왕을 쪼갤 듯이 내리쳤다. 푸른 검기가 검 위로 거대한 위세를 뽐냈다.
그걸 맞는다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몸이 무쇠가 아닌 이상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솔라리스에서 가장 강한 강철을 십 년 이란 세월에 걸쳐 버린 검이다.
그 어떤 무기도 울릉바르의 검을 견딜 수 없다.
"피하지 않아?"
검은 그대로 미치를 내리쳤다.
그랜드워드의 손바닥을 통해 무언가 베었다는 느낌이 전해왔고 검이 갑자기 어떤 것에 걸려 멈췄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설마? 여우왕이 검에 베인 건가?
그는 감각을 쫓아 시선을 검 아래로 내렸다.
"이런, 미친!"
여우왕은 푸른 예기가 넘실거리는 울릉바르의 검날을 왼손 엄지와 검지로 잡고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랜드워드는 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눈으로 여우왕의 손바닥이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잠깐, 졌다. 내가 졌어!"
"미치형 멈춰욧!"
제이미는 그랜드워드가 항복 선언을 하자마자 외쳤다. 미치의 손바닥은 정확히 그랜드워드 가슴 부근에서 멈춰졌다.
그랜드워드는 이마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려 눈썹 위에 매달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모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격투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랜드워드의 항복 선언 여우왕 미치의 승리입니다."
"으와, 그랜드워드 조차!"
"오, 맙소사. 하늘이여 진정 눈앞에서 벌어진 승부가 진짜입니까?"
관중들이 흥분하고 아무몰드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사태가 벌어졌다. 투기장의 동서남북 모든 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투기장 안은 기사들로 가득 찼다.
기사 단장이 머독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머독은 쪽지를 들더니 크게 고함을 쳤다.
"오늘부로 아무몰드 격투장을 폐쇄하며 격투장에 소속된 투사들은 모두 징집되었음을 밝힌다. 오크가 잔버크를 돌파했다. 이것은 국왕 윌리엄 대공의 친서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웅성웅성하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미치와 함께 투기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경비병으로 대체된 기사들이 가로막았다.
"국왕의 명령이다. 아무몰드의 모든 투사는 사병으로 징집되었다."
"비키세요. 저는 투사가 아닙니다."
"너 말고 네 뒤의 여우 가면을 말하는 거다."
"그는 제 친형입니다. 우리는 시몰레이크 후작의 사람입니다."
테츠는 목걸이에 매달린 가문의 문장을 꺼내 보였다.
그러자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길을 터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제이미는 분함을 다스리지 못해 화가 치솟았다.
조금만 더 했으면 그라운드 오브 클레임에서 우승을 하여 시몰레이크 후작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제이미는 그것이 가장 불만족이었다. 시몰레이크 후작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을 놓쳐 버린 것이 가장 아쉬웠다.
시몰레이크 후작에게 잘만 보인다면 그의 후광을 등에 업고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요즘 들어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목에 걸고 있는 이 펜던트는 삶의 프리패스와 같은 거였다. 이 목걸이만 보여주면 모든 사람이 설설 기었다.
다음날 파비앙 남작이 직접 찾아왔다. 시몰레이크 후작이 자신과 미치를 초대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제이미와 미치는 파비앙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전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제길 그라운드 오브 클레임 승리가 눈앞에 있었는데 시몰레이크 후작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직전이었는데···"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잖나. 시몰레이크 후작님도 이해하실 거네. 내 생각에는 더 중요한 임무를 두 사람에게 주려는 모양이야. 그것을 들어 드리면 더 큰 일을 하는 셈이 되지."
"그렇습니까? 어떤 일이라도 좋습니다. 시몰레이크 후작님의 명령이라면 지옥 불 속으로 뛰어들 자신도 있습니다."
***
메흘린은 손에 서신을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무슨 내용이 쓰여 있습니까?"
"동원령입니다. 윌리엄 대공의 친필 사인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진서입니다."
"흥, 버릴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동원령을 내리다니 이런 파렴치한이 다 있나."
테드버드는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끼었다.
"우리가 솔라리스에서 거병했으니 팬텀 가드너 왕가의 백성이 분명하고 왕의 명령은 어길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이 동원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반역행위나 마찬가지란 겁니다."
"그럼 메흘린 경의 뜻은?"
"당연히 윌리엄 대공의 뜻을 받아들여야지요."
"드디어 전쟁에 참여하는 겁니까?"
엘빈은 양손 깍지를 끼고 우두둑 소리를 내며 말했다.
"윌리엄 대공의 명령은 수락하되 작전은 저희가 구상합니다. 저는 두 개의 팀으로 나눌 생각입니다. 첫 번째 팀은 테일리아드 마법사 부대를 호위하여 오크의 뒤를 칩니다. 이것은 윌리엄 대공이 말한 동원령을 지키는 행동이지요."
"나머지는?"
"진짜 오크의 뒤를 쳐야지요. 꼬리 자르기입니다."
엘빈을 메흘린을 보고 말했다.
"메흘린 경 나는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마법사 뒤꽁무니를 바라보고 싶지는 않아. 오크와 최전선에서 싸우겠어."
"그렇지 않아도 엘빈 경은 꼬리 자르기 팀으로 보내 드릴 생각입니다."
"훗, 그럼 다행이군. 인제부터 내 소속 기사들의 훈련량을 더 늘려야겠어."
그때였다. 회의실 문 뒤에서 답답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경비대장 한스입니다. 지금 어떤 분이 성문 앞에서 고함을 치고 있는데 테츠를 내놓으라고 고함을 치고 있습니다."
"테츠를? 그가 누구인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막무가내로 고함만 치니 알 수가 없습니다."
일행은 즉시 성벽 위로 천마행공을 사용해 달렸다.
성문 앞에는 흑마를 타고 검은색 마의를 온몸에 걸친 건장한 사내 한 명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테츠님을 찾아왔소. 성문을 여시오."
"누구요? 무슨 사유로 마교 교주님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대는 것이오?"
"그것보다 자신의 신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닙니까?"
메흘린이 말하자 검은 마의의 사내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그분의 명이 없었다면 당신들 모두 송장이 되었을 거다. 나는 명령 받은 대로 행할 뿐이니 그대들의 명줄이 긴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
그 소리를 듣고 엘빈은 단번에 욱했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꼴랑 혼자 문 앞에 서서 개 짖듯이 짖는구나."
메흘린은 사내의 등에 매달린 창같이 기다란 이상한 무기를 보고 말했다.
"우리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습니까?"
마교 일행 모두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칠무신 풍신왕 제피로스
세상에서 성 전체 인원을 산송장 취급할 수 있는 인물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칠무신
메흘린은 독특한 외모의 사내를 보고 그가 하는 말이 정녕 거짓이 아님을 느꼈다.
"엘빈경 절대 저 사람과 시비를 나주지 마시오. 엘빈경은 절대 저 사람의 상대가 아니오."
그 말은 엘빈을 더욱 부채질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테츠로부터 내공과 무공을 전수받았고 수련을 거듭하여 부하들로부터 소드 마스터라는 존경을 받는 중이다. 그런 그의 자존심은 날로 대단해져 있어 메흘린이 한 말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엘빈을 찔렀다.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내가 직접 경험해 보겠습니다."
"엘빈경 내 말을 듣지 않을 겁니까?"
메흘린이 고함쳤지만 이미 엘빈은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 뒤였다. 엘빈은 경공을 너무나 좋아해 이제 그의 천마행공은 테츠로부터 배움은 받은 자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었다. 그는 성벽을 내려오며 성벽의 울퉁불퉁한 부분을 살짝 발로 차며 떨어지는 충격을 완화했다.
그리고 성벽 아래로 사뿐히 내려섰다.
검은 마의의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이해 못 할 일이군. 이 기술을 그분이 가르쳤단 말이지?"
"뭔 혼잣말을 수군대시는가? 그대의 부름에 확답을 한 자를 앞에 두고 실례이지 않은가?"
"나는 테츠님이란 분을 찾아왔지 그대가 테츠님이 아니시지 않은가?"
엘빈은 잠시 생각했다.
그는 안하무인인 척하면서 테츠를 호칭할 때마다 님자를 깎듯이 부치는 것으로 보아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은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테츠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입니까?"
"저에게 스승과도 같은 분입니다. 우리 마교의 교주님이시기도 합니다."
"나는 칠무신의 첫째 사신왕 제럴드라고 합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혼자서 그런 호기를 부리시니 칠무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주님께서 칠무신과 무슨 인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번 풍신왕도 그렇고 이렇게 칠무신이 직접 왕림하시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교는 그리 간단히 오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엘빈이 사신왕 제럴드를 정면으로 보니 과연 칠무신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실제로 조금 전 메흘린이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란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느껴졌다.
사신왕 제럴드에서 뿜어지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마치 테츠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그 압도적 기세는 대단했다.
눈매는 시원하고 호랑이 눈 같았고 짙은 검은 눈썹과 잘 정돈된 시커먼 턱수염이 매우 잘 어울리는 잘생긴 중년의 미남자 상이었다. 다만 그의 얼굴에서 뿜어지는 기도는 정면으로 오래 바라보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으로 엘빈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칠무신이 맞는지 입만 살은 비렁뱅이인지 확인 절차가 좀 있어야 할 것이외다."
엘빈은 느끼고 있었다. 메흘린의 말처럼 이 자는 건드려서는 안 될 자란걸. 본능으로 느끼고 있지만 아무리 칠무신이라도 마교는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생각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천마행공으로 날아오른 엘빈은 제운종을 펼침과 동시에 은영마환장을 날렸다. 제운종의 내력과 은형마환장이 섞여 그 위력이 배가 되어 제럴드에게 떨어져 내렸다.
묵직한 암경이 떨어져 내리자 제럴드는 그 암경에 맞서 단순하게 오른손을 쭉 뻗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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