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움직여 볼까? 더 지켜 볼까?
메흘린은 오랜만에 좋은 차의 풍미를 즐겼다. 요즘 들어 혹독한 수련으로 만신이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에미르슨과 마테니는 쉬지 않았다.
무공은 마나 수련과 비교하면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이 매력에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당장 에미르슨만 봐도 그렇다. 그는 무공의 무자로 모르던 엘드리치 성주였다.
지금은 성주의 품위는 고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무공 연마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가장 늦게 배워 다른 사람을 따라가려면 배로 노력해야 한다고 먹는 것도 마다한 채 매달릴 정도였다.
마테니는 마테니 나름대로 이룩해야 할 목표가 있었기에 오늘도 쉼 없이 성벽을 따라 달리고 있다.
메흘린은 한 손으로 찻잔을 홀짝이며 한 손으로 그동안 쌓였던 정보원의 보고서를 일일이 검토했다.
"지켜보기만 하실 겁니까?"
"응? 무얼 말입니까?"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메흘린의 질문이 테츠가 뒤를 돌아봤다.
"오크 말입니다. 아칸 시티를 포위하기 직전이라고 하는군요."
"글쎄요. 성황의 성군도 모두 철수했다고 하는데 팬텀 가드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왕자가 저리되었는데 윌리엄 대공도 참 난처한 상황이지요."
다음 쪽지를 든 메흘린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이거 아칸에 보낸 정보원에게 온 보고인데 윌리엄 대공이 실권했다는군요."
테츠는 완전히 돌아서서 메흘린 맞은편에 앉았다.
"두 왕자도 오크의 볼모고 윌리엄 대공이 실권했다면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 누구입니까?"
"교주님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설마 시몰레이크 후작?"
"네 그 설마입니다."
"녀석 이제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는군요. 여기나 중원이나 음흉한 놈들은 지들이 등장할 시기를 귀신같이 안다니까요."
"성군의 철수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성황은 제후국의 일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음, 제후국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오크 때문이 아니었나요? 성군의 등장은 팬텀 가드너의 후계자 문제나 그쪽 정치와는 상관없이 오롯이 오크 퇴치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런 성군이 뒤로 빠진 것은 이제 오크도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겠지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시몰레이크 후작의 진정한 의도입니다. 그가 이제 실권을 장악했으니 어떤 일을 벌일지 그것이 신경 쓰이는군요. 시몰레이크 후작은 이 왕자인 리차드의 후견입니다. 솔직히 왕자의 난에서 리차드 왕자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시몰레이크 후작의 힘이 컸죠. 귀족 대부분이 이 왕자 편에 섰었으니까요."
"그럼 시몰레이크 후작이 리차드 왕자라도 구하려고 움직이지 않을까요?"
메흘린은 다른 쪽지 하나를 들고 흔들었다.
"그럴 일은 없어 보입니다. 전군 진군 명령을 본인이 직접 내렸다는군요."
"그럼 두 왕자를 버리는 수를 택한 것이네요. 윌리엄 대공도 실각시켰고 눈엣가시 같은 두 왕자도 공식적으로 처분할 명분이 섰으니···."
"이제 팬텀 가드너가는 마지막을 달리겠지요. 팬텀 가드너가의 충신들은 대부분 요전 사건으로 목숨을 잃어버렸습니다."
요전 사건이라는 말에 테츠는 움찔했다. 자신과 칠무신의 충돌 여파에 휩싸여 두 왕자의 최측근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자신이 정신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그 사건에 관여된 것은 사실이다.
칠무신에게 주변 사람의 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롯이 황태자인 테드를 지키고자 했으며 주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력을 일으켰다. 황태자에 비하면 이런 인간들 따위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아니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칠무신 그들은 주신 제국을 호령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다. 성황으로부터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의 존재 가치는 황태자 수호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솔직히 칠무신이 마음만 먹으면 나라 하나 정도는 우습게 엎어버릴 능력을 갖춘 괴물이다. 성황이 엄하게 다스리는 이유도 혹 그들이 딴마음을 품고 인간 역사에 개입할까 우려한 마음 때문이다. 그만큼 칠무신의 존재 자체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다.
솔직히 반신에 가까운 능력을 휘두르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힘을 개방했으니 근처 있던 인간들이 어떤 꼴을 당했던가? 그때 태성왕이 두 왕자를 구하지 않았다면 두 왕자 또한 주변 사람들과 같이 시체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을 것이다.
태성왕이 두 왕자를 구해 나뭇등걸에 잠시 기대 놓은 사이 오크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다만 오크가 어떻게 왕자의 신분을 알아보고 인질로 이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들지만 아마도 오크 수뇌부에 마지막 네크로맨서 몰레이그가 있으면 가능할 법도 한 이야기다.
메흘린은 마지막 쪽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테츠를 바라봤다.
"만약 두 왕자가 희생되어도 팬텀 가드너가가 멸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또 무슨 소리입니까?"
"로렌 일왕자에게는 일곱 살짜리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제시어스 왕자죠."
테츠는 메흘린의 속 깊은 눈빛을 보고 그의 냉철한 두뇌가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간혹 이처럼 메흘린의 두뇌는 무섭도록 빠르게 회전했다. 테츠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말이다. 그 능력을 높이 사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그때 그렇게 메흘린을 유혹한 것이다.
"제시어스 왕자를 지켜보면 시몰레이크 후작의 의중을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윌리엄 대공은 실각했고 두 왕자는 이미 죽음 목숨이고 이 난관을 극복하면 문제는 제시어스 왕자가 걸린다는 거지?"
"그렇죠. 윌리엄이 실각하고 두 왕자가 죽으면 다음 차례는 일곱 살짜리 제시어스 왕자가 되죠. 지금 시점에서 시몰레이크 후작은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제시어스 왕자를 앞세워 섭정 정치를 할 생각인지 아니면 후환거리를 미리 없애려고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선택지가 두 곳밖에 없을까? 그리고 어떻게 시몰레이크 후작이 삼십만 대군의 오크를 몰아낼까?"
"지금 진군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 총력전으로 나갈 겁니다. 문제는 윌리엄 대공처럼 타 세력을 끌어들이려 할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요른 성의 일만 마법사의 능력을 가늠해 볼 때 오크 십만 정도는 충분히 방어할 능력을 지닌 무서운 마법사 정예입니다."
"허, 고작 일만의 마법사로 오크를 십만이나 상대한다고? 조금 과장이 아닙니까?"
"전혀요. 그것도 넉넉하게 잡은 겁니다. 킹덤 오브 소서러스급의 마법사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연속으로 메테오 열 방을 오크 대군 위에 떨어뜨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음, 정말 무서운 것이 마법사들이구먼. 하지만 그들은 근접형 기사들에게는 힘도 못 쓰는 존재가 아니오."
"그러니 세상은 공평하지요. 아무리 마법사가 강해도 일단 기사가 근접으로 치고 들어오면 답이 잠깐 제가 왜 이런 유치한 말장난에···."
메흘린은 테츠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끔 교주님을 보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것처럼 진심으로 그리 보일 때가 있습니다."
테츠는 솔직히 가슴으로 움찔했다. 도대체 메흘린의 이 기믹은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트릭을 트릭이 아닌 것처럼 말해 버린다. 진실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포장도 잘하고 여간 눈치 빠른 친구가 아니다.
메흘린을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본심이고 어디까지가 배려인지 정말 구분하기 힘들다.
테츠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진작에 마법사들을 사용할 것이지 윌리엄 대공은 뭐가 아쉬워서 그 좋은 마법사들을 묶어 놓은 겁니까?"
"그것에는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 왕자의 경력과 왕자의 난으로 인한 형제간의 우애를 다시 다지는 계기로 삼는 것. 오크를 막아 낸다면 후계자로서의 명성과 함께 형제간의 우애도 모두 지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고 두 번째는 오크가 필요한 존재가 윌리엄의 뒤에서 조종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크가 필요한 존재라. 시몰레이크 후작 말고도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지금은 그럴 확률이 높죠. 시몰레이크 후작의 본심을 알지 못하는 이상."
테츠의 눈에 막 성벽 위를 뛰어넘는 마테니의 모습이 순간 잡혔다. 그는 어제보다 훨씬 빠르게 성을 한 바퀴 돌았다.
"교주님, 우리 마교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지 의용군 정도의 강력한 용병 단체를 만들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아니면?"
"새로운 왕국 건설이 목적입니까?"
"새로운 왕국이라···.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성군의 철수는 팬텀 가드너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시몰레이크 후작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정당한 왕위 계승에 의문점을 던질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테일리아드 가문도 로만 울프 가문도 함부로 병력을 제공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직접 팬텀 가드너 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단체는 오직 우리 마교뿐입니다. 만약 아칸 시티의 전쟁으로 오크와 팬텀 가드너가 양패구상하거나 어느 한쪽이 이기더라도 우리 마교의 상대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칠무신의 등장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죠. 우리 마교가 흔한 용병 집단이 아닌 성황과 관계된 의미 있는 집단이란 것입니다. 성군이 철수한 이유는 그 자리를 우리 마교가 충분히 맡을 수 있다는 복선이 깔렸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제 추론이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테츠는 순간 장심에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 올렸다가 깜짝 놀라 풀었다. 순간적으로 메흘린이 두렵게 느껴졌기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반응한 것이다.
"하하하. 반은 맞고 반을 틀렸습니다. 전 국가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될 상황도 아닙니다. 제가 마교를 세운 이유는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단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어느 나라도 감히 마교를 얕볼 수 없으며 자신이 마교 출신이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입니다."
메흘린도 그런 말을 듣고는 혼자 가는 미소를 띄웠다.
"사내는 자고로 야망이 커야 하는 법입니다. 메흘린 저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 마교 군사로서의 제 직언입니다."
"으하하, 재미있지 않습니까? 한 번 지켜봅시다. 운명이 우리를 어느 쪽으로 이끌지 말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겁니다. 하하하하."
그리고 얼마 뒤 엘드리치에 두 명의 방문객이 찾아 왔다. 한 명의 기사와 마법사였는데 두 사람 모두 여성이었다.
"손님이 오셨다고? 그것도 여기사에 여마법사? 이놈! 진작 알렸어야지."
오늘도 성벽을 돌던 마테니는 경비병의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황태자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된다. 자신의 책임이 그 여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외부 인물이 황태자를 찾아 왔다니 칠무신도 아닌 인물이.
마테니는 쏜살같이 접견실로 달려갔다. 그는 노크할 생각도 경황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마스터 무슨 일입니까?"
작전실에는 테츠와 처음 보는 여기사 한 명과 여 마법사 한 명이 갑자기 난입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테니 넌 갈수록 칠칠치 못하게 행동하느냐? 예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죄송합니다. 낯선 자들이 마스터를 만난다기에 그만."
"나는 사람을 만나면 안 되냐? 왜? 일일이 네 허락을 맡아야 하는 거냐?"
마테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애써 침착함을 찾으며 재빨리 테츠의 옆으로 가 섰다. 그것은 당연히 테츠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놈아. 그러지 않아도 괜찮으니 쓸데없는 경각심은 가질 필요가 없다."
테츠는 한 손에 서신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반마르스 황가의 인장이 박힌 두루마리였다.
테츠는 천천히 인장을 제거하고 서신을 읽어 나갔다.
마테니는 테츠가 왜 이상한 여우 가면을 쓰고 있는지 몰랐다. 황태자가 가면을 썼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알리기 싫다는 것이다. 더욱 긴장감이 팽배해져 마테니는 의식적으로 여기사를 쏘아보았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는 테츠는 여우 가면을 쓰고 있어 상대가 표정의 변화를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테츠의 가면 속 표정은 웃었다가 굳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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