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가족
가상 현실의 고인물
043화
찬 바람을 쐬고 있으니 점차 이성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점차 오늘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내일 해야 하는 것도 생각난다.
‘내일 뭔 할 일이 있던 것 같은데.’
근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분명히 내일 무언가 있었다.
달력, 달력을 보면 기억이 날 것이다.
나는 길거리 벤치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간다.
남 부럽지 않은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더 많이 돌아온다.
“아, 나 휴대폰 있지?”
생각해 보니 나는 휴대폰 달력에도 일정을 적어둔다.
“자, 어디 한 번 볼까?”
천천히 휴대폰 달력을 켰고 이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어머니 생신이구나.”
곧 기사 하나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한국을 빛낸 천재 피아니스트의 생일이라면서.
어머니가 보통 인싸도 아니고 현재 한국 피아니스트 관련 인맥을 많이 가지고 계시니깐.
사실상 어머니의 생신은 한국의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모이는 자리이다.
“가야, 하는데.”
생각해 보면 형 생일도 안 챙겼는데 나를 불러줄 지도 의문이다.
나는 집안에 들어와 좋지 않은 기분을 풀 겸 여러 악기를 모아둔 창고에 들어간다.
‘다 너무 안 쳤는데.’
그중 눈에 띄는 기타를 든 후 몸에 맡긴 후 움직인다.
기타의 소리는 아름답게 울려 퍼졌고 나는 그렇게 이웃의 항의를 들을 수 있었다.
* * *
한 검은 머리의 여인은 오랜만에 돌아온 집 한가운데에 있는 피아노 앞에 선다.
“막내는 오늘 안 올려나?”
“형 생일도 안 챙겼잖아요. 안 오지 않을까요?”
첫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가만히 턱을 괴고 있다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내가 데리러 갈게. 어차피 집 내가 사준 건데.”
“뭐, 나쁘지 않네요.”
그들의 대화에 피아노 앞에 앉은 여인은 분노를 표출하며 크게 소리친다.
“왜 내 피아노 연주에는 관심이 없는 거지?”
“넌 알아서 잘 하니깐?”
어머니의 핏줄임을 뚜렷하게 알리듯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동생에게 굳이 무슨 관심을 줘야 하겠는가.
그냥 BGM 깔듯이 그냥 들으면 되는 것이지.
“어후, 너 아직도 그 습관 못 고쳤니?”
그리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타박하는 전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노년의 남성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첫째를 바라본 후 말한다.
“슬슬 사업을 물려줄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지?”
“아빠, 언제든지 말하세요. 솔직히 지금도 제가 다 하고 있잖아요.”
“그건 맞지.”
물론 그가 흠잡을 것 없이 너무 잘하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는 것이지만 그는 가볍게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잔을 부딪친다.
그런 그들의 귀에는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참새가 짖었고 평화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물론 약간 평화롭지 않을 수 있다.
“이제 가야지?”
당연하게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첫째 형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종철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천천히 몸을 빼며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도망친다.
아 제기랄.
한 가정을 유기체 생각하는 우리 가족을 생각했어야 한다.
한 명의 생일에 축하 메시지 하나도 없으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한다.
‘근데 어떻게 상상하냐고.’
단 한 번도 생일 축하 없이 잠적한 사람이 없는데.
그 와중에 화나게 톡은 울린다.
(병)신종철 – ㅎㅎ, 나 먼저 감
(병)신종철 – 아, 그리고 오늘 합방은 못 온다고 말해줄게.
나는 종철의 톡을 보며 티나지 않게 잇몸을 깨물었고 그런 내 표정을 꿰뚫어 본 형은 나를 향해 말한다.
“왜, 내가 친히 데리러 온 것이 그리 좋지 않니?”
“아뇨, 좋습니다.”
네 다 좋아요.
감히 우리 집 월세부터 여러 가지를 내주는 물주를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싫어도 억지로 좋은 척해야지.
그렇게 나 또한 축제장으로 출발한다.
* * *
첫째 형은 내 말에 피식피식 웃으며 묻는다.
“아 그래서 잠수 탄 거야?”
마치 귀엽다듯이 그렇게 말했고 나는 시선을 피한다.
“뭐, 대기업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지.”
그럴 수 없는데요.
인생 개 씹창 났는데 종철과 더 헌터 덕분에 조금 더 억지로 잡고 올린 건데요?
거기에 인플루언서 특성상 평생 유명할 수 없다.
언제가 나도 떨어지게 될 것이고 유명세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실력만 있으면 어느 정도 존중받는 셋째 형의 세계와는 다르다.
아무런 말 없이 침묵에 빠진 그때 누군가 전화를 하여 자동차 전체에 울리기 시작한다.
“응, 엄마.”
[ 건우 데려오고 있니? ]
“어 곧 도착해.”
[ 그래, 그럼 조심히 오고. ]
“응. 사랑해.”
[ 어 나도. ]
너무 사이가 좋다.
뭐, 모자 관계 좋은 건 나쁘지 않다.
근데 이들에게는 낯부끄럽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 = 사랑.
이것이 두뇌에 박혀 있어서 언제 한 번 고등학교 끝나고 집 가는데 우리 애기 데리러 왔다고 해서 놀림 받은 적이 있다.
누나, 형 가릴 것 없이 모두 이래서 언제는 우리 누나가 데리러 왔을 때 너 연상 좋아하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니깐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고 뜨는 순간 나는 축제장에 도착해 있었다.
* * *
축제장 한가운데에는 피아노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한 소녀가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들리는 노래는,
‘소나티네네.’
아마 엄마 지인 중 한 명이 제자 소개를 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모든 다툼을 카드로 하는 유희왕 세계관처럼 피아니스트의 세계관에는 모든 다툼을 피아노로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닌데 해결할 수만 있다면 무조건 피아노로 한다.
‘오, 진짜 잘한다.’
어린 나이의 소녀라 그런지 그리 어려운 곡은 아니지만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피아노를 엄청 잘 치지는 않지만 살면서 형누나들, 거기에 엄마 때문에 수천 곡을 수천 번 들었다.
적어도 듣는 귀는 확실하다 할 수 있었다.
“아버지!”
첫째 형은 몇 살을 먹었는데도 빨리 뛰어나가며 아버지에게 빨리 달려간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벌써 칠십이 다 넘었다.
엄마는 이제 곧 칠십 넘어갈 것이고.
진짜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친목을 잘 다져둔 것일까.
“네 엄마가 신기하냐?”
아버지는 그런 내 옆에 와서 그렇게 물었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실제 있던 일을 다시 한번 입밖에 꺼낸다.
“네 엄마가 그리 유명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던 음악학교와 같은 것의 문을 연 사람이다.”
한국이 다 망해있을 때 엄마는 홀로 피아노 앞에 서서 망한 한국의 이름을 힘차게 알렸다.
엄마가 유명해지고 나서 정상급 피아니스트가 되고 나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은 채 여러 인재를 양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재들은 현재 교수진일 것이다.
그녀가 한참 활동할 때 태어난 천재들이지만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천천히 와인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고 이틀 연속으로 마시는 술에 속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가족의 온기 속에서 술을 더 많이 마신다.
‘외롭게 지내기는 했지.’
종철이가 자주 와준 덕분에 요즘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대기업에 한참 다니던 때만 해도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하핫, 이윤설 피아니스트 님의 동생 분이신가요?”
“아, 반갑습니다.”
나는 가끔 오는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여러 생각을 한다.
‘천재, 천재라.’
일단 첫째 형은 공부도 진짜 잘하는데 경영을 미친 듯이 잘한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영까지 잘하는 것은 아니다.
공부와 피아노, 거기에 창의력을 이용하는 직업까지.
우리 가족은 진짜 엘리트 핏줄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나는.
만일 내가 칠백 년 전에 태어났으면 우리 가족 중 가장 엘리트였겠지.
일단 잘 싸우니깐.
‘쓸데없는 생각이다.’
축제니깐 즐기고 그냥 돌아가자.
나는 그렇게 생각을 고친 후 아무런 생각 없이 오는 사람을 맞이하며 거짓된 미소를 지어주기도 한다.
피곤해도 괜히 윤설 누나나 엄마한테 폐 끼치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런 내 옆에 한 꼬맹이가 다가와 바지를 잡아당긴다.
“오빠,”
“응? 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화답했다.
절대 서른 살 먹었는데도 오빠라 불러준 것이 너무 기뻤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오빠는 왜 피아노 안 쳐?”
아, 현재 사람들이 모여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하는 협주곡부터 피아노 독주곡까지 여러 곡을 치고 있었다.
내 피아노 실력이 절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저런 천재들 사이에 끼기에는 현저히 부족하다.
“부족해서.”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지금 자세히 보니 아까 소나티네를 치던 꼬맹이였다.
“응.”
“오빠 손은 내 손과 다르게 길어.”
“응?”
“옛날에는 손마디를 잘라서 억지로 길게 만들 정도로 피아노 칠 때 손가락 길이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들었어.”
“길다고 다 잘 치는 건 아닌걸?”
“그래도 유리하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가락 길이를 가져가고 싶다고 말한다.
확실히 피아노 칠 때 손가락 길이가 중요하기는 하다.
그리고 이 친구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내가 엄마네 아들인 것을 아는 모양이다.
이렇게 말하니깐 좀 이상하기는 한데 아무튼 그런 모양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않겠는가.
“난, 재능이 없어서 안 했어.”
“나도 재능 없어. 새벽까지 피아노 쳐.”
이건 좀 아동 폭력 아닌가?
나는 당황한 듯 눈을 떴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저기도 나처럼 다 노력했어. 그러니깐 천재성이 꽃 피우는 거지.”
“흠, 그런가?”
나는 그렇게 가볍게 읊조리고는 이어 형누나들을 떠올린다.
일단 첫째 형은 그냥 천재다.
내가 뭘 못하는 꼴을 본 적 없다.
근데 누나 계열은 좀 다른데.
공부에 재능이 있다기보다 공부를 즐긴다.
틀려도 웃으면서 한다.
이게 재능이기도 한데 아무튼 그렇다.
‘생각해 보면 꼭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네.’
물론 이런 예체능 쪽은 재능이 있어야 유리하지만 우리 첫째 형이랑 윤설 누나 빼고 그리 재능이 있던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지 셋째 형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
아니 이쪽은 반드시 있다.
나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나오지 않는 글을 금방 술술 적어내니깐.
오천 자 기준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뭐, 그래도 얘 때문에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네.’
어떻게 보면 너는 노력 안 해서 그 모양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해석할 필요 없다.
어린 나이를 지녔으며 굳이 그런 식으로 왜곡해서 들으면 너무 인생이 슬프지 않은가.
“지금은 안 되겠네. 나중에 쳐야 할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말해준 후 오랜만에 피아노 악보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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