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네스 건국사 - 18
강철 거인과 노기사의 싸움이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 때, 볼다르 시를 앞둔 벌판에서 움직이는 것은 어떻게든 상대를 끝장내려는 베르그너 경과 이에 맞서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도 끝끝내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자작군 마장기 뿐이었다.
베르그너 경의 마장기가 빠르게 상대를 마무리하기위해 방패까지 버리고 거검을 휘둘렀지만 두꺼운 외장갑에 보호받으며 바닥을 구르는 마장기의 조종석을 베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자작군 마장기는 땅바닥을 구르며 피하다 얼떨결에 베르그너 경에게 매달려버렸다.
두 강철 거인들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까지만해도 온갖 화려한 문양으로 도색이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거대한 몸 위로 흙으로 도배를 마친 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두 마장기가 엉겨붙어 또다시 뒹굴어대니 그 흉하고 추함이 이루말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하여 제법 거리를 두고서 벌어지는 전투는 흉험하기 짝이 없었다.
아그네스 경은 외장갑의 이곳저곳이 찢어지고 터져나가며 내부 골격까지 드러난 마장기를 향해 쉼없이 공격을 가했다.
손에 쥔 무기가 부서지면 미리 준비한 다른 무기를 쥐고서 달려들어 상처입은 사냥감의 약점을 노렸다.
쉴새없이 휘둘러지는 공격은 갈수록 점점 더 강맹해져만 갔다.
노기사가 무기를 쥐는 순간부터 돋아나기 시작하는 새파란 오러 블레이드는 치명적인 독니가 되어 상처입은 사냥감의 피륙을 거침없이 찢어발긴다.
점점 걸레짝이 되어가는 마장기는 사력을 다해 두 다리만을 지켜낼 뿐이었다.
마장기의 오너가 다리마저 잃어버리면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잘 알고 있는듯 했다.
강철 거인에 비하면 한없이 자그마한 인간들은 모두 가까운 곳의 전투를 외면하고서 마장기와 인간의, 세상에 다시없을 싸움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모두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이번 영지전의 향방을 가르게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뭇 기사들은 한계를 벗어난 시력으로 노기사의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기위해서 집중했고, 병사들은 멀리서도 확연한 존재감을 피력하는 마장기의 움직임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마다의 소망을 담은 병사들의 눈빛은 뜨거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충혈된 두 눈을 부릎뜨고 주먹을 꾸욱 쥔 채로 싸움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않는 소년 기사도 있었다.
" 대장... "
시브리오와 하임러가 곁으로 다가와 그를 불렀지만 제라드는 부하들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살은 쏘아졌다.
이제 제라드에게 남은 몫은 마스터의 마지막 모습을 두눈에 담아 간직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이별을 단 한번도 원한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간 아그네스 경으로부터 수련을 받아온 제라드는 무맥에서 전수하는 이론 교육만큼은 이미 전수가 끝난 상태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지금 아그네스 경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짐작하며 타들어가는 속을 주체하지 못했다.
마장기와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아그네스 경의 얼굴 가득하던 주름진 피부가 점점 펴지더니 탄력을 받아 팽팽해져가고, 하얗게 세어버렸던 머리카락은 점점 더 윤기를 머금은 갈색을 비치고 있다.
두눈에 보이는 것은 경지에 올라서는 기사가 맞이하는 위대한 순간이건만, 그에 숨겨진 사실은 잔혹했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기뻐할 일이지만 아그네스 경에게는 피할 수없는 파국이 찾아오고 있음에 다름없는 일이다.
늙고 병든 본신의 생명력이 고갈되는만큼, 노기사의 육신은 외부의 기운을 끌어와 망가진 육체를 탈바꿈시키려는 압박이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한차례 오러 코어가 심각하게 망가졌던 아그네스 경이 다시 바디체인지를 위한 과정에 진입하면 남는 결과는 하나 뿐.
1초가 한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 지나간다.
그렇게 길지않은 시간이 흘렀을 때 파탄은 이미 근접해 있었다.
그저 경탄의 시선으로 우러러보는 이들과 달리 우려의 시선을 보내던 제라드가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필연이었다.
그는 일방적 공격과 필사의 방어를 거듭하던 싸움의 흐름이 비틀리기 직전, 가장 먼저 움직였다.
" 제라드 경!? "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온 이름모를 기사의 부름에도 그는 대꾸할 새가 없었다.
낯선 호칭을 뒤로한 제라드는 곧장 자신의 애마에게 달려가 올라타며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쫘아악-
평소의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흉악한 채찍질에 놀란 애마가 고통을 이기지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앞발까지 들어올리며 반항했지만 이는 더 큰 폭력을 부를 뿐이었다.
" 달려! 달리란 말이야! "
퍽-
재차 주먹이 휘둘러지기 전, 고통에 못이긴 말은 곧장 전력을 다한 뜀박질을 시작했다.
히히힝-
말은 자신이 낼수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어쩌면 고통에 한계를 넘어선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 제발, 시간이 닿기를. '
제라드에게는 아그네스 경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느덧 젊은 청년의 모습에 가까워진 아그네스 경은 부러진 도끼를 내던진 다음 마지막 남은 롱소드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는 기운의 집중.
아그네스 경의 오러 코어를 잔뜩 달구던 기운들은 롱소드로 빠져나가 날에 맺히며 진동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곧이어 기음이 뒤따른다.
파삭-
파사삭-
그렇게 검날을 따라 돋아난 오러는 한층 더 압축되며 푸른 오러의 색이 변해갔다.
투명한 하늘빛이 새파란 바다의 색으로.
그 이후에는 밤하늘의 색이, 종국에는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었다.
마침내 강철 소재로 제작된 검날은 어둠에 잡아먹혀 자취를 감췄다.
그리하여 드러나는 것은 새카맣게 물들어 짙은 어둠을 주위로 뿌리는 검.
먼 옛날, 신화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용종의 숨통을 끊기위해 고련을 거듭하던 아그네스 경의 선조는 깨달았다.
신화의 존재를 베어내려면 자신 또한 신화의 반열에 올라서야만 한다는 것을.
그러나 이는 인간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었다.
신화의 반열이란 수없이 많은 성질을 품고있는 기운들을 합일하여 하나로 만들어내야만 이룩할수 있는 경지였다.
그렇기에 대륙의 역사에는 마스터 이상의 존재가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편법이 존재했음이다.
아그네스 경의 선조는 그 편법을 사용하여 신화룡과 대적하였으며 결국에는 숨통까지 끊어내는데 성공했다.
또한 편법은 대를이어 전해져 내려와 아그네스 경에게까지 이어졌다.
육신을 여과기로 삼아 기운을 단한가지 속성만을 남긴다.
그러한 과정의 끝에 영혼으로 벼려내어 탄생하는 검.
마검을 손에 쥔자는 잠시나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게된다.
실전되었던 영혼마검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세상에 현신했다.
이것이야말로 아그네스 경이 제라드에게 남길 수 있는 최선의 베품일 것이다.
마검을 구현해낸 순간, 아그네스 경은 짙은 고양감에 휩싸였다.
긴시간 고장난 육신에 갖혀있던 그의 령이 사방으로 몸집을 불리고 존재감을 확대해나가며 참을 수없는 쾌감을 선사했다.
아그네스 경은 그 속에서도 마지막 갈구하던 단서를 찾아 쾌감의 파도를 헤쳐나간 끝에 원하던 깨달음을 쟁취하는데에 성공했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이 생겨났다.
' 나는 틀렸다. 하지만 바른 길을 찾아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
아주 짧은시간 제라드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안심했다.
먼 미래의 제라드가 벽에 막혀있을 언젠가, 이 순간이 깨달음의 단초가 되어 제라드에게로 전해지리라 의심치않은 아그네스 경은 마침내 영혼마검을 휘둘렀다.
파파팟-
영혼마검은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부서져 사방으로 어둠의 줄기들을 비산시켰다.
그렇게 파편화되어 사방으로 비산하는 어둠의 조각들이 간신히 숨만쉬는 상태이던 마장기를 덮쳐갔다.
쯔거거거거거걱-
쏴아아아아아-
" 도련님,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생각입니까? "
10월의 중순이 지난 어느날의 아침.
아드리안 마탑 도시에는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점점 추워지는 계절에 내리는 굵은 소나기는 여행객들의 발을 붙들어놓는다.
그리고 이 추운 날씨에 방의 창문을 열고 걸터앉아 거리를 내려다보는 것은 주변인들에게 큰 민폐였다.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은 싸늘했고, 들이치는 빗줄기는 이미 도련님의 전신을 흠뻑 적시고서도 모자라 방안을 물바다로 만들어놓는 중이었다.
스카는 자신이 조금 불편한 것을 부디 도련님께서 알아주기를 바랐다.
'스카'는 아인델 왕국을 기준으로 북쪽 국경을 넘어서 존재하는 아드리안 마탑도시까지 도련님을 안내하면서 꽤나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길잡이 역할에다 가끔 나타나는 짐승들을 처리하기도 했고, 욕심에 눈이 뒤집힌 강도 떼들을 장사지내주기도 했다
적잖은 수고가 필요했던 일들이 전부 스카의 몫이었다.
하지만 불평할 수는 없었다.
이 베테랑 용병 겸 도적은 제 부하들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서 자신이 지리를 제법 안다는 이유에서 살아남았음을 알았을 때, 스카는 어린시절 가출하여 이곳저곳 떠도는 삶을 보냈던 스스로의 과거에 찬사를 보냈다.
그 덕분에 사신을 만나고서도 살아남았으니 찬사쯤은 두번도 더 보내줄수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스카의 생각과 경계심도 여정이 길어지면서 슬슬 무뎌져가고 있었다.
어느샌가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는 이 도련님이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스카는 자신이 슬쩍슬쩍 도련님의 심기를 위험한 곳까지 침범하고 있음을 몰랐다.
제 목숨이 귀한 줄은 아는 스카였지만 한동안 위협이 없다보니 마음이 풀어져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불안한 시선을 좀처럼 떼놓지 못하는 것은 세실이었다.
이 눈치빠른 하녀는 제깍 새로운 주인의 성향을 알아채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세실이 자신의 빠른 눈치로 파악한 결과, 현재의 도련님은 굉장히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있었다.
저 차가운 표정 아래에는 끓어오르는 분노의 기운이 역력한데 어찌 이리도 눈치가 없을 수가 있는지.
' 도대체 저 산적놈은 어떻게 저리 모를수가 있는거지? '
세실은 잠시간 갈팡질팡했다.
따로 데리고 나가서 말해주는게 좋을까?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주기에는 긴 여정동안에 스카가 세실을 대우하는 방식이 너무 거칠었다.
매번 그녀를 짐덩이 취급하면서 도련님 몰래 눈을 부라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하니 세실의 눈에 스카가 곱게 보일수가 없다.
하지만 결국 세실은 두눈을 질끈 감고서 스카에게 주의를 주기로 했다.
그냥 가만히 있기에는 터져 나올지도 모르는 새주인의 분노가 너무도 두려웠던 것이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되면 세실까지 덤터기를 쓸지도 모른다.
끼익-
방문이 열렸다 닫히고, 그 너머에서는 소리죽인 대화가 오갔다.
- 어, 뭐... 그게 정말이야?
작은 소곤거림의 끝에는 방에서 멀어지는 숨죽인 발걸음 소리들만이 남았다.
베일은 그제서야 누구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쥐고있던 손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스카는 운이 좋은 녀석이다.
매번 세실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목이 달아나고 말았을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을 보아하면 악운에 꽤 강한 인간일지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베일의 얼굴이 살짝 풀리며 그간 숨기고 있었던 감정의 일부가 새어나왔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가문의 지시에 따라 이곳에 도착하여 임무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베일은 기분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기분나쁜 가문을 떠나 가벼운 여행길을 즐기는 것도 좋고, 따질 것없이 모가지를 날려도 되는 녀석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그러다 어찌어찌 받아들인 스카라는 녀석은 살짝 거슬리는 감이 있기는 했지만 유쾌한 구석도 있는 놈이었다.
더하여 새로 받아들인 하녀는 싹싹하게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을 알았다.
이렇게 최근들어 긍정적이던 기분은 그림자 기사단에게 내려온 임무 대상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변하지 않았다.
대상의 정체가 살짝 놀랍긴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씨만 뿌리고 도망친 인간에 불과한데 이제까지 감정따위가 남아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왜.
어째서 지금 자신의 기분은 이리도 더러워져만가고 있는 것일까?
솨아아아-
베일의 며칠에 걸친 오랜 기다림이 결실을 맺었다.
그의 눈은 뿌연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일련의 무리를 잡아냈고, 그 안에서도 앳된 얼굴의 소년에게 고정되었다.
저 소년이야말로 베일이 임무가 끝났음에도 아드리안 마탑 도시에 남아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굳이 베일 자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가문으로 복귀하여 보고만 올리면 따로 이런 일에 특화되어 있는 인재가 파견이 될테니까.
그의 머리속에서는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보고 한다, 하지 않는다.
보고 한다, 하지 않는다.
균형을 찾을줄 모르는 저울추에 베일의 심신이 지쳐갈 때였다.
덜컹.
한 여관의 문이 열리더니 조그마한 몸집의 소녀가 튀어나와서는 베일이 쳐다보던 소년에게 안겨들었다.
그러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소년에게 묻는게 아닌가.
" 오빠! 할아부지는 어딨어? "
동시에, 베일의 머리속 저울도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대륙력 1364년 10월의 초일.
불상등급 마장기 1기 대파, 1기 소실.
템릿 자작가 소속 마장기 1기 반파.
전력의 열세를 인정한 템릿 자작이 이오닌 백작에게 항복의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마라두스 공국 남부방면, 마이네 산맥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영지전은 종료.
공왕의 명을 대변하는 근위기사가 항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던 이오닌 백작을 겁박하여 억지로 영지전을 마무리지었다는 소문이 존재하지만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할수있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음.
- 작가의말
선작, 추천,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제정신이 아니다보니 이편은 수정하게될지도 몰르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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