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콜라 캔을 든 채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돌이 된 건가?
손가락 끝에 동상에 걸린 듯 아린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쥐가 나는 느낌...
이렇게 이 자세 그대로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지?
“야!”
유나의 절박한 목소리에도 기민과 기찬은 돌아보지 않았다.
“야아아아아!”
“맞다! 땡!”
기찬의 짧은 한마디에 툭 하고 캔 콜라가 바닥에 떨어지고 유나의 몸이 녹듯이 풀렸다.
다행인지 큰 통증 없이 아주 깔끔하게.
“지금 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콜라 캔이 바닥을 떼구루루 구르다가 저만치에서 사라졌다.
“너 혹시”
유나가 기찬에게 다가섰다.
기찬의 능글능글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잘생긴 놈이 쫄지도 않아’
유나 속의 생각은 전혀 모르겠지?
하며 입을 떼려는 순간
"쫄지 않지. 겨우 너한테”
“야! 뭐? 겨우?”
순간 현타가 왔다.
쟤는 지난번부터 속을 다 읽는 것처럼 말한다.
유나는 멀끔하게 생긴 기찬을 다시 쳐다봤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기찬의 눈빛에서 뭔가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설마.... 혹시..
“너 어떻게 알았어?”
“뭐가?”
“그러니까”
“뭘?”
유나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시... 조상님이 귓가에서 막 뭘 알려주시고 그러는 거야?”
“아니야.”
들을 가치도 없다는 목소리였다.
아니라고 하니 더 의심스러웠다.
“맞구나!”
“너는”
기찬이 욱하려는 순간 기민이가 막아섰다.
“그만. 지금 장난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장난? 진짜 장난하나? 난 진지했는데...' 유나는 억울함을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래그래. 너는 진지하게 얘기한 거야. 알았으니까 일단 여기 좀 앉아봐.”
기민이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뭐지? 세트로 독심술인가? 이건 뭐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는 거야?
그럼...
‘쭈그리고 앉는 거 힘든데 의자 없나?’
유나는 가능한 집중해서 속으로 말했다.
사실 다리가 아프기도 했고 영 꾸민 말은 아니었다.
“우리 유나 다리 아프구나!”
역시 들었어.
생각과 동시에 기민의 손가락이 탁! 하고 쳐지자 인도에 덩그러니 의자가 놓였다.
딱 하나만!
뭐야? 지금 뻘쭘하게 나 혼자 앉으라고?
하자 역시 바로. 기민의 엄지와 검지가 다시 만났다.
이건 뭐 인도에 포장마차도 아니고 의자 세 개가 쪼르르 놓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민폐, 그 자체였다.
‘이 땡볕에 지나가는 사람들 길 막고 무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이거 아니지...’
“아! 그럼 어쩌라고?”
기민이 욱하자 유나는 더 욱했다.
“어쩌라고? 난 뭐 생각도 못 하냐?”
“생각? 할 수 있지.”
기민이 의자에 앉으며 수긍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유나도 따라 앉자 기찬도 나란히 앉았다..
셋이 이렇게 길을 막고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칫하고 나이 드신 분은 호통까지 치셨다.
“왜 길을 막고 이러고 있어?”
“죄송합니다.”
기민이 벌떡 일어났다.
“이건 아닌 거 같아”
좀 조용한 데로 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주변에서 ‘짹짹짹’ 새소리가 났다.
“새?”
시원한 바람에 기민의 단발머리가 훅하고 날리며 얼굴을 덮었다.
“바람?”
녹색의 싱그러움이 어느새 주변을 물들이고 좀 전까지 길가에 한 줄로 놓여있던 의자가 커다란 나무 사이에 사이좋은 모습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여기 어디야?”
유나의 목소리마저 몽롱했다.
또 최면에 걸린 건가?
‘깨어나자! 깨어나자!’
오늘 하루 종일 이상한 일만 생기는 게 일진이 안 좋던지 유나 몸이 안 좋던지 둘 중 하나였다.
유나는 자신의 몸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몸 보신을 해야겠어. 엄마한테 백숙이라도 끓여달라고 해야 할까 봐...”
“걱정하지 마. 누가 봐도 지금 아~주 건강해.”
“아니, 그럼, 이게 다 무슨 일인데?”
“내 말이”
“응?”
기찬이 유나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왜?
유나의 마음속 의문에 어김없이 대답해 줬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아! 응”
뭐 이젠 익숙하다. 해탈했다고 해야 할까? 그래 내 속이 네 속이고 네 속도 네 속이다.
“이상한 말 좀 그만하고 앉아봐.”
“그래, 어차피 속으로 하나 입으로 하나 알아듣기는 매한가지”
“앉아!”
“네”
유나가 얌전히 자리에 앉자 기민이 입을 열었다.
“이게 밖에서는 안되거든.”
“이건 뭐고, 밖은 어디 밖이라는 거야?”
기찬이 유나를 쳐다봤다. 멍청이라고 눈으로 말하면서
“아니, 물어볼 수도 있지.”
“밖은 웨딩홀 밖을 말하는 거고. 이건 우리 능력을 말하는 거야.”
“뭔 소리야? 능력은 또 뭔데?”
“지금! 여기! 있다는 게! 바로 우리 능력이야.”
유나는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식장에서 몇 번 가봐서 그런지 이런 곳에 갑자기 떨어진 게 뭐 막 소름 끼치게 놀랍고 그러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여기가 어딘데?”
“조용한 곳”
“조용하긴 하다. 새소리도 나고 나무도 많고, 바람도 불고”
기민이가 정말 신기한 동물을 보듯이 유나를 쳐다봤다.
“놀랍진 않고?”
“조금”
“조금?”
기민의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어떻게 이런 것을 조금이라고 할 수 있어? 넌 뭐 할 줄 아는 거 있어?”
“없어. 그런데 이렇게 장소 이동하고 그런 거가 막 아주 뭐 그렇게 대단한 느낌이 안 들어서.”
“그럼 뭐가 대단한데?”
“뭐, 돈다발이라든지. 복권이라든지. 뭐 그런 짭짤한 느낌이 드는 게 있어야지. 이렇게 맹숭맹숭 뭐 그래서는...”
“이야~ 이거 완전 날강도인데?”
기민의 경멸에 찬 목소리에 살짝 찔리기는 했지만 뭐, 이렇게 해서 뭐라도 좀 '돈다발' 이라든지 뭐, 그러면 뭐 잠깐 기분 나빠도 괜찮지 않나 하는 그런 계산이 다 서 있었다.
“아니 뭐”
“자! 여기!”
기민의 손에 돈다발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녹색의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햇살에 돈다발은 무엇보다 돋보였다.
“줄까?”
내밀어진 돈다발에 양손을 벌리고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까?”
기민이 돈다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장난해? 장난하냐고?”
유나가 채가려고 손을 뻗치자 기민이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까치발을 하고 어떻게든 잡으려고 손을 뻗쳤지만 기민의 가슴팍 정도에 오는 유나의 키로는 무리였다.
기민의 손짓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유나가 포기하고 자리에 앉자 기민이 돈다발을 힘껏 집어던졌다.
“야!”
유나의 단전에서 짐승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너 이~!!!”
“잘 봐봐”
기찬이 차분하게 말했다.
“뭐? 뭘 봐?”
하던 유나가 하늘로 날아가던 돈다발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바라봤다. 멍하니
“왜 저래?”
울먹이는 유나의 등을 두드리며 기민이 위로했다.
“이게 우리 한계야.”
“우리가 뭔데?”
“에리다누스인”
“뭔 인?”
기민은 포기한 듯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설명했다.
“지구에서 같이 살아왔지만 인간이 알지 못하는 존재.”
“뭔 소리야?”
“우리가 살아온 곳은 지구 깊숙한 지하에 있어. 지금은 돌아가도 어둠뿐이지만.”
“지하 세계면 지옥? 너네 지옥에서 온 거야?”
유나를 이해시킨다는 것은 기민과 기찬 둘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그러니까 죽은 인간의 영혼을 보내준다는 건 너네가 저승사자라는 거 아냐?”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는 에리다누스에서 온 에리다누스인이라고.”
“그게 그거 아냐?”
“그래. 그래. 그렇다고 쳐.”
더이상은 무리였다.
“근데 돈다발은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뭐 들었어?”
기민의 인내도 끝에 달한 듯하다.
“마법이 안 먹힌다고”
“아까 됐잖아.”
“그러니까 왜 됐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있으면 된다고.”
이제는 서로 싸우자는 거다.
“근데 왜 사라져?”
“나도 모르겠다고.”
“그게 뭐야?”
“아, 나 그냥 갈래.”
“그냥 가면 어떡해? 일은?”
등을 돌린 기찬이 다시 돌아봤다.
“맞다! 서리 성질 장난 아닌데.”
셋이 동시에 일어서는데 유나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내 돈은 사라진 거야? 정말?”
“그게 왜 네 돈이야. 진짜”
“쏘리”
“가자!”
기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셋이 있는 곳은 더 이상 숲속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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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벽면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랑 신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하얀색으로 맞춤한 가구, 거실 창에 드리워진 하늘거리는 시폰 커튼과 아기자기한 소품들. 모든 게 새것인 아파트 안에 셋이 신발 신은 발 그대로 서 있었다.
“누, 누구세요?”
하얀 소파에서 고개를 든 여자의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 건지 뜬 건지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마법 웨딩홀에서 왔습니다.”
“집으로요?”
“아, 문 앞으로 온다는 게 실수로.”
“그게 무슨...”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민의 말에 셋은 아파트 문 앞에 다시 섰다. 인터폰을 누르자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세요?”
기민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마법 웨딩홀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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