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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몽환의 역

본 베히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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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토
작품등록일 :
2016.12.27 22:52
최근연재일 :
2017.02.21 12:09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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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2
추천수 :
326
글자수 :
174,063

작성
17.01.1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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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6. 기울어짐

DUMMY

"다, 다시 한 번. 큐어(Cure)."


코 앞에서 아연실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힘이 빠진 것이 이럴리 없다는 것 같다.


다시 눈을 떠보니 빛이 상처를 쓰다듬고 있었다. 정말 그 뿐이었다. 내부까지 비춰야 할 신의 은사가 어깨 바깥을 맴돌 뿐이었다.


계속 시도하는 에버리스가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소용없어. 나에게 너의 기술은 먹히지 않아."


당황해 하는 에버리스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빛이 힘없이 꺼지는 것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아직 제대로 안 돌아온 걸 거야, 다시 한 번 해보..."


"먹히지 않아. 애초에 대상을 찾을 수 없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대상을 찾을 수 없다니?"


"그거, 모험가에게만 적용되는 기술이니까."


플루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에버리스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난 모험가가 아니야. 썩을 제국놈들 중 하나지."


그 말과 함께 플루토는 등을 휙 돌렸다.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졌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무겁다. 점차 데워져야 했을 오전 공기가 오늘따라 서늘하기만 하다.


다음 마을로 향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등에 매고 있던 포대를 열었다. 손으로 몇 번 뒤적여 원형의 나침반을 꺼냈다. 몹시나 낡고 추하게 생긴 나침반이었다.


플루토는 오랫동안 나침반을 쳐다봤다. 타성에 젖은 마냥 가는 눈초리로 내려봤다.


극단적인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당장 바닥에 쳐박아 버렸다. 청명한 유리 깨지는 소리도 모자라, 폭력적인 짓밟기에 섬뜩한 소리로 박살났다.


오싹한 기운에 훽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여기서 멈춘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텐데?-


무너진 잔해 속에서 낮게 들려오는 음성. 도돌이표 치는 메아리가 귀 깊숙히 박혀 왔다.


플루토는 포대에서 랜스를 사납게 잡아뺏다. 미지의 적에 대한 공포에 이빨을 까득 씹었다.


뒤 따라오던 에버리스가 놀라 경직되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음성이 들려오는 쪽을 노려봤다.


"나와. 그런 곳에 숨어있지 말고."


-너에게 목적이 있듯이 나에게도 목적이 있다. 그리고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너와 나 둘에게 모두 이로운 길이야.-


"알아들을 말을 해라. 정체도 모를 놈의 말을 믿을 거 같냐?"


-지금까지 지켜봐왔다. 네 놈이 하는 짓을. 언제나 네 뒤에 있었지만 네 놈이 날 보지 못한거야.-


플루토는 휘둥그레 커지려는 눈동자를 힘껏 막았다. 지금껏 있던 미행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불찰도 이런 불찰이 없다.


그런 심정을 꿰뚫었는지, 음성이 중저음으로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난 너를 쫓고 있는 녀석들과는 다른 목적을 가졌으니, 낄낄.-


기분 나쁜 웃음소리에 플루토는 멍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과 똑같이 난 너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지. 조력자는 더더욱 아니고. 그저 관망자일 뿐. 신처럼.-


"너 같은 스토커가 신이라면 그 교파는 진작에 망했겠네. 날 왜 따라다니는거야? 이 얼간아."


-너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즐기려고.-


긴 침묵이 흘렀다.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플루토가 뭔가 말 하려던 순간, 음성이 말을 가로챘다.


-잊지마라. 넌 내가 없었더라면 이 일을 포기했을거다. 실제로도 그렇게 흘러갔어야 자연스럽고. 그런데 내가 강제로 널 부추기는 거야. 운명의 흐름이 바뀌었으니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게 뭔가? 넌 여기서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 말과 함께 음성은 침묵했다. 아무 말이 없자 플루토는 조급하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야! 못알아들을 말만 잔뜩하고 가냐? 나도 할 말이 많았다고!"


연신 목에 핏대를 올렸지만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갈대밭에서 플루토는 씩씩 성을 죽였다.


급작스럽게 빨리진 호흡을 가다듬으려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플루토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흉하게 부서진 나침반이었다. 그럼에도 지침만은 구부러진 손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플루토는 거의 폐기물이 된 나침반을 포대에 도로 넣었다. 유리조각 하나가 손을 베고 갔지만 한 번 찡그리기만 했다.


가리킨 방향으로 가려는 순간,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플루토는 뒤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넌 어떤 기분이냐? 진실을 알았다는 것에."


스스로에게도 질문했다.


좀 전의 미행자. 처음으로 알았던 세상의 모순. 그리고 모험가들의 정체에 대해.


그러자 내면은 생각도 않고 답을 뱉었다.


매스껍다. 구역질난다. 혐오스럽다. 지저분하다. 추잡스럽다. 흉하다. 추악하다. 더럽다. 혼란스럽다. 무질서하다. 혼잡하다. 무섭다. 괴기스럽다. 이상하다. 괴이하다. 이해할 수 없다.


감정들이 오염된 강을 머금은 선풍처럼 불어닥쳤다. 정작 형용하려 입을 열려면 침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답을 듣고 싶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틀렸다고 지적해주길 바랬을까. 해답을 원하는 건 몸이 아닌 지쳐버린 정신이었다.


정작 대답을 듣고 의아해 질 줄은 몰랐다.


"해결해야 한다고 봐...너가 우리 마을에서 해줬던 말처럼."


낮은 침음성이 흘러갔다. 에버리스는 수줍게 미소짓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렇지. 그렇게 말한 건 나였었고. 순조롭다고 여길 땐 그렇게 말하다 좀 안 풀리니까 바로 낙담이라니, 나도 원."


자책하듯 고개를 휘저었다. 어쩐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스스로가 우스웠고, 눈앞의 모험가보다 경력도 많은 녀석이 이런 일에 휘둘리는 게 못마땅한 미소였다.


조금은 회복된 걸까. 그렇게 생각할 무렵, 플루토는 한 번 더 물었다.


"그래서 친구는 찾았어?"


"아, 그게...어디로 갔는지는 안 것 같아."


"뭐야, 그게. 여기엔 아무도 없는 거야?"


"그렇다고 봐도 되겠지..."


플루토는 뒷 머리를 쓸어내리며 헛웃음을 뱉었다. 이쪽도 힘들긴 매한가지겠다 생각했다.


등을 돌려 얼른 지침이 향한 곳을 빠르게 걸어갔다. 저 멀리 수풀이 청록으로 우거진 산림이 바람에 손을 흔든다.


이번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뭐해, 빨리 안 따라오고."


"아, 아, 그래. 얼른 다음 마을로 가야지."


"뒤쳐지면 괴수한테 잡아먹힐 걸? 이제 스킬도 쓸 수 있으니까 알아서 잘 해보라고. 건투를 빈다, 제군!"


뒤에서 뜀박질 소리가 들려온다. 플루토는 이젠 느긋한 발걸음으로 급하게 외치는 목소리를 즐겼다.





"그래, 그렇게 해줘야지. 그래야 너와 나 모두가 만족할지 모를 길을 찾지."


한 노인이 껄껄 웃었다. 짧게 깎아 거뭇거뭇 수염이 난 노인은 마법사였다. 자신의 앞에 펼쳐진 넓은 창엔 플루토의 에버리스의 모습이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맞춰 그의 밤색 로브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플루토가 부숴버리려던 것과 일치했다.


"자, 이제 너희가 어디로 가는지 나도 따라가 볼까."


노인은 야릇한 빛 머금은 눈으로 둘을 응시했다. 아직도 지켜보고 있을지 꿈에도 모르는 녀석들이다.


손에 뒨 나침반을 잡고 힘을 줬다. 정신과 심장을 선회하는 기운 그대로 온 몸으로 타고 흘렀다. 그러자 왼쪽의 애매하게 흔들리던 지침이 빠르게 회전했다.


눈앞의 영상이 흐릿하게 변했다. 푸른 광휘가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더니 오로라 빛나는 밤처럼 사방을 채웠다.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의 공간에 다달으자 노인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푸른색 광휘는 온데 간데 없어졌다.

소리가 쏴아 하고 귓 속으로 밀려들었다. 흐릿하게 사라졌던 영상이 갈대밭을 비추고 있었다.


단 한가지 바뀐 점이 있다면.


"제국 놈들...성깔만 더럽지 않다면 우리따위보다 훨씬 대단한 놈들일지도 모르겠군."


갈 곳 모르던 지침이 앞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질적이게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노인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한 후 지침과 반대로 걸어갔다.


좀 걷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낯익은 자들이었지만.


"이보게나, 아무리 너희들이 싫어한다지만 그렇게 기죽일 건 뭐있나? 껄껄."


노인 특유의 웃음소리에 제국의 병사들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무장한 제국 군인들 앞에 모험가들은 그 수가 무색하게 비굴한 얼굴을 비췄다.


속으론 찌푸리고 있을 병사들의 속마음에 웃음이 나왔다. 한참 모험가들을 추궁하고 있던 참에 다른 모험가가 훈수를 두니 속이 뒤집어 질 것이다.


그런 가운데 병사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테르미온."


"그럴리가. 너희만큼 한가할리도 없지,"


하얀 색 검사복이 미려한 여기사가 노인의 앞으로 걸어왔다.


은빛으로 길게 내려온 고수머리와 차갑게 내려앉은 동공.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인이었음에도 가슴 속 깊게 서리가 내려앉는 인상이다.


그런 그녀에게 능글맞은 말투로 대꾸하자, 그녀의 눈이 가늘어 더 매혹적인 차가움을 뿜었다. 싸늘한 카리스마의 여기사는 황실 기사단장 로제타였다.


테르미온은 곤란하다는 듯이 손을 올려보였다.


"워, 워. 내가 말했지 않은가. 그 쪽은 웃는다면 어느 남정네든 홀릴 수 있을거라고. 굳이 가진 장점을 죽이지 말게나. 자네를 내 잘 알아서 하는 말이야.~"


"임무에 협조할 생각이 아니라면 자리를 비키십시요.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복잡하단 말입니다."


"그래, 그 임무에 관한 이야기다. 듣기 싫다면 말고."


그 때 미세하게 로제타의 동공이 부릅 뜨였다. 곧 원래의 가는 눈초리로 바뀌었지만, 테르미온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군요. 그를..."


"곧 상봉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축하하네. 하지만 공과 사는 꼭 구분하도록."


"쓸데 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얼른 본론이나 꺼내세요."


로제타의 시선이 더 싸늘하게 바뀌었다. 조급한 속마음이 눈에 훤히 보였다.


테르미온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겉으론 차갑지만 속은 핏덩이인 아가씨 기사님의 반응은 예상 외로 재밌었다. 하지만 점점 시선이 거세지자 얼른 본론을 내뱉었다.


"놈들은 레이크볼 산. 던전 카노푸스로 향하고 있네. 지금 쫓는다면 마주칠 수 있을 걸세."


"놈들?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가요?"


"녀석이 외롭기라도 했나보군. 누굴 데리고 다니면서 하기엔 위험한 일 아닌가? 그 녀석이 치는 사고는."


"제가 고려할 것이 아닙니다. 둘이든 셋이든, 백이든 천이든 제국에 반기를 든 자는 베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모험가들을 추궁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뒤를 따라갔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통솔력에 테르미온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껄껄 웃었다.


"소년이여...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


작가의말

 인간의 행위엔 모두 목적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온 테르미온과 로제타는 어떤 목적으로 던전 파괴자를 쫓는 걸까요?

또 하나. 이 세계의 인류는 모험가와 제국인으로만 나뉘는 게 아닙니다. 플레이어인 ‘모험가’, 제국에 사는 NPC인 ‘제국인’. 그리고 제국 밖의 NPC인 ‘본토인’으로 나뉘지요. ‘제국인’이라는 말은 오직 제국 안에 사는 NPC들이 자신들과 타 인류에 선을 긋기 위한 심술에 불과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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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4. 역전 +5 17.01.10 585 10 9쪽
14 13. 돌파 +1 17.01.09 509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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