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3화>
깍아지른 절벽.
저 밑은 낭떠러지다.
20m나 되는 높이의 벼랑 끝에 남궁혁이 서 있다.
“여기는 내가 식후땡 하는 곳이거늘, 또 방해하러 온 게냐?”
덥수룩한 수염.
현대인으로는 볼 수 없는 희한한 헤어스타일.
사극에나 볼 법한 산신령 같은 옷차림의 노인이 다가와 물었다.
“죽고 싶어요. 사는 의미가 없어요.”
“죽다니? 뛰어내려서 말이냐?”
“네.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에요!”
이 할아버지는 누구길래 이런 곳에 나타났을까.
혁은 궁금했지만, 벼랑 끝에 선 마당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응시하는데, 노인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런 미련한 놈을 봤나. 거기서 떨어진다고 네놈이 죽을 성 싶으냐?”
“이렇게 높은데요?”
“벌써 2년이나 되었거늘,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구나.”
“깨닫다니··· 뭘요?”
혁은 당최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됐다.
“네 놈의 강함을 말이다. 그리고, 뭐하러 귀찮게 다시 태어나려고 하느냐?”
“강하기는요, 매일같이 괴롭힘이나 당하고! 이렇게 살 바엔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남궁혁은 눈물을 글썽이며 절규했다.
“이미 다시 태어나지 않았느냐? 쯧쯧. 너 같은 울보 녀석은 불알을 떼어야 한다. 썩 따라오너라! 싸게 중성화 잘하는 수의사가 있다.”
혁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미 다시 태어났다고요?”
“어리석은 놈. 곰싸움 챔피언이었던 네놈이 사정사정해서 인간으로 만들어 줬거늘. 어디 보통 사람이 그 높은 나무를 순식간에 오를 수 있단 말이냐. 미련 곰탱이로고!”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갑자기 혁의 눈은 희망에 찼다.
‘내가 곰싸움 챔피언이었다고?’
믿어지진 않았지만 거짓된 희망이 절망보다 낫다.
“털보 할아버지. 그 챔피언을 깨우면 저도 강해질 수 있을까요?”
“강해지는 게 아니라, 이미 강한 게야. 그 사실을 믿고, 야성을 흔들어 깨워보거라.”
“어떻게요?”
“그걸 곰인 네놈이 알지, 내가 알겠느냐? 우선 급한 대로 꿀이나 연어라도 먹어 보거라. 아님, 곰 인형이라도 사서 끌어안고 자보든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빨 썩는다고 단 것은 죄다 멀리했고, 연어도 비려서 먹어보질 않았다.
그래서 아직 야성을 못 일깨운 건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더니만, 죽겠다고 벼랑에 서 있는 꼴이라니. 다시 한번 울다가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얄짤없이 고자가 될 줄 알거라!”
펑!
순식간에 환웅이 있던 자리엔 연기만 남고, 환웅은 온데간데 없었다.
“할아버지! 털보 할아버지!”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혁은 애타게 불러댔다.
* * *
“털보 할아버지!”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에 팔을 휘젓다가 남궁혁은 눈을 떴다.
‘앗, 꿈인가?’
“혁아, 일어났구나.”
아버지 남궁천은 병상 옆에서 혁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침울한 표정의 남궁천.
혁이 깨어난 사실에는 기뻐하는 표정치고는 사연이 있어 보였다.
“네 친구 신지수라는 애가 다녀갔다. 아주 예쁘고 착한 애더구나.”
“아, 친구는 아니고 그냥 같은 반이예요.”
혁한테 있어서 신지수는 사실상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
친구라고 부르기에도 부담스러웠다.
“걔한테 얘기 다 들었다. 학교에서 아직도 널 괴롭히는 애들이 있다며? 전에 한번 담임선생님한테 얘기해서 다 해결된 줄 알았더니만···.”
아들이 깨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궁천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부모가 되어서 아들이 그런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혁은 마음이 급했다.
얼른 집에 가서 꿀이건 연어건 한번 먹어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 얼른 집에 가요. 나 숙제 해야 돼요.”
“지금 숙제가 문제냐. 며칠간 학교 가지 말고 쉬어.”
학교에 안 가도 된다?
그 말은 상태창을 안 봐도 된다는 의미였다.
‘오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꿈에서 들은 얘기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 담당의가 병실에 들어왔다.
“환자분이 드디어 깼네요.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부딪힌 SUV는 앞 범퍼가 다 나갈 정도로 파손됐는데, 사람은 타박상만 입었다니. 의사 생활 20년에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기적이예요.”
‘앞 범퍼가 다 부서졌다고?’
꿈에서 환웅에게 들은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럼 퇴원해도 되나요?”
“네. 퇴원하시고, 혹시 다른 문제가 있으면 내원해주세요.”
혁은 마음이 급한 듯 얼른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전속력의 차와 부딪쳐 20m나 날아간 것 치고는···.
너무나 몸 상태가 상쾌했다.
“참, 지수 걔가 여기 쪽지도 적어놓고 갔더라.”
남궁천은 혁에게 쪽지를 건넸다.
「남궁혁. 내 톡에 너 친추가 안 되어 있더라? 그래서 그냥 쪽지로 남겨. 우연히 사고 현장에 있었거든. 네가 뛰어들어서 유모차랑 아기 엄마를 밀쳐내는 거 봤어. 정말 너 죽은 줄 알았는데···. 방금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 멍든 게 다라고. 하늘이 도운 거겠지? 얼른 깨서 이 쪽지를 읽었음 좋겠다. 영광인 줄 알아, 나 남자한테 쪽지 첨 쓰는 거니깐ㅋㅋㅋ 오늘 넌 내가 아는 누구보다 멋졌어! 지수가.」
쪽지의 내용은 자못 감동스러웠다.
심지어 예쁜 손글씨.
의식을 잃고 누워있을 때 옆에서 지수가 그걸 정성스레 썼다고 생각하니 감동이었다.
남궁혁은 쪽지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하. 뭔가 쪽지에서도 좋은 냄새가 나는 거 같다.’
집으로 가는 차 속 내내, 남궁혁은 들떠있었다.
지수가 남자한테 쓴 첫 쪽지라니.
168cm에 75kg. 비만 고교생의 삶이 단숨에 이렇게 아름다워져도 될까.
‘오늘 넌 내가 아는 누구보다 멋졌어!’
남궁혁은 이 문장을 곱씹으며 혼자 배시시 웃었다.
* * *
<잠자는 야성 깨우기 프로젝트>
방에 들어오자마자 남궁혁은 A4 용지를 꺼내 큼지막하게 썼다.
우선 브레인스토밍을 해보기로 했다.
야성의 본능을 일깨울만한 행동 목록을 쭉 적어보기로 했다.
노르웨이 계곡에서 맨손으로 연어 잡기.
곰돌이 푸우 애니메이션 시청하기.
산에서 나무 오르기.
러시아 민속 춤추기.
꿀 퍼먹기.
동물원에 가서 곰 만나보기.
우선 생각나는 건 이 정도.
자, 하나씩 검토를 해보실까.
‘노르웨이 계곡에서 맨손으로 연어 사냥? 이거는 좀 오바다. 당장 여권도 없잖아?’
두 줄 쫙쫙.
그 다음은 곰돌이 푸우 애니 시청하기.
혁은 폰을 켜서 유튜브로 ‘곰돌이 푸우’를 검색했다.
잠시 5분 정도를 시청해 보니 영 이상했다.
‘야성이 아니라, 동심이 자극되고 있어.’
두 줄 쫙쫙.
그 다음은 나무 오르기.
‘이거는 오늘 했으니 패스. 그러고 보니 그 높은 나무를 어떻게 순식간에 올라간 거지?’
다시 되짚어봐도 믿어지지 않는 상황.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줄 쫙쫙.
그렇게 지우며 내려가다 보니 몇 개 남지 않았다.
러시아 민속 춤추기.
꿀 퍼먹기.
동물원에 가서 곰 만나보기.
‘이제부터가 진짜군. 러시아 민속 춤추기라.’
유튜브로 검색해서 영상을 틀었는데, 동작이 심상치 않다.
‘이거 난이도가 상당해 보이는데?’
쪼그려 앉은 자세로 폴짝폴짝 뛰면서 다리를 교차해서 내미는 동작.
막상 해보니 균형 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뚱뚱한 체형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음악이 작아서 흥이 안 났다.
‘이거는 야성을 깨우는 거라고. 본능을 흔들어 놓아야 돼! 음악에 완전히 몸을 맡겨보자!’
음악에 취하려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혁은 무선 헤드셋을 꺼냈다.
볼륨은 최대치.
자, 한번 신명나게 놀아 보자!
폴짝~ 폴짝~
쿵짝~ 쿵짝~.
흥겨운 러시아 민속 음악이 고막을 울려댔다.
‘얼씨구나~!! 막상 해보니까 신나는데?!!’
마침 집에 들어온 혁이의 엄마 은정희.
직장에서 문자로만 사고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집에 왔다고 남편 남궁천한테 연락 받았지만,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집에 오자마자 은정희는 혁을 찾았다.
“혁아! 혁아, 괜찮니? 어디 한번 좀 보자.”
똑똑.
아무 대답이 없다.
혹시 자고 있나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어본 은정희.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얼쑤~!!! 쿵작 쿵작~.
168cm, 75kg의 비대한 몸으로 남궁혁은 신내림을 받은 듯이 춤을 추고 있다.
무선 헤드셋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혁은 방문이 열린 것도 모르고, 더욱 열정적으로 쪼그려서 폴짝거렸다.
그 광경을 본 은정희는 어이가 없었다.
‘쟤가 귀신이 들린 건가?’
혼란스러워서 우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어휴, 힘들어.”
채 10분이나 췄을까.
몸무게가 몸무게니만큼, 오리걸음을 연상시키는 댄스다 보니 땀이 비오듯이 났다.
잠시 거실로 나와 물을 마시는데, 마침 남궁천과 마주쳤다.
“어이쿠, 이 녀석 등에 식은땀 좀 봐. 너 몸살이 온 거냐?”
“아니, 아빠 그게 아니고···”
“여보! 얼른 병원 갈 준비합시다. 아무래도 혁이 몸이 정상이 아니야! 정상일 수가 없지.”
남궁천은 급히 방에 있는 아내를 불렀다.
순간 혁은 말을 지어냈다.
“방에서 운동해서 땀 난 거예요. 다이어트 좀 슬슬 하려고요. 식은땀 아녜요.”
“그래? 어휴, 놀래라.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어.”
엄마 은정희도 거실로 나왔다.
“혁아, 그게 줌바 댄스인가 뭔가 하는 거니?”
“주, 줌바 댄스요? 아, 맞아요. 줌바 댄스.”
혁은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은정희는 조용히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줌바 댄스가 러시아에서 나온 거예요?”
“줌바 댄스? 난 그게 뭔지도 몰라.”
“아까 잠깐 보니까, 러시아 사람들이 춤추는 걸 틀어놓고 혁이가 따라 하던데.”
꿀꺽꿀꺽.
냉장고를 열어 생수 한 통을 입에 들이붓는 남궁혁.
한참을 마신 뒤, 입가의 물을 닦으며 주방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혁아, 뭐 찾니?”
“엄마 혹시 꿀 없어요?”
“꿀? 너 단 거 일절 안 먹잖아.”
“사고가 나면 몸이 놀라는데, 그때 꿀을 먹으면 안정이 된다네요?”
갑자기 너무 능숙하게 개드립이 튀어나와서 혁은 당황했다.
“그래?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다.”
은정희는 싱크대 위 선반 깊숙한 곳에 놓인 꿀을 꺼냈다.
“이거 올해 초에 선물 받은 건데, 하나도 안 먹고 그대로 있네.”
“엄마, 땡큐!!”
꿀병을 받아든 혁은 숫갈 하나를 집어 들고 방으로 직진했다.
비밀의 성배를 집어 든 인디아나 존스의 표정이 그랬을까.
뚜껑을 연 혁의 표정에는 긴장감과 호기심이 묘하게 교차했다.
‘자, 이렇게 한다고 야성이 일깨워질까?’
푸-욱.
혁은 한 숫갈을 크게 퍼서 그대로 입에 넣었다.
‘헐? 달다. 단데······ 존나 맛있다!’
혁은 미친 듯이 퍼먹기 시작 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점점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3화 끝>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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