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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루이야기] 고구려의 생활상.

고구려의 생활상.

(1) 남자의 의복 생활

고구려 사람들 중 남자의 옷차림을 저고리와 바지, 겉옷과 띠, 모자와 신발로 구분하여 살펴보자. 남자들의 옷차림은 벽화 등에서 알 수 있는데 저고리와 바지가 모든 옷차림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저고리는 그 길이가 지금의 양복저고리만하고 앞이 완전히 터졌있고 곧은 깃에 어김식 섶을 하고 있다. 이런 섶은 왼쪽으로 여민 것과 오른 쪽으로 여민 것 등 두 가지가 있다. 왼쪽으로 여민 섶은 보다 앞선 양식이었고 오른쪽 섶이 그보다 나중에 유행한 것이다. 또한 저고리의 팔소매는 통이 좁은 것과 넓은 것, 선이 단조로운 것과 화려한 것 등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신분상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일반 백성들은 소매통이 좁고 단조로운 저고리를 입었으며 지배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소매통이 넓고 화려한 선을 단 저고리를 입었다.

바지의 생김새는 지금의 것과 비슷한데 통이 좁은 것과 넓은 것이 있다. 좁은 것은 '궁고'라고 불렀으며 일반 백성들이 입었던 것이고 넓은 것은'대구고'라고 불렀으며 귀족 이상의 신분계층이 입었던 것이다. 색깔에는 흰색, 검은색, 황토색, 자주색, 붉은색, 청색, 녹색 등 여러가지가 있었으며 점무늬, 구름무늬, 기하무늬 등 여러가지 무늬로 화려한 모양을 내었다. 겉옷에는 두루마기와 덧저고리가 있었다.

겉옷의 섶에는 맞섶과 어김섶이 두 가지가 있었으며 허리에는 띠를 두르게 되어 있었다. 선을 단 것이나 그외의 모양 꾸미기는 저고리와 같다. 예절을 차릴 때에 긴 두루마기를 입었으나 보통 때에는 덧저고리를 입었다. 겉옷도 저고리와 바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반 백성들의 것은 통이 좁고 소박하였으며 귀족 이상의 신분계층들은 통이 넓고 화려한 겉옷을 입었다.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자기의 신분에 맞추어 호화로운 두루마기를 입었던 사실이 여러 벽화에 나타나며 여러가지 빛깔과 다양한 장식을 한 두루마기가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또한 저고리와 겉옷을 입을 때에 반드시 허리에는 띠를 둘렀다. 띠는 옷이 몸에 잘 붙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천, 색실 또는 가죽으로 만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천이나 가죽띠 위에 금, 은, 철 등 금속 장식물을 붙인 띠이다. 이런 금속장식 띠는 미천왕 무덤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인들의 띠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칼과 숫돌을 차고 다닌 풍습이다. 편리하게 차고 다니기 위해 칼과 숫돌에 구멍을 뚫었다. 옛 기록 [한원] 고구려조에 '허리에 은띠를 띠고 왼쪽에 숫돌을 차고 그리고 오른쪽에 오자도를 찼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남자들의 실용적인 패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머리장식 또는 모자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머리장식은 머리트는 모양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두 가지 형태의 머리트는 방식이 있다. 커다랗게 하나로 묶은 외상투가 있으며 쌍상투가 있다. 외상투는 안악 제 2호무덤에 나오는 문지기 장수와 집안현 제 4호 및 제 5호무덤 벽화의 신선, 그외 씨름군들이 하고 있던 머리모양이다. 쌍상투는 집안현 제 5호무덤 문지기 장수의 머리모양이다. 일반적인 머리모양은 외상투였다.

모자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머리수건, 절풍, 책, 관, 패랭이 등이 있다. 책은 활동이 그리 많지 않은 문관들이 주로 쓴 것으로 무관도 의례용으로 쓰기도 했다.또한 뒤가 뾰족하게 솟고 앞에서 보면 뒤가 한단 높게 되어 있으며 옆에서 보면 뒷부분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책이 있는데 이는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들과 무사들만이 썼다.

(2) 여자의 의생활

고구려때 여자의 옷차림은 저고리와 바지, 치마, 겉옷, 띠, 머리치장과 머리쓰개, 신발 등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저고리와 바지 및 치마가 여자 옷차림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저고리와 바지는 남자와 비슷하며 활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신분차이에 따라 일반 여자들은 통이 좁고 소박한 옷을 입었으며 귀족 이상의 신분계층들은 통이 넓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 귀족부인들이 입은 옷은 그 무늬가 화려한 고급비단으로 만든 것이다. 미천왕의 왕후는 진한 자주색 바탕에 붉은 물결무늬를 세로로 그리고 전면을 흰색의 복잡한 꼬불무늬와 물결무늬, 점무늬 등으로 배합하여 화려하게 꾸민 옷을 입었다. 왕후의 경우와 달리 부엌일을 하는 여인들은 자주색, 연회색, 청회색 등 단색의 소박한 옷을 입었다.

고구려때의 치마는 주로 여자들만이 입었으나 남자들 중에서도 승려는 치마를 입기도 했다. 고구려 여인들 치마의 특징은 주름을 잡고 단에 선을 댄 것이다. 여자의 겉옷에는 두루마기가 있는데 저고리 길이보다 더 길게 만들었다. 깃이 곧으며 소매끝과 깃 그리고 아래단에 선을 댔으며 허리에 띠를 맸다.섶은 어김섶이고 초기에는 왼쪽으로 섶을 여미었으니 그보다 후기의 것은 오른쪽으로 여미었다. 소매의 너비도 일정치 않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소매의 통도 점차 넓어졌다. 두루마기는 그 색깔과 장식무늬가 매우 다양하다. 색깔에는 흰색, 검은색, 누런색, 연분홍색, 청회색 등이 있으며 또한 이것을 바탕색으로 하여 그린 무늬에는 점, 쐐기, 초롱무늬 등이 있다. 무늬들은 바탕색과 조화를 시켜 진홍색, 적갈색, 자주색, 검은색 등으로 표현했다. 이와 같이 겉옷은 무늬있는 아름다운 천으로 화려하게 만들어 입었다.

다른 옷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분이 낮은 여자는 단색의 것이거나 무늬장식이 없는 단조로운 것을 입었고 신분이 높은 여자는 화려한 것을 입었다. 그리고 신분이 높은 여자들의 옷과 보통 여자들의 옷은 천의 질이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한편 여자의 겉옷 가운데에는 통저고리와 통치마가 맞달린 형식의 것이 있다. 이 옷은 통옷이라 머리에부터 입게 된 것이다. 이런 통옷은 고구려를 이룬 종족 중 예족이 입었었다. 여자들은 저고리와 겉옷에 반드시 띠를 둘럿는데 남자의 경우와 꼭 같다. 여자들은 검은색, 흰색, 붉은색, 자주색, 연록색 등의 여러가지 색깔의 띠를 맸다. 특수하게는 띠에 천으로 삼각형 또는 꽃잎모양의 장식물을 단 것도 있다.

여자들의 옷에는 한가지 더 앞치마가 있었다.허리에 매는 띠가 매우 넓고 타원형으로 생겼다. 앞치마는 여자들이 부엌일을 할 때 둘렀다.

여자의 머리모양과 머리쓰개 또는 모자가 있는데 머리튼 모양은 매우 다양하지만 머리를 트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올린머리이며 다른 하나는 내린머리이다.

고구려의 식생활.

고구려의 식생활은 의생활에 비해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햇다. 고구려의 음식문화에 대한 사료가 거의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농업이나 어업, 사냥과 주변 국가의 음식문화를 통해 개략적인 파악을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와 비교할 때 비옥한 영토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식생활의 완전한 자급자족과 풍요로운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나 중기와 후기를 거치면서 점점 식생활의 수준이 높아졌다.

고구려의 주식은 곡식과 육식이 결합된 양태였다. 곡식으로는 쌀, 보리, 콩, 조와 밀 등이 있었으며 사슴과 멧돼지 등의 야생동물 고기를 주로 섭취했다. 또한 고구려 초기에는 해안 쪽에 거주하는 피정복민들에게 공납으로 받은 해산물도 식생활에 이용했으며 이후 해산물의 직접 조달을 통한 활용도 이루어졌다. 농사를 지을만한 비옥한 영토가 그리 많지 않아 쌀은 매우 귀해 귀족들이 거의 독점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콩이나 조, 보리와 밀 등이 주요한 곡식이었다. 일반 백성들 대다수는 보리나 조, 콩 등의 잡곡밥과 간단한 반찬 정도로 식생활을 해결했다.

그러나 귀족들이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은 쌀밥과 사냥을 통해 조달한 각종 고기와 젓갈 등이 주로 식생활에 이용되었다. 국력이 강해지면서 요동지방과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쌀의 공급이 보다 나아진 때에도 여전히 일반 백성들은 주식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각종 양념이 발달되지 않아 반찬의 종류나 수준이 매우 낮은 것이었다. 마늘의 전래도 상당히 늦은 때였으며 고추는 조선시대에나 유입된 것이기 때문에 반찬은 대개 소금이나 발효시킨 것이 주를 이루었다. 반찬을 만드는 채소류는 아욱, 배추, 무우와 콩잎, 박, 오이 등이 있었다. 당시에 김치는 있었으나 지금과 같은 배추김치가 아니라 아욱을 주재료로 한 소금김치 수준이었으며 콩을 발효시킨 장이 많이 애용되었다.

300년 경 소금장수 을불(乙弗) 이야기와 고구려인들이 발효식품을 잘 만들었다는 [삼국지]의 기록은 대부분의 반찬이 소금과 콩을 이용한 발효식품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식생활 기구에는 맷돌과 연자방아, 디딜방아 등과 솥, 시루 등이 있었다.

초기에 일반 백성들은 오목하고 넓적한 돌판과 둥근 돌막대로 이루어진 맷돌을 이용했다. 그러나 왕궁이나 귀족의 집, 군대 등에서는 소를 이용한 연자방아가 사용되어 밥을 지을 수 있게 곡식을 까기도 했다. 이렇게 마련한 곡식을 솥이나 시루에 밥을 지어 먹었다. 솥이나 시루는 대개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인데 고구려 후기에 들어서며 쇠로 만든 솥이 이용되었다.

고구려에서 음식을 받쳐주는 밥상이 이용되었다. 여러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귀족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식탁을 이용해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하지만 고구려인들 모두가 식탁을 이용해서 식사를 하지는 못했다.

일반 백성들의 주거공간은 귀족들과 달리 움집이나 반움막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탁이나 밥상은 사용하지 못했다.

고구려의 주생활.

고구려의 주생활도 귀족 이상의 신분계층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철기생산의 증대와 수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 혜택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귀족들의 주거 공간이 기와집 등 지상가옥으로서 안락한 것에 반해 일반 백성들은 움집이나 반움집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다가 한강 유역으로의 영토확장에 따라 지상으로 주거공간이 올라가는 정도였다. 또한 귀족들의 주거 공간은 그 용도에 따라 구조화되고 튼튼해졌음에 반해 단촐한 주거 공간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먼저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이나 평양성에 사는 사람들은 주거 공간이 상당히 양호했었다. 이들은 대개가 귀족 신분이거나 그 혈족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부의 축적이 가능했고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꽤 안락한 주택을 마련하고 살았던 것이다.

한 사료에 의하면 고구려의 지배계층들은 집안에 부경이라는 창고를 두어 곡식등 식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가득 보관하고 있었으며 사위를 위한 서옥(胥屋)까지 갖추고 있었다. 대귀족들은 부엌, 우물, 고기창고, 수레창고, 방앗간 등 용도에 따른 공간을 세분화해 마련해 두고 살았다.

주거 공간의 난방형식에서 온돌이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이는 귀족이나 일반 백성들 모두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고구려 귀족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벽화에도 평상이나 마루 등에서 생활하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 온돌이 그렇게 일반화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귀족들 보다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허술하지만 온돌식 난반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주거 공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튼튼하고 안락한 집에서 사는 귀족들 보다 식생활의 현격한 차이로 영양상태가 좋지 않고 허름한 집에 사는 일반 백성이 난방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의 온돌난방에 관한 기록으로 [구당서] 고구려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구려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은 추운 겨울에는 긴 굴을 만들고 밑에 불을 때어 따뜻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자기 영토로 하며 국력을 확장하게 되었을 때부터 온돌식 난방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생업.

고구려 사람들의 생업은 농업, 수공업, 목축업, 상업, 임업, 어업 등과 일부 연예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에는 농경지가 부족하여 농업이 생업에서 압도적으로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요동정복과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가장 주요한 생업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지리적 특성상 목축과 사냥 등이 농업등 그외 생업과 함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의 농업은 철기생산의 발전과 비옥한 영토의 확보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라의 경제와 식생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바로 농업국가로서의 자기 모습을 갖추게 되어 일반 백성들의 생업도 농업 증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고구려의 농업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조, 콩, 보리 등 잡곱생산이 주를 이루었으며 철로 된 쟁기 보습이 이용되었고 우경재배를 하였다. 중기 이후에는 낫, 삽, 괭이,호미 등 일반적인 농기구가 폭넓게 사용되어 농업의 발전 속도를 더 한층 빠르게 하였다.

이렇게 형성 발전된 농업에서 고구려의 농민들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일차적인 생산자에 속했다. 이들은 한 해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었고 귀족들의 땅을 경작한 사람은 세수미를 바치며 생활을 꾸려왔다. 이들 농민은 직접 농업에 종사하며 휴한농법이나 상경농법, 종자개량, 비료생산과 비료주는 방법 등 과학적인 생산력 증대에 힘을 쓰며 생업에 종사했다.

고구려의 수공업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수공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고구려인들의 기술력은 고구려의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공업의 분야는 주로 국가적인 건설과 무기, 마구 생산, 농기구 생산과 주택의 기와와 벽돌, 그리고 장식품 생산이었다. 수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개 관청등 국가기관에 속해 있는 신분이었는데 귀족에 속해 있던 이들도 꽤 많았다.

철기생산의 발전에 따른 수공업 종사자들의 증대와 그들의 기술력이 상당한 발전을 거듭한 것은 무기와 마구 등 전투에 필요한 수공업 제품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지리적 여건상 말을 많이 기르는 목축업의 발달과 주변 나라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던 시절이었기에 수공업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증가가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외 고구려인들이 종사했던 산업분야는 목축업과 상업, 그리고 연예분야이다. 광할한 만주벌판에서 말을 비롯한 주요 동물을 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금 등 생필품을 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구려의 '과하마'라 부리운 말은 강인하고 날쌔 고구려 군사력 중에서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던 기마로 활용되었다. 이 '과하마'는 중국에도 그 이름을 널리 널쳐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목축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지금의 연예인이나 조선시대의 광대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왕이나 귀족들의 문화생활에 자신의 역량을 전문적으로 발휘하는 직업적 연예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관청이나 귀족 또는 절에 소속되어 있는 신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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