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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루이야기] 택견의 기원.

택견의 기원. clubrcy-naver.com

네이버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의 글이 있어 옮겨 옵니다. 혹여 저작권이 있는 글이라면 연락주세요.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택견의 발생을 고조선,부여 대(代)로 잡을 수..."

택견의 발생이 언제부터인가를 논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무예란 자신의 신변보호라는 본능적인 몸짓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우리 조상들이 살아 온 역사시대 이전부터 고찰해 보아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그러나 역사란 객관성을 위해 기록문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선사시대부터 택견의 명백한 근원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다고 볼 수 있겠다.

택견의 발생 역시 고서(古書)의 기록들을 통해 보면, 삼국시대 이전의 고조선,부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가 볼 수 있다. 구체적인 무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영고(迎鼓)나 동맹(東盟),무천(舞天)과 같은 제천의식 속의 춤과 노래를 즐겼다는 내용과 후한서(後漢書)의 '고조선과 부여는 '강용(强勇)으로 국풍(國風)을 삼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이미 이 시대에 택견과 같은 무예가 존재하였으리라 볼 수 있다.대개 전통춤과 전통무예의 공통점은 어느 민족을 보더라도 그 기본 몸짓은 동일하다고 한다.지금 우리가 보는 택견의 몸짓은 춤사위의 벌림과 디딤,사선진입,유연한 동작등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단순한 가무를 즐겼다는 내용으로 택견의 기원을 잡는다는게 억측스러워 보이지만 성스러운 제천의식 속에 춤과 더불어 무술 퍼레이드 혹은 무술대회등등을 통한 무술행위 역시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택견의 발생을 고조선,부여 대(代)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 고구려의 택견

우리민족의 역사 기록 중 택견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때는 고구려 태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며 제천의식과 더불어 행하여 지는 선배를 뽑는 각종기예들을 통해 알 수 있다.이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의 내용이며 다음과 같다."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에 있는데... 선배는 원래 신수두 교도(敎度)의 보통명칭이러니 태조 때에 와서 매년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에 모든 군중을 모아 혹 칼로 춤을 추며 ,활로 쏘며 혹 앙감질도 하며 혹 덕견이도 하며... 송도의 수박(手拍)이 선배경기의 일부분이니 수박이 중국에 들어가 권법이 되며 왜에 건너가 유도가 되고 조선에서는 무풍(武風)을 천시(賤視)한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니라.."여기서 앙감질이란 한 발을 들고 한 발로만 뛰 가는 짓(깨금발 뛰기)을 말하고 덕견이란 바로 택견을 말한다.수박과 덕견이를 다른 종목으로 기술하고 있듯이 수박은 손으로 하는 기술을 덕견이는 발로하는 기술이란 뜻이며 이 손기술과 발기술을 합친 기예가 오늘날의 쌈택견인 결련택견으로 내려 온다고 볼 수 있다.

"&apos;수박&apos;은 손으로 하는 기술을... &apos;덕견이&apos;란 발로하는 기술을.."

고조선, 부여가 씩씩하고 용맹한 기상을 국풍으로 삼듯이 고구려 또한 그러하였다. 고구려는 조공을 통한 군신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오늘날 연방국가체제와 같은 정복왕국이었다. 많은 정복과 정벌은 왕국의 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로인해 고구려는 당연히 무예에 힘 써야 했으며 수박과 덕견이는 물론 검술 및 궁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리라 본다.

수,당과 같은 외세의 침입이 많은 이유로 무예가 발전됐다는 데에도 일리는 있으나 고구려는 농경보다는 정벌을 통해 경제와 국부를 이루었다는데서 고구려의 발전된 무예를 찾는게 더 근본적이라 할 수 있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예의 근원은 중국 송나라 대의 소림사 무예가 아닌 고구려의 수박과 덕견이가 본산임이 사실이다. 이러한 증거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성(丸都城)에 있는 고분벽화, 각저총,삼실총, 무용총의 벽화는 씨름과 오늘날 택견의 몸짓과 비슷하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무용총 벽화의 수박도는 택견의 대걸이 맞서기중의 &apos;활개짓하며 품밟는 동작&apos;과 그 몸짓이 유사하다.이를 통해 상대방과의 겨룸 수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공격과 방어의 무예체계가 갖춰져 있었으리라 본다.현존하는 고구려의 무예교본같은 무예지는 고사하고 고구려를 연구할 만한 사서조차 부족한 형편이어서 구체적인 자료제시는 불가능하나 택견에 대한 내용의 기록은 다분히 존재했으리라 사료되며 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수탈과 굴곡의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리라 본다. 그러나 벽화의 모습에서 보듯이 고구려에는 상당한 수준의 맨손무예가 발달되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며 이는 중국무예의 근원인 송나라 소림권법보다 무려 600여년 앞선 명실상부한 동양최고의 무예이라 할 수있다.

 

** 백제의 택견

백제왕국의 기원은 고구려의 후예들임은 명백하다.이를 통하여 본다면 고구려의 풍속이 그대로 백제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의 선배제도의 수박도 백제에서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백제역시 멸망왕국이라 백제에서 쓰여진 문헌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조선조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전라도 여산군 작지마을에서는 해마다 백중일이 되면 인근 충청도,전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手搏戱)를 하여 승부를 겨루었다는 기록을 통해 백제에도 수박이 존재하였음을 추측 할 수 있다.

鵲旨在郡北十二里 忠淸道恩津縣界 每歲七月十五日 傍近兩道居民聚爲手搏戱 以爭勝負"

까치마을은 군북쪽 12리에 있으며 은진현과 경계를 이룬다. 매년 7월15일에 근처에 있는 두 도(道) 백성이 모여서 수박희를 해서 승부를 다투었다."

이는 이 지방에 오랜 옛날부터 수박희가 행하여 졌던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작지마을은 옛 백제의 영토였음을 고려한다면 백제에도 수박(手搏)이 존재했으리라 보며 한국정사(正史)에서는 인정치 않지만 백제가 당시 중국 요서지방을 비롯하여 황해 및 남해를 지배한 강력한 해상왕국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고구려에 버금가는 무예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중 한 가지가 까치마을의 풍속을 통해서 보았듯이 수박이라고 할 수 있다.앞으로 계속해서 수박이란 용어가 사용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수박은 손기술이요 택견은 발기술로 엄격히 구별하여야하나, 수박은 현재 전수된 기술이 없으며 다만 현재의 택견속의 활개짓과 같은 손동작에 그 형태가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박과 택견을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하여야하나 수박과 택견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어우러져 현대의 택견으로 계승된 점을 고려하여 수박 역시 택견의 원형으로 볼 수 있겠다.이에 관해 뒤에 자세히 다루었다.

 

** 신라의 택견

신라의 군인정신,상무정신하면 화랑도를 떠오른다.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의하면 화랑은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해 온 것이며 종목도 고구려에서 시행하던 수박(手縛),격검(擊劍),사예(射藝),말타기,덕견이,깨금질,씨름등 각종기예가  같다라고 한다.초기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문화에 많이 종속화 되어있었으며 고구려의 무예 역시 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신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각종 기예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여진다.고구려의 선배를 모방한 화랑과 같은 애국단체가 형성되고 점차 강력한 병제(兵制)의 발달을 가져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완묵의 <태권도사 및 태권도 어원에관한 연구>에 의하면 택견이라는 말은 신라어로서 이두문자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는 이미 신라에도 택견이 상당히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조선조 때의 문헌기록에 보이는 이두식표기인 托肩(탁견),卓見(탁견)과 일맥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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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택견"

등뼈를 꺽으니 손이 움직임에 따라 소리를 지르고  갑자기 크게 웃고 죽었다...".고려의 택견은 수박을 일컫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수박희(戱)라는 용어 자체도 고려사(高麗史)에 제일 처음 보이며 무신들이 왕 앞에서 수박을 시연한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사 문헌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수박이란 용어 자체의 의미성을 좀 더 고찰해 보아야겠으나 고려의 택견은 손기술 위주의 수박이 주를 이루었으리라 본다.고려사의 수박에 대한 내용이다.

翌日王將幸普賢院 至五門前 召侍臣行酒 酒감顧左右曰 壯哉 此地可以隷兵命武臣 爲五兵手縛戱 蓋知武臣缺望 欲因以厚賜慰之也.

다음날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려고 오문(五門)앞에 이르러 신하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술이 거나하매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 장하다 이 땅이여 ! 군사훈련을 할 만하구나 " 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五兵)에게 수박희를 행하게 하니 이는 무신들이 실망이 큰 것으로 알고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자 함이다.

韓賴恐武臣見寵 遂XX忌 大將軍李紹膺雖武人 貌유力X 與一人手搏不勝而走 賴遽 前 批紹膺頰 卽墜階下 王與群臣 搏掌大笑

한뢰는 무신이 임금의 총애를 얻을까 두려워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대장군인 이소응은 비록 무인이기는 하지만 바싹 마르고 힘도 없었다.

어느 한 무인과 수박을 하여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므로 한뢰가 급히 앞으로 나아가 이소응의 빰을 쳐서 계단 아래로 밀어 제치니 왕과 여러신하들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癸巳 幸賞春亭 觀手縛戱 己酉 王放鷹于東郊 環幸和妃宮 觀手縛戱 辛卯 公主移御延慶宮 王置酒慰之 夜觀角저戱 六月丙申 幸馬嚴觀手縛戱

1342년 5월(계사년)에 왕이 상춘정에 납시어 수박희를 구경하시었다.1343년 2월(기유년)에 왕이 동쪽교외에서 매를 풀어 사냥을 하고 화비궁에 돌아와 수박희를 관람하셨다. 신묘에 공주가 연경궁으로 옮겼다. 왕이 일한 이들에게 술을 주어 위로하고 밤에 각저희를 보았다. 6월 병신(丙申)에 마엄에 행차하시어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이 글을 통해 보면 왕과 그 신하들이 관전하는 가운데 수박으로 경기를 행했던 사실이 분명하며 수박의 기술이 상당히 발전되고 경기로서 체계가 잡혀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인(武人)이건 문인(文人)이건 무예에 대한 소양이 상당히 갖추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수박희 뿐만 아니라 각저희,

즉 씨름 또한 고려 때에도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수박희를 한 곳이 주로 궁궐 밖으로 되어 있다. 이는 수박(手搏)을 스포츠화 무예화 시켜 넓은 공간에서 시행했다는 증거라 하겠다. 근래까지도 택견을 야외에서 시연하는 것을 보면 한줄기 시행 장소의 전통적 대물림이 아닌가 생각된다.

義旼善手縛 의宗愛之 以隊正X別將.義旼拉背骨 應手有聲 便大笑

이의민은 수박을 잘하였다. 의종이 아껴서 대정을 삼았다가 별장으로 승진시키다. 이의민이 의종의 등뼈를 꺽으니 손이 움직임에 따라 소리를 지르고 갑자기 크게 웃고 죽었다.

이의민의 수박실력에 대한 고려사 내용이다. 이의민은 정중부를 도와 무신의 난을 성공시킨 핵심인물이다. 의종(1146~1170) 재위시절 만하더라도 수박을 잘 하면 출세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박은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기술체계 또한 높은 수준이었으리라 본다. 이의민의 의종 시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당시 수박 기술이 대단히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통하여 고려시대에 수박이 매우 발달되고 널리 퍼져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박기술이 뛰어나면 벼슬도 얻고 지위도 높아 졌으며 맨 주먹으로 기둥을 쳐서 서까래를 움직이게 한다거나 벽을 쳐서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감은 물론 급소처치 기술조차 발달하여 고도의 기예술을 누렸던 시대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이런 모든 것은 고구려의 수박으로부터 내려 온 것이며 조선조까지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려의 수박은 포괄적인 맨손무예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적 표현..."

주지하듯이 고려사 문헌에는 발기술에 대한 택견은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수천년 내려온 발 기술이 갑자기 고려시대에만 사라져 버렸다고는 볼 수 없다. 이는 수박이란 단어의 선택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다.

고려사의 작성 연대는 &apos;고려시대가 아닌 후대인 조선초에 이루어졌다. 당시 택견에 대한 이두식 표기인 托肩(탁견),卓見(탁견)이란 용어가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수박이란 용어로만 표기하였다. 물론 고려 때는 발기술 보다는 손기술이 더 널리 행하여졌다면 이 단어의 선택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어 자체로서의 수박은 그 이전에 쓰여진 고서에도 보이지 않던 용어이며 이 때(집필 당시) 처음 등장하였다.

이는 순 우리말 &apos;택견&apos;에 대한 한자 표기의 문제점으로도 볼 수 있으나 고려사를 정리한 학자들의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기인한다고 보아야만 한다.(요즘 우리가 미국문화를 따라하듯, 당시 대부분 조선 지배층의 가치관은 중국문화 베끼기였다.)수박이란 원래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에 처음 나오는 무예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의 수박은 포괄적인 맨손무예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적 표현으로 볼 수 있으며 오늘날의 택견과 자연스럽게 연결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기록자들은 대부분이 택견의 향유층이 아닌 성리학이론 중심의 학자, 문관들이었다.이에 고려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헌 속에 택견을 수박으로 기록한 부분이 많이 보이나 다행스럽게도 "수박이 곧 탁견이다" 라는 수박이란 단어와 택견을 하나로 연결지을 수 있는 결정적 문구 또한 남겨져있다. 이는 조선 정조 때의 박물사전인 재물보(才物譜)의 내용이다.

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若今之 탁견 변(卞)이란 곧 수박(手搏)을 변(두들겨 패는 것)

이라하며 각력(힘을 겨루는 것)을 무(武)라 한다. 지금 이를 "탁견"이라고 한다.

쉬운 말로 하면 두들겨 패는 것을 수박(手搏)이라하며 이를 가지고 힘을 겨루는 것을 무예라 한다.지금 이를 두고 순 우리말로 "탁견"이라고 한다.

또한 이두식 표기의 托肩(탁견),卓見(탁견)이 아닌 한글의 탁견이라는 표현을 놓고 본다면 그 동안 죽 "탁견"이라는 우리이름이 불리어 왔음을 더욱 명백히 해주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다음 아래는 수박(手搏)을 한글로 "슈벽"이라고 표현한 내용이다.

手搏.. 仝(同) 今之 슈벽 當用此字수박(手搏)이란 변(卞) 과 같은 말이며 지금 이는 슈벽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1921년에 지어진 해동죽지(海東竹枝)는 옛 풍속을 설명하는 란에서 택견을 의미하는 탁견희(托肩戱)와 수박을 의미하는 수벽타(手癖打)를 각각 다리기술과 손기술로 별개의 기술로 읊고 있다.

"두들겨 패는 것을 수박(手搏)이라하며  이를 가지고 힘을 겨루는 것을 무예라 한다. 지금 이를 두고 순 우리말로 "탁견"이라고 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삼국시대엔 엄격히 손기술인 수박과 발기술인 덕견이(택견)가 구별되어 공존하였다. 비록 재물보의 내용대로라면 슈벽이 곧 택견으로 볼 수 있지만 후대로 내려 오면서 이 두기술의 조우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대로 개별적 기술로 내려 왔는지는 확인할 문헌들의 소실로 알 수 없으며 또한 겨우 택견만이 전수가 되어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수박으로 알고 있는 슈벽치기는 대가 끊긴지 오래라 역시 그 형태조차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나마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오늘날의 택견이 엄격히 말해 발기술 위주의 기예이지만 그 속의 활개짓 과 손질 더 나아가 쌈택견의 급소를 공격하는 손 기술들을 통해 미약하나마 과거의 수박(손기술)을 엿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택견

"무예를 할 줄 안다는 것이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조선은 통치이념으로 숭유사상인, 즉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선대인 고려와 정치,문화의 단절을 의미하며 또한 이를 통한 신흥왕국 설립의 당위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초의 사상정책은 가히 심하여 고려의 풍속은 모조리 몰아 배척하였으며 더불어 세월이 흐르면서 옛 부터 내려오던 우수한 무예들 역시 하나 둘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미약하나마 일부 유희적 성격의 모습으로 나마 남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잦은 외침으로 인한 국가적차원에서 국방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때도있어 무예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다수의 무예서 와 병서가 편찬되기도 하였으나 호란과 왜란의 강펀치를 두 번이나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강병론자들은 시대의 조류를 주도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으며 훌륭한 장수들은 판에 박힌 삼류 영화 시나리오 마냥 늘 대역적으로 몰려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여야 했고, 조선역사의 시작이 하극상 쿠데타와 왕자들간의 암투였듯이 전국 방방곡곡 힘쎄고 싹이 있어 보이는 호걸들은 애초부터 죽여 버리고 운명으로 돌려 버렸다.

중국 역대 왕조를 고구려,백제,신라보다 더 잘 꿰고 있고,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힘이라고는 책 페이지만 넘길 힘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잘 나가는 학자 밑에 들어가 당적을 받고, 오랑캐가 침략하건 말건 당리당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붓과 먹으로 입신양명하여 가문의 명예를 일으키는 자가 진정한 조선의 남자로 추앙받았다. 조선의 무인들은 점차 사회적 지위를 잃어 갔다. 무예를 할 줄 안다는 것이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한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도 않았다.잘 나가는 집안이 아니면 목숨이 위태로웠다.조선의 택견은 초기 태종 때만 하더라도 병사를 선출하는 정식경기종목이었다.

兵曹義輿府 以手搏戱試人 補防牌軍 用勝三人 者 <太宗實錄 卷十九.5>

병조에서 수박희로써 사람을 시험하여 방패군을 보충하였는데 3인을 이긴 사람을 뽑아 썼다

兵曹聚武士于興仁門內 第其騎步射 以充甲士 至是 以不能者 聚于三軍府 令走步手搏 勝三人以上者 皆取之 其不能者 皆汰之.<太宗實錄 卷二十一.28>

병조에서 흥인문안에 무사를 모아 놓고 말타고 활쏘기와 걸으면서 활쏘기를 시켜서 갑사에 보충하였다.

그런데 이를 할 수 없는 자들을 삼군부에 모이게 하여 달리기와 수박을 시켜서 3인이상 이긴자를 모두 뽑아 썼고, 그것도 못하는 자는 버렸다.초기조선의 상류층은 조선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민중(백성)들은 아직 고려인이며, 비록 국가주도의 유교장려책을 폈더라도, 그들이 살아온 고려 때의 풍속과 생활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이다. 고려엔 수박을 잘하면 군인이 될 수 있고 지위도 높아질 수 있었던 만큼 수박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처럼 조선 초기에 택견(수박)으로 병사를 선출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민중들 뿐만 아니라,용재총화의 기록에는 선비들까지도 수박을 즐겨하였다 할 정도로 당시 택견은 대중화되어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기술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박으로 병사를 선별한 기록은 단종을 넘어 세조 때까지 보인다.조선중기로 들어 서면서 무풍(武風)을 비롯하여 수박은 점점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두 차례의 양란과 갖은 당파싸움으로 인한 사화가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정조 때의 무예도보통지는 이 시대에 이미 수박이 쇠퇴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정조 때에는 들어서면서 무예의 부흥기를 누리기도 하였다.정조는 무사 양성을 위하여<<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하여 군사훈련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무예도보통지는 이 시대에 이미 수박이 쇠퇴되었음을 말하고 있다.이책의 권법총보(拳法總譜)와 권법보(拳法譜)내용이 결정적 증거라 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수박의 폼을 설명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명백히 그 바탕은 중국의 권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나라에서 간행된 정규군사 훈련서에서 중국권법을 다루었다는 점은 조선중기에 접어들면서 조선 초기의 수박의 높은기술은 둘째치고,병사들의 기본 무예로서의 수박은 안타깝게도 사장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다만 동시대인 정조 22년(1798년) , 이일영에의해 쓰여진 재물보(才物譜)의 기록 중 수박(手搏),슈벽,탁견을 같은 것으로 보는 대목을 통해 택견의 존속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후 50여년 뒤인 1846년 유숙이 그린 <대쾌도(大快圖)>를 통해 여전히 민중의 유희 속에 택견이 존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조선후기 근세까지도 그런 민중 속의 택견의 모습은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어지고 있다.

안곽(安廓1881 ~1946)의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의 기록( "근래에도 청년들이 씨름보다 소이(小異)한 수박희(手搏戱)를 행(行)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이다.")

김준근의 풍속도첩과 개항이후 선교사가 촬영한 어린 애들의 택견하는 모습등을 통하여 구한말 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대중적 스포츠, 유희로써 택견은 자리 메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송덕기 옹은 1912년까지 택견판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민중의 유희 속에 택견이 ...."

조선의 택견은 과거의 그것 보다 오히려 발전적이지는 못 할 망정 많은 쇠퇴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와의 단절을 성리학에서 찾은 기본적인 조선의 이데올로기에 결정적인 원인이 있으며 이로 인해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함이 당연시 되고 자유분방한 과거 고려의 민중들의 가치관이 유교에 의한 엄격한 규율의 가치관으로 뿌리내려 지면서 무예는 한량이나 백수 깡패들이나 하는 천한 기예로 전락을 가져 왔으리라 보며 더불어 무예가들의 지위 역시 이런 천한 것들과 다를 바 없는 하락을 가져 와 기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못한 사회구조로 변질되어 조선 말엽으로 오면서 차츰 옛 선조들의 우수한 기예들의 대가 끊기는 현상을 가져 왔으리라 본다.

맨손무예인 택견 역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그러나 선조들이 늘 그랬듯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명절의 세시풍속 놀이로나마 그 본질을 계속 이어 왔으며 대부분의 조선 민중들은 그 기예들을 술자리의 여흥으로 혹은 어린아이들의 놀이로 대대손손 근세까지 향유하여 왔으며 비록 놀이이나 경기 도중의 오해로 벌어지는 쌈택견(결련택견)의 수준은 여럿이 다치거나 죽어 나갈 정도로 무서운 기예로 변할 수 있는 수 천년 역사의 민족 전통무예의 맥을 이어 온 곳이다.

 

** 경술국치후 택견"

특히 택견을 통해 민족정신이 전수되고 민족적 저력이 형성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갖은 탄압으로,...

경술국치 후 일본은 식민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조선의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일본 문화와 일본정신을 조선에 심어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하였다.이 때의 우리민족의 문화후퇴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우리 민족에게는 큰 충격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민족의 언어가 빼앗기고 역사가 날조 왜곡되었듯 민속놀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이런 와중에 택견 역시 피해 갈 수 없었으며 특히 택견과 더불어 전통무예는 민족정신이 전수되고 민족적 저력이 형성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갖은 탄압으로 급격히 쇠퇴되고 말았다.

택견판을 여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으며 택견꾼을 보는대로 잡아 갔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놀이로 벌이는 택견판도 금지시겼다.대신에 그들의 무예인 가라테와 유도,검도를 가져와 대체하였으며 더불어 일본정신을 심고자 하였다.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은 택견판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일본무도를 가까이해야 했으며 또한 개항 후 들어 온 근대 스포츠에 관심을 갖게 되어 택견은 더더욱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1912년 윗대패와 아래대패의 택견꾼이 시합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1900년대 구한말 까지만 해도 전국에 성황리에 벌어졌던 택견이 일제치하동안 말살을 당하였다.

조선시대 마지막 택견인인 송덕기옹의 증언에 의하면 1912년 윗대패와 아래대패의 택견꾼이 시합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한다.사실 오늘날의 택견은 서울에서 전승되어 온 기예이며 이는 오늘날의 택견이 있기까지 계승,전수자들의 계보를 모두 서울의 종로,구리개,왕십리의 택견꾼들에게 두고 있고 근세에 와서 택견은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각 지방마다의 독특한 기술과 유형의 택견이 대를 이어 꾸준히 내려왔으리라 보나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많이 퇴화되어 지금은 이를 추측할 수 있는 말만 전하여 질 뿐이다.

전국적으로 &apos;까기&apos;가 있고 평안도의 &apos;날파름&apos;, 전주의 &apos;챕이&apos;, 경남 김해의 &apos;잽이&apos;, 경상도 전 지역의 &apos;깔래기&apos; 북한쪽에는 싸움 기술을 일컫는 &apos;칠래기&apos;, &apos;난다리&apos;등의 말들이 있다.

 

** 해방 후 오늘날의 택견

"당시 택견을 지켜보았던 많은 이 땅의 지식인들도 일본무도에 길들어져 있어 춤사위 같은 택견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방후 민족문화의 부활운동에 편승하여 택견 역시 빛을 보게 되었다.1958년 이승만 대통령 탄신기념 경찰무도대회에서 송덕기옹은 경무대의 요청으로 택견시연을 보이게 된 것을 계기로 택견은 다시 대중 속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송덕기 옹은 종로의 택견 명인 임호로부터 전수 받은 분이시며 오늘날 택견이 있기까지 중요한 분이시다. 그러나 택견에 대한 깊은 애착과 자부심은 있었으나 택견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체계화시키기에는 너무 연로하신 분이셨다. 송덕기 옹 이외에도 이 당시 구리개 택견의 명인 김홍식(1892 ~1985). 왕십리 살꽂다리 명인 이경천(1904 ~1985) 같은 분들이 계셨으나 역시 연로하시고 전통무예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셨다.더욱이 당시 택견을 지켜보았던 많은 이 땅의 지식인들도 일본무도에 길들어져 있어 춤사위 같은 택견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어려서 종조부이신 왕십리 택견의 명인 신재영으로부터 택견을 익혀 온 신한승이란 분이 계셨다. 누군가 체계화를 시켜 놓지 않으면 택견은 영영 없어질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어려서 종조부이신 왕십리 택견의 명인 신재영으로부터 택견을 익혀 온 신한승이란 분이 계셨다.신한승선생은 1960년대초부터 택견정립 작업을 시작하였다. 1970년도부터 직접 송덕기옹을 찾아가 기술을 전수 받았으며 그밖에 구리게 택견의 명인 김홍식옹과 왕십리 살꽂다리 명인 이경천옹으로부터 재차 택견의 전수를 받아 각 택견의 계보를 두루 섭렵하면서 전국을 샅샅이 뒤져가며 오늘날의 택견을 완성하였다..

"1973년 10월에 처음 충청북도 충주에 택견 전수 도장을 개설하고...."

1973년 10월에 처음 충청북도 충주에 택견 전수 도장을 개설하고 후배양성과 택견 보급에 전념하시었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으로 택견은 중요무형문화재76호로 등록이 되었으며 오늘날 자타가 공인하는 민족 전통무예로 사랑받게 된 것이다.

현재 신한승선생을 비롯하여 근세 택견의 산 증인이시던 이 분들은 모두 작고 하시고 그 대를 이어 2대 인간문화재 정경화 선생과 국가 이수자 박만엽 선생에 의해 택견은 전국적으로 계속 보급 대중화되고 있으며 일부 신한승 선생으로부터 짧은 시간 전수를 받은 이들도 독자적인 노선으로 보급에 매진하고 있다.


댓글 2

  • 001. Personacon 水流花開

    12.12.31 16:22

    It's very informative and educational.

  • 002. Lv.68 이가후

    13.01.08 00:24

    택견이 태국의 무에타이처럼 연속성을 가지고 발전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의문인 것은
    [수박은 손으로 하는 기술을 덕견이는 발로하는 기술이란 뜻이며 이 손기술과 발기술을 합친 기예가 오늘날의 쌈택견인 결련택견으로 내려 온다고 볼 수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수박과 덕견이 어떻게 택견이 됐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제가 아는 한에서)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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