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찌르르르!!" "찌르르르!!" "찌르르르!!"
언제부터 울린 전화였을까? 방금에서야 전화기가 울어대는 소리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다. 뭘까? 힘없이 무의식적으로 의심없이 전화기를 집은 나였다. 너무 지쳐있어 그런 것 같다.
"여보세요?"
힘없는 내 목소리였다.
"....이카리, 나야 코즈, 아까 이야기는 그만할게....너무 혼란...."
"아니, 그 이야길 해야겠어. 학교 앞으로 지금 나올 수 있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을까? 아마 낭떠러지 앞에서의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어....나갈 수 있긴한데.....알았어."
"뚝"
"후......"
이제 더는 고민하고 싶지 않다. 이제 확실하다. 난 오츠네를 죽였다. 하지만 처벌 받을 일은 없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니까. 나와 코즈, 이 세계의 인간에서는 그정도 뿐이다. 뭐 나는 마음의 책임감을 안고 가야겠지만....일단 코즈에게 모든걸 말해야한다. 또 한명의 당사자로서, 또 한명의 기억을 가진 자로서....그 정도의 권리는 가지고 있다. 그 정도의 피해는 최소한 알 권리를 부여할 수 있어야한다.
"후......."
그래도 뭔가 꽉 막힌 느낌이 들기는 한다.
"코즈, 내가 알고있는 사실은 여기까지야."
시원하다. 속 시원하다. 마음이 개운하다. 누군가한테 이야기하니 슬픈 마음이 그나마 나아진다. 이래서 고통은 나누면 반이라는 말이 있는걸까?
"하하하.....하하하하, 정말 재밌는 이야기였어, 이카리..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니가 처음에 말했던 우리 둘이서 우연히도 같은 정신착란을 일으켰다는게 신빙성이 더 높은것 같은데? 그래,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냐,젠장, 단지 잘 꼬이던, 하지만 잘 알지 못하던 친구 하나의 사망장면을 본 것 뿐이니까."
"안 믿을 거라는건 알고 있었어. 믿어주리라 기대는 안했어. 하지만 믿을 수 밖에 없어. 움직이지 않는 증거가 여기 있으니까, 로첸 레이지."
"뭐...뭐야!"
내가 기대했던 여자의 모습 대신 검은 빛을 내는 검이 나왔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코즈의 얼굴에선 재미, 신기함의 표정은 사라지고 오직 당황과 믿을 수 밖에 없음에서 오는 혼동의 표정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 남자 인간이 나에 대해 방금까지 말했잖아. 뭐긴 뭐야. 난 로첸 레이지라고, 아, 이카리 참고로 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검으로 바뀌는건 전적으로 내 자유야. 아, 그리고 손 좀 놔줄래?"
"...어?...어, 그래."
인간으로 변한 로첸 레이지의 손이 내 손과 마주잡고 있는 걸 보아 나는 얼 빠찐 상태로 손을 뺼 수 밖에 없었다. '검에서 인간으로 바뀔 때 잡고 있는건 로첸 레이지의 손이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덕분일까? 기절해서 쓰러지는 코즈를 잡은 건 내가 아니라 로첸 레이지였다.
"이건 뭐야? 이렇게 쓰러지면 위험하다고, 인간들이란....정말..."
나에게 코즈를 넘겨주면서 짜증나는 말투로 말하는 그녀였지만 쓰러지는 코즈를 잡아준 것을 보면 그다지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아. 이카리, 넌 왜 병원으로 안 데려가고 벤치에 눕히는거야?"
"어? 병원이나 벤치라는 단어도 아는거야? 다른 세계에서 왔다하지 않았나?"
"이 곳에 온지는 조금 됬거든, 어느 정도는 지식이 쌓였지."
"끄래? 어쨌든 병원에 안 데려가는 이유는 단순기절인데다가 괜히 병원에 데려갔다간 정신병원으로 끌려갈 것 같아서 말야. 그런 곳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들어서말야."
"으흠....? 그래? 그럼 놀라지 않게 사라져줄까?"
"아니, 그대로 있어. 오히려 확실히 코즈에게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어. 나중에 다시 부르기도 귀찮으니 그냥 있어."
"...어?...어, 그래....근데 너 몇살인데 막 부르는거야?"
"뭐?"
갑작스런 어이없는 질문에 당황한 나는 분명 얼빠지고 바보같은 표정을 지었음에 틀림없다. 그녀의 비웃는 듯한 웃음을 보면 느낄 수 있다.
"16살인데 왜?"
"뭐?"
이번엔 그녀가 얼빠진 바보같은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아까의 나도 그 같은 모습이었음에 틀리없다. 정말 실망이다. 내가 저딴 표정을 지었었다니, 혹시 지금의 내 표정은 그녀의 아까 비웃는 표정일까? 그녀의 얼굴이 조금 화난 듯이 변한 걸 보니 비슷했음에는 틀림없다.
"나보다 1살이나 많은데 키는 뭐 이따위야? 얼굴은 뭐 이따위고, 근육은 또 왜이리 없어? 난 존대해줄 생각이 없어. 그러니 대우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아."
"어....뭐, 상관없어...."
얼빠진 표정 같은건 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짓게 만든다. 이 상황이, 저 여자의 말이 , 덕분에 얼빠진 표정으로 강제적으로 긍정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나는 16살, 누워있는 코즈도 16살, 앞에 있는 이 20대 같아 보이는 여자가 15살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내가 땅꼬마 같아 보이니 반말로 찍찍 부르겠단 뜻이다. 나 원 참.......
"우왓!!! 말도 안돼!"
로첸에게 항의하려는 내 발언이 나오기 바로 직전 코즈가 깨어났다.
"코즈, 진정해. 이건 꿈이 아니고 현실이야. 나도 믿기 어렵지만 이 15살의 여자는 검이야."
옆에서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가(아마 그녀는 내가 15살이라고 강조해준 것을 조금 분하게 생각하겠지?) 얄밉게 느껴졌지만 지금 중요한건 코즈였다.
"그래, 그래, 그래, 이제 믿어. 저 여자가 검이란 건......나도 알았으니까. 그래, 내 눈으로 봤으니 맞는거겠지. 맞는거야, 그래. 아니면 내가 미친거거나, 그런데 말이야. 이런 경우 내가 미쳤을 확률이 더 높지 않나?"
"코즈! 좀 진정해."
코즈가 이렇게 말을 쏟아내는 걸 처음 봄에 놀랄 여유 따윈 없었다. 단지 코즈가 또 기절하길 원하지 않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래, 이카리 말대로 이건 별 것도 아닌거야. 너가 몰랐던 방법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일이 벌어진 것뿐이야. 넌 너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그래 너희 인간중 유명한 살마의 말을 빌리자면, 넌 땅을 기어가는 딱정벌레야. 자신이 곡선으로 가는지도 모르는거지. 넌 직선으로 움직인다고만 생각하기에 곡선으로 가고 있단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거야. 바보 꼬맹아."
하하하하. 이 여자의 말대로일까? 상상도 못한의 범위 문제가 아닐까 의심되긴 하지만 코즈가 진정되는 모습을 보긴 했으니 일단 효과는 있나보다.
"니가 해야 될 건 혼동하는게 아냐, 당황하는 것도 아니지. 날 원망하는 짓 따윈 의미없다는 것 정도는 너도 알거야. 이제부터 뭘 할지가 중요하지. 뭘 할거지? 죽은 친구는 잊어버린 채 그냥 살건가? 사실 그것말고는 길이 없네? 헷?"
참 독한 말만 쓰는 15살의 여자다. 꼭 나쁜 표현만 고르는 15살의 여자다.
하지만 코즈가 체념한 듯 받아들이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거면 됬다. 나에겐 그것이면 충분하다. 코즈가 사실을 알고 다시 나와 같이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면...비밀을 하나 간직한 채로.....뭔가 빈 마음을 알고 살아가겠지만...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잊어가고 적응하게 될 것이다. 오츠네란 남자는 까맣게 잊고 일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로첸, 널 원망하지는 않아. 사고였으니까. 너도 나도 코즈도 몰랐던 사고였으니까. 어쨌든 고마웠어. 코즈에게 잘 이야기해준거...이제 안녕."
그래, 이제 끝이다. 내가 얻은 건 없다. 아니, 굳이 있다면 상상 못하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단 것, 생명을 잃는 것? 오츠네, 나의 친구, 내 인생의 소중한 사람 중 하나....대가는 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돌아가야 한다. 현실로, 그 외엔 방법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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