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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구. 님의 서재입니다.

정점의 DNA로 뉴 스타트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서지구.
작품등록일 :
2022.05.11 21:31
최근연재일 :
2023.01.01 00:00
연재수 :
203 회
조회수 :
207,622
추천수 :
3,569
글자수 :
1,721,531

작성
22.10.19 22:00
조회
385
추천
8
글자
26쪽

왕이 나셨도다

DUMMY

정점의 DNA로 New Start


145화



집회가 열리는 스페인의 메노르카 섬은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바다는 하늘을 닮아 에메랄드빛을 뽐내고 있다.


내륙의 대부분은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이요, 산을 깎아 만든 기암괴석들이 장관인데.


바람을 타고 오는 신선한 해산물 요리 냄새가 사람들의 침샘을 자극했다.


이번 경호 팀의 팀장을 맡은 석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


“크으~ 경치 죽이네. 의뢰만 아니었으면 꽤나 재밌었겠어.”

“따로 자유 시간 드릴 테니까 일단은 일에 집중 하시죠?”

“짜식이. 나를 뭘로 보고. 나 이제 팀장이거든?”


석호는 기존에 샘숭 경호 팀에서 부팀장을 맡다가, 이번에 내 개인 경호 팀을 꾸리며 팀장으로 스카우트 해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를 무시하며 이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서열정리가 끝난 이제는 그런 모습은 볼 수 없다.


애초에 능력은 탁월한 사람이다. 나름대로 경험도 많고. 새로 생긴 집단을 이끌기엔 최적의 인물이라 생각했다.


“애들아. 경치 좋고 따뜻하다고 해서 풀어지면 안 된다? 알지?”

“Yes sir!”


경호 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사실 이 정도 인원이면 ‘팀’이 아니라 ‘부대’로 보는 게 맞긴 하다.


총 인원 120에 중화기 담당 13명, 스나이퍼 둘, 혹시 모를 폭발물 처리반과 전차 승무팀까지 데려왔으니. 일종의 무력시위라고 봐도 무방하다.


초인류 협회고 나발이고, 이상한 꿍꿍이를 준비하면 다 찍어버릴 생각이니까.


살벌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저 멀리서 랜들이 맨발로 뛰어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상혁님! 오셨군요... 드디어. 드디어!”


못 본 사이 얼굴이 많이 초췌해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네. 이제 막 볼 일을 다 봤거든요.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차에 오르시지요.”


대형 버스 3대와 리무진 한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버스에 타려고 하자 랜들이 만류했다.


“어? 상혁님은 여기 리무진에 타셔야죠!”

“저는 경호 팀이랑 같이 탈래요.”


내가 리무진을 안 타봤으면 모를까. 미르네 자동차를 자주 얻어 타봐서 별로 관심이 없다. 승차감도 별로더구만.


경호원들만 따로 보내는 것도 악덕 고용주 같아서 마음에 안 들고. 버스에 타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그 증거로 내 행동에 감동을 받은 경호 팀원들이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크흡. 평생 따르겠습니다.”

“저래야 우리도 지킬 맛도 나고 그러제. 크으. 다른 사람들도 우리 고문님 반만 닮았으면 좋겠네.”


랜들은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버스에 올랐다.


“저희가 가려는 곳은 섬의 뒤편입니다. 사유지라서 협회 사람이 아니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지요.”


그는 앞자리에 앉아서 섬과 협회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묘하게 관광버스 가이드 같은 느낌이 났다.


“메노르카 섬은 휴양지로 알려져 있긴 합니다만 그 진가는 백사장이 아닌 절벽에 있습니다. 스페인의 건축가 가우디를 아십니까?”

“네.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안토니 가우디. 스페인의 전통 건축 양식을 재해석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창조해낸 건축가다.


곡선을 기반으로 한 건물의 외형과 타일 아트가 유명하다고 그랬나.


“맞습니다. 이 섬의 뒤편에 있는 절벽에는 가우디가 지은 성채가 하나 있습니다.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작품이지요.”


돈 많은 녀석들의 모임 아니랄까봐, 집회 장소부터 거창하다.


가우디의 건축물이면 국가적 유물일 텐데 그걸 사유지에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


“그런데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주로 활동한 걸로 아는데. 여기도 건물이 있어요?”

“저희 초인류 협회의 역사는 길답니다. 재능에 대한 집착은 그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돈으로 포섭했거나, 아니면 일원으로 받아들였거나.


둘 중 뭐가 되었든 만만히 볼 집단은 아닌 것 같다. 세계 각지에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뿌렸던 녀석들이라는 소리였으니까.


“자. 도착했습니다. 어떠신가요?”

“이건... 대단하네요.”


규모가 크다더니, 작은 마을 두 개 정도는 붙여놓은 크기의 성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기에 이렇게 큰 공간을 준비한 걸까.


크기에서 오는 폭력적인 장엄함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경호원 분들은 아무 건물이나 편한 곳에 짐을 푸시면 됩니다. 다만 저희의 인가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성 내부에 들어오시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경호 팀은 성채 내부의 마을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차별이 생활화 된 뻐킹 레이시스트들은 활동 구역마저 제한을 두고 있었다.


그의 권고를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자칫 잘못 행동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사유지에 들어간 이후부터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제는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마을이 가득 차지는 않았지만 느껴지는 것만 해도 어림잡아 천 단위. 경호 팀을 120명 데려 오길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


‘인원수가 조금만 딸렸으면 쪽도 못 쓸 뻔 했네.’


그래도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맥아리 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혁님. 성 내부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얼레. 바로 들어가요?”


10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곧바로 행사에 참석하라니. 조금은 쉬는 시간을 줄 줄 알았는데?


랜들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간곡히 말했다.


“쉬는 시간을 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기다리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발 사람 한 번 살린다고 생각하고... 부탁드립니다.”


이곳이 적진 한 가운데라고 하더라도 내가 ‘갑’이라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라면 꼴리는 대로 움직여도 된다는 소리.


초인류 협회 사람들이 나 하나만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도 꽤나 재밌을 것 같긴 하다.


내 눈동자가 빛나는 걸 본 랜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내 눈동자가 이렇게 빛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플로리다에서 지독하게 당했을 테니 모를 수가 없지.


랜들이 무릎을 꿇고 내 다리를 붙들었다.


“13번! 제가 오늘까지 협회에 집회 연기를 간곡히 요청했던 게 13번입니다. 제 비천한 능력으로는 더 이상은 10분도 지연시키지 못합니다. 탓하실 거라면 저를 탓하시옵소서.”


13번이라. 적은 수는 아니다. 그러고 보니 랜들이 주기적으로 메일을 보냈던 것 같다.


제발 와달라고, 더 이상은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하다가 나중에는 죽음을 결심한 것 같은 편지까지 보내더라.


“...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착한 내가 고생을 더 하는 수밖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소리도 있지 않나.


비행기도 나름 괜찮았고, 그동안 단련을 소홀히 하지 않은 덕에 체력도 나름 짱짱하다.


상대의 무리한 부탁도 들어주는 게 대인배의 자질이 아니겠나.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치하하고 있는데, 랜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뭡니까. 그 ‘진짜 착한 사람은 애초에 애태우지 않고 그냥 들어갔을 거’라는 오만불손한 눈빛은.”

“헉.”

“제가 나쁜 게 뭔지 보여줘요? 노 쇼(no show)라고 들어 보셨나? 대한민국으로 U턴 해요?”


나를 존경하고 내게 매달리는 것과 별개로 스트레스를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랜들이 탈수기를 10번 돌린 세탁물처럼 추욱 늘어졌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

“그래요. 들어가 보죠 뭐.”


성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개인 경호원은 3명까지. 석호를 비롯한 엘리트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성문을 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지,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시선들이 쏟아졌다.


기대감이 어린 시선, 살갗을 꿰뚫을 것 같이 따가운 시선, 전신을 샅샅이 훑는 것만 같은 끈적한 시선 등등.


다른 건 몰라도 모두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 하나는 분명하다.


평소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익숙한 내가 아니었다면 기가 죽었을지도 모를 압박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백색의 복장을 한 일련의 무리들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들의 복장은 로마 시대의 전통의상 토가와, 현대의 드레스가 섞여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성의 환경과 어우러져 정말 귀족, 특권층 같은 느낌을 주었다.


“따라오십시오.”


그들의 뒤를 따라 성 깊은 곳으로 향했다.


건물이 더럽게 커서 조금 많이 걸어야 했는데 의외로 심심하지는 않았다.


괜히 천재 건축가라고 불리는 게 아닌지 건물들이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교양이 늘어나는 기분이랄까?


곳곳에 놓인 가구나 명화들도 모두 진퉁, 최고급들이었고.


뭐니, 뭐니해도 가장 재미있는 건 사람 구경이었다.


“우와. 호아킨, 디카프리오. 저 사람은 누구지 몸이 그냥 돌덩이네.”


유명 인사들이 협회에 속해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듯, 심심치 않게 아는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축구선수, 배우, 격투기 선수로 추정되는 사람까지. 재능만 있다 하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포섭하는 듯하다.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내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저들은 회색 로브를 걸치고 있다는 점일까.


백색과 회색은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 걸까. 나는 무슨 옷을 받게 될까.


랜들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녀석은 먼발치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쫓아오고 있어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참고로 랜들도 회색 복장이었다.


“이곳입니다.”


도착한 곳은 커다란 분수대였다. 그 주위 좌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다.


실내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분수대의 구조를 살피다 보니 절로 감탄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사각형의 연못 끄트머리에 조각상들이 앉아 있다.


형태와 들고 있는 도구를 보아 짐작하건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로 보인다.


순서대로 무기를 들고 있는 아레스, 미모를 뽐내는 아프로디테, 책을 읽고 있는 아테나, 하프를 연주하는 아폴론 순.


그리고 그 가운데 압도적인 위압을 떨치고 서 있는 제우스까지.


세계적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더라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다.


찬찬히 주변을 살피고 있자니, 백색 옷의 사람 중 하나가 나아와 안내했다.


“분수대 가장 위로 올라가 피를 흘리십시오.”

“... 네?”


밑도 끝도 없이 따라오라 그래서 따라갔더니 다짜고짜 피를 흘리라고 한다.


“이게 뭘 하는 건데요? 의식 비슷한 건가?”


설명을 더 요구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백색의 로브를 입은 사람은 입을 꾹 닫고 지켜볼 뿐이다.


다시 분수를 살피니 보석으로 세공된 단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거로 손가락을 베던가 해서 피를 흘리라는 이야기겠고. 가장 위는 또 무슨 소리야.


잘 보니 제우스의 손에 간장 종지만한 접시가 하나 들려 있다. 피를 흘려야 하는 곳은 저 곳인 모양.


방법은 이제 알겠다. 왜 하라고 하는 지도 대충은 알겠고.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명도 없이 행동을 강제하는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길들이기다.


초인류 협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러한 절차를 겪어야 한다. 네가 아무리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이곳의 규율을 거스를 수 없다.


뭐 그런 이유일 터.


거기에 날 보는 백색 녀석들의 눈초리도 곱지 않다.


깔보고, 평가하려 들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봐주겠다는 눈빛. 나를 시험하는 모양새다.


오랜만에 내 안의 반동기질이 솟구쳤다.


선의에는 선의로. 좆같음에는 좆같음으로.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침이 되어주는 행동방식이다.


모든 걸 다 알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치로 백색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뭔데요?”

“...”

“의식이에요? 주술? 입단식? 테스트?”


대답이 없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고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몰라. 알려주기 전까지는 안 할래요.”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하나 둘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영어로, 또 어떤 이는 중국어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세계 각지의 비아냥거림이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럴 땐 내가 2개 국어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신경 안 쓰고 쌩까면 되니까.


“덜떨어진 어린애.”

“... 네?”

“모질이. 코찔찔이. 천박한 동양인.”


석호가 옆에서 친히 번역을 해주고 있다.


“내가 스페인어를 좀 할 줄 알거든.”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뱉는 이유는?”

“궁금할 거 같아서?”

“혀 뽑히면 어떤 느낌일지는 안 궁금해요?”


살벌한 경고에 석호가 입술을 앙 다물었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어보겠다고 한 거 같은데 여하간 유능한데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석호에게 경고를 주고는 백색 무리에 시선을 던졌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그들의 표정은 이제 일그러지기까지 하고 있다. 배짱을 부리는 내 모습이 고까운 모양.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기분이 편해졌다. 이대로 눈을 붙여도 쾌적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언제까지 저렇게 고집을 부릴 수 있을지. 열심히 해 보라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한가한 양반들이 아니다. 하나같이 유명한 사람들로 일 분 일 초가 금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거기에 백색 무리들은 여건이 더 안 좋다. 쟤들은 서 있지 않나. 이대로 20분 30분 있다 보면 서서히 다리가 아파올 터.


품격 있는 녀석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다.


다리가 저린 상황에도 여유롭게 서 있을 수 있을지 보자고.


내가 아예 눈을 감아버리자 그제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10시간을 넘게 날아와서 말이죠. 조금 피곤하네요?”


일정이 빡빡함을 꼬집자 상대의 말이 멎었다.


다음 사람은 조금 더 건방진 목소리였다.


“애새끼 같은 고집은 그만 부리시죠. 빨리 마치고 쉬면 될 것을.”

“다른 칼 없나요? 저 칼을 썼다가 파상풍 걸리면 어떡합니까?”

“이런 무례한! 저게 무슨 칼인지 알고!”


걸려들었다. 화를 내고 있는 백색의 남성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무슨 칼인가요? 설명 좀 해주면 좋겠는데. 해달랄 때는 입 꾹 닫고 가만히 있더니.”


다시 찾아온 정적. 그리고 한숨 소리. 자기들이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장년인이 한 발자국 나서며 출구를 가리켰다.


“나가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필요가 없으니. 랜들이 그렇게 간청했다기에 기대를 좀 했건만 실망이 크군.”


어차피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저 멀리 있던 랜들이 황급하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안 됩니다! 측정. 측정까지만 지켜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시끄럽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장년인이 경고했으나 랜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공들인 탑이 무너지는 걸 직관하게 생겼는데 경고가 문제일까.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걸어와 내 다리를 붙들었다.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저 분수대가 뭔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다 알려드릴 테니 부디 고정을...”

“필요 없어요. 이미 다 알고 있는데요. 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숭고하게 지키는 비밀을. 별 거 아닌 듯 폭로할 시간이다.


“저 분수대. 유전자 검사기잖아요.”

“... 그걸 어떻게?”


백색 무리 중 하나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랜들. 아무리 왕의 그릇이라고 해도 검증 절차를 밝혀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어긴 겁니까?”


어떤 이가 랜들의 멱살을 붙들었으나 그는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애초에 일언반구도 안 했기 때문에 정말 억울한 탓이다.


백색 무리의 시선에서 의아함이 느껴진다.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면 예술 작품을 보고 최첨단 기계를 떠올릴 수 있냐는 듯한 눈치다.


역시. 내 예상대로 저 분수대는 유전자를 분석하는 기계인 것 같다.


확인도 받았으니 나대다가 쪽팔릴 위험도 없다. 보다 거리낌 없이 내 두뇌가 추론한 내용을 들려주도록 하자.


“그렇잖아요. 신입이 들어온다고 해서 기존의 인원들이 다 구경 올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볼 만한 거리가,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게 있으니까 모였겠지.”


환경부터가 힌트나 다름이 없었다.


“그 볼거리가 뭘까 생각을 해봤는데 그 쪽 협회가 환장하던 게 뭔지 생각이 나더라고요. 재능. 다른 말로 하면 유전자.”


만약 이 곳이 유전자를 판별하는 곳이라면 저 인파도 설명이 된다.


보아 하니 이곳은 재능에 따라 신분이 나눠지는 것 같은데. 신입이 재능을 측정한다는 데 보지 않고 배길 수가 있나.


새로 들어온 사람이 무시무시한 중대장이 될 수도 있고, 풋내 나는 이등병이 될 수도 있는데.


유독 띠껍게 구는 흰색 복장이 회색 로브에 비해 상급자일 테고.


내 재능이 흰색 복장 급인지를 보기 위함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저 조각상도 미적 가치 말고 또 하나의 의미를 품게 된다.


“아레스는 힘, 아프로디테는 미, 아테나는 지혜, 아폴론은 예술. 저 분수대에 피를 흘리면 내 유전자가 어느 분야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나겠죠.”


침묵은 대체로 긍정을 의미한다.


어느새 회색 로브들의 시선에는 감탄과 흥미가 어린다. 불만을 토로할 때는 언제고 내 추론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 소질이 있는 경우, 압도적인 재능의 경우 제우스가 반응을 한다. 이를 왕의 재능이라 판단한다. 맞죠?”


내가 내뱉은 가능성이 이윽고 핵심을 찌른다.


흰색 복장들의 표정이 옷만큼이나 창백해졌다. 구태여 답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직 랜들만이 눈물을 흘리며 긍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먼저 맞아본 놈이라고 내 실력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다 아시면서 왜 그러셨습니까. 제 간이 떨어지는 걸 기어코 보셔야 했습니까?”


랜들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같잖아서요.”

“... 누가 말씀이십니까?”

“당신 옆에 있는 무리들이요.”

“제 옆이라면 선택받은 분들 뿐... 히익!”


고개를 돌리다 백색 옷의 무리와 눈이 맞은 랜들은 고개를 처박았다.


협회에 오래 몸을 담은 랜들에게 저 무리들은 신과 같은 존재인 듯하다.


그런데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정말 같잖을 뿐이다.


“그 쪽이 일부러 불친절하게 응대하는 이유도 그거잖아요. 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급이 안 맞아서.”


세계에서 재능 있는 놈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 막 천재라고 데려왔다가 덜 떨어지는 놈이라 판명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니 미천한 놈일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랑은 말조차 섞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그러다 만약 내 재능이 제일 높으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몰라. ‘아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대가리라도 박으려나?”


이유 없이 남을 하대했다면, 그러나 그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응당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분수대로 향했다. 그리고 보석으로 만들어진 칼을 집어 들었다.


녀석들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를 두 눈으로 지켜보기 위해서.


그릇을 들고 있는 제우스의 키가 꽤나 컸다. 웬만한 성인도 쉽게 닿지 못할 만한 높이였다.


‘이것도 보나마나 기죽이기의 일환이겠지.’


그들에게 간청하거나, 도움을 구하면 올라갈 방법을 알려주겠지.


그러나 나는 그런 게 필요 없다. 튼튼한 두 다리가 있었기에.


걷기의 DNA를 최대 출력으로 활성화시켰다.


쿵.


디딤 발에 땅이 미약하게 흔들린다. 그 충격을 반동삼아 뛰어 올랐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그 힘을 가일층 더했고, 뒤이어 발이 무언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점프 한 번으로 신 중의 신, 제우스의 머리 위에 오른 것이다.


여전히 실내는 조용하다. 그러나 이전과 비교했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궤가 다르다.


놀라움, 감탄, 기대, 경외. 설레는 감정들이 열기와 함께 상승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모든 DNA를 최대 출력으로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칼을 들어 팔목을 그었다.


혈관의 단면으로 튀어나온 혈액이 팔을 타고 흘러내려 그릇에 닿았다.


일정 수위까지 차오르던 그릇은 어느 순간 꿀렁이며 안으로 사라졌고.


뒤이어 분수대에 변화가 일어났다.


밑바닥에서 붉은 꽃봉오리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라, 아레스 조각상의 발치로 향했다.


그 꽃봉오리는 분수대의 끄트머리에 닿은 순간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호오. 힘과 관련된 재능을 가지고 있으시군요.”

“재능도 없는 버러지는 아니라는 소리인가.”


지켜보던 이들이 내 재능에 대한 해석을 늘어놓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협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만하나, ‘힘’이라는 재능이 원래 다른 재능에 비해선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다.


나는 그들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저렇게 열심히 떠들어대서야. 나중엔 어떡하려고.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분수대의 중앙에서 꽃봉오리가 한 송이 더 떠올랐다.


“하나 더? 두 개 분야에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오랜만인데. 어느 쪽으로 가려나.”


두 번째 꽃봉오리는 아테나에게 가서 활짝 피어올랐다.


“힘에 이어 지혜까지. 문무겸비라. 저분도 선택받은 분이셨군.”


관객들의 소란이 더욱 커졌다. 내가 백색 복장을 입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실제로 백색 복장의 무리들은 그렇게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나에게 그렇게 꼿꼿하게 굴었는데 내 재능이 그들을 위협할 정도이니, 지금이라도 태도를 고쳐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리라.


바로 고개를 조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자존심 때문일 것이나.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곧바로 세 번째 꽃봉오리가 솟아나 아프로디테에게 향했다.


“세 번째! 지금 계신 분들 중에도 세 분야의 재능을 가지신 분은 없는데...”

“아니 역대로 찾아봐도 한 명 정도였던 걸로 알고 기억해. 그분은 ‘이끄는 자’셨고.”


사람들의 눈에 불신의 빛이 서렸다. 그러나 의외로 쉽게 납득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긴. 저렇게 잘생겼는데. 미의 재능은 없는 게 이상하지.”

“인정.”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물결도 결국 하나의 바다에서 만난다는 뜻으로, ‘미’의 기준 역시 마찬가지.


동양의 아름다움이든 서양의 아름다움이든 각자의 특색이 있을 뿐, 잘생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들 중 여성들에게 빠르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쯤만 해도 건방진 녀석들을 찍어 누르는 데는 충분하지만, 텅 빈 아폴론 쪽을 보니 욕심이 솟아났다.


이왕 정점을 찍을 거라면 모든 분야의 탑에 오르는 게 멋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폴론 쪽은 솟아날 기미가 안 보였기에 DNA의 출력을 더욱 올렸다.


이미 한계에 이르렀지만 온 몸의 기관이 터져나갈 기세로 더욱 거세게 DNA를 돌렸다.


새로운 DNA를 반영한 혈액이 심장의 박동에 맞춰 뿜어져 나왔다. 이전보다 한층 붉어진 피는 그릇을 채우다 못해 흘러 넘쳤다.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움이 올라왔다. 그래도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 아무리 세 가지 영역에서 활성화를 하면 무얼 한단 말인가.


마지막에 용을 쓰다가 실패하면 개쪽인 것을.


그래서 이를 악 물고 버텼다. 그리고 분수대의 중앙을 노려보았다.


흘러넘치는 피에 사람들의 걱정하는 소리가 하나 둘 튀어 나올 즈음.


한 송이의 꽃이 퐁 튀어 올랐다. 그 꽃은 유유히 흘러 아폴론에게 향했고, 더 없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네 번째!”

“모든 영역에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남은 DNA들 중 예술에 걸맞은 DNA가 있던가? 있어봐야 행운? 그래도 지금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성취감이 뒷목을 타고 짜르르 흘렀다. 등이 오싹해짐과 동시에 형언하기 힘든 쾌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가장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만족스럽게 즐기고 있는데, 분수대에서 퐁 소리와 함께 꽃봉오리 하나가 더 솟구쳤다.


“어라?”


소란스럽던 실내의 잡담이 뚝 그쳤다. 모두가 갑자기 솟아난 또 하나의 꽃봉오리를 경악스럽게 보았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퐁, 포봉, 포보보봉.


고장난 슬롯머신을 보는 것처럼 분수대 중앙에서 꽃봉오리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붉은 꽃잎이 분수대를 화려하게 수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이제는 거의 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는 내 재능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처럼 꽃 위로 꽃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 인류는 자연스레 겸허해지는 법이었다.


“음... 너무 과했나?”


나름 최첨단인 기계가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DNA를 전력으로 때려 박았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보는 맛은 있었다. 저 만발한 꽃을, 유명 스타들의 경악한 표정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그 어떤 도시의 경관을 보는 것보다 즐거웠으니.


그 순간 제우스의 번개가 깜빡였다. 이거 원래 발광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거였나.


꽃봉오리가 재능의 증명이라면, 제우스의 번개는 왕의 자격을 의미한다.


정확히 어떤 요소에 반응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한국에서 온 11살 소년이 세계의 온갖 재능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제일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


그야말로 정점의 DNA를 세계에 선보였다는 사실을.


그 순간 반짝이던 제우스의 번개에서 형언할 수 없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감히 우러러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밝은 빛이, 찬란한 광채가, 아름답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켜보던 관객들이 하나 둘 그 앞에 엎드려 새로운 왕께 경배를 드렸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 선호작, 댓글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매번 챙겨주시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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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의 DNA로 뉴 스타트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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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대회의 22.10.26 374 7 24쪽
149 왕인 줄 알았는데 종마였던 것에 대하여 22.10.25 362 5 16쪽
148 은총 더 많은 은총 22.10.22 359 7 20쪽
147 붕당정치 22.10.21 367 8 17쪽
146 귀족이 뭐라고 22.10.20 380 5 21쪽
» 왕이 나셨도다 22.10.19 386 8 26쪽
144 이제는 세계를 향해 22.10.18 396 6 18쪽
143 학생회의 일상 22.10.15 398 7 15쪽
142 선생 공아린의 수난 22.10.14 393 8 24쪽
141 내가 할 수 있는 것 22.10.13 395 5 19쪽
140 연설 22.10.12 402 8 21쪽
139 악몽의 밤 22.10.11 411 6 18쪽
138 모략이 가득한 선거활동 22.10.08 441 6 22쪽
137 학생회장 후보가 되다 22.10.07 443 8 19쪽
136 석유재벌의 금고 열쇠를 얻다. 22.10.06 445 10 21쪽
135 상승기류2 22.10.05 434 6 20쪽
134 상승기류 22.10.04 422 9 14쪽
133 Do you know 김치? 22.10.01 455 6 21쪽
132 플로리다의 중심에서 붉은악마를 외치다 22.09.30 459 9 21쪽
131 플로리다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다 22.09.29 458 9 24쪽
130 한국인의 정서 22.09.28 456 9 17쪽
129 플로리다에 가다 22.09.28 474 9 18쪽
128 형 노릇 22.09.27 489 6 18쪽
127 재활용 22.09.24 514 10 20쪽
126 역으로 돌려주다 +2 22.09.23 506 11 17쪽
125 마지막 실험 22.09.22 507 10 17쪽
124 스트레이트 한 방에 22.09.21 518 10 17쪽
123 vs 남미르 22.09.20 508 10 21쪽
122 대적자 해체, 분석 22.09.17 509 10 21쪽
121 전초전 22.09.16 547 1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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