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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구. 님의 서재입니다.

정점의 DNA로 뉴 스타트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서지구.
작품등록일 :
2022.05.11 21:31
최근연재일 :
2023.01.01 00:00
연재수 :
203 회
조회수 :
207,614
추천수 :
3,569
글자수 :
1,721,531

작성
22.09.20 21:54
조회
507
추천
10
글자
21쪽

vs 남미르

DUMMY

정점의 DNA로 New Start


123화



내가 ‘전국 상반기 수학경시대회’에 나온다는 사실은 꽤나 큰 화제가 되었다.


똑똑하고 영민한 학생이 경시대회에 나가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 가지고 무슨 화제냐 싶겠지만.


박상혁과 남미르의 정면 대결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니어 수학 올림피아드를 차지하며 왕좌에 오른 박상혁과, 최근 열리는 모든 대회의 상을 쓸어 담은 샛별 남미르.


둘의 대결은 사람들의 기대와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왕이 도전자를 피하는 모양새였으나,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갑자기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을 선택했다.


평소 교육 업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스토리가 짜여졌다.


여태껏 그래왔듯 왕이 압살할 것이냐, 아니면 신성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냐.


하다못해 달팽이와 거북이를 경주시키는 사람들이다. 다들 편을 나누어 열기를 더하며 토론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상혁이지. 올림피아드야. 가장 권위 있는 대회 우승자. 여기서 뭐가 더 필요해?”

“쿠후후. 하나 빼먹은 게 있지 않습니까? 그 대회에는 미르군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만약 미르군이 대회에 참가했으면 우승자도 달랐을 겁니다!”

“이 사람아! 공부에 만약은 없는 거 몰라? 니네 아들도 만약 공부 더 했으면 대학도 잘 가고 취업도 잘했겠지!”

“어... 지금 가족 건드시는 겁니까? 저의 주먹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경쟁 컨텐츠가 그러하듯 끝은 폭력과 파멸뿐이었지만 말이다.


시험장의 소란을 잠재운 것은 다름 아닌 남미르.


그가 기다란 벤츠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여나 미르의 신경을 거스를까봐.


고작 8살짜리임에도 그에게는 남들을 자연스럽게 발아래 두는 위엄이 있었다.


구경꾼들은 그의 행보를 기대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특별한 사람은 특별한 행동을 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런데 미르는 시험장을 한 바퀴 돌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한 번 찼다. 그리고는 다시 시험장의 문 앞으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상행동의 이유는 흰색 봉고가 시험장을 통과한 이후에야 파악할 수 있었다. 봉고에서 상혁이 내리자 미르가 콧김을 내뿜으며 그를 향해 쇄도했으니 말이다.


“박상혀억! 오늘도 도망가는 줄 알았다!”


* * *


얘는 할 짓도 없나. 입구에서 이렇게 대기를 타고 있을 줄이야. 집착 하나만큼은 정점의 자리를 양보해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


“상혁아 무슨 일 있냐?”

“아뇨. 할아버지. 정신이 이상한 친구여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그래. 근방에서 친구 만나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연락하거라.”


봉고는 모두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유유히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열심히 손을 흔들어 배웅한 뒤 나 역시 시험장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작은 손이 나의 어깨를 콱 짓눌렀다.


“무시라니. 뭐하자는 거지? 아니. 그보다 정신이 이상하다는 건 무슨 소리냐. 싸우자는 거냐?”


안타깝게도 미친 사람은 스스로 미쳤는지를 모르는 법이다. 아직도 꽃꽂이 학원에 쳐들어왔을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내가 말없이 안타까운 눈빛만을 보내자 녀석이 흥분한 듯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네가 아니냐!”


그것도 그렇긴 하다. 근엄한 캐릭터를 유지하던 애가 한 3개월 도망 다니니까 캐릭터가 변하더라고.


자신의 숙원을 이뤄야 하는데, 도통 기회가 나지 않으니 자기도 모르게 조급해지는 모양이다.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자 경멸 어린 시선과 함께 욕설을 내뱉은 미르.


“추악한 기만자 녀석. 친하게 지내자고 할 때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구나. 드디어 가면 속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게지.”


잠깐. 이 말은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었다.


“... 너 등신이냐?”

“뭐?”

“선빵 때려놓고 잘도 친하게 지내겠다.”


‘신성’이라더니 ‘얼빵’이라고 호칭을 바꿔야겠다. 친하게 지내자 그런 건, 아직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의 이야기고. 그렇게 난장판을 쳤으면서 상대가 순하게 있기를 바라다니. 누굴 호구로 아나.


상황이 바뀌면 태도 또한 바뀌는 게 당연한 일인 것을.


미르는 말을 더듬으며 공세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 이제 와서 이빨을 드러내도 소용 없다! 그래봤자 나한테 공개적으로 패배한 개 아닌가.”


꽃꽂이 패배도 패배라면 패배다.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려 세상의 진리를 모르는 모양이다.


이 세상은 마지막에 이긴 사람을 기억하는 법.


“그래서 오늘 왔잖아. 너를 짓누르려. 기다려.”


말을 마치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미르는 더 이상 나를 잡지 않았다. 그저 ‘하. 하하! 드디어 기회가 왔군! 이기는 건 내가 될 거다!’라고 나의 등을 향해 외칠 뿐이었다.


시험장 내부로 들어가니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참가자도 참가자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심사위원의 수.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십은 되어 보인다.


원래 참가자랑 심사위원의 수가 비슷했던가? 내가 참석 안 한 사이 트렌드가 바뀌기라도 한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너랑 미르 때문이란다.”


평소엔 그냥 엄한 장년인으로 보이지만, 공부에만 관련되면 눈이 돌아가는 변태적인 남자. 교류회 회장 이송혁이다.


“평소라면 그냥 1등을 뽑고 말았을 거란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공동 1등의 확률이 너무나도 높잖니?”

“그러니까 채점을 빨리 채점을 하고 재시험을 보려 하는데, 지원자가 많아 시간이 걸릴까봐 이렇게 잔뜩 동원했다 이거죠?”

“그래. 역시 똑똑하구나.”


인원수가 많을수록 채점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검수도 해야 하고.


그러면 흐지부지 해지기 때문에 차라리 많은 인원을 투입하여 빠른 진행을 하겠다는 소리다.


그런데 왜 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만 같을까.


심사위원들이 동원 된 것 치고는 다들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기 때문 아닐까?


교류회 회장도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민망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물었다.


“그래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이번 대회를 선택한 이유는 있어?”


그 역시도 이번 대결을 기대하고 있던 호사가들 중 하나였던 모양.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교류회 회장 이송혁 정도면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후원도 해 줬고, 우리 빵집 단골손님이었으니까.


“공부 중에는 수학이 제일 깔끔할 것 같아서요. 국어는 추상적이고, 영어는 단어 암기 싸움이고. 메이저 과목 중에 수학이 가장 머리싸움이 어울리는 영역이잖아요.”


수학자들은 그런 부분에서 은근히 프라이드가 높았다. 수학이야말로 진정한 탐구의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학문이라며.


송혁 또한 공감하는 듯,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뇌싸움이라. 그렇다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소리구나.”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비슷한 부류였던 교장은 나 말고 미르를 택했다. 공부 전문가인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손가락을 두드리더니 운을 뗐다.


“나는 학계에 인물이 나오면 나올수록 좋다고 생각한단다. 누가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도.”

“그래도?”

“하나만 뽑는다면... 너랑 같은 의견일 것 같구나.”


나랑 같은 의견이라. 당연하게도 나는 나의 패배를 점치지 않는다.


회장을 짬밥 순으로 뽑는 건 아닌 듯하다. 보는 눈이 있다.


“아. 이제 시작할 것 같구나. 기대해도 되겠지?”

“그럼요.”


짧게 대답하고 배정된 자리로 향했다.


숨을 고르고 두뇌의 DNA의 출력을 한계까지 올렸다.


“후우.”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내가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적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미르는 신이 나를 없애기 위해 준비한 인공 생명체나 다름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외계인이다.


날 잡아먹으려 하는 프레데터와 싸우는데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전력을 다해, 모든 것을 부딪혀, 결국에는 이겨낼 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심사위원의 허가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각거리며 필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이라면 문제를 확인하고, 푸는 순서를 정할 시간인데 벌써부터 저런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문제를 받자마자 바로 풀이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소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마치 원래 있어야 했을 배경음악처럼.


사람이라면 숨도 돌리고, 잠시 헤맬 법도 한데 일절 그런 게 없다.


컨닝 우려 때문에 고개를 돌리지는 못하지만, 위치상 미르가 있는 곳이 분명하다.


빨리 풀기 대회가 아닌, 높은 점수를 맞는 대회임에도 저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대항심이 높구나 싶다.


어차피 상대도 100점일 테니, 먼저 풀어서 실력을 뽐내겠다는 것.


바보 같은 생각이다만 나이가 어려져서 그런가, 저런 바보 같은 경쟁이 싫지만은 않았다.


조금 스타트가 늦긴 했다만 오히려 이 정도 핸디캡이 딱 어울린다.


오랜만에 전력을 다할 기회를 만난 두뇌는 성난 황소처럼 스팀을 뿜고 있었으니까.


‘준비됐냐 두뇌?’

‘조용. 빨리 문제나 풀어라. 1번에 공식은...’


참.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다. 어쩌면 그만큼 미르에게 지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고.


그 후로는 두뇌가 시키는 대로 빠르게 풀이과정을 적어내릴 뿐이었다.


제한시간 2시간 중 19분이 지날 즈음 두 사람이 손을 들었다.


시간 상 제출을 할 타이밍은 아니다. 평범한 아이었으면 화장실이 가고 싶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 한해서는 그럴 일이 없다. 앉아서 문제만 풀었음에도 저렇게 땀을 흘리고 숨을 헉헉 거리는 걸 보니,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심사위원은 시험문제를 걷으러 나오려다 멈칫했다.


누구의 시험 문제를 먼저 걷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타이밍 상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모션 카메라가 있으면 모를까.


위치가 가까운 쪽은 이 몸, 하여 심사위원도 나에게 향했다.


그러자 미르가 있는 곳에서 덜컹 소리가 났다.


말을 하면 실격이니 책상을 걷어찬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학생들이 방해받던 말던 그는 살의를 담은 눈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그 쪽에 먼저 가면 죽인다는 것처럼. 심사위원도 찔끔할 수준급의 살기였다.


그래서 슬그머니 뒤를 돌려고 했으나, 곧이어 우뚝 멈췄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감히 어딜 가려고. 내가 잔잔한 미소를 띄우자 그는 돌처럼 굳어 이내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결국 다른 심사위원 한 명이 더 투입되어 동시에 답안지를 회수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예측했던 것만큼이나 초장부터 강하게 부딪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 41분이 더 흐르고 시험이 끝이 났다.


채점 도우미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것처럼 빠르게 다가와 시험지를 거두어갔고.


이례적으로 채 20분이 흐르지 않아, 등수가 밝혀졌다.


미르와 나, 두 사람 모두 백 점이었다.


운영측은 예상을 했던 것처럼 동점자들을 대상으로 재시험을 치룰 예정을 밝혔다.


100점을 맞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후다닥 상패를 나눠준 뒤 귀가조치를 취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들러리가 된 듯한 기분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대우를 해 준 것이 맞다.


까고 말해서 그냥 두 사람만 데리고 시험을 열어도 되는 것을 대회 시늉이라도 낸 거니까 말이다.


다른 학생들은 그 격차에 분해하면서도, 순수하게 경외심을 드러냈다.


“진짜. 저 두 새끼 사람은 맞냐?”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질투나 견제도 급이 맞아야 할 수 있는 법, 그들은 그저 큰 산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동경하고 깨달음을 얻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태산도 급이 있고, 가장 높은 산은 하나라는 사실을.


그 증거로 시험이 끝난 이후로 미르가 계속 이 쪽을 야리고, 아니 째려보고 있지 않나.


몸도 파들파들 떠는 것이 조금이나마 밀린 것이 참을 수 없이 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점수도, 낸 시점도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가 판정승을 거두었으니까.


내가 더 늦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음에도, 내는 시간은 같았다.


푸는 속도가 그만큼 빨랐다는 소리다.


쓸 데 없는 공식들을 제거하고 딱 필요한 부분만 적어 내렸으며. 정점에 이른 팔 근육이 속도를 더해주었다.


유치하게 싸움을 건 쪽이, 치욕적으로 패배했다. 수치심이 말이 아닐 것이다.


녀석은 입술을 짓씹으며 다음 시험지만을 기다렸다. 다음은 다를 거라 중얼거리는 것 같다.


인원들이 하나, 둘 빠지는 동안 심사위원들은 다음 문제지를 꺼내 들었다.


이제부터 본 게임이라면서. 아예 첫 문제부터 중학교 난이도를 박아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눈에 흥분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문제 출제는 그들이 한 거겠지.


천재들이 자신이 준비한 문제를 얼마나,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 변태적으로 흥미를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얼핏 보니 시험지의 분량이 꽤나 많다. 동점이 계속 나올 경우를 염두에 둔 모양.


무대는 준비되었다. 이렇게 철저하다면 전력을 다해 부딪힐 수 있을 터.


오랜만에 호승심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부딪쳐 쓰러트리고 짓밟으리라.


잠깐의 정비를 마치고, 대적자와의 승부가 다시금 재개되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또다시 동점이라는 소리를 들은 뒤, 새로운 시험지를 받아든다.


이 과정이 끝이 없이 반복되었다. 저녁을 먹고, 날이 어두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두 사람 모두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 제가 이긴 건가요?”

“그건... 아니지?”

“그럼 계속 할래요.”


미르는 완고했다. 나 또한 시험지가 남아 있으니 조금 더 해보고 싶다고 빼지 않았다.


상대가 저렇게 꾸역꾸역 버티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대결이다. 내가 2살 더 많았으니까.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에 2살은 아주 큰 개념이다.


뇌의 발달 여부, 한 가지에 몰입할 수 있는 집중력, 버틸 수 있는 체력까지.


모든 조건에서 내가 유리했다. 다 푼 시험지가 20장이 넘어가자 미르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내 쓰러지지는 않았다. 꺾일 법할 때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더니, 머지않아 다시 쌩쌩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늘만 봐도 기운이 충전된다니, 눈앞에서 보니 더 어이가 없는 사기 능력이다.


사실상 도전 코인이 무한한 상대와의 대결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고작 저런 능력 따위로, 내가 쌓아올린 것들을 넘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몸도 두뇌도 정신도 10년 동안 정성스레 가꾸고 닦았다. 굳게 쌓아올린 실력은 요행 따위에 뚫리지 않으니.


오히려 즐거운 부분도 있었다. 그간 상대했던 적들은 몇 대 때리니 재기불능이 되어버렸으니까.


알아서 피통을 채우고 무한하게 일어나는 샌드백이라. 치는 맛이 조금 있을 것 같다.


* * *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어느새 달이 지고, 어슴푸레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날밤을 세운 것이다.


마지막 즈음에는 문제지가 다 떨어져 출제자들이 새로운 문제를 낸다고 머리를 싸맸는데 결국 우리가 푸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들도 사람이고, 중년인지라 아침에는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승리자는 없었고, 패배자는 출제위원들이었다. 위원들은 무릎을 꿇고 공동 1등으로 처리하게 된 것에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최고의 승부를 보게 해 주어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다 큰 어른이 질질 짜는데 독하게 계속할 수도 없었고, 미르와 나는 무승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승부라기엔 미르 쪽은 너덜너덜해진 반면, 나는 비교적 멀쩡했지만 성적으로는 무승부가 맞다.


꼭 1등을 차지하겠다던 미르의 태도가 변한 것은 내 지분이 크다.


이제 도망치지도 않겠다. 다시 겨룰 기회가 또 없겠냐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미르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의 정전제의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바로 오늘 대한제일 빵집과 성X당이 우위를 가리기 위해 같은 방송에 출연하기로 되어있다.


집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나가면 시간이 얼추 들어맞았다.


그러니 지금의 무승부는 끝이 아닌, 길고 긴 연장선상의 일부에 불과하리라.


미르는 밤을 세우고도 살벌한 기세를 띄우며 집으로 돌아갔다.


두고 보자! 다음은 다를 것이다! 등 하나도 안 무서운 대사를 외치면서 말이다.


나는 그저 그를 향해 지긋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참고로 거짓말은 안했다. 다음에 부딪힐 일이 있을 거라고만 말했지, 그게 제빵 방송이 될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하품을 쩍쩍 하며 집으로 돌아가, 그대로 숙면을 즐겼다.


푹 자고 일어나 보니 미르로부터 문자가 잔뜩 도착해 있었다. 얘는, 번호도 안 알려줬는데 어떻게 안 거지.


미르 – 너!!!! 이 자식 어디 간 거냐! 약속은! 승부는?!


이와 비슷한 내용이 1분 단위로 쌓여 있었다. 참고로 지금도 오는 중이다.


녀석의 손가락을 배려하여 친히 답장을 보내주었다.


상혁 – 집인데. 나는 엄마를 믿거든.


아무리 상대가 성심X이고, 재벌 부자여도 대한제일 빵집이 밀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국 최고의 제빵사 봉식이 있고,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엄마가 있었으니까.


거기에 제이에게 연락을 넣었으니 샘숭도 사력을 다해 도와줬을 터.


그래서 결과는? 무승부였다. 승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상대의 진을 빼어 놓는 것에는 성공했다.


사실 이길 뻔도 했는데, 미르가 눈에서 불꽃을 뿜으며 무승부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고생한 미르를 위해 문자를 하나 더 남기기로 했다.


상혁 – 너 영화 찍는다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배역 뺏긴다.


답장이 바로 왔다.


미르 – 뭐? 네 녀석 나와 배역을 가지고 다투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거짓말을 할 수는 없기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미르가 참여한다는 영화에 추가 면접이 있었다.


미르로부터 문자가 또 도착했다.


미르 – 네 녀석. 또. 또 안 나왔겠다? 그러면서 저런 괴물을 보내?


녀석이 말하는 괴물이라 함은 나의 마지막 비밀병기 유한별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부탁을 하니 온 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더라. 동생에게 의지를 받는 게 오히려 보람차다나.


내 꿍꿍이만을 위해서 추천한 건 아니다. 미르가 선점한 영화이니만큼 꽤나 흥행할 작품이며.


그녀의 연기에 있어서도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미르는 남자다. 한별 누나는 여자고. 여자가 남자 역할을 도전하는 건 연기로써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과 같다.


나이도 어리겠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한별의 엄마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며 적극 찬성해주었다.


미르는 열연을 펼쳐 배역 방어에 나섰지만, 한별도 쉬운 상대는 아니다.


어려서부터 단련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며, 어머니가 국민배우다. 연기 한정으로 밀릴 것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영화감독의 고민이 깊어졌다는 소문이 어깨 너머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미르로부터 전화가 왔다.


“뭐 하는 거냐! 왜 다른 녀석들을 보내는 거지?”


일부러 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뿐만 아니라 배터리를 뽑아 두었다.


그리고 들리지 않을 상대에게 답해주었다.


“이건 사냥이니까.”


그래. 이건 사냥이었다. 상대는 코스믹 파워라는 정체불명의 힘을 사용하는 괴물이다.


다행히도 괴물의 뿌리는 인간. 인간은 무리를 하면 지치는 법이다.


나는 그 부분을 공략하기로 했다.


미르는 나를 견제한답시고 벌려놓은 판이 많았다. 책임 때문이라도 참석할 수밖에 없고, 나의 지인들로 인해 피로가 더욱 심해졌을 터.


아무리 우주에게 기운을 받는다고 해도, 꽤나 소모 값이 심할 터.


일부러 첫 승부를 공부로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무승부와 재경기가 많이 나오니 붙잡아두고 상대의 능력을 소모시키려고.


소모전으로 갈 생각이 아니었으면 벌써 내가 준비한 ‘남미르 파훼법’으로 승리를 차지했겠지.


호승심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의 승리보다 온전한 제압을 염두에 두고 한 선택이다.


다음 승부는 종합 무술 겨루기 대회. 내가 녀석을 짓밟고 최종 승리를 차지할 대회이기도 하다.


내가 인터뷰를 통해 출전 의사를 밝혔으니, 미르는 피곤해 뒤질 것 같아도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사에 그렇게 도발을 써 놨는데 안 오면 꼬마가 아니라 붓다겠지.


치사하지 않냐고? 벼락 맞고 우주의 기운 쓰는 놈이? 내가 정당하게 이룬 게 아니꼬와서 깽판 치는 녀석이?


나에게는 삶이 걸린 문제다. 그리고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


거의 다 왔다. 이제 저 탐스러운 먹잇감의 목덜미에 날선 이빨을 박아 넣으리라.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추천과 댓글, 선호작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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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대회의 22.10.26 374 7 24쪽
149 왕인 줄 알았는데 종마였던 것에 대하여 22.10.25 361 5 16쪽
148 은총 더 많은 은총 22.10.22 359 7 20쪽
147 붕당정치 22.10.21 367 8 17쪽
146 귀족이 뭐라고 22.10.20 380 5 21쪽
145 왕이 나셨도다 22.10.19 385 8 26쪽
144 이제는 세계를 향해 22.10.18 396 6 18쪽
143 학생회의 일상 22.10.15 397 7 15쪽
142 선생 공아린의 수난 22.10.14 393 8 24쪽
141 내가 할 수 있는 것 22.10.13 395 5 19쪽
140 연설 22.10.12 402 8 21쪽
139 악몽의 밤 22.10.11 411 6 18쪽
138 모략이 가득한 선거활동 22.10.08 441 6 22쪽
137 학생회장 후보가 되다 22.10.07 443 8 19쪽
136 석유재벌의 금고 열쇠를 얻다. 22.10.06 445 10 21쪽
135 상승기류2 22.10.05 434 6 20쪽
134 상승기류 22.10.04 422 9 14쪽
133 Do you know 김치? 22.10.01 455 6 21쪽
132 플로리다의 중심에서 붉은악마를 외치다 22.09.30 458 9 21쪽
131 플로리다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다 22.09.29 458 9 24쪽
130 한국인의 정서 22.09.28 455 9 17쪽
129 플로리다에 가다 22.09.28 474 9 18쪽
128 형 노릇 22.09.27 489 6 18쪽
127 재활용 22.09.24 514 10 20쪽
126 역으로 돌려주다 +2 22.09.23 506 11 17쪽
125 마지막 실험 22.09.22 507 10 17쪽
124 스트레이트 한 방에 22.09.21 518 10 17쪽
» vs 남미르 22.09.20 508 10 21쪽
122 대적자 해체, 분석 22.09.17 508 10 21쪽
121 전초전 22.09.16 547 1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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