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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3,017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1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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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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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1권 (14)

DUMMY

전과는 달리 업무를 다 마친 상태였었다. 그 때도 거의 마쳤을 무렵이었지만, 이번에는 한결 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넓찍한 책상 주변을 포위하던 종이문서들은 일당백에 의해 사라져 있었다. 소파 위에서 등을 뻗고 편히 쉬고 있는 게, 내가 여태껏 겪을 일과 비교해 보면 훨 나은 환경이었다.

그나저나 흐느적거리고 있는 팔인지 다리인지 모를 것들을 보면서 이 세계의 안마사들은 저걸 어떻게 처리할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한 나도 비교적 여유로웠다고 본다.


"맞은 편에 앉아."


4개의 다리가 소파를 가르켜서 착각할 일은 없었다. 사전에 들은대로 라데르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 이 가운데에서 움직여 소파에 앉으러 갔다. 한 가지 오류는 "사전에 라데르가 말했다."고 되어 있는데, 실은 까먹어서 그 부분을 못 적었다. 이렇게나마 적어서 오류를 퉁치기로 한다.


"이제 적응이 되었니?"


이런 질문은 듣는다면, 누구나 이렇게 대답했었을 것이다.


"되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뼈 빠지게 고생한 보람 덕분에 이 세계로 오기 전에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도 까먹고 있었다. 온갖 잔머리들을 떠올리며 난리를 쳤던 과거는 여기엔 없었고, 훈련 아닌 노동을 매일매일 실행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적응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좋고, 아니 그래야지. 우리 라데르가 그런 건 잘하거든."


라데르가 코 한숨을 내뱉는 것을 보면, 잘하는 분야는 아니란 소리였다.


"혹시 돌아가고 싶다는, 그런 회의감! 그런 건 없니?"


이상하게 회의감에 악센트가 붙은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래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직후 깨달았다.


"없다고, 봅니다."

"흠, 그래?"


잠시 말하고서 이게 맞는가, 의심했지만 이것 역시 틀린 말을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지금에선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가, 진행형으로 잘 알고 있어서 도피하고 싶다며 조삼모사로 느끼고 있긴 했다.

그렇다고 전 세계로 돌아가는 길은 결코 내가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마음이 황폐해져 버린 세계에서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가능성을 따지자면 그나마 이곳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불러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무척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깁니까?"

"애석하게도 그런 기능은 없어. 불가능해."


상급자란 것은 모조리 하급자를 짜증나게 하는 궁리를 하는 녀석들이다, 이런 편견을 갖게 한 사람들 중 하나를 꼽자면 이 분은 무조건 들어간다.


"살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기에는 이게 효과가 매우 좋아. 방금처럼 마치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는 것 마냥 잠시 믿어버리니까 딜레마에 빠지잖아?"

"살··· 의향?"

"가급적이면 살아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멋대로 끌고와서 미안하긴 한데도, 그런 타인의 의지에 휩쓸리지 않는 인생이란 게 어디 있겠니? 그럼에도 특히 넘어온 사람들이 자살 시도율은 현저히 높더라고, 개인이면 좋아도 집단 자살까지 나온다니까. 그래서 물어보는 거지."

"······."


자살이라니, 이해는 가지만 공감까지는 되지 않은 소리였다. 나야 완전히 미련을 버려서 그러지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었다면 이딴 기괴한 세계에서 죽어서라도 탈출하고 싶었을까? 기과하다고 해도 어떤 신화보다도 인간적인 세계라서, 다만 라데르의 그것은 그로테스크하니까 완전 부정은 할 수 없었다.


"이곳이 살벌하긴 하지. 나도 살벌하고, 허나 살벌해서 못 살 것 같았으면 그게 그들만의 공감대였을까. 난 이 살벌한 시기가 마음에 드는데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라데르가 물리적으로 압도적이라면, 이 아라크네는 심리적으로 압도적이었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 남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떼싸움으로 두세 명 죽는 것에서 전투 한 번으로 1, 2백 명 죽는 걸로 바뀌었다는 얘기지. 피 냄새가 매일 진동하는 것은 우리도 역겨워. 단체 대 단체가 그나마 좀 신사적이지 않니?"

"신사적···?"


도무지 모르겠다. 신사적이란 단어가 이런 곳에서 쓰일 수가 있는지 난 모르겠다. 어쨌거나 살인이라는 행위가 적나라하게 가미된 게 신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조금 더 신사적이라,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항상 그렇다.


"근데 그거 아니?"

"무얼 말입니까?"

"한 번 화목하게 모여서 생활하면 이런 일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드디어 깨닫게 돼. 언제라도 누군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경험을 하고 나니 매료된 거지, 이처럼 단화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우린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몇 백 년이나 날려 먹었었지."


계속해서 무안하게 살벌한 말을 내뱉다가 뜻깊은 말이 흘러나왔다. 굳이 종족이 아니라도 집단 간의 갈등은 동족이더라도 나타날 수 있는 일인데, 여기는 종족이라는 게 명확히 정해져 있으니까 갈등의 이유가 확고했었다는 말로 해석했다. 목적과 명분이 있으면 싸워도 이상할 것 없다, 이렇게 받아들였을 터였다.


"그래서 지금은 말이지, 아라크네가 바실리스크와 갈등 없이, 계급만 다르지 막 다리로-"


말만 늘여놓을 줄 알았더니 발을 길게 뻗은 저 분은 라데르를 향해 투구 깨기를 시전했다. 접혀 있어서 몰랐던 다리의 길이에 놀라고, 탁 소리가 난 라데르의 머리에 한 번 더 놀랐다.


"-패진 않잖아, 심하게."

"···아무렴 그래도 군법이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불법행위는 아니야."


법도 그리 완벽한 방패는 아니다만, 일정 정신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방패인지라 일이 크게 번지는 상황은 아니라 보았다. 그러나 추후에 나가서 내가 무슨 처우를 받을지 심각한 중압감에 시달렸다. 라데르가 받을 스트레스는 나에게도 큰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본론을 말하지 않았네."


앞서 말했던 자살 여부가 본론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론의 행방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든 대화가 서론도 아닌 것이고 그저 잡담을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보는 게 올바른 결론이었다. 그조차도 재미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신분증, 하고 기타 등등, 상부에서 늦게 내려주어서 너한테 이제 전달하는 거란다."


동시에 다리 하나가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내왔다. 기타 등등이라고 생략된 게 많았지만, 어제 혼잣말로 말했던 것들이라고 예상을 했다.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다소 받는 게 더 번거로웠다. 괜히 잃어버리면 안 되는 필수 품목들이 늘어났다고 귀찮게 여겼다.


"손 내밀어봐."


더욱 더 귀찮게 봉투 째로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내민 양손 위로 내용물을 털어서 주었다. 마름모 꼴의 문장과 이름표 같은 작대기 하나, 거기에 개목걸이 비슷한 게 아닌 줄만 없는 진짜 개목걸이가 물품들의 정체였다.


"목걸이를 모를 수 없겠고, 이름표는 나중에 바느질해서 박을 거야."

"누가 박아줍니까?"

"그야 네가 박아야지."

"···도대체 목걸이는 무엇입니까?"

"목에 걸어야지."


그걸 물은 것이 아닌데, 라는 표정을 짓자 바로 대답해주었다.


"계급이란다."

"계급?"


계급이란 소리를 듣자 의아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고개를 홱 돌려서 라데르 쪽도 확인해 보지만, 둘 다 목걸이는 착용 안 한 상태였다.


"왜 저만인 거죠?"

"일반 병사라서 그렇지."

"아."

"원래 그래. 일반 병사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하면 골치 아프지. 그래서 계급으로 통일해서 통솔하는 게 편하거든. 여기에선 너만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겠지만, 다른 데 가 보면 안단다."


결국 개목걸이 비슷한 게 아니라 의미조차 개목걸이였다. 개와 주인을 가르는 징표라고 표현되어 착잡하였다. 난 역시 개로 부려지는 거라고 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절반 상실되었다.


"네모가 3개 겹치면 다음은 세모, 세모가 3개 겹치면 그 다음부터는 나처럼 목걸이에서 해방이란다. 벗기 위해서 올라가면 돼."


듣기로도 험난한 여정이 예고되어 있었다. 그나마 전시라서 시간 제약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만큼 공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내 목숨이 불사버릴 위험부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허황한 마음이었다. 이제야 전쟁이란 게 와 닿았다.


"그러면, 나도 막 여러 명을 쑤셔대고 올라왔는지 궁금하니?"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기에는 몹시 긍정을 기다리는 시선이었다.


"네."

"10년을 성에 몸 담고 성실히 일하면 이래."


오히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이상했다. 중학생 남자아이의 몸을 한 다리로 여유롭게 들고 내릴 수 있는 체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피를 한 번도 묻히지 않았다, 의문스러운 점이었다. 당연히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게 속마음이었다.


"여기에 들어올 때만 해도 누가 전쟁이 날 거라 예상했을까. 나야 이런 상황이 즐겁겠니?"

"마냥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맞아. 잘 인용하는구나. 앞으로도 명심해서 열심히 기여해주렴."

"네."


이건 정말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면 골치 아팠을 마무리였다.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른다, 라데르는 수업으로 괴롭히지 아무래도 그럴 사람은 아니었기에 멀쩡히 방에서 나온 것에 감사히 생각했다.

이젠 따라오라는 표시도 안 하는 라데르를 보고 쫓아가려는 찰나, 나는 문자를 모르니까 이름표를 못 읽을 거라 착각했었다가 그러니까 문자를 배우고 있다고 자각해서 이름표를 유심히 들여보게 되었다.


"테···즈?"

"마침 받침이 없는 이름이라 읽을 수 있었군."


라데르가 무슨 말을 했건 간에 신경 쓰지 않고, 당시 읽자마자 나는 이름이 버려졌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원래는 이름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내가 기억도 못할 시기에 부모님이 붙여주신 이름은, 그냥 인식표 같이 써먹어서 평상시에 별 느낌이 들 수가 없었다.

'이름'이라 써져 있는 곳에는 그걸 쓰면 되겠다고, 단 이 정도로만.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테즈'라고 불려야 한다는 걸 깨닫고 나니, 과장해서 말해 다시 태어났다는 기분을 만끾했다.


"테즈, 빨리 와라."


맨처음으로 '테즈'라고 불린 이 때부터, 난 과거를 청산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 세게에서 나의 과거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아라크네의 잡담과 같이 매우 길게 썼지만, 정작 본론은 이 구절부터라고 내심 의미를 거청하게 불리고 싶다.

정체성을 깨닫는 게 아니라 정체성이 구현되는 과정이었다고 또 다시 강조한다.


"그렇게 황홀감이 드는 이름이냐?"

"그건 아닌 것 같지만요."


새로운 이름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 솔직히 말해서 테즈라는 이름이 썩 나와 어울리고 분위기가 맞다고는 주장 못했다. 언제라도 가명으로 생각해내기 힘들었을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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