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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3,058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17 17:26
조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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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권 (12)

DUMMY

"여기서 난 이만~"


잠깐의 정적을 못 참고 파논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더 오랜 정적을 이끌어 냈다. 탕에서 요란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며,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날개에 물기가 머금어지면 어쩔 수 없을 거란 사실에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저만한 날개에 물이 흡수된다고 치면 양팔에 대걸레를 묶어놓은 정도가 될까, 신체 구조가 날개만 다르더라도 날개라는 특징이 휴먼과의 심각한 격차를 벌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반려동물이면 참을지언정 파논이라는 지성체의 날개짓에 내 얼굴에 물이 마구마구 튀었다.


"미안미안! 한동안 주변에 아무도 없다 보니까 본능적으로 이랬네! 괜찮니?!"

"그냥 물이니까 괜찮아요."


사과에 진정성이 있어 보여 격한 감정은 올라오지도 않았다. 탕에서 해준 것이 얼마인데 이런 것은 사소하다고 넘어갈 수준이었다. 오히려 파논이 걱정인 게 저 날개를 어떻게 닦느냐 매우 궁금했다. 이곳에는 드라이기가 없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종족이란 생각이 든다. 날개에 비듬이 끼인다는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허나 그 방법을 전혀 보여주고 싶지 않은 탈의실의 문이 닫히고, 그 이후에 어떤 소음도 공허를 채우지 않았다. 파논에게서 충분히 많은 설명을 들었고, 또한 라데르와 거리도 멀었다. 과거사를 얘기하고는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라데르와 함께 나도 이쪽을 바라봐주기를 포기했다.

이게 낫다고 점차 편안해지는 기분에 잠식당했다. 휴식에 있어 무한한 대화가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치유되었는지 모르겠는 내 몸을 걱정하여 뼈마디에 스며드는 감각을 기폭제 삼아 내일을 향해 기도했다. 차라리 한계까지 끌어올려 블랙아웃 당하는 게 심신에 위안이 되리라고 저주 아닌 축복의 기도였다.


입고있던 모든 것들이 냄새 투성이 옷 무더기 위에 동봉되었다. 라데르가 했던 말대로 목욕 가운으로 생활하게 되는 건가, 예상했지만 그건 망상에 놔두기로 했다. 건강상 문제가 된다는 걸 모를 턱이 없으니 실천할 마음조차 없었던 게 진실이었다.

다른 종족들만 사는 일명 이국 동네라 내 옷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파논이 하피라는 점을 따지면 휴먼에 맞는 사이즈란 있는 게 맞았다. 진짜 잠옷스러운 걸 받아서 한결 편해졌다.

내 일상이 비정상적일 수도 있다는 추정은 없어지고, 이들 또한 도덕이 있는 고등 생물인 게 솔직히 말해서 인간과의 차별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생긴 것만 다르지 모든 게 비슷한데 따로 구별해야 할까. 적국의 뜻이 전혀 이해가 안 됐다.

마치 내일의 땀까지 쏙 빠진 상황에서 탕까지 들어가니 내 몸의 수분이란 수분은 남아돌지 않는 기분이었다. 수분을 보충해야 될 것 같다고, 진담 반 농담 반이었으나 곧장 라데르는 식수실을 가르쳐주었다. 식수실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가봤더니 정말 물을 먹는 방이었다. 탈의실 및 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식수실이 존재했다.

심지어 같은 층이라는 것,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수도가 발달되지 않았기에 물을 이용하는 시설은 같은 층에 지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건 자기 생각이다.

컵이 아닌 큰 그릇으로 받아야 할 정도로 잠시만 뚜껑을 열어도 쏟아지는 물줄기에 놀랐다. 해봤자 2초였는데 1L는 되는 것 같았다.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 한순간 물에 채할 뻔하기도 했지만 순수 자연산 물은 실로 대단했다. 일단 정수기보다는 맛있었다. 표현력을 이게 최대다.

생명이 돋아나는 황홀함에 잠긴 나는 무엇이든 풍경에 굶주리게 되었다. 얼른 바로 옆에 있는 창문 사이를 들여다 보았다. 밤이라 하여 달이 둥둥 떠 있었다. 아니면, 달이 둥둥 떠 있었기에 밤이라 하였다.

그런 헷갈림이 드니 나는 이 세계에 대하여 아직도 모른다고 자각했다. 원래 맞는 말이긴 하나, 그렇다고 자각하는 순간 갑자기 학구열이 넘쳐흘렀다. 우리 세계에서는 지동설이며, 달의 자전 속도가 공전 속도와 똑같다는 등 낮과 밤이 바뀌는 현상에 대해 설명이 가능했지만 여기서는 똑같지 않을 거라 지식을 파괴했다.

과연 날 저 세계에서 이 세계로 날려보낸 작자들은 이곳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는 있을까. 언젠가 만나게 할 거라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음은 어디로 갈 것 같냐."

"자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어디."

"그것까지 말해야 하는 거였어요?"

"어디?"


일단 철창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닌 것 같은 게 아니라 가자고 해도 절대 사양할 기세였다. 1인 게스트룸을 하기에는 가면 좋고, 목적지 후보에서 탈락되진 않았다.


"제 방이 있진 않겠-"

"주겠냐."

"그렇겠죠."


그러면 그나마 있는 후보란 둘이었다.


"네 개인의 방은 아니지."

"교관 님의···?"

"그래."


다행히 완전 타인과 자는 것은 아니라서 안심했다. 후보 중 하나는 라데르의 것이었고, 하나는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의 방에 엉겨 붙는 것이었다. 인간적으로··· 아니, 이성적으로 그건 가축취급인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나는 도덕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자꾸 매번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그래도 떨렸다. 그나마 휴먼다운 종족이 걸렸으면 차라리 좋았겠지만 바실리스크의 방은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교관과의 동침이라고 하니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상시 긴장 상태여야 할 것 같았다.


"···에."

"잘 때만 조심하면 된다."


아무튼 명심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른 채 고개를 마구잡이로 끄덕였다. 그게 무리라는 것인지도 모르고 갑자기 걸려오는 근육통에 몸이 굳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없어서 자기 전까지 중략한다. 하나만 있는 침대는 더블 사이즈지만, 인간의 기준이었다.

라데르가 누우면 다 찰 것이었기에 여분의 공간이 없는 침대를 놔두고 나는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았다. 사실 바실리스크 기준에서는 이불이었을 텐데, 이불 하나가 등과 배를 한꺼번에 만족시켰다.

부모님 방에서 잤을 때보다도 기분이 묘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잘 안 나긴 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마취된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이불을 깔고 정식으로 다른 세계에서 잔다는 것은 실감이 안 났다.

다른 세계더라도 잠은 잘 오더라, 눈이 침침해지고 무거워졌다. 보통은 긴장이 되거나 혹은 설레여야 하는 게 기본이라 보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언제라도 했듯이 편하게 한 쪽 다리를 이불 위로 두어 라데르 쪽으로 몸을 눕혔다.

문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올랐다. 거기에서도 라데르만큼 이상한 친구들이 많이 나온다. 저만큼 험악하지 않지만, 나는 그 동화에 나오는 친구들이 더 험악하다고 본다. 험악하기보다는 기괴함에 가깝긴 하다.

외모로나 성격으로나 기괴한 녀석들이 사는 동네에서 동갑내기일 것 같은 소녀 앨리스가 겪는 일들을 생각해보자면 한결 편할 부분이라 없어보인다. 난 거기에 인권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문방구에서 파는 트럼프가 우리의 뒷바라지를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최상의 가성비는 없겠다.

그것보다 수상한 케잌이 놓여져 있어 내가 먹기는 곤란하고 시험삼아서 근처에 있었던 악어에게 던져주었더니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보면, 참 잘 잠이 왔다. 아니 그게 꿈이었을 수도 있었다. 약간 감겼던 것 같은 감각이 남아있었으니 그랬을지도.

수학여행이라면 내일이 놀이공원에 갈 날이라 한다면 기쁘겠다. 하지만, 나는 잘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박물관에 가거나 어느 날에는 놀이공원에 가거나, 여기는 어느 날에는 훈련을 하거나 어느 날에는 훈련을 하기만 하니 기대가 안 되니까 잠 자체에 의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 잠은 짧을까. 이런 달콤함을 짧게 맛보라는 계시인가? 시간을 느리게만 할 수 있으면, 낮에 했던 기적을 다시 떠올린다. 조금이라도 이 편한 때가 길었으면 하는 바램에 참지 못하고 라데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다린듯이 눈이 조금이라도 감겨져 있지 않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부엉이만큼은 아니지만 몸집이 큰 만큼 눈동자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이었다.


"교관 님."

"그럴 줄 알았다."


어쩌면 나는 눈동자와 대화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매일을 인공의 빛에 의지하고 있었으니 밤눈 자체는 밝지 않았다.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라데르의 눈동자였고, 눈동자의 위치로 거구를 그릴 수 있었지만 만지지 않은 이상 확증을 할 수 없었다. 나에게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오직 그 눈동자였다.


"왜냐."

"교관 님으로 남으신 이유가 있나요."


심드렁한 태도가 이불로 기어들어왔다.


"탕에서 뭘 들은 거냐."

"그것 말고는 없나요?"


의도를 알아차린 듯 라데르는 태도를 바꾸었다. 감성적인 태도로, 그게 의외였다.


"내가 전장에 서고 싶었던 것은 개인의 이유보다는 마을의 관습이 앞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습···."


도시놈이라 딱히 와닿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공감하는 투로 말을 흘려보냈다.


"그리 무식한 종족은 아닌데, 이런 덩치다 보니 힘 겨루는 축제가 마을 단위로 열린다. 지금도 갈 때마다 일어나곤 하는데, 거기에서 원만히 1등을 거머쥐면 전사로서 마을을 알릴 상이라고 축배를 든다."

"그런 게 있군요."

"힘이 센 것은 인정하겠지만, 내가 전사로 결심했을 때는 전시가 아니었더라도 세상이 흉흉하니 위험한 직업이란 것은 똑같았다. 그래도 명예에 있어서는 출신에 관계없이 공정하기에, 전사가 되어 성공한다면 종족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긴 했다. 그러나 그걸 각인한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몇 달 동안은 난 겁쟁이였다. 적들의 숨통을 죽이는 데에 몇 번이고 공험하는 것이 충성이고, 충성은 곧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아군이나 적군이나 공통의 정서인데 내가 먹잇감이 될 수도 있지 않냐. 내가 원하는 만큼 그들도 올 것이라고 내가 매혹당하기보다 적들의 매혹에 두려워했다."


흔한 전개 방식이었다.


"반전이 있죠?"

"반전···이라 할 큰 계기는 없었다. 난 마을의 강요가 나를 사지로 몰아갈 거라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몇 번 포탄이 적중되더니 적이 쓸려나가는 걸 육안으로 지켜보았다. 고작 방패만 세우고 부디 안 오기를 기다리던 내가 초라해보였다. 이렇게 대단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을 안 하고 있었다는 걸. 다 영웅이 될 수는 없겠으나, 다 위대해질 수는 있다는 걸."


천천히 라데르의 설에 음미하다가도 마지막 대목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위대할 수도 없다는 것 아닌가요?"

"네가 아직 훈련병이라는 소리인 거다."


몹시 아픈 곳을 직격으로 맞은 것 같이 얼얼해진 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제를 넘었다고 파악했다. 하기야 남의 설이란 것은 내가 겪어보지 않았기에 재미있는 것이기에 스스로 재미를 반감시킨 것에 깊이 사죄했다.


"그러다가 사고가 일어나고,"

"그 뒤로는 네가 아는 이야기다."


흥미가 고조되었던 풍경이 사라지니 한없이 고요하고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뭔가는 말 걸어야 하는데, 이런 의무 같은 되뇌임은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떻게든 다른 화제로라도 이 밤을 오래 있게 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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