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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안녕히

[공모전 참가]히어로즈 레퀴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TYE
그림/삽화
없음
작품등록일 :
2020.06.16 14:32
최근연재일 :
2020.08.24 01:13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3,060
추천수 :
18
글자수 :
403,680

작성
20.06.17 15:17
조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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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권 (8)

DUMMY

"첫 번째는 발검이다."

"발도가 아니고요?"

"죽도니까 발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통일하는 게 유혈사태를 안 일으킬 거다."


맥락으로는 자기가 유혈사태를 일으키겠다는 뜻이었지만, 내 판단으로는 그건 아니라고 해석했다. 농담이었을 수도 있고 전장에서 맞아보라는 식으로 악독한 가르침을 선사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발검이면 검집에서 뽑기만 하면 되는 거죠?"

"해봐라."


오른손 잡이니까 왼쪽 허리춤에 죽도를 메고 있었다. 가죽으로 된 검집이 실제 진검의 검집과 비슷할지는 몰라도, 처음 만져 본 그 손잡이는 왠지 부드럽게 빠질 거라는 예상을 그르게 만들었다. 힘을 주고 앞으로 최대한 뻗어 보니 결국 죽도는 날이 다 안 빠지고 일부 검집 속에 걸려서 요상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왼손은 장식인가."

"아."


그 말에 왼손으로 검집을 오른쪽으로 틀게 하여 날을 다 빠지게 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고 보는데 그것조차 해내지 못했다.


"그게 기본적인 발검 자세다. 그 쪽에선 검을 잘 쓰지 않으니 모를 만도 하겠군."

"대부분이 안 써요."

"그러냐."

이런 기다란 날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날이 길어봤자 총 하나 쥐는 게 이득이다. 아니면 살상력으로는 이보다 작게 만든 나이프도 만만치 않으니 검이라는 것 자체가 이득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게 400년 차이라고 해도 평균 수명의 6배는 되는 시기다.

그보다 가장 의아했던 것은 죽도에도 검집을 달 수 있단 것이었다. 실용성이라고는 일체 없지만 훈련용으로는 이런 지혜가 쓸모있단 걸 느꼈다. 정보를 더 안다고 해서 지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동작을 가르쳐주기 전에 먼저 그 동작을 100회 반복해라."

"100번이요?!"

"사소하게 수가 틀려도 죽는 게 전장이다. 연습한 시간보다 오래 살고 싶으면 해라."


이전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반론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대로 다시 되감기를 하여 검집에 죽도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런데, 죽'도'인데 '검'집이라 하는 것은 좀 이상하긴 하다. 그래도 별다른 대책이 없으니.

이번에는 왼손으로 미리 검집을 튼 후에 오른손으로 쭉 뽑아냈다.


"하나!"

"내가 숫자를 샐 거다."

"···네."

"그리고 미리 손을 갖다 대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익숙하지 않겠지만 되도록 한 번에 취하게 노력해라."


이러한 이유로 이번에는 무효라는 뜻이었다. 오른손과 왼손을 같이 움직이라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자세는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해야만 몸으로 알아낼 수 있었다. 카운트는 0, 무효된 횟수만 5번이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쌓는다고 하여도 금새 무너지는 정신력에 똑바로 안 한 횟수는 늘어나고, 총 횟수는 125 정도였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한참 그렇게 씨름하고 나서 빌어먹을 죽도라고 쳐다본 때가 있었다. 그제서야 한 가지 죽도에 관한 기묘한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죽도를 둘러싼 빨간 끈은 뭔가요?"


이 때 빨간 끈 이상으로 진귀한 발견을 하였다. 철창 안에서부터 바라보던 라데르의 얼굴이 게슴츠레 웃음을 띤 것이었다. 매우 길게 찢어져 있는 입술(입술이라 할까)의 끝이 살짝 올라가 피부가 밀려 눈을 가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꽤 빨리 알아차렸다."

"웃는 거죠? 칭찬하는 거죠?"

"어."


이곳의 생태계는 어떻게 되먹은 것인가. 사람 사이야 매섭게 생겼다고 해도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으나 이건 종족 자체가 다르다 보니 전혀 비교가 안 되었다. 바실리스크란 종족은 라데르 때문에 우람하고 무섭다는 인식이 박히게 될 뻔했다. 웃는 게 웃는다고 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빨간 끈과 같이 검집도 타원형으로 되어 있다."


죽도만 그런 건 줄 알았더니 검집도 그러했다. 나름 오래 손에 쥐고 있었다지만 이런 기본적인 특징조차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수련 사이에 숨겨진 비밀에 나는 참패했다.

그러니까 검집에 잘 안 들어갔던 것이었다. 뭣 모르고 지름이 긴 부분을 짧은 부분 방향으로 넣으려고 했으니 무지가 만든 고생길이었다.


"100 몇 번이고 모른 상태로 하니 어떠냐."

"일부러 안 가르쳐 준 거죠?"

"그래."


왠지 굳어있던 얼굴 표정을 일부러 변하게까지 한 걸 보니 자랑스러워서만은 아니었다. 비웃기 위해서, 라데르의 본의를 깨닫자 열불이 났다.


"다음은 뭔가요?"

"다음?"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은근히 재빨리 대답했다.


"쉬어라."

"네-에?"


보나마나 다음 동작에 들어가라고 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자비란 있었다. 그 말과 함께 내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곧장 모든 몸이 말을 안 듣더니 푹삭하고 모래 위로 전신이 쓰러졌다.

정신을 멀쩡한데 신체가 아예 마비된 기가 막힌 상황에 봉착해 한순간 죽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몇 초 뒤에 그건 아닌 것 같다며, 단순 피로 현상이었다. 그야 숨도 멀쩡히 쉬고 근육통 말고는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는 전혀 없었다.


"일어설 수 있겠냐."

"아니요. 조금만 쉬면 안 되나요."

"이래서야 오늘 안에 다 완료할 수 있겠냐."

"새벽녘까지 하는 거 어떤가요."

"내가 자야한다."


수업을 빌미로 한 동귀어진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인성이 있기 때문에 놔두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이로써 확실히 휴먼만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성이 있는 이상 도덕이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몰라도 기복이 심한 교육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정신은 멀쩡하지 못했던 것 같다. 몇 분이 흐르고서 이제 괜찮다는듯이 나는 아무 말 않고 일어났다. 이 정도면 200번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심이 들었던 것이었나. 혹독한 훈련에 절여지니까 이제는 할 만 하다고 정신이 나갔었나.

그냥 일어서게 되었다. 그대로 누워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 수치였다. 미안하기도 하고, 혹은 도전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이대로 내가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님을 알리고 싶었다고 오락가락한 정신을 분석한 결과는 이랬다.


"2번째는 전술 발검술이라고 있다."

"발검술은 했잖아요."

"전술이 붙었잖냐."


그건 마치 일반 달걀임에도 고급 달걀이라고 우기는 격 아닌가. 하지만, 그런 말장난을 할 상대가 아니기에 몇 번이고 설명을 들을 준비를 해두었다.


"왼발을 2척 뒤로 빼고 허리를 살짝 왼쪽으로 틀어라. 발검 그대로 하긴 하지만, 대신 허리를 고정하고 상체만 돌려라."


허리를 고정하고 상체만 돌리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억지로 이해하고 억지로 실행해냈다. 그리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직접 해보니 흔히 말하는 발도술과 같은 자세가 나와 라데르한테는 들리지 않게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은근히 멋있다는 둥의 감상만은 입에 담지 않았다.

검은 잡아 본 적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120번을 붙잡고 늘어지니 전술 발검술이라는 자세는 할 만했다. 할 만 한 거지 결코 안 힘들다고는 할 수 없었다.


"화려하긴 한데, 뭔가 실제로는 잘 안 쓰일 것 같은 기술인데요. 막 검집에 넣은 상태로 전장에 돌진하진 않잖아요?"

"항상 검을 들고 있을 거라 생각하냐?"

"아닌가요?"

"아무리 전장이라도 상시 들고 있기란 힘들다. 운반, 포로 수용, 승마, 암벽 등반, 까딱하면 수영 및 승선까지, 다소 검술을 발휘하기에 있어 제약이 될 때 검집에 넣고 다닌다. 그러면 검이 거슬리니까 버리고 다니냐? 무기 하나 끝까지 사수해야 적에게 넘기는 배신자 꼴을 면할 수 있다. 무기 없어서 찡찡 대다가 죽을 쏘냐?"


실로 반박할 구간이 없는 멋진 연설이었다. 끙끙 앓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전술 발검술이란 이 놈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것과 같았으니까 말이다.


"정 힘들다면 95회로 줄여주겠다."

"네."


5회나 줄어들었다고 보기에는, 겨우 5회라는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꽤나 부정적인 상태였다. 10회 하고 쓰러지기,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게 나름대로의 최선이었다. 10회를 거의 3분하고 쉬기를 1분 했으니, 막상 계산하니 40분 가량이 소모되었다는 진실이 새삼 놀랍다.


"배고프지 않냐?"


내 말이 그러했다. 일어나서 4시간을 무식, 무음으로 지냈는데 안 배고플 리가 없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위가 배고프다고 신호를 보내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라데르도 마찬가지라 신기했다. 교관이라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서 배울음소리 하나 작게 내보내지도 않으니 평소에 단련이 되어있다는 멋짐에 반할 뻔했다. 마지막은 농담이긴 하다.


"오고 나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알지."

"그럼···."


그랬다면 말하지도 않고 나도 까먹고 있었으면 그대로 식사란 없었다는 소리인가. 잘 모르겠다. 라데르의 의도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오로지 알아야 할 사실은 내가 죽도록 배고프다는 것이었다. 자세가 하나 더 남아있었지만, 그의 넓은 아량으로는 이는 연기해 둘 수 있지 않을까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일어나라."

"네!"


먹을 수 있다는 거지 근성에 본래는 낼 수 없었던 포효를 내뱉었다. 여전히 철판들이 몸에 철썩 달라붙어 제지했지만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펄럭이는 종이 몸은 굳센 각설탕 같이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었다. 부서지기 직전이란 게 안타까운 점이었지만.


"평소에 운동을 했으면 버틸 수 있는 거 아니냐."


운동을 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러나 반대로 운동을 안 하자는 사람은 있었다. 그게 나였다. 변명할 거리도 못 되는 터라 침묵했다.

극한의 열기로 가열된 몸은 여름의 기온에도 식어갔다. 땀샘이 활화산처럼 활동하여 온몸을 적셔서 급한 불에 소화기를 뿌리듯 무차별적인 수분 공급에 나는 눈에 땀이 들어가는 막으려고 애썼다. 생리 현상에서 과유불급이 일어나면 어쩌자는 것인가. 하지만, 과유불급도 아닌 것 같았다. 체온 이상으로 뜨거운 철판이 닿을 때마다 저것 좀 어떻게 하라고 임시방편으로 땀으로 철판을 적셨다. 유익한 행동은 아니었다.




밥이 있었다. 밥이 있다는 것은 쌀이 있다는 것. 쌀이 있다는 건 벼가 있다는 것. 그리고 논이 있다는 얘기다. 글쎄, 벼가 논에서 자라는지 밭에서 자라는지 공부를 안 해서 모른다. 농부로 태어났다면 알았을지도 모를 테지만 난 일개 병사였던 자다.

우습게도 이 때문에 역사를 익히기보다 문화와 환경을 익히자고 시급하게 명심했다. 너무 시급했기에 다짐은 그리 오래 못 갔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다짐을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거란 당장 교과서를 정복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잊힐 운명은 피할 수 없었다.

먼 산까지 온 주제에서 다시 원점으로, 땀샘과 더불어서 다른 샘들도 활동하게 해둔 것이 잘한 짓이었는지 곱게 씹어지는 입 속의 밥은 매우 맛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맛있는가. 우리 집 전기 밥솥이 아닌 이상 맛있었겠다. 유기농도 포함 되어있었겠다. 사실 무기농을 만들자는 게 더 어렵긴 하지만, 아무튼 맛있었다.

보통 밥의 맛에는 신경이 안 쓰이는 편이었다. 밥을 기준으로 반찬을 먹는다는 느낌보다는 반찬을 먹기 위해 밥이 있었던 경향이 큰데, 여기서는 반찬이 희귀하니 저절로 밥에 신경이 쓰였다. 십여 번 씹을 가치가 있었다.


"야."

"엌, 네?"


고독한 미식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 라데르가 강제로 끄집어냈다. 저 말만 들으면 어떤 지적이 들어올 거라 정신 차리고 방어할 태세를 하였다.


"밥만 받아가면 어떡하냐."

"아니었어요?"

"전쟁이 급해도 최소한의 도덕은 있다."


그러면서 건네준 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채소 덩어리들이었다. 보아하니 샐러리? 직접 만져본 적은 없지만 본 적만은 있는 종류의 채소들이었다.


"없어 보이는데요···."

"맞다. 없다."


라데르는 보란듯이 채소 바구니를 멀리 식탁 끝으로 밀어보냈다. 길게 이어진 그 끝에는 똑같이 버려진 바구니들이 수두룩 쌓여 있었다.


"전쟁이라면서요?"

"오히려 급할 때일수록 다들 뿔이 나있는 상태다."


영양이 골고루 않지만 힘을 내는 데에는 탄수화물이 많이 작용하니까 말이다. 고기 한 점 없는 식사라도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일부러 만족하는 것 같지만 나의 기분은 어느 때보다 최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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