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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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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20.01.2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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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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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임무 실패

DUMMY

절망.


인간을 절망하게 하는 건 무수히 존재한다.


세상은 넓고 장애물은 넘쳐난다. 다른 생물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나약한 인간이 이 세계에서 의지를 잃지 않고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승리했다. 짐승을 지혜로 다스리고 자연을 굴복시켰다.


그건 인간 본연의 힘 덕분이 아니다.


인간을 불쌍히 여겨 길을 열어준 초월적인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으면 인간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어떤 역경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는다.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무너져도 약한 마음을 먹지 않게 해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힘을, 고뇌의 끝에는 찬란한 끝이 있을 것을 의심치 않게 하는 희망을.


유디트 황국의 전원은 그렇게 믿었다.


혼란을 일으키는 마왕의 출현. 그에 대항하는 용사.


역사는 이 굴레를 아주 오래전부터 되풀이해왔다.


추악한 마족의 욕망 앞에 인간이 유린당한다. 밭이 불타고 여자는 성 노리개로 전락, 어린아이는 살아있는 채로 뜯어먹히며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광경은 마족과의 싸움에서 흔한 일이다.


인간보다 월등히 강한 신체능력. 체내의 마나까지도 자유자재로 쓰는 마법능력. 본래라면 싸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적을 앞에 둔 인류가 마음이 꺾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언제나 그들과 함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부신 빚을 내는 검이 마족의 몸을 가르고 정의를 집행한다.


모든 건 신의 의지대로.


그렇기에 리우 에스타의 보고를 들은 고위 성직자들 중에 당황하는 자는 없었다.


확실히 적은 강대하다. 마왕의 부하 하나를 상대했을 뿐인데 벌써 천벽인광에 공석이 둘이나 생겨버렸다. 천벽인광은 전원이 일기당천의 기사들. 위기의식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은 위협이다.


하지만 정의는 최후에 승리한다는 생각은 모두의 머릿속에 박혀있다.


이번 마왕이 아무리 잔재주를 부리더라도 위대한 루미아 여신의 가호를 받는 인류는 지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신의 뜻을 집행하는 유디트 황국은 더더욱.


"일어나세요, 리우."


페이 루드게이트 대주교는 인자한 목소리를 내었다.


무릎을 굽혀 바닥에 대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우는 고개를 들었다.


대주교들의 모습은 통신마법으로 만들어낸 영상으로 보이고 있을 뿐이었지만 리우는 실제로 같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깍듯하게 대했다.


영상으로 비치는 주교들 너머로는 장엄한 교회 내부가 보였다.


의식 말고도 회의 따위를 위해 쓰이는 교황청 내 교회다.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교황청과 통신을 할 수 있는 건 황국에서도 중요 임무를 맡은 몇 명뿐. 물론 그것도 긴급 연락시로 한정된다.


하지만 리우가 올려야 할 보고가 충분히 긴급하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 천벽인광의 피해 보고만 해도 꽤 심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가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로지스트와 랭겔, 그 둘이 그렇게 당하다니."


미간을 살짝 찌푸린 건 붉은 머리의 중년 여자다. 주교의 위치에 있음을 알리는 붉은 사제복은 그녀가 황국에서 손가락에 꼽는 권력자 중 하나라는 걸 뜻했다.


"다섯 번째와 일곱 번째 빛을 잃은 것은 안타깝지만 마왕의 강림 사실을 밝혀낸 건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덕분입니다. 순교자들의 기도는 본청에서 올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리우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직접 마왕군 간부와 싸워본 느낌은 어떤가요. 어느 정도면 대처할 수 있을지."

"제 추측입니다만."


리우는 싸움을 떠올리는 것처럼 천검에 눈길을 주었다.


"그 다크엘프를 기준으로 동등한 조건에서 싸운다면 네 번째 빛이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 겁니다."

"ㅡ잘도 말하는군."


페이 루드게이트 대주교 뒤에서 얼음장 같은 분위기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이 한심하다는 듯 리우를 흘겨보았다.


"그럼에도 두 번째 빛, 당신은 부하 둘을 내버려 두고 퇴각했다. 부단장을 맡은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위군. 네 번째 빛으로 정리가 가능한 상대라면 어째서 일찌감치 처리하지 않았나?“

"아엘 추기경. 그녀는 적진 바로 앞에 발이 묶인 채였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어요. 마왕군의 존재를 알리는 것을 우선으로 한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요."


리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루드게이트 대주교는 바로 반박했다.


"페이. 나는 에스타를 깎아내리려 하는 게 아니다. 무사히 정보를 빼내 오기는커녕 사망자 숫자만 늘린 지금, 이번 마왕군의 상대가 과연 천벽인광으로 충분하냐는 지극히 논리적인 질문일 텐데."

"지금 굳이 그런 질문을... 마왕 타도와 용사의 보조는 언제나 천벽인광의 의무였지 않나요?"


질문을 무마시키려는 루드게이트의 노력에도 아엘은 굽히지 않았다.


"그 천벽인광의 두 번째 빛이 이번 마왕은 느낌이 다르다고 진언하지 않았나. 아직 진위여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왕국은 이미 마왕군에 완전히 넘어갔다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이제 열 명으로 줄은 천벽인광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중대사다.“


같은 주교급이긴 하지만 추기경의 계급을 맡은 레인 아엘의 발언력은 페이 루드게이트 주교보다 크다.


정면으로 맞서면 밀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루드게이트는 물었다.


"그럼 좋은 방안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엘 추기경."

“나라고 해서 바로 천벽인광이 발을 빼라는 건 아니다. 다음 작전도 실패한다면 내 직속 성기사단을 움직이도록 하지."


그 말에 다른 주교들이 웅성거렸다.


레인 아엘 추기경. 그는 유디트 황국의 성기사단의 관리를 겸임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오로지 교황청에 속하는 다른 성기사단과 달리 제1성기사단 만큼은 직속으로 둔 그는 독자적인 판단하에 큰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성직자다.


전쟁이 확실하게 발발하고 나서야 투입되는 기사단이 지금 움직인다면 천벽인광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믿을만하지 않아서 제쳐졌다는 게 되니까.


"아무쪼록 내가 직접 전선에 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소리다. 이유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두 번째 빛."


리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주교들도 아엘 추기경의 제안이 꽤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루드게이트 주교만이 염려스러운 눈으로 리우를 보았다.


"이 보고는 교황님께도 전달해드리겠어요, 당신은 무사히 귀환하는 것에 주력을 다 해주세요. 부단장마저 잃어선 곤란합니다."

"예, 주교님."


레인 아엘 추기경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걱정됐는지 루드게이트는 말이 끝나자마자 통신을 끊었다.


벽에 비춰지던 영상이 끊기자 빛나던 마법석이 빛을 잃고 평범한 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리우는 질척이는 바닥에서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 습한 동굴 내부는 거짓말이라도 쾌적하다고 말할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마차는 추적당하지 않을 위치에 버리고 도보로 이동하기를 수 시간. 적의 추격은 제대로 따돌렸지만 바로 움직이는 건 위험할 수 있었다.


품으로 되돌려놓으려 집은 통신 마법석이 아직도 미세하게 진동하는 걸 느끼고 리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교황청에서 더 물어볼 게 남아있었나요.“


파앗.


마법석이 흰 광채를 띠었다.


"소식은 전해 들었다."


마법석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에 리우의 살짝 크게 뜨였다. 통성명은 없었지만 절대 착각할 리가 없는 목소리다.


"오랜만입니다, 첫 번째.“


리우에게 연락해온 건 웬만한 임무가 아니고서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천벽인광의 단장, 첫 번째 빛. 이번에 그가 있었으면, 하고 리우가 후회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방금 교황청에 올린 보고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니, 원래 같았으면 불가능하겠지만 그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음 작전에는 나도 동행하겠다. 황국으로 복귀하는 즉시 집합장소로 모이도록.“

"알겠습니다, 단장.“


설명은 전혀 없이 말을 최대한 줄인 명령.


리우는 임무 실패에 대한 사죄 따위를 입에 담지 않았다. 첫 번째는 그런 것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둘이나 공석이 생긴 것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겠지.


그것도 그럴만하다. 첫 번째는 천벽인광의 최대 전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한 명. '높은' 숫자가 몇 명 죽었다고 한들 그가 살아있는 이상 천벽인광은 건재하니까.


하지만 이걸로 이번과 같은 일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단장과 부단장이 동행한 임무를 실패한 적은 천년이 넘는 천벽인광의 역사상 없다.


"그럼 황국에서 뵙지요."

"...“


통신을 끊기 직전, 목소리는 무심한 듯 덧붙였다.


"루미아님의 가호가 있기를."


작가의말

봄도 아닌데 요즘 굉장히 피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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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방아쇠 +1 20.02.06 281 10 9쪽
106 용족 소녀 +1 20.02.02 323 9 11쪽
105 현자 +1 20.01.31 282 12 8쪽
» 임무 실패 +1 20.01.23 298 9 9쪽
103 용의 이상향 +1 20.01.19 300 11 10쪽
102 꽃잎은 천천히 떨어진다 +1 20.01.16 296 8 12쪽
101 어쩔 수 없는 희생 +1 20.01.12 303 10 10쪽
100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 20.01.09 303 8 9쪽
99 적발 +1 20.01.05 292 9 9쪽
98 잠입 +1 19.12.29 310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26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16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15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45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2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49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79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84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1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82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1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2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0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36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68 11 11쪽
70 서로의 요구 +2 19.09.22 453 13 11쪽
69 대화의 시작 +1 19.09.19 449 12 10쪽
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1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63 사전 준비 +3 19.09.01 543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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