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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570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12.08 00:22
조회
344
추천
8
글자
11쪽

천벽인광

DUMMY

제국령 가장자리의 마을을 지나던 리우 에스타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길에 나있는 나무의 기둥에 기댄 채 곯아떨어진 자가 있었다.


리우가 바로 앞까지 와도 남자가 일어날 기미는 없었다.


리우와 마찬가지로 검은 사제복을 입었지만 흰 망토는 담요 대신인지 하반신을 덮고 있었다. 지급 받은 검도 풀어놓고 머리맡에 놓아둔 걸 보니 작정하고 취침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리우는 빤히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랭겔, 일어나세요. 지금은 임무 도중.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리우가 말했지만 역시 그 정도로 잠에서 깨지는 않는다.


“임무를 내팽개치기로 한 건가요, 다섯 번째.”

“... 드르렁.”


코까지 골며 꿈나라에 가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리우는 혼잣말을 했다.


“누구보다도 충실해야할 신도가 신의 가르침을 거스르다니, 즉결처형 감. 못난 부하는 천벽인광의 부단장인 제 손으로 직접 처단하겠습니다.”


리우는 손잡이밖에 없는 검을 뽑았다.


원래라면 철의 도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했지만, 돌연히 빛의 입자들이 채워져서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밝은 도신이 불안하게 사방으로 타닥, 타닥 튀기는 검이 완성되었다.


리우는 검을 잡은 왼손을 높이 올렸다.


“참회의 기도를 올리세요.”


나무 그늘에 누워 늘어지게 잠을 자던 남자에게 리우의 검이 날아들었다.


즈ㅡ쾅!


검격의 여파로 지면이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두꺼운 먼지구름이 떠올랐지만, 리우는 검을 한 번 휘둘러 없애버렸다.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나 있었다. 한손으로 검을 내리친 것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크기다.


“베는 감각이 없었네요. 피한 건가요.”


리우가 빛의 도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 차차.”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뭐하는 거야, 부단장?”


어느새 반대편 길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공격이 닿기 직전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뽑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챙겨서 잡고 있는 검은 리우가 쥔 것과 달리 제대로 도신이 달려있다.


“난데없이 자다가 죽을 뻔했잖아. 부하에게 문답무용으로 천검을 휘두르다니... 저 나무는 또 무슨 죄야?”

“적당히 공격해서 그런지 피했군요. 제 불찰.”


리우는 자세를 낮추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검이 방금 전보다 더 위협적으로 파지직, 튀긴다. 그게 특정 공격의 징후라는 걸 아는 랭겔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잠깐, 설명할 기회는 줘야지! 딱히 농땡이 피우고 있었던 건 아니야! 부단장이 부탁했던 놈을 찾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그니까 천검은 빨리 꺼줘!”

“행상인을 벌써 확보했다?”

“그렇다니까!”


타닥이던 리우의 검, 천검이 다시 손잡이만 있는 형태로 돌아갔다.


“그런가요. 제가 넘겨짚었네요.”


숨을 돌린 랭겔은 이마에 흐르던 식은땀을 닦았다.


“정말이지, 부단장은 살기도 없이 검을 휘둘러대니까 정말 위험하다니까. 감으로 피하기도 힘들어.”

“그래서 그 자는?”


리우는 랭겔이 투덜거리기 전에 말을 끊었다.


“일곱 번째 빛이 데려갔어. 이 앞의 토츠 마을에서 구슬리고 있을 거야.”

“로지스트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소리네요. 그런데 왜 랭겔은 여기서 잠이나 자고 있었던 거죠?”

“그, 그건...”


십자 눈이 그럴듯한 대답을 못 찾는 랭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일단 잘했습니다, 랭겔. 즉결처형은 후일로 미뤄드리죠.”

“후일이라니, 무섭네!”


손사래를 치며 랭겔이 일어섰다. 먼지가 묻은 망토를 적당히 털고 있자니 리우가 앞서 걸어갔다.


“잠깐, 부단장!”


발을 헛디딜 뻔하며 리우를 따라잡은 랭겔이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그 행상인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최근 광맥지대 인근은 위험하다면서 안 가려고 하던데, 이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들어주게 만들면 됩니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리우가 대답했다.


“바실루스 황제가 제공한 정보로 미루어보아 제일 수상한 건 광맥지대. 황국은 류셀이 정말로 마왕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요.”


광맥지대의 조사. 그 목적과 신분을 가능한 들키지 않는 것이 전제조건이었지만 왕국 세력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전투복으로 개조된 사제복을 갈아입는다 해도 황국 특유의 말투나 근방사람보다 흰 얼굴 때문에 외지인이라는 건 금방 들통 난다.


제국까지야 교회의 도움으로 은밀히 왔다고 해도, 황국과 연락이 끊긴지 오래인 왕국 내 교회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상인의 짐마차에 섞여 들어가 광맥지대까지 접근한다는 작전이었다.


“왕국은 꽤 최근까지 제국과 정기적으로 거래를 했죠. 아무리 출입불허 지역이라 해도 제국의 상인이라면 덜 수상하게 여길 테니.”

“역시 이번에도 강제적으로 협력시킬 수밖에 없다는 소리잖아. 또 한바탕 하겠는데 이거?”


임무 달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천벽인광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거기에 사태의 중대함까지 겹쳐졌으니 고삐가 완전히 풀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리우를 포함한 천병인광의 빛들은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슬슬 토츠 마을입니다. 로지스트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리우가 물었다.


“글쎄, 일곱 번째 빛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여관 앞에서 행상인을 붙들고 있었을 텐데...”


랭겔은 허름한 여관을 가리켰다.


“그 놈 성격상 안에 처박아두지 않았을까? 놓치지 말라는 명령이었고.”

“그러네요.”


둘의 복장을 보고 여관 앞에 몰려있던 마을사람들이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하나같이 다 집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을 닫는 걸 보며 랭겔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로지스트, 확실히 뭔가 저질렀어. 몇 명이나 해치운 거지?”


리우와 랭겔이 부서진 문을 밟고 여관에 들어가니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네댓 명이 갈기갈기 찢긴 채 내장을 드러낸 상태로 죽어있다. 저항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이야, 냄새 한번 지독하네. 그 놈은 깔끔하게 처리하는 재주가 없다니까.”


랭겔이 코를 막으며 볼멘소리를 내뱉는 사이, 리우는 바닥에 널려있는 시체를 재주 좋게 넘어갔다.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은 다음 순간 바에 딸린 뒷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을 활짝 열자 들어오는 건 의자에 묶인 초로의 남자와 나이프를 빙빙 돌리고 있는 소년이다.


“오, 부단장님! 그리고 다섯 번째! 오셨습니까?”


소년이 리우의 얼굴을 보고 반색하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의 흰 망토는 붉은 점도 없이 깨끗했다.


“로지스트. 죽어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죠?”

“아아~ 이 상인이랑 아는 패거리인가 본데 데려가려는 걸 자꾸 방해해서요.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처리했답니다!”


로지스트가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리우는 부하의 살생에 별 신경 쓰지 않고 묶여있는 남자를 불렀다.


“제국의 행상인. 이름이 뭔가요?”


이가 서로 맞부딪힐 정도로 심하게 떨던 행상인은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두려운 나머지 리우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못할 정도다.


“부단장님이, 물으시잖아!”


로지스트가 웃는 얼굴로 휘두른 주먹을 맞고 남자는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이 남자가 죽으면 곤란합니다, 로지스트. 너무 세게 치지는 마세요.”


리우는 쪼그리고 앉아 남자를 바라보다, 눈썹을 올렸다.


“음? 왜 공포에 떨고 있나요? 당신은 기뻐해야해요. 신의 뜻을 집행하는 저희를 도울 수 있는 영예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죠.”


겁에 질려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행상인을 향해 리우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알트레아 왕국의 광맥지대까지 저희와 동행. 그건 결정사실이니 괜한 짓은 하지 말아주세요. 도망치려하면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볼 수밖에 없으니까.”


그 문장에 함축된, 협조하지 않으면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를 깨달은 행상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번째 빛, 이 남자의 마차는 어디에 있나요?”


부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마다않는 리우가 굳이 계급으로 부를 때는 정식 명령을 내릴 때뿐이다. 장난기 가득한 태도를 보이던 로지스트도 표정을 싹 지웠다.


“시장터에 세워놓았습니다. 수일간 이 마을에서 체재하던 모양이라 말들도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잘된 일이군요. 여긴 마무리하고 빨리 이동하도록 하죠.”


랭겔이 남자를 묶은 줄을 풀었다.


“부단장님 말씀 들었지? 귀찮으니까 하라는 대로만 해달라고. 나도 상인 하나 더 수소문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대로 행상인을 질질 끌며 여관에서 나가려는 찰나,


“이... 무슨 짓이냐!”


여관의 참상을 확인하고 있던 위병 차림의 사내가 리우 일행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든 창의 끝이 리우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자들을 죽인 건 네놈들이냐? 옷차림은 황국 같은데... 제국령에서의 살인은 그냥은 넘어가지 못한다!”


마을마다 크던 작던 위병소는 있기 마련이니, 마을사람 중 누군가 신고를 넣은 것이겠지. 하지만 시골의 위병이 아무리 나서 봤자 다.


“비켜주세요. 저들은 신의 가르침을 거부한 응보를 받은 겁니다.”


리우가 상큼하게 말했다.


“신의 말씀은 절대적. 한낱 인간이 거스르려 한다면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되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뭐...?”


위병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렸다.


“지,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너는...?”

“모든 것은 루미아님을 위해서. 당신도 그 숭고함을 알고 있다면 무기를 거두라는 겁니다.”


리우의 옷차림을 쳐다보던 위병이 계속 느끼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는지 창을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가... 들어본 적이 있어... 미쳐도 단단히 미친 유디트 황국의 광신도 집단. 신을 지껄이면서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놈들이 있다고. 왜 네놈들이 제국에 있는 거냐!”


그가 비킬 기미가 없자 리우가 안됐다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가요. 당신은 '거스른' 자인 건가요.”


샥.


리우의 아무것도 쥐지 않은 오른손이 휘둘러진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위병의 목은 깔끔하게 절단되어 몸에서 떨어졌다.


리우는 손수건을 꺼내 손날에 맺힌 피를 닦더니, 쓰러진 위병의 시체를 넘어서며 눈을 감고 경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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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잠입 +1 19.12.29 310 9 11쪽
97 간부 회의 +3 19.12.26 326 8 10쪽
96 침공 준비 +1 19.12.22 315 10 9쪽
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94 위화감 +1 19.12.14 315 12 11쪽
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 천벽인광 +1 19.12.08 345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2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49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79 11 11쪽
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84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1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82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1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2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0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36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68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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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대화의 시작 +1 19.09.19 449 12 10쪽
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1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63 사전 준비 +3 19.09.01 543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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