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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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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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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10.2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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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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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11쪽

포로의 결정

DUMMY

“날 쓰러뜨린 웨어울프구나.”


시이나의 얼굴을 알아본 바르포르도가 말했다.


“복수를 하러 온 거면 말리지는 않아. 도망칠 힘도 남아있지 않은걸.”

“복수?”


시이나는 고개를 한차례 젓는다.


“내 친구들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 부하도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 난 당신에게 복수를 하러온 게 아니야.


시이나의 손가락은 허리춤의 철 무기 위에 놓여있었다. 바르포르도의 401여단에 한방 먹인 것과 같은 무기일 것이다. 초초한 것처럼 그걸 두드리던 시이나가 문득 손을 멈췄다.


“궁금해서 당신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어. 어릴 때부터 제국군에 들어가서 제국의 이익만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는 번견. 그 덕분에 제국은 역사상 제일 큰 영토를 자랑하고 있고.”


바르포르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론이 기네.”

“당신 정도의 능력이면 굳이 인간 밑에서 복종할 필요는 없었을 거야. 그런데 왜 마족이면서 인간의 편을 들었어?”

“무슨 질문을 하려나 했더니, 후훗.”


바르포르도가 시답잖은 질문이라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시이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마족은 인간과 진정한 의미로 공존할 수 없어. 이 대륙만 봐도 공공연하게 노예취급당하지 않는 나라는 제국뿐이야. 공화국도, 황국도 인간 우월주의에 빠져서 우리는 노리개 취급이라고. 당신도 그건 충분히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도 왜 끝까지 인간의 편에 선 거야? 그나마 상황이 낫다고 하는 제국도 어차피 인간의 나라,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싹 바꾸는 건 놈들의 특기인데.”

“재미있는 물음이구나, 꼬마 늑대 아가씨.”


바르포르도는 피식 웃었다.


“내게서 대단한 대답을 바라고 있으면 너는 분명 실망할 거란다. 나는 네가 기대하는 것처럼 뜻 깊은 이유가 있어서 제국을 섬기고 있는 게 아니니까.”

“질문에 대답해.”


물러나지 않는 시이나를 보고 바르포르도는 한숨을 쉬었다.


“왜 내가 이제껏 제국을 섬겨왔냐라... 깊은 철학 같은 건 없고, 대단한 사상도 없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한 사람을 향한 충성심 뿐.”

“충성심?”


바르포르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 하나면 충분했지. 그 사람은 나를 흡혈귀로 보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줬어. 그가 인간이고 내가 마족인 건 아무 상관없게 된 거야.”

“단지 그런 것만으로ㅡ”

“때로는 그거 하나면 충분할 때도 있단다. 지금껏 나를 움직이는 건 그런 사소한 생각이야. 너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네.”

“당연한 거 아니야, 인간은 마족이 무서워서 깔아뭉개고 박해하는 비겁한 놈들이라고. 그런데 그런 인간에 충성을 바치는 낙으로 산다는 소리를 들어도 납득이 갈 것 같아?”


지긋이 시이나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던 바르포르도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사실 네게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지. 패배한 건 사실이고 나는 포로로서 심문을 받는 입장이니 조금 양보해줄게.”


그녀는 조금 남은 밀크티를 목구멍으로 넘기더니,


“옛날 얘기를 하나 해줄까?”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이 아직 영토를 지금처럼 넓히기 전의 동부 평야는 유디트 황국의 소유였어. 지금은 대륙 남부에 있는, 인간 우월주의의 끝판왕인 광신도들이 교황 아래 모인 나라 말이야. 마족이라는 걸 들키면 재판도 없이 공개처형하는 게 당연한 미친 곳이었지, 거긴. 불결하다면서 마족은 노예로조차 쓰지 않는, 이른바 '마족청정구역'.”


바르포르도의 목소리는 분노의 편린도 없이 평온했다.


“그곳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흡혈귀들의 마을이 하나 있었어. 구름이 자주 껴서 흐린 날이 많은데다 폭우까지 자주 내리니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농민들도 피하는 재수 없는 땅이었지만, 인간이 아닌 우리가 인간인척 숨어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 바깥 세상에 별로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사는 작은 마을 정도로 알려져 있었거든.”


남의 일을 말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라는 단어가 나온 것에 시이나는 눈썹을 올렸다.


“인간의 흉내를 하고 있다지만 결국은 흡혈귀. 인간의 음식으로는 공복도 채워지지 않아. 주기적으로 흡혈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지. 그렇다고 인간을 습격하면 언젠간 꼬리가 길어 정체가 발각되고 말테고. 그래서 형편없는 땅에서 밭일을 해서 모은 푼돈으로 암시장에 나도는 인간의 피를 사서 생존했지.”

“암시장?”


시이나가 물었다.


“어라, 왕국에도 있을 텐데 들어본 적 없나 보구나. 공식 루트로는 거래할 수 없는 불법적인 물건들이 오가는 지하시장 같은 거라고 생각하렴. 인간의 생피 같은 의심스러운 물건도 수요만 있으면 파는 사람도 있었지.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는 암시장 같은 것이 신의 가르침만을 따른다는 황국에도 있다는 게 참 재미있어. 그렇게 조금씩 구한 피는 마을 전체가 배불리 마실 양은 절대 아니었지만 적어도 굶어죽지 않을 수는 있게 해줬고.”


바르포르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는 거란다. 어느 날 심부름을 나간 내가 암시장에서 그 주분 피를 사서 돌아왔을 때, 우리 마을은 처참히 부서져 있었거든... 그래, 너는 성스러운 빛을 본 적 있니?”


시이나의 침묵을 부정으로 받아들인 바르포르도가 어깨를 으쓱했다.


“눈이 멀 것 같은 새하얀 빛이 마을 위에 떠있었지. 마을사람은 보이지 않았어. 무너진 집의 잔해를 아무리 뒤져봐도 잿더미만 가득 쌓여있었더라고. 그걸 잔뜩 들이마셔서 기침을 실컷 하면서도 몰랐지만, 그게 내 이웃이고, 부모님이었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 황국에서 우리 마을에 대한 제보를 받고 집행자를 보냈던 거야. 흡혈귀 사냥에는 도가 튼 놈들이니 마을 사람들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


그건 슬퍼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나 빛이 바랜 기억이었다.


“나는 황국을 침략한 제국의 군대가 마을을 우연히 지나칠 때까지 모두를 기다리며 혼자 있어야 했어. 아직 수중에 있었던 피를 조금씩 마시면서 말이야. 그때 레스트에게 주워지지 않았다면 아마 거기서 굶어 죽었겠지. 자, 여기서 하나 질문이야. 황국에 밀고를 한 건 누구였을까?”

“그거야, 암시장의 상인이라든지... 징세관이라든지.”


당연하게 후보를 좁힌 시이나를 똑바로 보며 바르포르도는 고개를 저었다.


“밀고자는 인간이 아니었어.”


어조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이가 빠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황국으로부터 평야 지대의 영토를 완전히 빼앗고 나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밀고자는 같은 마을 사람이었어. 동족이 제보를 넣은 거야.”

“그런... 어째서?”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구나. 배신할 이유가 있었다는 것밖에 더 있겠니? 유디트 황국의 협력자로서 집행자들로부터의 보호와 더불어 눈이 돌아갈 만한 재보를 약속받았지. 전부 본인한테서 들은 거란다.”


바르포르도는 빈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같은 마족끼리는 배신하지 않아? 그런 꿈같은 소리는 현실이 아니야. 인간이 할 수 있는 추악한 짓은 마족도 할 수 있어. 난 그걸 스스로 경험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인마전쟁에서 패전한 게 인간이었다면 지금 인간이 마족에게 하고 있는 짓거리를 마족이 그대로 하고 있겠지. 마족이라고 해서 그런 대단한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시이나는 바르포르도의 말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와 내 부하들이 걸어온 발자취에 남은 시체들을 보고도 마족이 고귀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농부도, 여자도, 아이도 제국의 적이라면 공평하게 죽여 왔는데 말이야. 그건 설사 같은 마족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지.”

“당신,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네.”

“자랑?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그 시체더미는 내 인생을 정의하는, 나만의 업적이니까. 나는 제국의 어린 황자를 만나면서 마족이 흔히 가지기 마련인 고정관념을 버렸단다. 천천히 죽어가던 나를 구해준 건, 인간이었어.”


바르포르도를 바라보는 시이나는 뭐라고 하면 좋을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나사 빠진 소리로 치부하는 건 쉬웠지만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던 것이다.


“속이 뻔히 보이는 걸. 너는 망설이지 않기 위해 나를 몰아세우려 온 거구나. 자꾸 다른 생각이 드는 자신을 다그치기 위해서.”

“다물어. 당신... 다 안다는 듯이...”


시이나가 위협하듯 허리춤의 총에 손을 얹었지만 바르포르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언해줄게. 네가 따르는 소년은 반드시 이 세계에 파멸을 불러와. 네가 싫어하는 세계도, 좋아하는 세계도 사이좋게 부서지겠지. 어떻게 할지, 선택은 네 몫이겠지만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만ㅡ”


바르포르도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시이나의 팔을 덥석 잡았다. 놀란 시이나가 권총을 치켜든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바로 허를 찌르기 위해서였나.


“물러서!”

“지금의 나는 레스트에게 짐만 될 테니까.”


그 무기의 위력을 직접 본 그녀라면 섣불리 행동해서 어떤 일이 생길지 충분히 알고 있을 터다. 문밖에는 린이 대기하고 있기까지 하니 시이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승산은 없었는데.


“!”


하지만 바르포르도는 주눅 들지 않고, 놀랍게도 총구를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그 의도를 눈치 챈 시이나가 권총을 홱 잡아채기도 전에,


“황제에 영원한 영광이 함께하길.”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귀를 울리는 하는 격발음이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바르포르도의 몸은 생명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자신 있게 앞을 응시하던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졌고, 포로의 입장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던 자세는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그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걸려있는 건 어째서일까.


치이익.


흡혈귀의 시신이 천천히 회색 재로 바뀌어간다.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시이나는 뒷걸음질 쳤다. 이해하기에는 너무 빨리 벌어진 참상이다.


자신의 뒤에서 문이 열리고 급히 누군가 들어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ㅡ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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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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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92 천벽인광 +1 19.12.08 345 8 11쪽
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2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49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81 마력 증강 +1 19.10.31 379 11 11쪽
» 포로의 결정 +1 19.10.27 385 11 11쪽
79 돌이킬 수 없는 선택 +2 19.10.24 391 13 10쪽
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82 11 10쪽
75 세계수 +1 19.10.10 416 12 11쪽
74 에델가르드 토벌 +1 19.10.06 412 12 11쪽
73 빙결의 마수 +1 19.10.03 410 11 11쪽
72 설원 +1 19.09.29 436 11 11쪽
71 류아 +2 19.09.26 468 11 11쪽
70 서로의 요구 +2 19.09.22 453 13 11쪽
69 대화의 시작 +1 19.09.19 449 12 10쪽
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1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63 사전 준비 +3 19.09.01 543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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