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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 비밀을 아는 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필더
작품등록일 :
2015.04.20 11:46
최근연재일 :
2015.10.23 16:27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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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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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수 :
85,862

작성
15.08.1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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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언젠가의 이야기

DUMMY

1026년 가을, 아이츠크호람 모다스 백작이 부하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고열로 괴로워하다가 병사했다. 이름 있는 의사들이 아이츠크호람 백작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병의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다.


곧 이어 알피엑시대륙의 미래라 불리던 발라 모다스가 쓰러질 때도 그들은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리오 모다스는 영지 내의 일인자에 올랐고, 진찰에 참여했던 세명의 대표의사들은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몇몇 사람들은 의사들이 매수되었으며, 쓸모가 없어진 다음 암살당했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명의 의사 중에 한명인 마텔람 슈르카 백작은 아이츠크호람 백작의 친우였으며 발라의 대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텔람 백작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병의 원인을 찾으려했다.


다리오 모다스가 범인이라는 심증은 누구나 있었다. 물증을 잡아낸다면 마텔람 백작은 친구의 원수를 갚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도 허사였다.


거의 열흘간이나 저택 안을 살피고 시체를 조사하던 마텔람 백작은 고개를 떨구고 "이미 사라진 마법으로 암살한 것인 것 같소."라고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마법은 이 세상에 거의 남지 않았다.


40년 전의 전쟁을 끝으로 테르센트의 대기에는 더 이상 마법을 구현할 만한 마나가 남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을 죽일 정도의 힘을 갖는 마법은 설령 마나가 있다 해도 사용할 수 없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마텔람 백작이 마차에 치어 죽은 다음, 그의 일가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다. 다리오 모다스는 그의 여섯 아들들에게 되먹지도 않은 죄목을 붙여서 모조리 북랑시에로부터 추방시켰던 것이다.


다만 12살의 고명 딸인 첸 뤼트 슈트람은 추방당하는 대신 인질 명목으로 다리오 성에 갇혔다. 그녀의 오빠들은 극렬히 저항했으나, 다리오의 절대 권력을 이겨낼 수 없기에 눈물을 흘리며 첸을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첸은 눈물따위는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녀의 아버지를 닮았다. 다리오 성에 갇히게 된 것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밝힐 찬스라고 생각할 정도의 기개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츠크호람 백작님이 돌아가신 이유를 밝혀내서, 증거를 가지고 저택을 탈출하겠어."


그렇게 되면 다리오와 그의 아들들이 아무리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무너뜨릴 수 있을거라고 첸은 생각했다.




그녀는 여기저기서 억울하게 잡혀온 어린 소년 소녀들과 함께 모라우 성 깊숙한 곳에 갇혀 지냈다. 부모와 떨어진 것에 대해 슬퍼하는 아이들은 한 주가 지나기 전에 주방일을 돕게 되거나 세탁물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녀는 밤이 되면 훌쩍이는 소리만이 들리는 공동 숙소를 몰래 빠져나가 캄캄한 다리오 성의 복도 구조를 익혔다.


"첸, 밤에는 나가지 않는게 좋아."


몇몇 아이들이 첸에게 조심스럽게 조언했지만 첸은 여유있는 척 했다.


"난 언젠가 빠져나갈 거야. 그때는 너희도 모두 탈출하게 해줄게."


"그게 아니야, 첸. 밤은 위험하단 말이야."


아이들 중 가장 어린 아이가 불안한듯 눈동자를 굴리며 그녀를 말렸다.


"위험하다니, 어째서?"


"이 성은 밤이 되면 괴물이 돌아다녀. 난 괴물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단 말이야."


첸은 그 소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겨우 12살의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행동력으로 그녀는 다리오 성을 탐색해나갔다. 경비가 돌아다니는 시간을 알아낸 다음, 안전하게 복도를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냈다.


매일같이 파티가 벌어지는 홀 근처는 경비가 삼엄했기 때문에 다가갈 수 없었지만, 첸은 개의치 않았다. 홀 이외의 장소는 경비가 부실한데다가, 아이들이 밤중에 복도에 나온다고 해도 문제가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낡은 모시 앞치마의 뒤에 건물 구조 지도를 조금식 그려나가던 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몇몇 사소한 자료들이 단서였다.


'너무 낮아.'


최근 지어진 다리오 성은 4층이었다. 그런데 사용된 기재와 인부는 필요이상으로 많았다.


'이정도의 자재라면 10층성이라도 지을 수 있어. 분명히 지하에 무언가 있을거야.'


첸은 총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곳에 모라우의 비밀이 있을거라고 확신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 중에 단 하나만이 매일 두 명 이상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다. 그 문은 긴 복도 끝에 있었으며, 회색빛의 큰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첸은 밤마다 지하로 통하는 다른 길을 수색했지만 허사였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처음보다도 더욱 날카로워졌고, 모든 것을 경계했다.


야간 수색을 하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계획은 영영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언제 탈출할 수 있는거야?"


언젠가의 작은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아직 기회가 나지 않아. 걱정하지마. 계속 방법을 찾는 중이야."


"하지만...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는걸."


첸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매주 두세명의 아이들이 불려나갔다.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거니까 잔말하지 말고 따라와."라고 병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소문은 제멋대로였다. 다리오가 기르는 개의 먹이가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아이들은 모두 두려움에 울었다. 우는 아이들을 본 병사들은 킥킥댈 뿐, 달래주는 말을 건네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공포에 두려워한다 해도 첸은 꿋꿋했다. 그녀는 단서를 하나씩 찾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라지는 날이 되면 지하 입구에 경계서는 병사가 줄어들어.'


첸은 머릿속에 기억해 놓은 정보를 되뇌였다.


'밤 12시부터 2시 사이에는 병사가 없어. 아이들이 끌려가는 날만이야.'


즉 그 시간이 되어 지하 복도까지만 갈 수 있다면, 지하로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날에는 한 여성이 성에 와.'


워낙 특이한 여성이기 때문에 눈치 못 챌수가 없다. 그 여성은 다리오가 자신의 동생 맥크로스에게 직접 모셔오게 하는 귀빈으로, 그 날을 전후해서 성안이 긴장으로 가득찬다.


여성은 긴 파란 머리칼-테르센트에서는 정말로 드문 머리색이다-을 자랑처럼 팔랑이며,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는데, 마법 시대에나 썼을 것 같은 보석이 박힌 거대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아름답다, 라고 첸이 혼잣말을 할 정도로 그녀는 찬란하게 빛났다. 화려한 복장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녀의 뒤로 녹색의 촌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꼽추 하나가 뒤따르는데 불가사의한 색의 액체-어쩌면 기체일지도 모른다-가 담긴 유리병이 가득 들은 찬장을 등에 매고 있었다. 손에는 구리 저울을 소중한 것처럼 들고 있었고, 눈을 감히 올려뜨지도 못하고 바닥만 보며 여성을 뒤따랐다.


'노예인걸까?'


첸은 기둥뒤에 숨어서 그들을 훔쳐보았다. 기둥 뒤였기 때문에 보일리 없었지만 첸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는 여성이 자신이 있는 곳을 훑어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자리를 피했다.




결행의 날을 정했다. 다음 주, 여성이 오는 날에 지하로 내려가겠다고 결심했다.




1026년의 마지막 주.


북 랑시에성은 한해를 보내는 축제를 시작했다. 모라우 성도 그 축제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들떠올랐다. 매일 변변찮은 식사-멀건 야채 스프와 마른 빵-만 나오던 공용 숙소의 식단도 평소와는 달랐다. 초콜릿 푸딩도 조금이지만 주어졌다. 가장 나이가 많은 첸은 아이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고, 자신은 먹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빠들과 있을 때는 자주 먹었던, 그녀가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에게는 사소한 것이었다.


오늘이 바로 성에 "그 여자"가 오는 날인 것이다. 몇 명의 아이들이 지하로 내려갈 것이다. 차라리 그 안에 자신이 낀다면 당당하게 지하로 내려갈 수 있겠지만, 일이 그렇게 잘 돌아갈 리 없다.


'그렇다면 12시에 복도로 가면 돼.'


이제는 자신의 방처럼 익숙한 지하로 향하는 검은 복도를 떠올리며 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곳은 충분히 익숙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마치 누군가가 그 복도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것 같은...




밤을 기다리며 첸은 그리운 꿈을 꾸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잠들었었다. 아버지는 그런 첸을 깨우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다. 첸은 중간 부분-달을 쫓아 주인공 소년이 하늘로 올라갈 방법을 묻는 장면-에서 잠이 깼지만, 계속 자는 체 했다. 아빠도 첸이 깬 것을 안 것 같았지만, 계속 읽어주셨다.




"너, 그리고 너. 둘만 따라와라."


멀리서 들리는 병사의 쉰 목소리에 첸은 눈을 천천히 떴다. 두 아이가 병사에게 이끌려 방을 나가고 있었다. 그 중에 한명은 가장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첸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첸은 딱딱한 빵을 입에 밀어넣고 결전을 준비했다. 지하로 들어가면 모다스와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아버지를 죽인 방법이나 관련된 문서를 얻을 수도 있다. 그 다음 어떻게든 저택을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모다스 성의 경비는 말못할 정도로 허술했기 때문에, 첸 정도의 어린아이가 빠져나갈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약 지하에 가서도 증거를 못찾으면?"


첸은 자문(自問)했다. 여태까지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지만, 그래도 가족이 보고 싶었다. 오빠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를 데리고 탈출하는 상상은 차선책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통쾌한 일이었다.


'안 돼. 각오를 다져야해.'


증거를 찾는데 집중해야한다. 오늘 가는 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가. 첸은 창밖의 달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달이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걸리는 시간이 머지 않았다. 희미한 초승달은 마치 달이 죽어가는 것 같았다.




잠든 아이들 곁을 지나 첸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발은 맨발이다. 소리를 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지하로 가는 복도를 마지막으로 지키던 병사는 도망치듯이 떠나고 있었다.


첸은 그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질때까지 기다렸다가 지하입구로 향했다.


자물쇠는 걸려있지 않았다. 혹시나 안에서 문이 잠겨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녀가 살짝 밀었는데도 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좋아, 가자."


그녀는 작게 소리내어 기합을 넣었다. 계단은 지하를 향해 길게 뻗어있었다. 가끔은 갈림길이 나오고 또다시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졌지만 길을 헤멜 염려는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빛이 밝혀져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타타탁, 소리를 내어 타오르는 횃불의 빛을 따라 숨을 죽이며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 지하가 영원히 이어진다고 느낄만큼의 시간이 들때쯤, 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실제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30분? 1시간?


'긴장을 하면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고 했어. 아직 10분도 안지났을거야.'


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계단에는 갈림길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저 내려가고 내려갈 뿐.


"어?"


첸은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길이 끊겨있었다. 돌로 된 벽이 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럴리가 없어. 이럴리가 없는데..."


첸은 돌벽의 곳곳에 손을 댔다. 비밀문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긴 계단길을 만들어 놓았을리 없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땀도 닦지 않고 그녀는 돌벽앞에서 시간을 지체했다. 근처의 횃불도 당겨보고 벽돌을 일일히 눌러보았지만 비밀문 같은 것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첸은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경비가 다시 돌아오는 시각은 2시경. 만약 빠져나간다면 그 이전이 되어야 한다. 지금 달려서 돌아간다해도 아슬아슬할 것이다.


'길을 잃어서 여기에 왔다고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결국 첸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 곳을 다시 수색했다. 이번에는 조금씩 되돌아가면서 벽을 두드려보았다. 반드시 비밀문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보장은 없다.


만약 비밀문을 만든다면 그 전에 들어갈 통로를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 첸의 땀에 젖은 뺨을 스쳤다.


'바람?'


첸은 눈을 반짝였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벽에 가까이 댔다. 체온을 떨어뜨리는 희미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여기야."


첸은 벽을 세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횃불 바로 아래에 있는 벽돌처럼 생긴 스위치를 발견했다.






스위치를 누르자,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벽으로 위장하고 있던 돌문은 스르륵, 하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마치 마법처럼.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첸은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횃불이 밝혀져 있는 거대한 신전이었다. 신전,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신 엘리츠나의 신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제단위에는 붉은 피가 흩어져있었다. 무서운 병사의 모습은 없었다.


홀의 구석에는 넝마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10명 이상일까? 80피메세도 안되어보이는 사람도 있고, 200피메세가 넘어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뭔가를 중얼거리며 벽에 기대어 있었다.


홀의 중앙에는 깊은 구덩이가 파여있었고, 그 구덩이 앞에 바로 그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구리 저울을 든 꼽추는 구석에서 불안한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두려운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저 구덩이는 뭐지?'


첸은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앞치마에 닦았다. 누구에게도 눈치채이지 않도록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다가갔다. 여인은 친절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누구와 말하고 있는거지?'


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의 주변을 주시했다. 여인이 앞에서 누군가의 그림자를 확인한 순간, 첸은 깜짝 놀랐다. 공용숙소를 같이 쓰던 작은 소녀가 여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아이는 여기에 왜...'


파란 머리칼의 여인이 소녀에게 무언가를 속삭이자, 소녀는 정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구덩이 아래로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툭, 하고 떨어졌다.


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자칫하면 새어나갈 뻔한 비명에 대한 염려보다 구덩이 아래로 떨어진 아이가 더 걱정되었다.


여인은 자신은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지하의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쫓아 넝마를 뒤집어 쓴 크고작은 사람들이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녹색 옷을 입은 꼽추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구덩이를 한번 쳐다보고 허둥지둥 짐을 챙겨 여인를 뒤따랐다.


모두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첸은 구덩이를 향해 달려갔다.


"괜찮아?"


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구덩이 아래를 쳐다보았다. 손이 뻗어나왔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손은 소녀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뱀의 비늘같은 것이 덕지덕지 엉겨붙어있다. 소녀의 얼굴이 코 위에만 남아있는 "그것"은 벌레에게 파먹힌 눈으로 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찌그러진 입에서 낼름거리는 혀는 두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등은 뱀처럼 휘었고, 피부는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괴물"은 소녀를 보며 기괴한 목소리를 내었다.


"꺄아아악!"


첸은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질쳤다. 더 이상은 냉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아빠, 아빠, 하고 그리운 호칭을 불렀다. 괴물이 천천히 다가왔다. 소녀의 눈이 있던 곳에 노란색의 도마뱀같은 눈이 들어섰다. 우직우직하고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바닥에 마구 흩어졌다. 괴물은 울부짖었다.


첸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첸은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절했던 것일까? 아니면 기억이 잠시 지워진 것일까? 구속되어있지 않았다. 첸은 아직 자신이 지하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랜턴의 빛이 비추는 이 좁은 방에는 첸과 파란 머리칼의 여성, 그리고 구석에 쭈그려 앉은 다른 한 명만이 있었다. 여인은 첸이 충분히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전 죽는건가요?"


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염려하지 말렴, 얘야. 아무도 널 죽이지 않아."


첸은 이 고혹적인 목소리에 적잖게 안심했다. 동시에 이렇게 갑자기 안도가 되는 것에 대해 의아함도 느꼈다. 여인은 그 의아함을 곱씹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난 마후라나야."


"마후라나... 요?"


그것은 테르센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었다.


태초에 신이 인간과 천계를 나눌 때, 한 인간은 신을 독실히 따랐다. 여신은 인간에게 천사의 자격을 주었고, 그 인간은 천사가 되었다. 신을 상징하는 파란 색의 머리칼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천사가 된 인간은 오랜 시간 천계에서 행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인간들이 겪는 고통을 좌시할 수 없었기에 그 천사는 다시 인간계로 내려갈 것을 청했다. 여신은 그녀에게 마후라나, 고대어로 "인간을 사랑하는 자"라는 이름을 내리고 다시 인간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 후 그 인간은 수명이 다하여 죽었지만, 그 후손은 마후라나의 이름을 계승하여 계속하여 인간의 곁을 지켜왔다. 인간으로는 상상을 할 수 없을정도의 마력을 갖는 마후라나는 그야말로 대마도사였고, 테르센트에 위기가 올 때마다 나타나서 그가 사랑한 인간을 지켜왔다.




모든 것은 전설이지만, 테르센트에서 전설이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마후라나요?"


그렇기에 첸은 다시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후라나가 모다스의 성 지하에 있다는 것부터가 믿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 본 그 괴물은 무엇일까?


"궁금한게 많은 모양이구나."


마후라나라고 자칭한 자는 생긋 웃었다. 구석의 녹색 옷을 입은 꼽추는 움찔 하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름이 뭐니?"


"전... 첸이요."


첸은 거짓이름을 말하려고 했지만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서 본명을 말해버렸다. 마후라나는 다시한번 미소지었다.


"좋은 이름이구나, 첸."


첸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점점 머리가 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기분탓일 것이다.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넌 죽지 않아, 첸. 거기에 대해서는 보증할게. 그러니 안심해도 돼."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일까.


"날 엄마로 생각해도 돼, 첸."


당신은 엄마가 아니야. 내 엄마는... 엄마는...


"어라?"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가 어떻게 생겼었지?


"엄마라고 불러보렴, 첸."


여성은 이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첸은 "엄마"라고 말했다.


"착한 아이구나. 넌 죽지 않아. 좋지?"


첸은 "네."라고 대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인은 첸에게 뭔가 더 말을 걸어왔다. 첸은 "네."라고 대답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눈 앞의 사람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녹색옷의 남자는 눈을 꿈뻑이며 두 사람의 담화를 듣고 있었다.


"넌 다시 태어나는거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첸은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여인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걷고 있는데도 걷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구름위에 떠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넌 똑똑한 아이니까, 다시 태어나면 분명 엄마를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을거야."


첸은 매우 기뻤다. 엄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걸었다. 구덩이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구덩이 안에는 뱀과 전갈과 지네가 가득 차있었다. 시커먼 것들이 꿈틀거렸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그 곳에 들어가면 너무나 포근할 거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엄마가 말한 것 같아서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겨서, 허공에 발을 내딛었다.






와직와직, 와득와득.


피부를 파먹는다. 우득우득, 하고 손가락을 무언가가 씹고 있다. 몸을 조이는 차가운 비늘, 벌레가 팔을 기어가는 기분. 옷속으로 기어들어오는 지네가 등줄기를 타고 기어가는 기분.


와지직, 뿌득뿌득, 투투툭.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아프다.


내장이 흔들린다. 몸 속의 모든 것이 와작와작 씹혀서 사라져가는 감각. 그 곳을 채워가는 꿈틀대는 것들. 이 과정이 너무나 아픈데도, 첸은 웃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소녀의 눈동자가 올려다본 구덩이 위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흘렀다.






마후라나는 구덩이에서 기어나오는 괴물을 보고 미소지었다. 괴물은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괴물의 울음소리가 검은 신전을 울렸다. 벽에 기대어 있던 넝마를 걸친 괴물들도 따라 울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보세요, 조르너. 이 아이는 다시 태어난 거에요."


그녀는 자신의 곁에서 연신 굽신거리면서도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울상짓는 사내에게 말했다.


"태어나면 우는 것은 탄생의 섭리지요. 보세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하고 마후라나가 황홀한 듯이 말했다. 소녀의 뺨에 흐르던 눈물은 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말라버렸다. 괴물은 녹색 남자가 던져준 넝마를 뒤집어쓰고, 엄마의 뒤를 따랐다. 이제 더 이상 첸은 이 세상에 없었다.


작가의말

이 글은 본편, 붉은 거인, 순백의 장군, 비밀을 아는 자에 모두 올라갑니다. 복붙을 하면 작은 따옴표가 깨지는군요. 일일히 수정하기가...(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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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화. 있을 수 없는 계략 15.07.08 108 1 17쪽
9 9화. 티에세를 향하여 15.07.02 157 1 9쪽
8 8화. 사자의 방문 15.06.26 148 1 3쪽
7 7화. 되찾은 세인트 에일린 -2 15.05.29 109 1 11쪽
6 6화. 되찾은 세인트 에일린 -1 15.05.29 123 1 11쪽
5 5화. 지켜진 적 없는 약속 15.04.29 107 1 6쪽
4 4화. 실수 15.04.20 139 1 14쪽
3 3화. 퀴나성 전투 15.04.20 144 1 13쪽
2 2화. 슬픈 봄날 15.04.20 166 1 21쪽
1 1화. 홀로 남은 소녀와 홀로 남은 남자 15.04.20 265 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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