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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 비밀을 아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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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작품등록일 :
2015.04.20 11:46
최근연재일 :
2015.10.23 16:27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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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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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수 :
85,862

작성
15.05.2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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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6화. 되찾은 세인트 에일린 -1

DUMMY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나덜론은 나직히 목소리를 냈다.


"이번 전투는..."


헬레나와 엘리사는 나덜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인트 에일린의 입구는 동쪽과 남쪽뿐이야. 성벽은 견고하고, 공성은 어려워. 둘로 부대를 분산시켜서 공격했지만 효과가 크지 않았어. 멜비나는 전장에 아예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암살할 수 없어."


그는 기억을 냉정하게 되짚어갔다.


"히폴리토는 남쪽 성문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어. 안젤라는 동쪽 성벽이 무너지면서 죽고... 두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우리는 성문을 열었고, 멜비나를 죽일 수 있어."


나덜론의 목소리는 풀벌레소리와 섞였다. 엘리사는 아무말 없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성벽을 먼저 넘어야만 이길 수 있어. 퀴나 때처럼... 내부의 호응이 없으면 플로라님은 매우 고전하게 돼."


나덜론은 왼손을 들어 그의 오른팔을 잡았다. 아직 제대로 움직일리 없다. 이 팔로 성벽을 넘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아빠가 그렇게 하면 이길 수 있나요?"


"희생은 컸지만, 이길 수 있어."


"다른 방법은 없나요?"


헬레나가 묻자 나덜론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시도는 전부 실패했어. 그것이 거의 최선이었다고 해. 어차피 지금은 불가능하겠지."


나덜론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침울해진 엘리사와 달리 헬레나는 평온해보였다.


"나덜론님.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으면 돼요. 더 좋은 결과를 만들 기회가 있을거에요."


나덜론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은 안도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래. 좌절하고 있을 틈은 없지. 생각해봐야겠어."


"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적들도, 그리고 나덜론님도요."


헬레나는 웃어보였다. 엘리사도 나덜론의 손을 잡고 흔들어주었다. 은발의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의외로 겨우 3분만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다른 방법이 있었어."


그는 헬레나를 바라보고, "이거라면... 이길 수 있어..."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를 위해 최고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저택은 고요했다.

한때 세인트에일린을 세운 체사르 아모스백작은 자신의 저택을 짓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클라우디오 아모스는 도시를 상징하는 건물의 중요성을 알고 상당히 큰 건물을 지었다.

사람들은 라빈그라나드의 왕성을 닮은 아름다운 이 대리석 건물을 아모스 저택이라 부르며 사랑했다. 아모스 저택은 백작가문 사람들이 한 층을 빼고 모든 도시 사람들에게 쓸 수 있도록 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개중에는 만취하여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의를 지키며 정다운 말이 오가는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명만이 저택의 홀에 앉아있었다.


봄은 한참전에 시작되었는데 아직 밤바람이 차가웠다. 멜비나는 혼자서 그녀 전용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의자는 멜비나가 직접 주문한 것으로, 왕좌와 닮았다. 금으로 만든 의자는 라빈 그라나드의 성에 있는 황제의 의자와는 다르게 생겼다. 멜비나의 기억억에 의지하여 제작한 이 의자는 왠지 어설프고, 조잡했다. 그래도 멜비나는 이 의자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자라온 성을 닮은 이 저택에서, 왕좌를 닮은 이 의자에 앉아있으면 모두가 자신을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치 황제처럼 모두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멜비나를 미워했다. 그들이 좋아하던 아모스 백작을 쫓아낸 것이 멜비나라고 생각하던 것일까? 그들의 비난은 너무나 듣고 싶지 않았던 것.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죽였다. 자신에게 상처주는 사람들때문에 괴로웠다. 너무 슬퍼서, 그 욕설을 담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록, 사람들은 자신을 증오했다. 백성들은 더욱더 아모스 백작만을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아모스 백작이 없다면 자신을 사랑해 줄거라고. 마치 이 의자에 앉아서 만민의 사랑을 받는 작은 황제처럼.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레프그루츠 가문의 시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늙고 병든 아내에게 질려서 병수발을 들던 시녀를 겁탈했다. 멜비나가 태어난 직후, 그녀의 어머니는 자살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네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죽어라."


자살을 강요한 집사의 말에 그녀는 아무말 없이 멜비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날 밤 그녀는 갓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쌔근쌔근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목을 매달았다. 멜비나는 그렇게 자랐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레프그루츠 대공은 그녀를 동정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멜비나 본인이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이 곳에 온 다음에는 달랐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았다. 백성들이 아무리 그녀를 비난해도 부하들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 중에 사자보는 멍청해보이고, 둔하게 생겨서 그녀의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그녀 대신 말에 채여주기도 했다.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부하에게는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침실로 불렀다. 그는 당황해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그 후로 사자보는 더욱 자신을 위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무척 소중한 일이었다.


"그래. 여기에 오길 잘했어."


멜비나는 그렇게 말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 위해주는 사람이 있었어. 나 대신 죽어주기도 했어. 날 사랑해주었어."


그녀는 미소지었다. 바람은 어느새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라, 멜비나를 죽여라. 그것은 노래소리와 같아서, 듣다가 잠이 들것 같았다. 동쪽에서, 남쪽에서, 그리고 서쪽에서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서쪽은 바다이다. 거기에서는 누구도 올 수 없는데 그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멜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멜비나님! 적입니다! 시민 반란군 놈들이 이미 성문을 돌파했습니다! 곧 여기에 올겁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급하게 말하는 청년을 힐끔 보았다. 이름이 뭐였지? 토마스? 아구스틴? 아냐. 스키너 린치였나? 그의 무거운 갑옷은 피투성이였다. 그의 피는 아닌 것 같다. 그럼 저건 누구의 피지?


"적들이 바다로 돌아들어왔습니다...! 땟목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공성병기를 부숴서 만든... 동쪽과 남쪽에 우리의 병사를 묶어놓고 성의 서쪽을 파괴하고 들어왔어요! 지금 남쪽도 돌파당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너무 창백했다. 질려있다. 마치 당장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어서 도망치십시오! 여기는 위험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절망이 담겨있었다.


"린치?"


그의 이름을 확인해보았다.


"예, 멜비나님."


그는 당황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름이 맞았나. 아니면 그냥 대답하는건가?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밤하늘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그 비명소리가 꿈 속에서 듣는 것 같아서 몽롱하다.


"린치. 난 어떻게 하면 좋지?"


"멜비나님, 도망치십시오. 제가 뒤를 막겠습니다."


"... 당신도 죽을거야? 사자보처럼?"


멜비나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린치는 그녀에게 각오가 담긴 미소지어보였다.


"아니오. 저는 살아남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를 드러내고 힘겹게 웃는 그를 보며 멍하니 물었다.


"린치, 왜 당신은 날 위해 목숨을 거는거야?"


그는 의외라는 듯 나를 잠시 보더니, 자신의 피묻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번 문지르고 다시 환하게 웃어주었다.


"전 어릴 때부터 성에서 살았습니다. 천한 몸이라서 전 친구가 없었죠. 멜비나님이 저에게 처음 말을 걸어주실 때부터, 멜비나님을 위해 싸우기로 다짐했습니다."


"나, 기억나지 않아."


"너무 어릴 때니까요."


린치는 꿈에서 덜 깬 자신의 주군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살아주십시오. 멜비나님."


멜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끄덕이다가 얼굴을 가리고 "응."하고 대답했다. 멜비나는 저택의 후문으로 달려갔다. 린치는 검을 뽑아들었다. 저 소녀가 자신의 거짓말에 힘을 얻기를 바라며. 생각해보면 충성을 다할만한 주군은 아니었다. 그저 동정심으로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덧없이 웃었다. 동시에 알리사와 나덜론이 저택으로 달려들어왔다.


"덤벼라! 여기서는 한발짝도 못간다!"


린치는 크게 외치며 검을 들었다. 엘리사의 대검이 그를 힘차게 내려쳤다. 린치는 대각선 방향으로 날아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급히 숙였다. 그는 일어나면서 소녀 무장의 목을 노려 양날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검은 나덜론의 은사에 휘감겨 손에서부터 빠져나갔다. 나덜론은 왼손을 휘둘러 린치의 검을 멀리 날러버렸다.


린치는 그렇게 전투 경험이 없는 무장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무기를 상대로, 이 긴박한 상황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였다. 그는 엘리사를 발로 걷어차고 재빨리 단검을 뽑았던 것이다. 체중 차이를 노린 것이지만, 엘리사는 보통의 여자아이와는 달랐다. 발로 턱을 차였지만 그녀는 대검의 무게에 몸을 맡겨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그리고 린치가 자세를 잡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대검은 린치의 허리에 박혔다.


"멜비나... 님."


육중한 무게의 검이 허리에서 빠져나갔다. 그 검은 잠시후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멜비나는 이제 뛰지 않았다. 비싼 옷도 구두도 모두 넝마가 되었다. 아름다웠던 긴 머리칼은 잘려나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평범한 소녀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만한 상황에서도 그녀에게는 마지막 운이 남아있었다.


어둠과 불꽃은 그녀의 모습을 감춰주었다. 호위병이 모두 죽은 것도 그 운의 하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대장이 홀로 걸어나갈거라는 생각을 하는 병사는 없었다. 멜비나는 이제 세인트 에일린을 벗어났다. 그녀는 그래도 계속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아냐. 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잖아.'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것은 너무나 기쁜 추억이라서,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풀벌레소리가 들리는 밤하늘에 소녀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작가의말

세인트 에일린은 테르센트에서는 보기 드문 계획 도시로, 50년 전만해도 황무지였던 땅입니다. 도시 이름인 세인트 에일린은 선왕 에일린에서 따왔습니다. 에일린 황녀는 티프소의 1차 침공 때 가이아 프레디히라는 젊은 장교에게 사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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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 되찾은 세인트 에일린 -1 15.05.29 124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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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화. 실수 15.04.20 140 1 14쪽
3 3화. 퀴나성 전투 15.04.20 14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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