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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 비밀을 아는 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필더
작품등록일 :
2015.04.20 11:46
최근연재일 :
2015.10.2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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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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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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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0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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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1화. 홀로 남은 소녀와 홀로 남은 남자

DUMMY

아모스 백작가문은 이계의 악마와의 전쟁 직후 분사정책(*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에 의해 세인트 에일린으로 이주해왔다. 당시의 아모스 가문을 대표하던 체사르 백작은 그저 성실하기만 하였으며, 딱히 왕실에 대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황제부재기를 맞이한 리베리아 제국의 혼란 속에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할 일만 할 뿐, 정치적 변화에 무신경하게 대응했다.


그가 분사정책의 희생자로 선정되어 수도를 떠나게 된 것은 그런 그의 대응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라빈 그라나드에서 쫓겨난 분노 절반에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특유의 성실함 절반으로 아모스 가문은 의욕이 넘치게 일했다.


이 새로운 도시는 왕실이 특별히 하사한 세인트 에일린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노이슈 에일린 테르센트와 엘츠 에일린 테르센트의 희생을 기린다는 그럴싸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인트 에일린은 사실상 그런 그런 대단한 도시는커녕 대륙 최서단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아모스 백작은 귀족이란 이름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 곳의 백성들과 같이 땅을 갈고, 길을 내고, 건물을 지었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대륙의 그 어느 집단보다도 성힐하게 일했다. 하지만 거의 10년이나 도시는 성장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뭐라해도 물이었다. 도시의 어디를 파도 물이 솟아나지 않았다. 몇몇의 성직자은 창의적인 해결법을 제시했다. 그들의 말인즉슨, 도시에 신전이 없고, 도시의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으니 신이 물을 내려주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체사르 아모스 백작이 한 거절의 말은 지금도 가벼운 비난과 묵직한 경외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겨우 신전이 없다는 이유로 우릴 말려 죽이려하는 신은 안 믿겠소.”


이 늙은 백작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인부를 고용하고 수로를 파기 시작했다.


그의 물을 만드는 계획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공사였다. 바로 옆 도시인 퀴나의 곁을 따라 흐르는 강물의 방향을 바꾸어 세인트 에일린까지 끌어오는 것이었다. 강물의 방향을 바꾼다는 상식을 초월한 계획이었지만 세인트 에일린의 백성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큰 댐을 만들고, 수문으로 물길을 나눈 다음 두 가닥의 물길을 도시 안으로 끌어왔다. 이 엄청난 규모의 공사는 무지막지한 돈과 어마어마한 인원, 그리고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공사 도중에 체사르 아모스 백작은 둑이 무너지는 사고로 중상을 입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체사르 백작의 아들인 클라우디오 백작은 그 뒤를 이어 공사를 마무리했고, 도시는 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강물이 들어왔다.


세인트 에일린은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시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를 따라 흐르는 맑은 강물을 보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늘을 극복해냈다!”


분사 이후로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고통을 이겨내려는 희망을 위해 흐르며 도시의 사람들은 단합했고, 테르센트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진 젊은 시민들로 성장했다.


도시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두 줄기의 물줄기가 깨끗하게 정리된 마을의 외각을 따라 흐르며 도시를 끌어안았고, 늪이었던 지면은 타일이 깔린 도로로 바뀌었다. 도시의 건물들은 가지런했고, 경수로는 푸른 밭을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왕성도시 라빈 그라나드라 해도 이보다 깔끔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 이 도시는 그들의 자산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인트 에일린은 새로운 영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레프그루츠 대공의 조카인 멜비나 백작은 부임당시 21세였다. 그녀는 이 도시에 세금을 올리는 문제로 방문한 다음 이 아름다운 도시에 반해버렸고, 왕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레프그루츠 대공에게 며칠씩이나 졸라대었다.


“나 그 도시가 갖고 싶단 말야!”


조카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그는 그 말을 들어주기 위해 황제에게 세인트 에일린에 새로운 성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밝혔다. 제안의 근거는 아모스 백작가문이 흥청망청 돈을 써서 더 이상 백작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졌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더 이상 돈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클라우디오 백작은 형식적인 조사를 받은 다음 새로운 성주에게 도시를 내주어야 했다.


그의 가문은 근처의 도시인 퀴나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들의 땀과 피가 흐른 도시를 내주는 것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지만, 아모스 백작의 사람들은 감히 왕실의 뜻에 저항할 의지가 없었다. 순순히 이주하는 그들을 위해 왕실에서는 금화 몇 자루를 보상금인양 내주었다.


세인트 에일린의 주민들은 이 처사에 분노하며 아모스 백작을 위해 왕실에 편지를 쓰고, 수도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정성을 다해 만든 도시를 버릴 수 없었기에 아모스 백작의 뒤를 따를 수 없었다. 클라우디오 아모스 백작은 그의 가솔과 몇 명의 추종자만 데리고 백성들의 작별인사를 뒤로하고 세인트 에일린을 떠났다.


세인트 에일린에 비할 수 없겠지만, 퀴나는 제법 거대한 도시였다. 하지만 수도와의 거리가 워낙 멀었고, 농업이 발달하기에 땅이 척박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활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농사를 지어도 수확이 많지 않았으니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수가 워낙 적었고, 이중에 다수가 도시를 이탈하여 조직적인 범죄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퀴나의 근교는 귀금속과 마약의 밀수가 성행하는 유명한 범죄지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클라우디오 아모스 백작은 왕실에서-정확히 레프그루츠 대공이- 도시값처럼 내려준 황금을 모두 털어서 도시를 정돈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만든 사병집단은 그 수가 수백에 이르렀으며 철저한 훈련을 받은 다음, 군율에 따라 도시를 지켰다. 클라우디오 백작의 노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퀴나 북쪽의 산맥을 조사하던 도중 우연히 발견된 금광의 개발을 위해 다시 한 번 모든 재산을 쓴 것이다.


“아버지가 세인트 에일린에서 전 재산을 백성을 위해 썼을 때 솔직히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뜻을 안다. 너도 언젠가는 내 뜻을 알거야.”


클라우디오 백작은 아직 소녀였던 플로라에게 말했다. 플로라는 보란듯이 코웃음을 치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지금도 알아요. 별 걱정을 다하시는 군요.”


플로라 아모스는 백작의 걱정과 다르게 정말로 백성들을 위해 해야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귀족의 자부심을 한 번도 잃지 않았지만, 괴로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배만 불릴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매우 강직하고, 정의감에 차있었으며, 진보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귀족은 결국 백성에게서 나오는 거에요. 백성들이 굶는다면 귀족이 있을 이유가 없죠.”


백작과 플로라는 열성적으로 광산개발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로 퀴나는 7년 만에 거대한 광산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광산의 수입은 상상을 초월했다. 클라우디오 백작은 이 수입을 제대로 분배하였고, 도시의 사람들을 위해 학교와 도서관을 지었다. 금광 사업에 항상 따라붙는 도적들을 막기 위해 그는 사병집단을 늘렸고, 그 결과 도시는 갑작스러운 부의 증가에도 안전이 보장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이 소문은 근방으로 퍼져나갔는데 세인트 에일린의 멜리나 백작은 매우 이 사실을 불쾌하게 여겼다. 세인트 에일린은 이미 과거의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었다. 강물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흐르지만 정비되지 않은 수로의 물은 고여있었고, 썩은 냄새가 났다. 도시에는 과도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었고, 학교는 문을 닫았고, 병원은 멜리나 백작의 개인 마사지를 위한 관리실로 변모하였다.


멜리나 백작은 본인의 27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세인트 에일린 도시 전체에서 거대한 불꽃놀이를 하라고 명령했는데, 불꽃놀이를 위해 준비한 화약에 불이 붙어 큰 화재가 나버렸다. 기대하던 불꽃놀이가 불가피하게 취소되자 그녀는 크게 노하여 관련자 수십명을 모조리 참수시켜 버렸다.


그러던 중에 퀴나의 금광 성황의 소문을 듣자 멜비나는 즉시 수도로 달려가서 자신의 큰아버지에게 무서운 내용을 칭얼거렸다.


“아모스 백작이 사병집단을 늘렸어요. 왕실에 반란을 할 생각인 것 같아요. 게으른 세인트 에일린의 백성들은 아모스 백작에게 선동되어 반란에 찬동하려고 했지만 제가 본보기를 보여 일부를 처형하여 겨우 막아냈답니다. 퀴나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고 있어요!”


형식적인 조사가 다시 벌어졌다. 조사관에게는 협박과 황금이 더해졌다. 한주 후 레프그루츠 대공에게 날아온 보고서는 멜리나 백작의 말 그대로였다.


“사병을 키우고 훈련을 시키고 있다니...! 폐하, 이는 명백한 반란 음모입니다!”


“... 대공의 뜻대로 하세요.”


나약한 황제는 슬픈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었다.




1027년 가을. 퀴나, 클라우디오 아모스 백작은 멜리나 백작의 갑작스런 방문에 의아해 하면서도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마중 나갔다. 플로라는 이 때 상업지구와의 교섭을 위해 오제로 떠나있었는데 만약 플로라가 있었다면 마중 따위는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모스 백작 부부와 시종들을 보자마자 멜리나 백작은 자신이 이끌고 온 오 천의 병력을 풀어 그들을 사로잡았다.


“어명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그대를 처형하겠소!”


멜리나 백작은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아무런 말도 듣지 않고 직접 시행에 옮겼다. 그녀는 백작의 목을 장대에 걸어 선두에 세우고 그대로 퀴나를 공격했다.


“이 곳은 반란군의 마을이다! 철저하게 파괴하라! 왕실에게 올리지 않은 황금을 수거하여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을 보여라!”


퀴나의 백성들은 당황했으나 최소한 몇 명, 특히 아모스 백작가를 위해 오랜 시간 일해오던 사람들은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상장(上將)이었던 제이로 플라비오는 예하 병력을 끌어모아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결국 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고, 멜리나 백작을 위한 최후의 특공도 무위로 돌아가며 그의 목은 클라우디오 백작의 옆에 걸리게 되었다.


“아하하하! 멍청한 놈들! 보아라! 이들은 반란군이 아니더냐! 날 죽이려고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황제폐하를 위해 충성을 보여라! 모두 죽여버려!”


단 3일 만에 퀴나는 말 그대로 유령의 도시가 되었다. 도시는 불타오르고, 시체는 거리를 메웠다. 강물에서는 물이 아닌 피가 흘렀다. 물고기의 시체가 가득 떠올랐다.


이 핏물은 그대로 수로를 따라 흘러들어갔다. 자신들이 모시던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세인트 에일린의 백성들은 다같이 거리로 나와 통곡했으며, 붉은 물을 보고 외쳤다.


“이건 백작님의 피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살아있을 수 있는가!”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이라 부르고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멜리나를 공격했다. 멜리나는 깔깔 웃었다.


“내 말이 맞잖아? 역시 이놈들은 모두 반란을 꾀하고 있었어! 하지만 다 죽이면 그것도 귀족이 할 일은 아니지. 그래, 노인만 죽여라.”


그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병사는 없었다. 멜비나의 군대는 민병대를 격파하고 전투에 참가했던, 혹은 방관했던 백성들의 집을 뒤져 노인들을 모아놓고 모조리 그 자리에서 잔혹하게 살해했다.


“다음은 너희의 자녀들 차례다. 이 꼴이 되는 걸 윈치 않는다면 충성을 맹세해라.”


히죽히죽 웃는 그녀의 앞에 남은 백성들은 서글프게 울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탈출한 민병대와 시민들은 그 수가 1천이 넘었다. 이들은 아모스 백작가문이 있던 퀴나로 도주했는데 퀴나로 향하던 중에 멜리나의 ‘청소부대’를 만나게 되었다.

멜비나의 돌격대장이었던 사자보 파르는 이미 청소의 결과로 얻은 금은보화를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는 디룩디룩하게 살이 접힌 얼굴에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칼을 뽑아들었다.


“다 죽여! 모두 뺏어라!”


그 명령에 의해 또 한번 살육이 다시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더 이상 맞설 수 없었다. 그들은 다시 도망쳤지만 수백의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때 시민을 이끌던 이는 세인트 에일린의 서기관이었던 페델리코 아브라르도였는데, 퀴나의 동남쪽의 소도시 오제에 이르기 전에 추격병을 만났을 때 더 이상의 도주는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다.


“항복을 하면 죽임을 당하는 것 밖에 없소. 차라리 싸워봅시다.”


페델리코의 말에 그와 함께 싸우던 이들은 무기를 뽑았다. 하지만 전력차가 너무나 심했다. 상대는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이었으며 그들보다 숫자도 많았다. 페델리코는 주름 잡힌 눈가에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만약 당신이 있다면 우릴 도와주소서.”


그 기도는 단 1초 만에 받아들여졌다.


"돌격! 백성들을 지켜라!"


매서운 외침과 함께 플로라가 이끄는 수십기의 기병대가 나타난 것이다. 사자보는 이 갑작스런 기습에 놀랐지만, 즉시 창병대를 선두로 세워 플로라의 돌진을 막아냈다. 수에서 밀리는 중에도 플로라는 스스로 선두에 서서 사자보의 본진을 격파했지만, 적장을 사로잡기는 커녕 적 한가운데에 포위당한 꼴이 되어버렸다.


플로라와 그녀의 호위대는 레이피어를 들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말에서 내려 적과 맞섰다. 그녀의 부대는 분명 약하지 않았으나 적이 너무 많았다. 플로라의 레이피어가 부러지자 약탈자들은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크크, 저거 백작의 딸이잖아?”


“잘됐다! 손대지마! 내가 먼저야!”


플로라는 이를 악물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앞선 병사를 칼 손잡이로 후려치고, 부러진 칼을 뻗어 뒤 따라오는 병사의 눈을 찔렀다. 하지만 그 다음 병사가 그녀의 위를 덮치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면에 부딪혔다.


“크.. 아버지..!”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힘이 부족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녀가 사랑하던 가족과 백성들이 죽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이룩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도록 슬펐다. 그녀는 바로 앞에서 침을 흘리는 병사의 턱을 팔꿈치로 올려치고 겨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부러진 레이피어를 들어올렸다. 병사 하나가 다시 달려들었다. 플로라는 달려드는 적의 검을 피해 그의 목에 레이피어를 쑤셔박았다. 이제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전 이제 곁으로 가겠습니다.’


플로라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촤악! 하는 살을 찢는 소리.


플로라의 앞에 있던 병사 한명의 목에서 선혈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동시에 몇 명의 적병이 피를 솓으며 쓰러졌다. 이어지는 깨끗한 목소리는 이 더러운 전장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직 죽기엔 이릅니다.”


가벼운 검은 빛 로브를 걸치고 있는 청년이 적진을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면 길을 막고 있던 병사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내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그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당신...”


플로라는 기억 속에서 그를 기억해냈다. 오래 전, 울음을 꾹 참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세인트 에일린을 떠날 때, 앞서가다가 뒤를 잠시 돌아보던 따뜻한 눈길을 가지고 있던 남자. 어린 플로라와 눈이 마주치자 순박하게 웃어주었던 그 남자의 눈빛을 플로라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퀴나의 생존자들을 데리고 오느라... 제 가족들도요.”


그는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가 말하는 도중에도 적병은 계속 목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 마법사... 였나요?”


청년은 대답하는 대신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플로라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청년은 플로라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조금 특이한 무기를 쓰는 것 뿐입니다.”


그는 왼손에 쥔 긴 끈을 보여주었다. 마치 얇은 채찍처럼 생긴 끈의 맨 끝에는 무거워 보이는 붉은 색의 칼날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원래는 등반용이지만, 이런 사용법도 있죠.”


병사들은 웅성거렸다.


“뭐야, 마법이 아니었어!”


“저런 속임수 따위!”


“죽여버려!”


플로라는 어이없는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건 암기가 아닙니다.”


그러더니 그는 가장 앞서 달려오는 병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 명의 병사가 일격에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눈으로 보고 피할 수는 없습니다.”


병사들은 주춤했으나 다시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청년은 자세를 낮췄다. 청년의 몸이 회전하면서 다시 몇명의 적이 피를 뿌렸다. 그의 무기는 정교하게 적의 갑옷이 없는 부분을 베어냈다. 그것은 마법이라 해도 믿을 만큼 화려했다. 그 피보라 속에서 은발의 청년은 플로라를 향해 웃어보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그의 웃음은 너무나 진실되어 보였다. 플로라에게는 그것이 기이하다면 기이했다.


--------------------


1027년의 가을. 아모스 백작가의 비극은 세인트 에일린, 퀴나의 사상자 1만으로 결론이 났다. 이들은 대부분 무고한 일반 백성들이었고, 두 도시의 성주는 반란을 막아낸 공을 인정받아 멜비나 펠리페 히드오레 백작으로 결정되었다.


아모스 백작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플로라 아모스는 도망쳐오는 백성들을 수습하고 병력을 모아 소도시 오제에 머물렀다. 리베리아 황실에서 멜비나 백작에게 남은 반란군 잔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는 소식은 곧 그녀에게 전해졌다.


임시 막사에서 플로라는 지도를 펼쳐놓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적이네요. 왕실도, 퀴나도, 세인트 에일린도.”


“그래도 아직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가씨.”


“포기따윈 안해요.”


플로라는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페델리코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그 사람은 어딨죠?”


“예?”


플로라는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은발의 남자요."라고 대답했다.


“아... 아아, 그는 병사들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전술을 아주 잘 알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 사람은 누구죠? 본인을 나덜론이라 부르라고 하던데요.”


“나덜론... 이름이에요? 성인가요?”


“모르겠습니다. 아가씨도 모르십니까?”


두 사람은 잠시 마주보았지만 결국 다음에 물어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지금은 신경써야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나덜론은 멀리서 플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반대편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금발의 소녀는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보고자 했던 모습. 그녀를 볼 때마다 입가에서 미소가 돌았다.


"플로라님."


그녀의 이름을 되뇌어보았다. 그의 입에 또다시 미소가 번졌다.


'이제 남은 것은 각오를 굳히는 것 뿐인가.'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것을 기뻐해도 괜찮겠지. 아주 긴 시간이 걸렸으니까. 나덜론은 문뜩 커튼 사이로 창문 밖을 내다보는 플로라와 눈이 마주쳤고, 당황하는 그녀를 위해 살짝 시선을 돌려주었다.


작가의말

리베리아 제국은 아주 긴 시간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펼쳤지만, 50년 전부터 나라는 각 영주들에 의해 여러 개로 쪼개졌습니다. 이계의 악마와 싸우며 잠시 단합했던 그들은 여황 “엘츠”의 죽음 이후 다시 나뉘었고, 각자의 영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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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센트 연대기 ~ 비밀을 아는 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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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화. 휴식의 날 15.10.23 131 1 20쪽
13 12화. 마후라나 15.08.17 96 1 14쪽
12 언젠가의 이야기 15.08.12 163 1 22쪽
11 11화. 재앙을 막을 땅 15.07.10 92 1 10쪽
10 10화. 있을 수 없는 계략 15.07.08 108 1 17쪽
9 9화. 티에세를 향하여 15.07.02 157 1 9쪽
8 8화. 사자의 방문 15.06.26 148 1 3쪽
7 7화. 되찾은 세인트 에일린 -2 15.05.29 109 1 11쪽
6 6화. 되찾은 세인트 에일린 -1 15.05.29 123 1 11쪽
5 5화. 지켜진 적 없는 약속 15.04.29 108 1 6쪽
4 4화. 실수 15.04.20 140 1 14쪽
3 3화. 퀴나성 전투 15.04.20 144 1 13쪽
2 2화. 슬픈 봄날 15.04.20 166 1 21쪽
» 1화. 홀로 남은 소녀와 홀로 남은 남자 15.04.20 266 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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