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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의 서재입니다.

고독한 사이보그의 요리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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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21 03:23
최근연재일 :
2019.03.14 05:32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1,092
추천수 :
7
글자수 :
57,670

작성
19.02.27 17:18
조회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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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1. 빵이 먹고 싶어 (8)

DUMMY

너구리판다들의 달리기는 빠르지 않았다. 그래서 난 고개를 돌렸다. 이미 거리가 충분히 벌어져 붙잡힐 염려는 없다. 게다가 곧 출구다.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머리 위에서 부욱, 하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소리였다. 뒤로 향하던 고개를 위로 쳐들면서 난 직감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하필 부러지고 꺾인 진열대가 그곳에 있었다. 녹슨 진열대의 뾰족한 부분이 비상식량의 포장을 길게 찢어버린 것이다. 통밀빵이 되었어야 할 연갈색의 고운 가루가 마치 산산이 부서진 희망의 파편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아······ 아아······ 아······.”


눈앞에서 야속하게 사라지는 빵을 보면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구멍까지 물기가 차오른다. 눈가가 촉촉해져 눈앞이 흐리다. 허공에 떠다니는 통밀가루에 시선을 빼앗겨 달리기를 멈춘 너구리판다 무리의 모습이 촉촉한 렌즈 너머로 보이지만 더 이상 아무 감흥을 느낄 수 없다.


절망이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겪게 된 절망의 무게는 감당할 수 없이 무거워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 공기가 날 짓누르는 것 같다. 뼈와 살과 장기의 무게가 버겁다. 여태껏 어떻게 이 모든 무게를 견뎌왔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팔이 저렸다. 통밀빵 비상식량을 쥐고 있던 손은 아직도 머리 위에 있었다. 그 순간 난 눈을 번쩍 떴다. 아직, 아직 희망을 버리긴 이르다. 포장이 찢어져 내용물이 조금 흐른 것일 수도 있다. 화덕을 이용하면 된다. 통밀가루만 남아 있다면 여전히 빵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난 아주 조심스럽게 팔을 내렸다. 소중한 통밀가루가 더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내려오던 비상식량의 눈과 일직선이 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길다. 비상식량의 포장에 난 상처가 너무나도 길다. 당장 수술이 필요할 만큼 치명상이다.


아니, 아직 희망은 있다. 절망은 섣부르다. 포장은 위아래로 조금 볼록한 형태다. 아랫부분에 통밀가루가 가득 남아 있다면 조약돌만 한 빵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맛을 느끼기에 충분한 크기다. 빵은 구울 때 부풀어 오른다고 했으니 어쩌면 주먹만 한 빵이 나올지도.


“히이······.”


이건 분명 영혼이 빠져나가는 소리였을 것이다. 비상식량의 갈라진 상처 안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남아 있는 통밀가루는 손가락 한 마디에 펴 바르기도 부족할 양이다.


밑바닥에 깔린 가루들이 파르르 떨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왜 하필. 왜 하필이면 지금! 아예 발견하지 못했다면 일찌감치 실망하고 말았을 텐데!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이런 시련은 너무하잖아, 정말!


난 손에 쥐고 있던 비상식량을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맥없이 떨어지는 그 모습조차 화가 났다. 화조차 속 시원하게 낼 수 없다니. 뭐라도 시원하게 부서졌으면 좋았을걸.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포장뭉치를 내려다보던 난 조용히 자리에 주저앉아 그것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가루들을 모으면 어떻게든 작은 빵이라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조약돌만 한 빵이라도 좋으니 맛만 볼 수 있다면······.


구겨진 비상식량의 포장을 다시 폈다. 그리고 손으로 바닥을 쓸어 떨어진 통밀가루를 모으고 또 모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거친 입자들은 희망의 파편이리라.


모으고 모은 희망의 가루들을 구겨진 포장 위에 조금씩 옮겨 담았다. 가루를 담아 출입구 주변의 창문에서 내려오는 빛줄기에 비춰보았다. 열심히 모은 먼지들이 뭉텅이로 모여 있었다. 그 안에 연갈색의 통밀가루가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있다.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수의 입자가 먼지 사이 간간이 끼어 있다.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 비상식량의 포장과 함께 부질없는 먼지뭉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리도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는 선다는 행위가 귀찮게 느껴진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지고 싶다. 그리고 난 정말로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망연히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을 때, 정수리가 따가울 만큼의 시선이 느껴졌다. 너구리판다들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맹렬했던 적개심은 온데간데없이 온순한 표정으로, 마치 좋은 구경거리를 발견한 군중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


무엇인가에 꽉 막혀 있던 속이 뚫리는 소리였다. 후련하다기보다 허전한 기분이다. 그래, 전부 내 잘못이다. 어렵게 살아남은 돌버섯과 너구리판다의 보금자리를 함부로 들쑤신 벌을 받은 것이다. 빵을 먹겠다는 생각에 같은 처지에 놓인 생명에게 민폐를 끼쳐 버렸다.


“너구리판다들아, 미안해.”


알아들을 리 없지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예상대로다. 너구리판다들은 멀뚱멀뚱 날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아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뭘 사과하는 거야?」


먼저 밖으로 달아났던 카인이 되돌아왔다. 하나뿐인 눈을 깜빡거리며 다가오는 카인을 보니 울컥하며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어진다. 공중에 있으니 안전했을 텐데. 그렇게 서둘러 꽁무니를 빼지 않고 나 대신에 통밀빵 비상식량을 입에 물고 밖으로 가주었다면 어땠을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 카인이 괜히 야속하다.


「왜 그렇게 봐?」

“아무것도 아니야. 돌버섯과 너구리판다의 보금자리를 멋대로 어지럽힌 것 같아서 사과했어.”

「사람은 크게 좌절한 뒤에 성장한다더니. 멀리서 지켜보는데 퀴블러-로스 모델을 그대로 재현하는 줄 알았어. 빵의 희생을 양분 삼아 성장했구나.」

“왜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났어? 공중에 있어서 안전했잖아.”

「내 몸은 너처럼 단단하지 않아. 겉보기에는 평범한 너구리판다로 보이지만 실제로 어떤 능력을 갖고 있을지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일단 몸을 피해야 한다고 판단했어.」

“일리 있는 말이지만······ 결국 평범한 너구리판다였어.”

「아니야. 평범하지 않아. 저 머리를 봐.」

“머리? 음?”


너구리판다의 머리를 유심히 쳐다보니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띄었다. 뾰족한 귀 사이에 거칠어 보이는 질감의 딱지가 앉아 있었다. 모든 너구리판다가 그러했다.


“저게 뭐야?”

「네가 돌버섯이라고 이름 붙인 버섯이야. 너구리판다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하나같이 머리에 붙어 있는 걸 보면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너구리판다들이 너에게 적개심을 보이며 달려든 것도 돌버섯을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어.」

“버섯에게 지능이 있을 리 없다면서? 자기들을 보호하도록 조종하는 게 가능해?”

「지능이 없다고 위협에 반응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뇌는 결국 화학반응에 의한 전기신호로 작동하니까. 너구리판다의 뇌에 뿌리를 내린 돌버섯이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화학물질을 내뿜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선택 받은 생물인가. 용케도 그런 식으로 환경에 적응했네. 이용당하는 것 같아서 너구리판다가 불쌍해지는걸.”

「너구리판다가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 입장은 아니야. 공생관계일 거야. 너구리판다가 운 좋게 새로운 지구의 대기에 적응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2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멸종되기는커녕 저렇게 무리를 유지했잖아. 돌버섯은 자신들의 일부를 먹이로 제공하고, 너구리판다도 돌버섯에게 양분을 제공하고 보호해주며 상부상조했을 거야.」

“동족의 일부를 먹이로 주다니······. 그 결정은 너구리판다의 머리에 기생하고 있는 돌버섯들이 하려나? 양분은 뿌리가 연결된 너구리판다의 몸에서 직접 얻고? 완전 돌버섯 왕족이네.”

「그걸 그렇게 해석하다니.」

“휴우. 연구소로 돌아가자.”


난 의욕을 잃었다. 더 이상 있을지 없을지 모를 빵을 찾아 헤매고 싶지 않다. 눈앞에서 동그란 눈을 뜨고 쳐다보는 너구리판다들을 또 자극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빵을 잃은 뒤의 내 모습이 너구리판다들에게도 가여워보였나 보다. 맹렬했던 적개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보면.


너구리판다들의 무언의 배웅을 받으며 마트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석양이 하늘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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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 살을 구워 먹는다고? (1) +1 19.03.01 64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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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빵이 먹고 싶어 (7) +1 19.02.26 60 1 9쪽
7 1. 빵이 먹고 싶어 (6) 19.02.25 64 0 9쪽
6 1. 빵이 먹고 싶어 (5) 19.02.24 62 0 10쪽
5 1. 빵이 먹고 싶어 (4) 19.02.23 70 0 9쪽
4 1. 빵이 먹고 싶어 (3) 19.02.22 86 0 10쪽
3 1. 빵이 먹고 싶어 (2) 19.02.21 96 0 9쪽
2 1. 빵이 먹고 싶어 (1) 19.02.21 104 1 9쪽
1 프롤로그. 고독한 요리사의 탄생 +1 19.02.21 232 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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