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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의 서재입니다.

고독한 사이보그의 요리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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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21 03:23
최근연재일 :
2019.03.14 05:32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1,081
추천수 :
7
글자수 :
57,670

작성
19.02.2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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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1. 빵이 먹고 싶어 (2)

DUMMY

손에 묻은 돌가루. 이건 막 새싹을 틔운 건물이었던 모양이다. 새싹을 짓밟은 것이다. 괜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거대한 건물이 될 꿈에 부풀었을 텐데.


난 고개를 흔들었다. 건물이 땅에서 저절로 자라날 리가 없잖아. 200년 전에 이 자리에서 있었던 건물들이 가라앉은 것이다. 땅이 단단했던 시절에 지어진 건물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은 얼추 열 채가 되지 않았다. 어떤 건물은 발목 높이까지 남아 있었고, 어떤 건물은 허리 높이까지 남아 있었다. 바닥과 건물의 경계를 보아하니 가라앉은 뒤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건물이 가라앉았다는 것은 땅이 늪처럼 변한 적이 있다는 증거였다.


200년 동안 테라포밍이 진행 중이라고 했었지.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0.05%에 불과하다는 카인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지구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다.


기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나 외에 다른 인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이런 광경을 마주하고도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200년이라는 간극을 좁히기에는 내겐 인류애가 없다시피 하니까. 애초에 만난 적도 없는걸. 이식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간의 모습은 200년이라는 시간의 먼지가 고스란히 쌓인 것처럼 흐리다고.


그리고 지금 내겐 인류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이곳이 ‘유적지’라는 사실이지. 탐험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


“하나, 둘, 셋, 넷······ 여섯. 방금 발이 차인 것까지 포함하면 일곱 채.”


난 우선 가장 덜 가라앉은 건물로 움직였다. 이유는 단 하나. 들어갈 수 있는 창문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건물이 가라앉은 뒤로는 침입한 사람이 없다는 증거였다. 역시 세상이 이 지경이 될 때가지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어이쿠.”


잠긴 창문을 억지로 열기 위해 조금 힘을 줬더니 잠금장치가 부서지며 허무하게 열려 버렸다. 오래돼서 낡은 건지, 내 힘이 센 건지. 나조차도 아직 내 신체능력을 모르고 있다.


부서진 창문 사이로 안을 살펴보니 역시 어둡다. 앞으로 유적지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불빛이 가장 필요할 것 같다.


건물은 약 30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햇빛에 의지해 안을 살펴본 결과 이 건물은 가정집이었을 것이다. 한쪽 구석에 가구들이 처박혀 있었는데, 침대, 화장대, 옷장 등 가정집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었다. 하나같이 낡고 부서져서 쓸 만하지 않았다.


난 계단을 발견하고 만족스러운 수확물 없이 아래로 연결된 계단 앞에 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조명 없이는 도저히 내려갈 수 없을 지경이다. 계단 근처에서 조명 스위치를 발견하고 만져보지만 작동할 리 없었다.


“역시 이럴 땐 책이지.”


조명이 고장 난 화장실을 다니면서 터득한 생활의 지혜. 역시 책은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


2층으로 올라가 부서진 가구들을 뒤졌다. 예상대로였다. 잔해에 깔린 책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부서진 가구에 쓸리고 부딪치는 사이 기능이 고장 나지는 않았을지 걱정스러웠다.


기우였다. 책을 집는 순간 약하지만 분명하게 빛을 내뿜었다. 책을 돌돌 말아 계단을 내려가니 은은한 빛이 칠흑 같았던 어둠을 몰아냈다. 지금 이것보다 든든한 물건이 또 있을까. 인간의 기술력은 역시 우주 최고!


하지만 책이 비춰준 아래층의 광경은 실망스러웠다. 물컹물컹하고 끈적끈적할 것 같은 질감의 흙뿐이었다. 아래층을 완전히 잠식한 흙 위에 올라서니 머리가 천장에 닿아 허리를 숙여야 했다.


“유물은 역시 흙에서 캐는 맛이지.”


기억 속 탐험가 혹은 고고학자들은 언제나 땅을 파헤치곤 했다. 자고로 바깥에 대놓고 있는 보물보다 땅속에 묻혀 있는 보물이 값진 법이다.


“으······.”


책을 입에 물고 흙을 파내려는데 손에 닿는 흙의 감촉이 너무 이상야릇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타르에 기름을 섞어 애매하게 굳힌 뒤에 손을 넣으면 이런 느낌일까. 바닥에 손을 찔러 넣을 때마다 주변의 흙들이 손에 옹기종기 달라붙어 압박한다. 그리고 털어낼 때는 떨어지기 싫다며 손을 붙잡지만 묘하게 약한 점성 때문에 허무하게 떨어져 나간다.


테라포밍이 끝난 뒤에도 지구가 이 꼴이라면 최악이다. 이상야릇한 감촉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흙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기 시작한다.


열심히 땅을 파다가 슬쩍 팔을 보니 실제로 닭살이 돋아 있다. 카인······, 이런 것까지 구현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닭살이 돋는 사이보그라니. 기계보다 인간에 더 가깝다는 증거이니 기뻐해야 하나.


정신없이 흙을 파다보니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구석에는 퍼낸 흙이 쌓이고 쌓여 천장에 닿을 기세였다. 그 아래에 보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2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유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조각난 옷가지는 삭아서 구멍이 숭숭 뚫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원래 가구였을 나무 파편은 만지자마자 바스러졌다.


그 외에 깨진 그릇들과 완전히 광택을 잃은 숟가락, 무슨 이유인지 녹아버린 전자제품들까지. 아무리 좋게 말하려고 해도 유물보다는 쓰레기라는 단어가 더 어울렸다.


허탕이다. 너무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사치품도 사지 않고 근검절약을 하던 서민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 난 곧장 다음 건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가장 깊이 잠긴 건물로. 든 게 많으니까 깊이 잠겼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부디 내 생각이 맞기를.


30분 뒤, 난 수북하게 쌓인 흙구덩이 안에서 다시 한 번 실망감을 맛봐야 했다. 두 번째 집도 허탕이었다. 아아, 그럼 그렇지. 위대한 발견이 이토록 쉬울 리 없다. 보아하니 이곳은 평범한 주택가다. 부유층은커녕 중산층도 아닌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살던 동네다.


난 목표를 수정했다. 대단한 유물이 아니라도 좋으니 쓸 만한 물건이라도. 잘 갈고 닦으면 써먹을 만한 수준만 되도 좋을 것 같다. 카인에게 최소한의 체면을 차리려면 연구소를 수리하는 데에 쓸 부품이라도······.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석양이 지자 파스텔 톤의 연한 하늘은 순식간에 형형색색의 페인트를 끼얹은 듯 강렬한 색채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휴······.”


난 깊게 파인 흙구덩이 안에서 서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양손에는 책을 하나씩 들고. 일곱 채의 집을 뒤져서 얻은 것이라고는 겨우 책 두 권. 초라하기 그지없는 수확이다. 탐험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주변을 더 찾아보고 싶지만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는 카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하긴 길을 잃지 않으려면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출발해야 했다.


하지만 역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좀 더 샅샅이 뒤졌을 텐데. 달랑 책 두 권을 들고 온 나를 한심하게 쳐다볼 카인의 눈빛이 눈에 선하다.


기분이 울적해졌다. 인생에서 처음 맛본 실패. 입 안이 너무 쓰다. 정신없이 바닥을 파다가 흙이 들어간 걸까.


“에잇! 에잇!”


난 울적한 기분을 풀기 위해 바닥을 연신 세게 밟았다. 이렇게 열심히 흙을 팠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다니. 너무하다고, 정말. 하다못해 벌레라도 나오면 잡아갔을 텐데 벌레 한 마리 안 나오는 건 너무하잖아. 설마 벌레들까지 멸종한 건 아니겠지.


너무 힘차게 바닥을 내리쳤나보다. 땅이 진동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다. 그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하루 두 번씩 지구에 달라붙어 테라포밍 하고 있는 거대한 기계가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시간 말이다. 탐험에 정신이 팔려 깜빡 잊고 있었다.


난 낡은 집들이 무너지기 전에 서둘러 흙구덩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카인은 내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이대로 생매장을 당하면 평생 죽지도 못하고 화석이 될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안 된다. 난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하다고.


“탈출!”


어째서인지 외치고 싶었다. 난 탈출을 외치면서 바닥을 박차고 흙구덩이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럴 작정이었다. 갑자기 바닥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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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 빵이 먹고 싶어 (6) 19.02.25 63 0 9쪽
6 1. 빵이 먹고 싶어 (5) 19.02.24 62 0 10쪽
5 1. 빵이 먹고 싶어 (4) 19.02.23 69 0 9쪽
4 1. 빵이 먹고 싶어 (3) 19.02.22 85 0 10쪽
» 1. 빵이 먹고 싶어 (2) 19.02.21 96 0 9쪽
2 1. 빵이 먹고 싶어 (1) 19.02.21 104 1 9쪽
1 프롤로그. 고독한 요리사의 탄생 +1 19.02.21 231 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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