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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의 서재입니다.

고독한 사이보그의 요리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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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21 03:23
최근연재일 :
2019.03.14 05:32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1,086
추천수 :
7
글자수 :
57,670

작성
19.03.0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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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 살을 구워 먹는다고? (1)

DUMMY

등을 두드리는 바닥의 진동에 난 잠에서 깼다. 12시간에 조금 못 미치는 진동 주기. 최근 들어서는 이른 아침에 찾아왔다. 덕분에 요즘 난 카인이 깨워주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이보그다.


난 잠이 덜 깨 몽롱한 정신으로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캡슐 한 알을 삼킨 뒤 머리맡에 둔 요리책을 손에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눈을 뜨자마자 캡슐을 먹는 이유는 단 하나. 요리책을 보고 나면 캡슐을 먹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캡슐은 단지 살기 위해 필요한 연료에 불과하다. 아직 음식을 구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나저나 매일 캡슐만 먹는데도 장 활동은 언제나 활발하다. 이유가 뭘까?


화장실에서 나오니 카인이 다가왔다.


「요즘 들어 테라포밍 장치의 진동이 심해진 것 같아.」

“그래? 난 잘 모르겠어.”

「둔하기는······.」

“그건 예민한 너의 몫으로 남겨둘게. 청소도, 정리정돈도 다 내가 하는데 너도 뭔가 해야지.”

「여기서 어지르는 건 너뿐이야. 당연히 정리정돈은 네 몫이지. 매일 청소를 해야 하는 이유도 너 때문이야. 인간은 매일 각질을 바닥에 흘리니까. 지저분하다고.」

“나 사이보그거든? 진짜 세포로 이루어진 피부도 아닌데 각질이 나올 리 없잖아.”

「아무튼 당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다른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떠맡은 게 아니란 말이야.」

“아― 알았어, 알았어.”


난 손사래를 치고는 바닥에 누워 요리책을 들여다보았다. 카인의 한 줄기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지만 괜찮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카인은 내가 독서를 할 때 건드리지 않으니까.


까칠한 녀석. 말싸움은 이길 수가 없다니까. 가끔 카인이 말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내 머리에 제한적인 지식만 이식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카인에 대한 생각도 잠시. 난 점점 요리책에 빠져들었다.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요리들을 보고 있으니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언제쯤 이런 음식들을 먹을 수 있을까.


빵 만들기에 실패한 뒤로 며칠이 흘렀건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200년 전 지도를 기억하고 있는 카인에게 물어 연구소 주변에 있었지만 완전히 땅에 묻혀 보이지 않는 주택가를 파헤쳤으나 헛수고였다.


절반 이상이 완전히 가라앉았는지 아무리 땅을 파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 나머지도 2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티지 못했다. 건물 자체는 보존되어 있었지만 부서진 창문과 현관문으로 들이닥친 흙에 모조리 삭아버린 것이다.


다시 한 번 마트도 갔었다. 지난번에 발길을 돌려야 했던 정글의 깊숙한 곳을 탐험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실패했다. 너구리판다들이 화난 표정으로 길을 막아선 것이다. 첫인상을 완전히 망친 모양이었다. 물론 그 모습조차 귀여웠지만.


그 뒤로도 종종 마트에 들르곤 했다. 한 무리의 너구리판다들이 통통한 앞발을 있는 힘껏 들어 올리고 위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마약처럼 끊을 수 없는 치명적인 귀여움이다.


잠깐 너구리판다를 떠올렸을 뿐인데 또 마트에 가고 싶다. 어제도 호버 바이크를 타고 연구소 주변을 대충 돌아다니다가 마트 입구에서 너구리판다들을 구경했었는데.


그렇게 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카인이 다가왔다.


「오늘은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요 며칠 너무 나태한 거 아니야? 맨날 마트만 들락날락거리고. 프로 탐험가 타이틀은 반납해야겠는걸. 아마추어야, 아마추어.」

“왜 갑자기 시비야?”

「시비라니. 로봇이 무슨 시비를 걸겠어. 사실을 말하는 거야. 최근에 나태해진 건 사실이잖아. 너구리판다 구경도 좋지만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어? 뭐,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되는데 프로 탐험가다 뭐다 하는 말은 하지 말라는 거야.」


난 말없이 요리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트집을 잡는 걸 보니 카인이 많이 심심한 모양이다. 하긴 최근에 마트에 많이 들른 건 사실이니까. 어제 아침에 잠깐 들렀고, 점심에 잠깐 들렀고, 저녁에 조금 오래 있었지. 그저께도, 그끄저께도, 그리고 그 전날, 그 전날도.


돌이켜보니 카인의 반응이 이해됐다. 탐험의 의욕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첫날 이후 가는 곳마다 허탕이니 당연하잖아.


그나저나 요리책의 넘기다가 보니 고기를 사용한 요리들이 참 많다. 요리책 속 스테이크 조각에서 육즙이 흘러나와 접시를 적셨다. 육즙이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라는 건 어떤 맛일까. 빵과 마찬가지로 주식이라고 하던데.


스테이크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만큼 요리도 참 다양하다. 고기의 종류와 조리법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다니. 돼지고기, 소고기, 양고기 등 온갖 고기들을 삶거나 굽거나 튀기기도 한다. 후추, 소금, 허브, 버터 등 맛을 내기 위해 첨가하는 재료들도 엄청나게 많다.


입 안에 홍수가 났다. 침샘이 고장 난 것 같다. 빵을 봤을 때도 이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는데. 본능이 외치고 있다. 이건 정말 맛있을 거라고.


“카인.”

「뭐야, 목소리 왜 그렇게 심각해?」

“고기는 무슨 맛이야?”

「흠. 이번엔 고기야?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고기일 거야. 가장 맛있는 식재료거든. 채식주의자들조차도 채소로 고기의 맛과 식감을 구현해낸 요리를 가장 선호할 정도니까.」

“빵이랑 비교하면?”

「빵은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어. 아무리 맛있는 빵이라도 고기에 비할 바는 아니야.」

“그 정도란 말이야? 지금 요리책에서 스테이크를 보고 있었거든.”

「스테이크는 고기 본연의 맛을 즐기기에 좋은 요리지. 매일 스테이크를 먹는 사람도 많았어. 어떤 고기의 어떤 부위를 쓰고, 어떤 향신료를 첨가하느냐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니까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어.」

“스테이크······. 먹고 보고 싶은데. 하······ 고기를 어디서 구한담.”


빵을 구하는 데에도 그 고생을 했는데. 고기는 정말 어떻게 구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다. 게다가 연구소 주변에는 이제 더 이상 탐험할 장소도 없다고.


「지금까지 건재한 고기밭은 없을 거야. 빈곤층이 살던 이 주변에 비싼 가정용 고기 배양기가 있을 리도 없고. 정말 운 좋게 발견하더라도 전부 고장 났겠지. 애초에 고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배양액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 없겠지만.」

“고기밭? 고기 배양기? 배양액?”

「대량의 고기 배양기로 배양육을 생산하는 곳을 고기밭이라고 불러. 배양액은 배양육의 씨앗이야.」

“흐음. 나무처럼 자라는 건가.”

「쉽게 설명하자면 새끼 고기가 점점 자라서 어른 고기가 되는 거야. 고기나무도 있지만 그건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고기열매야. 엄밀히 말해서 과일이지.」

“새끼 고기가 어른 고기가 된다고?”


배양액 위를 뛰어노는 새끼 고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새끼 고기는 배양액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맛있는 어른 고기가 되고, 맛있게 자란 어른 고기는 더욱 맛있는 스테이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매일 먹는다. 매일. 캡슐로 삶을 연명하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다.


“200년 전 사람들은 천국에서 살았구나.”

「지금 기준에서 보면 천국이지. 당시에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고기는 포기해. 고기는 신선함이 생명인 식재료야.」

“배양액을 구하면 나도 기를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지. 죽기 전에 이 배양액만큼은 인류를 위해 꼭 보존시켜야 해, 라고 생각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배양액 보존에 힘쓴 업자가 있었다면 말이야. 고기밭을 가질 만큼의 부자라면 개인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났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지구에 남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주인 잃은 방치된 고기밭을 발견하고 대신 그런 일을 했을지도.”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죽어갔어. 그럴 정신이 있었을까? 당장 그럴 정신이 있었다고 해도 흔해빠진 배양액보다 더 소중한 걸 지키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럼······ 난 앞으로도 평생 고기를 못 먹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그렇게 먹고 싶어?」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본 순간······ 뭐랄까······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외쳤어. ‘인간은 고기를 먹기 위해 태어난 거야!’라고 말이야. 아니, 내 몸의 기계적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외쳤어. ‘고기를 원해!’라고.”


카인이 오랜만에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봤다. 조금 과장한 면이 있지만 사실인데. 고기가 어떤 맛인지도 모르지만 몸이 원하고 있다. 인간의 DNA에 각인된 본능인 것 같다.


난 시무룩해져 다시 요리책을 집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생생한 스테이크가 어서 먹어달라고 유혹하듯 육즙을 흘렸다. 쓸데없이 너무 생생해. 냄새도 날 것 같단 말이야.


시무룩해하는 날 보며 카인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카인의 고민하는 표정이란 입을 굳게 다물고 하나밖에 없는 눈을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것이다. 평소에도 입을 다문 채 눈을 깜빡이긴 하지만. 아무튼 뭔가 다르다. 느낌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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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 살을 구워 먹는다고? (2) 19.03.05 30 1 8쪽
» 2. 살을 구워 먹는다고? (1) +1 19.03.01 64 0 9쪽
10 1. 빵이 먹고 싶어 (9) 19.02.28 50 0 7쪽
9 1. 빵이 먹고 싶어 (8) +1 19.02.27 43 0 9쪽
8 1. 빵이 먹고 싶어 (7) +1 19.02.26 60 1 9쪽
7 1. 빵이 먹고 싶어 (6) 19.02.25 63 0 9쪽
6 1. 빵이 먹고 싶어 (5) 19.02.24 62 0 10쪽
5 1. 빵이 먹고 싶어 (4) 19.02.23 70 0 9쪽
4 1. 빵이 먹고 싶어 (3) 19.02.22 86 0 10쪽
3 1. 빵이 먹고 싶어 (2) 19.02.21 96 0 9쪽
2 1. 빵이 먹고 싶어 (1) 19.02.21 104 1 9쪽
1 프롤로그. 고독한 요리사의 탄생 +1 19.02.21 231 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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