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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의 서재입니다.

고독한 사이보그의 요리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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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21 03:23
최근연재일 :
2019.03.14 05:32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1,089
추천수 :
7
글자수 :
57,670

작성
19.03.14 05:32
조회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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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2. 살을 구워 먹는다고? (5)

DUMMY

파란 가루는 무거운 무게감을 자랑하며 빠르게 떨어졌다. 절묘하게 바닥의 구멍으로 떨어진 고사리의 잔해는 구멍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흘렀다. 빛을 받아 묘하게 반짝거리는 허공의 포자들처럼 바닥의 가루도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손바닥에는 아직도 끈적거리는 고사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을 스치는 이 서늘함은 뭘까?


한순간 거대한 식물에서 빛나는 파란 흙으로 변해 버린 고사리를 내려다보다가 난 도움을 청하듯 카인을 바라보았다.


“고사리가······ 죽어 버렸어.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식물이 외부의 충격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건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황스러워. 상태를 보아하니 바닥에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바닥에 씨를 뿌린 건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말에 난 충격을 받았다. 내 괴롭힘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다. 탐험 첫날 바닥에 튀어나온 건물의 귀퉁이를 부쉈을 때 느꼈던 죄책감과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죄책감이 가슴 안쪽을 콕콕 찔렀다.


그때 파란 숲이 흔들렸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했는지 다른 고사리들이 머리를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단체로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머리를 흔드는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난 뒷걸음질 치며 고사리 숲에서 멀어졌다. 내가 이 고사리들을 화나게 한 것이다. 아무리 고의가 아니었다지만 고사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너구리판다에 이어서 난 또다시 다른 생물의 미움을 사고 말았다. 나만 불행하다고 불평했지만 사실은 내가 다른 동물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난 사고뭉치야. 난 말썽쟁이야.


「피티, 밖으로 나가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고사리들이 화가 났어.”

「미역들도 마찬가지야.」


뒤를 돌아보니 노란 숲의 미역들이 지느러미 같은 잎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거대한 미역들도 내 만행에 화가 난 것 같았다. 또 미움을 샀다. 난 정말 구제불능인 것일까.


난 의기소침해져서 숲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들리는 파르르 소리가 내 잘못을 책망하는 식물들의 목소리 같아서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 잘못이니까.


호버 바이크에 기대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보니 포자들의 수가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나 숲 주변의 대기가 뿌옇다. 파란 고사리와 노란 미역의 포자들이 뒤엉키며 만들어내는 경계면의 에메랄드빛도 한층 강렬해졌다.


숲은 아름다웠다. 분노가 만들어낸 아름다움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저 숲은 이제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저렇게 경기를 일으키는데 무시하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바닥에 씨를 뿌리고 죽었다지만 죽음의 무게는 무겁다. 지금처럼 생명 하나하나가 소중한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경솔했어, 정말.


카인은 뒤늦게 숲에서 빠져나왔다. 몸체가 얼룩덜룩했다. 카인이 분노의 찌꺼기를 뒤집어쓴 것도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 그렇게 의기소침해 있어?」

“전부 내 잘못인 것 같아서. 고사리를 내가 죽여서······. 그래서 저렇게 다들 화가 났잖아.”

「뭐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어? 고사리는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야, 식물.」

“저렇게 화를 내는데 무슨 동물이든 식물이든 상관없잖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야.”

「고사리들과 미역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너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야. 영역 다툼을 하고 있는 거야.」

“영역 다툼?

「고사리와 미역은 저 숲에서 공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저 포자들 말이야. 서로에게 악영향을 주고 있어. 고사리 포자에 닿은 미역은 시들고, 미역 포자에 닿은 고사리도 시들어. 두 숲의 경계면에 보이는 저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은 사실 포자와 포자가 만나 치열한 생존 싸움을 벌이는 장면인 거지.」

“하지만 내가 고사리를 죽이니까 둘 다 화를 냈단 말이야. 몸을 파르르 떨면서 ‘감히 우리 동료를 죽이다니!’라고 화를 냈어.”

「너에게 화를 낸 게 아니야. 영역 다툼이 팽팽했는데 네가 균형을 깨뜨려서 그래. 네가 최전방에서 포자를 뿜던 고사리를 뽑아 버려서 생긴 빈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운 거야. 넌 못 봤겠지만 고사리의 잔해가 덮인 구멍 위로 미역 포자랑 고사리 포자가 자석처럼 달라붙었어.」

“정말? 미역들은 그랬을지 몰라도 고사리들은 화를 내지 않았을까? 돌버섯들도 화를 냈잖아.”

「화를 낸 건 돌버섯이 기생하고 있던 너구리판다들이었지. 넌 아무것도 모르고 전장 한복판에 들어가서 작은 조약돌 하나를 던졌을 뿐이야. 돌을 좀 세게 던진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숲을 쳐다보았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화를 낸 게 아니라고? 난 안중에도 없었다니. 분명 날 싫어해서 몸을 떨었다고 생각했는데.


멀리서 바라본 고사리와 미역의 영역 다툼은 치열했다. 파란 구름과 노란 구름이 부딪치며 녹색의 불꽃을 튀기는 형상이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생긴 빈자리에 싹이 트기 전까지는 이 격렬한 싸움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싸움에 가담할 수 있을 만큼 자라나기 전까지 계속 될지도.


치열한 전쟁이 한창인 숲을 쳐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고사리와 미역의 영역 다툼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왜 싸워야 하지? 숲 옆으로 너른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굳이 저렇게 싸워야 할 이유라도 있어? 주변에 널린 게 땅이잖아.”

「네가 살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식물들도 비옥한 땅이 필요해. 200년 동안 저 땅에서 수많은 식물들과 동물들이 죽었을 거야. 죽은 식물과 동물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거든. 거기에는 저 고사리와 미역이 가진 독성도 한몫 했을 거고. 결론은 저기가 저들에게는 꼭 필요한 땅이라는 거지.」

“······치열하네. 돌버섯과 너구리판다처럼 같이 산다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서로에게 해가 되는 독을 가졌다니.”

「공생하는 생물이 있으면 적대하는 생물도 있는 법이지.」


사정을 알고 나니 그토록 아름다웠던 숲이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파란 총알과 노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녹색의 피 안개. 가슴 한구석에 자리했던 죄책감은 이내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서글픈 세상이야.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살아남기 위해서는 투쟁도 필요한 법이라고.」

“저러다 한 쪽은 세상에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까 서글퍼졌어. 완전히 멸종하는 거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한 곳에서 공존할 수 없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이곳은 미역이 있을 곳이 아니긴 해. 어떻게 이곳까지 왔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신기하네.」

“바다에서 자란다고 했었지? 혹시 바다가 사라진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바다가 차지하고 있어. 200년 사이에 바다가 말라버릴 정도로 환경이 바뀌었다면 대기가 이렇게 촉촉할 리 없어.」

“바다가 전부 증발해서 대기가 이렇게 촉촉해졌다면?”

「터무니없는 추측이야.」

“그런가? 휴······. 그나저나 이젠 어쩌지?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나? 어쩐지 맥이 빠지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해. 돌아갈 생각이면 지금 돌아가야 해. 지금 출발해도 밤늦게 도착할 거야.」

“으음······.”


난 호버 바이크에 기댄 채 고민을 빠졌다. 동물보호구역이었던 땅은 더 이상 동물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렸다. 동물은커녕 다른 생물들도 살 수 없겠지. 고사리 숲이 되거나 미역 숲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도 고사리에게 미안하니까 고사리 숲이 되는 편이 나으려나. 아니, 역시 미역 숲이 낫겠다. 카인은 고사리들이 나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야. 고사리 숲이 되면 날 들여보내주지 않을 거야. 대대손손 내 얼굴을 기억하게 해서 10년, 100년 뒤에도 날 적대할지도 모르니까. 반대로 미역이 숲을 차지하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영웅이라며 환대해줄지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고사리랑 미역 중에 미역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고사리가 이기면 대대손손 날 미워할 것 같아서.”


카인이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식물에게 인간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식물에게 곤란하다는 얘기가 아니야. 인간에게 곤란하다는 뜻이야. 인간과 동일시하는 순간 넌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될 거야. 동물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저렇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 나니까 마음이 좀 그래. 감정이 있는 것 같아서.”

「저 고사리들과 미역들도 살기 위해서 다른 생물들을 죽이고 저 자리에서 서게 된 거야. 오로지 생존본능 때문에.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면 조금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생각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흐음, 역시 이식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뭐, 지금 당장 결론을 내려야 하는 문제는 아니니까······. 차차 괜찮아지겠지. 이런 고민도 나쁘지 않아. 철학적이야, 철학적. 철학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학문이지.」


카인이 이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 봤다. 심각한 문제인 걸까? 횡설수설하며 얼렁뚱땅 이 문제를 넘어가려는 것 같은데.


철학이라. 분명 어떤 의미의 단어인지는 알 것 같은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나 지식은 없다. 카테고리만 만들어 놓고 내용은 채워 넣지 않은 것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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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빵이 먹고 싶어 (4) 19.02.23 70 0 9쪽
4 1. 빵이 먹고 싶어 (3) 19.02.22 86 0 10쪽
3 1. 빵이 먹고 싶어 (2) 19.02.21 96 0 9쪽
2 1. 빵이 먹고 싶어 (1) 19.02.21 104 1 9쪽
1 프롤로그. 고독한 요리사의 탄생 +1 19.02.21 231 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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