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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의 서재입니다.

고독한 사이보그의 요리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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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꾼2
작품등록일 :
2019.02.21 03:23
최근연재일 :
2019.03.14 05:32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1,088
추천수 :
7
글자수 :
57,670

작성
19.02.28 18:13
조회
50
추천
0
글자
7쪽

1. 빵이 먹고 싶어 (9)

DUMMY

「그래도 헛된 고생은 아니었어. 살아남은 생물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잖아.」


난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호버 바이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일이 너무 술술 풀린다고 했다. 매일이 어제와 같을 수는 없겠지.


「희망이 간 자리에는 절망이 오고, 절망이 간 자리에는 희망이 온다고 했어. 너무 낙담하지 마.」


호버 바이크에 자리를 잡으며 카인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정말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처럼 희망과 절망도 번갈아가며 오는 것일까. 그럼 다음에는 희망이 찾아오려나.


난 액셀을 강하게 당겼다. 촉촉한 공기가 얼굴을 감싸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카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좋을 텐데. 내일은 희망 가득한 하루가 찾아오고, 모레는 또 절망이 찾아오려나. 그럼 내일은 탐험을 나갔다가 모레는 집에서 얌전히 휴식을 취해야겠다.



* * *



그날 저녁, 화덕에서 첫 번째 불꽃이 피어올랐다. 꼬마 불꽃은 이내 육중한 어른 화염이 되어 화덕 안이 비좁다는 듯 입구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시체풀 한 줌을 넣고 불을 붙였을 뿐이었다. 그 작은 시체풀들이 이토록 커다란 불을 일으킬 줄이야. 시체풀 대신 기름초라고 개명해야 할 판이다.


매섭게 타오르던 불꽃이 잠잠해진 뒤 난 준비한 반죽을 평평한 돌그릇 위에 올려 화덕 안에 넣었다. 유적지에서 돌로 만든 그릇이다. 돌그릇을 붙잡은 손끝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만하면 더 이상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화덕을 만들고도 넉넉하게 남은 돌덩이들을 쌓아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난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제 화덕 안에 고인 열기가 반죽을 노릇하게 구울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어느새 카인도 곁에 다가왔다. 사실 날 완성시킨 뒤로 카인은 할 일이 없었다. 다른 부분에서는 섬세한 카인이 무료함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하긴 그랬다면 200년이라는 세월을 견디지 못했겠지.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나도, 카인도 이런 상황이 어색하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탐험을 시작하기 까지 한 달 동안 이런 정적이 일상이었으니까.


밤하늘은 달빛을 받아 흑진주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타르 같았던 바닥은 어느덧 굳어서 소복하게 쌓인 눈 같았고, 바닥과 맞닿은 등으로 한기가 느껴졌다.


“이쯤이면 완성됐겠지?”

「빵을 화덕에 굽는 시간은 보통 30분을 넘기지 않아.」

“얼마나 지났어?”

「두 시간을 넘겼지.」

“다 탔겠네. 진짜 빵이었으면.”


난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덕의 입구를 막았던 돌들을 치웠다. 그러자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하얀 구름을 만들며 새어나왔다. 그에 비해 화덕 안에 넣었던 돌그릇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유적지의 건축 재료는 놀랍도록 낮은 열전도율을 자랑했다.


화덕에 넣기 전 거무튀튀했던 반죽은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투명한 표면이 유리처럼 반들반들했다. 손가락 한 마디 두께의 투명한 유리 안에는 흑요석 같은 흑갈색의 앙금이 다소곳이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난 화덕 안에서 다시 태어난 빵을 집어 들었다. 딱딱하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손 안에 느껴지는 감촉은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하다. 부드러운 고무 같은 그 느낌이 기분 좋아 손을 뗄 수가 없다.


「투명한 호빵 같다.」

“호빵?”

「푹신하고 부드러운 하얀 빵 안에 달달한 팥 앙금이 들어 있는 빵이야. 이것처럼 안이 보이지는 않고.」

“그럼 이건 호빵석이야.”

「결국 빵을 만들긴 했구나.」

“응. 예상했던 모양의 빵은 아니지만 이쪽이 더 예쁘니까 괜찮아.”


달빛을 받은 호빵석이 반짝였다. 오늘을 기념하고 싶은 본능이었을까. 마트에서 나와 연구소에 도착한 뒤 화덕을 마주한 난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바닥의 흙을 뭉쳐 빵 반죽을 만들었다. 그것의 결과물이 이 호빵석이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나간 줄 알았어.」

“생애 첫 절망을 기념하려고.”

「인간은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해. 좋은 일이야. 그런 것이 쌓여서 종교가 되고,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됐으니까.」

“참, 바닥에 날짜를 새겨둘 걸 그랬어. 지금 새기면 망가질 것만 같아. 네가 대신 기억해줄래?”

「그게 의미가 있을까? 금세 잊어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할걸? 차라리 일기를 쓰는 게 어때?」

“일기를?”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기록하는 거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야. 기록하지 않으면 잊고 말아. 일기를 쓰면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줄 거야. ‘내가 이날 첫 탐험을 나가서 호버 바이크를 얻었었지. 다음 날은 빵을 구하러 나섰다가 생애 처음으로 절망을 맛봤었어. 그리고 돌아와서 호빵석을 빗었구나.’라고 말이야.」

“듣고 보니 일기를 써야 할 것 같아.”

「그럼 내일은 일기를 쓸 공책을 찾으러 가야겠구나.」


난 품에서 책 하나를 꺼내 카인을 향해 흔들었다. 빵을 찾기 위해 마트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공책이었다.


“마트 안에서 주웠어.”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네.」

“응.”


배에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난 한 손에는 호빵석을, 다른 손에는 공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소로 들어가서 캡슐을 먹어야겠다. 다시는 캡슐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은 결국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은 많으니까. 분명 언젠가는.


화덕은 어느덧 식었는지 연기도 올라오지 않았다. 문득 마트 안에서 살아남은 너구리판다들이 생각났다. 200년 동안 땅속에 묻힌 마트 안에 갇혀 지냈지만 이제는 바깥까지 영역을 넓히겠지.


너구리판다는 야행성이라고 했다. 지금쯤 출입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생전 처음 보는 밤하늘을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지 않을까. 개중에는 드넓은 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하얀 연기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 * *



프로 탐험가의 요리 일지.



3251년 5월 21일. 탐험 2일차.


땅속에 묻힌 200년 전의 마트에서 호밀빵 비상식량을 얻었다. 하지만 너구리판다의 귀여움에 시선을 빼앗겨 그만 내용물을 모두 쏟고 말았다.


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절망했다. 세상은 지구상에 남은 최후의 인간일지도 모르는 사이보그에게도 결코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제 희망을 맛봤다면, 오늘은 절망을 맛봐야 한다고 카인이 말했다. 사실인 것 같다. 빵을 쥐어준 뒤에 빼앗더니만 다시 호빵석을 쥐어주었다. 먹을 수는 없지만 만족스러웠다.


오늘 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찾아온 희망에 큰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찾아온 절망에 좌절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빵을 잃었을 때 난 정말 죽음을 선고 받은 기분이었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걱정이 된다. 다음은 절망이 다가올 차례니까. 그래서 난 다가올 절망을 사소하게 만들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는 캡슐을 하나만 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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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 살을 구워 먹는다고? (1) +1 19.03.01 64 0 9쪽
» 1. 빵이 먹고 싶어 (9) 19.02.28 51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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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빵이 먹고 싶어 (7) +1 19.02.26 60 1 9쪽
7 1. 빵이 먹고 싶어 (6) 19.02.25 64 0 9쪽
6 1. 빵이 먹고 싶어 (5) 19.02.24 62 0 10쪽
5 1. 빵이 먹고 싶어 (4) 19.02.23 70 0 9쪽
4 1. 빵이 먹고 싶어 (3) 19.02.22 86 0 10쪽
3 1. 빵이 먹고 싶어 (2) 19.02.21 96 0 9쪽
2 1. 빵이 먹고 싶어 (1) 19.02.21 104 1 9쪽
1 프롤로그. 고독한 요리사의 탄생 +1 19.02.21 231 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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