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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르미의 서재입니다.

금발마녀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녀르미
그림/삽화
Copilot GPT
작품등록일 :
2024.02.19 17:43
최근연재일 :
2024.05.06 20:15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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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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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수 :
292,754

작성
24.05.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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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10장. 화월루주

DUMMY

“그래서 내가 고작 내 무공을 탐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고 정의맹주 나준을 막 다그치고 있는데, 갑자기 비상종이 울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뒤로도 양현의 이야기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나준이 죽는 장면에 이르렀다.

“그렇게 죽어가던 그가 연이 네게 꼭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연이 너에게 정말로 미안하다고, 자기가 죽으면 연이 네 부모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겠다고, 꼭 좀 전해달라고 말이다. 미안하다고, 죽을죄를 지었기에 마땅히 죽음으로 속죄하였노라고 말이다.”

“예, 사부님.”

설연은 이제 감정을 완전히 다스리고 있는 것인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 연이 네 부모의 죽음에 그런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지금 당장 어린 네게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연이 네가 더 자란 후에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지난달에 환이로부터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방금 전까지도 이 사부는 계속 고민을 했단다.”

“하온데, 어찌 지금?”

“네게 속죄하고자 했던 나준의 당부가 있기도 했고, 이제 며칠 후면 네 아비의 사십구제가 있는 날이 아니더냐? 비록 연이 네 손으로 직접 한을 씻은 것은 아니지만, 억울하게 죽은 네 부모의 한을 이번 기회에 달래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내가 믿고 아끼는 연이 너라면 이 정도의 고난은 어렵지 않게 이겨낼 것이라고 믿었단다.”

말을 마치는 양현의 표정에 살짝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이 설연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듯 했고, 그런 양현을 마주 보던 설연은 갑자기 양현의 얼굴에 아버지인 설관의 웃는 얼굴이 겹쳐지듯 떠올랐다.

“아, 아빠?”

“응? 아빠라니?”

“아, 아닙니다, 사부님.” (아빠 얼굴이 보였었는데, 히잉. 사부는 쫌만 더 그대로 있을 것이지.)

되묻는 양현의 말에 설연은 급히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양현의 모습에서 느껴지던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사라진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이 너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겠지만, 사실 여기 있는 환이도 처음에는 연이 너를 끌어들이려던 그 자들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온 것이란다.”

“예, 좀 전에 사부님 말씀을 듣고 짐작하였습니다.” (그래, 이제 확실히 알겠다고요.)

“미안하구나, 연아. 이 아저씨는 달리 뭐라 할 말이 없구나.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아저씨가 무슨 죄가 있어요. 시킨 사람이 나쁜 사람이지. 물건을 훔친 손이 나쁜가? 훔치라고 손에게 시킨 사람이 나쁜 거지. 연이도 그쯤은 안다구요.” (환이 아저씨는 착한 사람이니깐 봐주는 거야. 알았지? 그러니깐 앞으로 연이한테 잘하라고.)

“여, 연아?”

“허허허, 연이가 이 사부가 할 말을 다 해버리는구나. 허허허.”

설연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으려던 장환은 곧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만 말문을 잊고 말았고, 양현은 크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설연과 양현, 그리고 장환, 세 명 모두에게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10장. 화월루주(花月樓主)


“그러니까 연이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그 말인 즉, 언니가 우리 사부님한테 홀딱 반하셨다··· 뭐, 이런 말씀이시죠, 지금?”

“그, 그렇지.”

“히히히, 제가 도와드리면 뭐 해주실 건데요, 사.못.님?”

“사, 사모? 내, 내가 사모? 아휴, 이 귀여운 것!”

“연아, 이제 네 아비의 제사도 마쳤으니 그만 이 마을을 뜨자꾸나.”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양현이 화향촌을 뜨자는 말을 꺼냈다.

“예, 사부님. 그럼 이제 아미 산중에 있는 사부님의 거처로 가는 것이옵니까?” (이제 이 집이랑 전답도 죄다 팔렸으니, 더 있고 싶어도 이젠 방법이 없어. 에효, 집이랑 전답 판 것을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진정하자, 진정해!)

설관의 사십구제를 무탈하게 치른 지도 벌써 오 일이나 지났으니, 애초에 이 집에 머물기로 약속했던 기한도 이미 다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이곳을 뜨자는 말이 없던 양현이 오늘 갑자기 저 말을 꺼낸 것은 한 달도 더 전에 팔려고 내놓았던 집과 전답을 사겠다는 임자가 드디어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추측하면서 오늘 낮에 집과 전답을 팔던 일에 생각이 미친 설연은 속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한 시진 전까지 그녀가 겪었던 참담하기 그지없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세 시진 전, 막 점심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이 처마 밑에 탁자를 내놓고 봄볕을 즐기며 차와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사람이 두 명 찾아왔다. 양현이 하남으로 가기 전에 집과 전답을 살 사람을 구해 달라고 부탁해 놓았던 이곳 화향촌의 촌장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온화한 인상의 중년인과 함께 집과 전답을 한꺼번에 사겠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촌장의 말이, 객지에 나가 있던 둘째 아들이 고향으로 완전히 돌아온 참에 아들과 식구들이 살 수 있는 좋은 집과 일굴 전답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글공부도 꽤 오래한 아들이니 서당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이 서당을 했던 이 집을 꼭 사고 싶어 하는 기세가 역력했다.

장환이 급히 탁자를 다시 방 안쪽으로 옮기는 사이, 촌장과 그의 아들 두 사람을 자기 방 안으로 들인 양현은 어린아이가 집과 전답을 파는 것과 같은 큰 계약에는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며, 그녀는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고 장환과 둘이서만 방 안으로 들어가고 문까지 걸어 닫았다.

방문 앞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설연은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열심히 안에서 나는 말소리를 들어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양현이 일전에 알려 줬던 강기막을 친 것이라고 짐작하고 꾀를 내었다. 차를 가져다주며 은근슬쩍 끼어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설연의 바람과는 달리, 방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쟁반을 장환에게 넘겨주고 물러나야만 했다. 게다가 흥정이 잘 마무리되어 계약서까지 쓰고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난 후에도 양현은 그녀에게 계약서를 보여주지도 않았고, 또 얼마에 팔았는지 말해주지도 않았다. 설연이 집과 전답을 얼마에 팔았냐고 한참 동안 열심히 돌려 물었지만, 양현은 그저 사부가 알아서 잘 팔았으니 걱정 말라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그녀가 크면 주겠다고만 했을 뿐, 그 밖에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장환도 양현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설연이 아무리 떼를 써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런 양현의 처사에 설연은 분하고 억울해서 미치고 폴짝 뛸 노릇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집과 전답은 분명 자기 것인데, 왜 자기는 쏙 빼놓고 양현이 나서서 파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뿐더러, 또 양현이 얼마에 팔았는지 말조차 해주지 않으니 자칫하면 얼마인지도 모를 그 돈마저도 못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은 물론이고, 마치 자기 집과 전답을 양현에게 빼앗긴 듯한 억울한 심정마저 들었다.


분함과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설연이 끝내는 폭주하고 말았을지도 몰랐을 이 대사건이 지금처럼 잠잠해진 것은 순전히 장환의 덕분이었다.

한참을 졸라도 두 사람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한 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힘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 죽여 울 수밖에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양현의 처사에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실로 억울하고 분하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해질 무렵까지 설연이 방 안에 쥐 죽은 듯이 박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장환이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의 방에 들렀을 때까지 그녀는 한 시진이 넘도록 계속 울고만 있었다.

무심결에 설연의 방에 들렀다가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고 기겁한 장환은 그녀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야 양현과 자신이 그녀에게 씻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치켜들고 왜 자기 부모가 남기고 간 것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팔아치우느냐고 울먹이며 항변하는 설연의 말에, 장환은 그가 천애고아가 되어 유리걸식하던 아홉 살 때 꼬박꼬박 밥을 먹여준다는 말에 혹해 은영대에 들어간 후에 목에 걸고 있던 단 하나뿐인 모친의 유품 목걸이를 교관에게 빼앗기고 나서 며칠 밤을 꼬박 울었던 일과 정규대원이 되고 난 후에 목걸이를 되찾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장환은 설연과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하고 집과 전답을 팔면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집과 전답의 값을 흥정하고 계약서를 쓰는 동안, 양현은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값을 받기 위해, 무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했는데, 촌장이 값을 깎으려고 할 때마다 가뜩이나 인상이 날카로운 장환에게 얼굴을 찌푸리고 인상을 쓰도록 전음으로 일일이 지시한 것도 모자라서, 양현은 은밀히 기세를 내뿜어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든 것이 그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꽤 비싼 값에 집과 전답을 팔 수 있었고, 양현은 이렇게 비싸게 받아낸 돈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은으로 바꿔 두었다가 후일 설연에게 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하는 장환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울음을 완전히 그치고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고, 양현 몰래 얼굴도 씻고 저녁식사 준비도 할 수 있었다.


사실 오늘 낮에 양현이 그렇게 했던 것은, 나이 어린 설연이 너무 일찍부터 돈에 눈을 뜨게 되면 무공이나 학문에 소홀해질 수 있다는 걱정과, 어른이 나서서 팔아야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설연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기에 양현이 직접 나서서 계약을 마무리 짓고, 또 장환의 입단속까지 시켰던 것이었지만, 이런 양현의 생각은 잘못 짚어도 한참이나 잘못 짚은 것이었다.

어린아이일수록 자기 소유의 물건에 어른보다 더 강하게 집착하고, 자기 물건을 다른 사람이 처분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아이를 키워보지 못한 양현이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였고, 그냥 단순하게 양현 본인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해버린 탓에 나타난 어처구니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보편적인 어린아이의 특성과 심리는 물론이고, 어릴 적부터 돈을 다뤄온 설연의 성격, 거기에 죽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던 두 남자가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때려 박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양현이 대신 나서서 집과 전답을 파는 것인지, 그것들을 판 돈은 얼마이며, 또 그 돈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더라도 그녀가 납득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판국에 두 사람 모두 아예 입까지 다물어 버렸으니, 제자된 입장에서 사부인 양현에게 따지고 들 수가 없었기에 설연이 그저 혼자 울고만 있었던 것이지, 만약 양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했으면 처음에 흥정을 시작하는 자리에서부터 큰 사단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한 시진 전까지 그녀가 겪었던 슬픔과 분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현은 그녀의 물음에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아니다, 우리는 성도로 갈 것이야.”

“예? 성도라니요?” (엥? 저번에는 아미산으로 간다더니, 갑자기 웬 성도? 진짜 사부 왜 그러는데? 왜 이랬다 저랬다 하냐구?)

설연은 깜짝 놀라 되물으며, 속으로 양현의 흉을 보았다.

“그간 연이 너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이 있어 아미산이 아니라 성도로 가기로 한 것이니 그리 알고 가자꾸나.”

(사람들 있는 데서는 못 배우는 거라며? 설마 그것도 거짓말이었던 거야? 흥! 사부, 거짓말쟁이.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도 모르나. 쳇! 아빠랑 닮았다는 거 완전히 취소야, 취소라고!)

“예, 사부님.”

성도로 가겠다고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양현의 말에 설연은 속으로는 계속 그의 흉을 보면서도 겉으로는 조용히 알겠다고 대답했고, 설연이 그렇게 성도 행을 수긍하고 나자 양현은 살짝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장환에게 물었다.

“환이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예, 저는 일단 저번에 피신시켰던 수하들을 좀 챙길 요량입니다. 틈이 날 때마다 찾아가 보기는 했지만, 벌써 두 달 가까이 한 곳에서 숨죽이고 지냈을 사람들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군요.”

(위말종, 아니 위일구 일가랑 용삼아저씨 일가, 장숙수아저씨까지도 죄다 환이 아저씨 수하들이라고 했지? 쳇!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구.)

설연은 장환의 입에서 수하들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입을 삐쭉거렸다. 처음엔 그녀가 먼저 명령을 내린 사람만 미워하면 된다고 당차게 말하기도 했고, 또 그 후로도 속으로 숱하게 같은 말을 되뇌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갈수록 부모를 해친 그 사람들이 밉고 원망스러운 생각이 고개를 들면서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현과 장환은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그래, 그렇게 하게나. 그럼, 수하들을 건사한 다음에는 바로 강호로 나갈 겐가?”

“실은 그것 때문에 저도 말씀드릴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맹주도 죽고 없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피신해 있던 그들을 데리고 와서 어르신과 연이 곁에 조금 더 머물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응? 그건 또 왜 그러는가?”

“저도 그렇고, 제 수하들, 아니 이제 제 수하도 뭣도 아니긴 하지만, 여하튼 그들에게도 연이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에? 진짜요?”(속죄라고? 에잉, 얼굴 보면 더 속상할 텐데, 그냥 안보면 안 될까?)

장환의 옛 수하들과 대면하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느껴졌는지 설연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방금 전, 속으로 양현을 흉볼 때만 해도 속마음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녀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얼굴에 바로 드러난 것이 그녀가 느끼는 부담이 정말 상당한 듯했다.

잠시 굳어진 설연의 표정을 살핀 양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연아, 그들을 대면하기가 꺼려지느냐?”

“그것이···”(아휴, 사부! 사부 같으면 마음이 편하겠어?)

“연아, 당장은 힘들고 어색하겠지만, 네가 이 아저씨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기회를 한 번 주는 것이 어떻겠니?”

“···”(아우, 나보고 대체 어쩌란 말이야? 히잉.)

장환은 설연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으나, 설연은 그저 입술만 꼭 깨물고 한동안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기가 답답했는지 양현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래, 어려운 문제이니, 일단 식사부터 마저 하자꾸나.”

“예, 어르신. 그래, 미안하다, 연아. 이 아저씨가 너무 아저씨 생각만 한 모양이다. 네가 이해해주렴.”

“아니에요, 아저씨.” (아휴 참, 아저씨가 자꾸 그러면 연이가 괜히 미안해지잖아. 낮에 아저씨가 그렇게 연이를 챙겨주기까지 했는데, 모른 척만 할 수도 없고 말이야. 히잉, 고민이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세 사람은 다시 천천히 식사를 계속했지만, 양현과 장환은 곧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설연은 두 사람이 자신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가 싶어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요리가 좀 맛이 없었죠?” (에고, 잘 먹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다, 요리 맛이야 훌륭하지. 아까 점심에 조금 과했던 듯싶어서 조금만 먹으려고 그런다.”

“그래, 여, 연아. 아저씨도 점심을 거하게 먹었더니···”

두 사람이 어색한 표정으로 얼버무리자, 설연은 한숨을 포옥하고 내쉬고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에효, 나이도 많이 드신 어른들께서 왜 그러세요? 알았어요, 연이가 그 분들 보면 되잖아요. 됐죠? 그러니 그만들 하시고, 어서 마저 드세요.” (에효, 환이 아저씨 부탁만 아니었어도 연이가 참지 않았을 거라구.)

“아하하, 그래 연아, 고맙다.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다.”

“그래, 연이가 아주 잘 생각했구나. 그래, 그래야 내 제자지, 허허허.”

(사부가 아니라 완전 웬수라니깐. 아! 연이 앞날이 왠지 고달플 거 같애.)

그렇게 설연이 항복 선언을 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리며 젓가락을 들고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입을 삐쭉 내밀던 설연은 성도에 가는 일정을 물었다.

“그런데, 사부님, 성도엔 언제 가실 생각이세요?”

“일단 여기 짐들도 꾸려야 할 것이니, 닷새 후에 집을 비워 주기로 한 날에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예, 사부님.” (아! 맞다. 짐싸야 하는구나. 아우, 이 많은 짐을 어떻게 다 싸지? 뒷마당 창고에 있는 서책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진짜 큰일이네.)

“아참, 어르신, 성도에 거처할 곳은 혹시 마련해 두셨습니까?”

(맞다! 성도에 살 집은 구한거야, 사부?)

장환이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양현에게 물었고, 그 말을 들은 설연도 궁금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부터 구해 봐야지. 이 집이 오늘 팔렸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성도에 다녀올 작정이네.”

“···”(아니, 진짜, 사부 너무하는 거 아냐? 갈 곳도 없이 이 많은 짐을 싸들고 무작정 성도로 가겠다고 한 거야, 지금?)

“하하하, 이럴 때는 제가 도움이 되는군요, 어르신.”

설연은 대책 없이 일을 벌이는 양현의 황당함에 그저 눈만 크게 뜨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으나, 장환은 얼마 전에 자신의 손으로 부순 성도 일번 거점 외에, 비슷한 시기에 꽤 큰돈을 들여 마련해 놓은 이번(二番) 안가(安家)를 떠올리고는 냉큼 양현에게 말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성도에 좋은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비어 있는데다가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으니 금상첨화일 듯합니다.”

“호오, 그래?”

“아저씨, 정말이에요? 누구 집인데요?” (집이다, 집! 어떤 집이야? 혹시 그 집 아저씨 집이면, 연이한테 그 집 줄 수 있어? 응? 연이한테 그 집 주면 안 돼?)

설연은 밥풀까지 튀겨 가며 장환에게 급하게 물었다. 그녀가 나고 자랐고, 또 후일 성혼할 때의 지참금으로 삼고자 했던 이곳 화향촌 집과 전답은 이제 며칠 뒤면 돈으로 바뀌어 양현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이었기에, 그녀는 앞으로 살게 될 집에 대한 관심과 욕심이 폭발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예전에 구해놓은 집이니 아저씨 집이지. 정의맹에서 타낸 돈으로 산 것이지만, 정의맹에서는 그런 집을 산 줄은 모르거든. 집문서도 전장에 맡겨 놓았고 말이야, 하하하.”

“우와! 아저씨 최고! 이제 보니 아저씨도 은근히 부자였네요.” (이제 보니 완전 남의 돈 빼돌려서 산 거잖아. 아저씨이! 그 집, 연이 주면 안 돼? 아저씨도 남의 돈 빼돌려서 산 집이니깐 그냥 연이 주라, 응? 그 집 주면 그 사람들 다 용서해 줄께!)

그러나 이러한 설연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장환은 엉뚱하게 집 자랑만 계속했다.

“아하하, 부자는 무슨··· 그나저나 고풍스럽기 그지없고 꽤 크기까지 한 집이니 살 만할 겁니다, 어르신. 사연이 있어서 집을 싸게 사들이기는 했지만, 방도 여섯 개에, 앞뒤 마당도 이 집보다 꽤 넓기도 하고요. 처음 집을 구했을 때 관리해줄 사람도 한 명 같이 구해 두었으니 손을 보아야 할 곳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고마우이. 자네 덕에 큰 시름을 덜었네 그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어르신께 입은 은혜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걸요.”

“아닐세, 아니야. 집을 구할 걱정을 던 것만 해도 어딘가? 자네 공이 크네 그려.”

“하하하,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르신.”

양현과 장환은 그렇게 서로 칭찬과 겸양의 말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온 신경이 성도에 있다는 집에 쏠려 있던 설연은 장환이 스쳐가듯 말했던 사연이 있어서 싸게 사들였다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아저씨, 사연이 있어서 집을 싸게 사셨다고 했는데, 그 사연이 뭐에요?”(설마 귀신이라도 나온다는 건 아니겠지?)

“아! 그거? 별다른 것은 아니고, 그 집에 살던 사람 한 명이 죽어서 급하게 집을 팔길래 잘되었다 싶어서 싸게 산 것이거든.”

“예? 사람이 죽어서 싸게 판 집이라구요?”(뭐야? 설마 진짜로 귀신 나오는 집 아냐?)

“아니,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사람이 죽어 나간 집이라니 말이야.”

설연이 크게 반문하자, 양현도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하하, 이런이런,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사람이 죽었다는 게 별다른 게 아니구요. 그 때가 칠 년쯤 전이었는데, 성도의 관리였던 그 집 가장이 병사하고 죽은 관리의 부인과 그 아이들 세 명까지 달랑 네 명만 남아 있던 집이거든요. 서안(西安)의 세도가인 애들 어머니 처가에서 곧 그들을 데리러 온다고 했다고 급하게 집을 처분하지 뭡니까? 덕분에 싸게 살 수 있었지요.”

“아! 그런 것이었군요. 난 또···”(으이그, 첨부터 그렇게 말을 하지. 아저씨도 참 말재주 없다.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꺼내냐?)

“예끼, 이 사람아, 그럼 처음부터 그리 말을 했어야지. 사람 놀라게 하기는.”

“하하하, 이거 참,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아저씨! 그 집 어쩔 거야? 연이한테 주라고오오!)

차마 대놓고 집을 자기한테 달라고 말할 수 없었던 탓에 한 맺힌 설연의 간절한 바람은 그렇게 묻히고 말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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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8장. 내공입문 24.04.05 28 0 14쪽
22 8장. 내공입문. 24.04.03 28 1 17쪽
21 8장. 내공입문. 24.04.01 32 0 17쪽
20 8장. 내공입문. 24.03.29 31 0 16쪽
19 8장. 내공입문. 24.03.27 34 0 15쪽
18 7장. 단서포착. 24.03.25 28 0 14쪽
17 7장. 단서포착 24.03.22 31 0 13쪽
16 7장. 단서포착 24.03.20 34 0 13쪽
15 6장. 금선탈각. 24.03.18 33 0 18쪽
14 6장. 금선탈각 24.03.15 39 0 17쪽
13 5장. 만찬전후. 24.03.13 35 0 36쪽
12 4장. 내공심법. 24.03.11 42 0 22쪽
11 4장. 내공심법. 24.03.08 40 0 15쪽
10 3장. 부정만리. 24.03.06 41 0 13쪽
9 3장. 부정만리. 24.03.04 42 0 23쪽
8 2장. 소리장도. 24.03.01 50 0 26쪽
7 2장. 소리장도. 24.02.28 51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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