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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르미의 서재입니다.

금발마녀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녀르미
그림/삽화
Copilot GPT
작품등록일 :
2024.02.19 17:43
최근연재일 :
2024.05.06 20:1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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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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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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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6쪽

5장. 만찬전후.

DUMMY

5장. 만찬전후(晩餐前後)


“연아, 이제 네 아비의 제사도 마쳤으니 그만 이 마을을 뜨자꾸나.”

“예, 사부님. 그럼 이제 아미산중에 있는 사부님의 거처로 가는 것이옵니까?”

“아니다, 우리는 성도로 갈 것이야.”

“예? 성도라니요?”

“그간 연이 너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이 있어 아미산이 아니라 성도로 가기로 한 것이니 그리 알고 가자꾸나.”

“예, 사부님.”




설연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자 양현은 방안을 둘러보며 설연이 숨을 곳을 어디로 할지 생각했다.

“어디가 좋을까? 평범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침상 밑이 편하고 좋겠지? 그럼 어디 침상부터 치워 볼까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린 양현은 침상 옆 벽에 붙은 창문과 방문을 활짝 열고 설관의 침상을 허공섭물(虛空攝物)로 들어 올려 방 밖에 내놓았다. 세 명이 누워도 될 법한 커다란 침상을 허공섭물로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이 역시 천하제일인다웠다.

“어디 보자. 나무 바닥을 들어내고 바닥을 파내려면 일단 침상 밑에 쌓인 먼지부터 치워야겠지?”

침상이 놓여 있던 자리에서 반 장 정도 떨어져 선 양현은 양 손에 바람의 기운을 일으켜 침상이 놓여 있던 바닥 쪽으로 바람을 강하게 불러 일으켰다. 그러자 바닥에 수북이 쌓여있던 먼지들이 양현이 일으킨 바람에 날려 창밖으로 빠져 나갔고, 양현은 다시 방문 앞으로 걸어가 방 안쪽으로 바람을 일으켜 방 안의 먼지들을 창밖으로 몰아내었다.

“그럼 이제 바닥을 파볼까?”

방안의 먼지가 거의 다 빠져나가자 양현은 침상이 놓여 있던 자리로 다가가 오른손에 내기를 모아 길쭉한 막대같이 만들더니 그 막대를 가지고 침상이 놓여 있던 바닥에 깔린 나무판 한 가운데를 가로세로 네 자 크기로 잘라냈다. 양현이 가볍게 만든 막대 같아 보인 것은 내기로 만든 검강(劍罡)이었던 것이다.

본래 양현의 주된 무공은 혼원일기공을 바탕으로 하는 적수공권의 권장각지(拳掌脚指) 등의 무공이었으나, 그는 이미 생사대적(生死大敵)을 마주한 것이 아닌 한 혼원일기공에 기반을 둔 무공들을 펼칠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검 없이 검강을 만들어 사용하는 데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일단 이 정도 넓이로 일 장 정도 파고 들어가서 옆으로 파 들어가자. 그리고 이 나무판은 덮개로 사용하면 되겠구나.”

양현은 방금 자신이 검강으로 잘라낸 덮개 위에 올라서더니 내기로 덮개를 감싸 덮개가 부서지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천근추를 시전했다. 그러자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덮개 크기만큼의 바닥이 서서히 꺼져들기 시작하더니 그의 몸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덮개가 두 자 정도 깊이로 꺼지자 양현은 천근추를 거두고 가볍게 몸을 날려 방바닥 위로 올라왔다.

“이제 제대로 파내야겠군.”

허공섭물로 잘라낸 덮개를 들어 올려 창밖으로 옮겨 놓은 양현은 다시 오른손에 검강을 만들어 내더니 덮개에 눌린 흙과 눌리지 않은 흙의 경계선에 수직으로 꽂아 넣었다. 양현은 흙 안쪽에 꽂아 넣은 검강에 내기를 더 불어 넣어 다시 일곱 자 정도 길이를 더 늘이고는 손을 놀려 덮개에 눌린 크기에 맞게 사각형으로 흙을 잘라냈다.

“바닥을 자르고 들어내야 되겠지?”

흙을 덮개 크기로 잘라낸 양현은 다시 정신을 집중해 검강 끝에서 직각으로 휘어진 검강을 여섯 자 길이로 생성해내고는 그 자리에서 손에 잡은 검강을 사각형으로 잘라낸 흙의 중심 방향으로 사분의 일 바퀴 정도 회전시킨 후에 검강을 소멸시켰다.

그렇게 검강으로 흙덩이를 잘라낸 양현은 상체를 바닥에 대고 팔을 쭉 뻗어 흙덩이에 손을 꽂아 넣고 흙덩이 전체를 내기로 감싼 후 살짝 들어 올려 보았다. 어딘가 걸리거나 당기는 느낌이 없이 흙덩이가 달려올라 오는 것이 흙덩이 밑 부분도 잘 잘려진 듯했다. 양현은 그 상태에서 흙덩이에 허공섭물을 펼쳐 흙덩이가 떠있도록 유지하고는 흙에 꽂아 넣은 손을 빼냈다. 잘라낸 육면체의 흙덩이를 허공섭물로 마저 들어 올린 양현은 흙덩이를 허공에 눕혀 방 밖으로 들고 나왔다. 흙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내기로 감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흠, 이 흙을 어디다가 버린다?”


“어머나, 사부님, 그,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에코야, 뭐야 저게?)

설연은 자신의 방에서 잠시 단공의 비급을 뒤적여보다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불그죽죽한 커다란 관 같은 덩어리가 허공에 둥둥 떠서 양현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고 기겁하며 놀랐다.

“아, 이건 방바닥에서 파낸 흙이니라. 이걸 어디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버려야 할 텐데 어디 좋은 곳이 있느냐?”

“흙이라고요? 그런데 어찌 허공에 떠있는 것인지?” (우와! 저 큰 흙덩이가 둥둥 떠 있다니.)

“하하. 내기를 이용한 허공섭물이니라. 나중에 너도 능히 할 수 있는 재주이니 신기해 할 것 없다. 그나저나 이 흙을 버릴 곳이 마땅치 않구나.”

“아, 네, 사부님. 욕간 옆 창고 뒤편이 뒷산과 이어져 있으니 그 쪽이 어떨는지요?” (거기 가면 흙 많아, 사부)

“그래? 그럼 그쪽으로 한번 가봐야겠구나.”

“예, 사부님” (세상에나. 잡서에서는 찻잔이나 뭐 이런 것만 허공섭물로 옮긴다는 얘기를 봤는데, 사부는 저, 저렇게 큰 흙덩이를 허공섭물로 옮기는 거야? 그리고 나중엔 연이도 할 수 있다고?)

설연의 말을 들은 양현은 뒷산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그 뒤에는 흙덩이가 둥둥 뜬 채로 양현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설연은 양현의 뒤에서 둥둥 떠가는 흙덩이를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양현과 흙덩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신을 차린 설연은 부엌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우헤헤, 연이도 나중 되면 사부처럼 될 수 있겠지? 헤헤헤. 아이쿠, 저녁 밥 늦겠네. 서두르자.)

양현이 욕간 옆 창고 뒤편에 도착해보니 뒷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경사진 길이 보였다.

“흠, 여기가 좋겠구나.”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간 양현은 허공에 둥둥 떠서 뒤 따라오던 흙덩이를 자신의 앞으로 꽤 멀리 옮겨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흙덩이를 감싸고 있던 내기를 거두었다.

“이제 저걸 부숴서 흙을 흩어 버려야겠지? 되도록 잘게 부숴야 할 테니 역시 탄으로 부숴야겠구나.”

양현은 아직도 허공에 높이 떠있는 흙덩이를 향해 우장(右掌)을 뻗어 삼 성의 공력을 실은 혼원장(混元掌) 육초(六招) 탄(彈)을 날리고 허공섭물을 거두었다. 그러자 양현의 우장에서 쏘아져 나간 주먹만 한 강기(罡氣) 덩어리 하나가 흙덩이를 파고들더니 곧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 조각난 흙덩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양현은 흙덩이가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연이가 오르내리려면 사다리가 필요할 테니 사다리를 만들어야겠군. 마땅한 나무가 있으려나 모르겠구나.”


양현은 장작더미가 쌓여 있는 부엌 옆으로 가서 사다리를 만들 만한 나무를 한참을 찾아보았으나 적당한 목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옳지, 흙벽이니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렇게 말한 양현은 두께가 두 치 정도 되고 길이는 한 자 이상인 장작들과 한 치 두께의 곧게 뻗은 나뭇가지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반 각 정도 장작들을 뒤져 이십여 개의 굵은 장작들과 십여 개의 가는 나뭇가지들을 골라낸 양현은 굵은 장작 두 개를 집어 검기를 일으킨 수도로 한쪽 끝을 뾰족하게 다듬고 반대편 끝 두 치쯤 되는 곳에는 손가락으로 지름이 한 치 정도 되는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는 곧게 뻗은 한 치 두께의 나뭇가지 중 하나를 집어 길이가 한자가 조금 넘도록 자르고 양 끝을 다듬어 굵은 장작 두 개에 뚫은 구멍에 각각 끼워 넣었다. 그러자 양 쪽의 굵은 장작 두 개와 둘을 연결한 나뭇가지가 凹자 모양의 한 덩어리가 되었다.

“됐어. 이걸 벽에 적당한 간격으로 박아 넣으면 되겠다.”

나머지 장작들과 나뭇가지도 모두 비슷한 크기의 凹자 모양으로 만든 양현은 그것들을 왼팔에 걸쳐 들고 설관의 방으로 향했다.

설관의 방으로 돌아온 양현은 왼팔에 들고 온 凹자 모양의 장작들을 바닥의 구덩이 옆에 내려놓고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 구덩이의 사방 흙벽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흠, 흙이 생각보다 약하군. 옆으로 길게 파내면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하긴 하루나 이틀, 그것도 잠깐씩만 사용하고 말 것이니 여기서 흙을 더 파낼 게 아니라 흙을 다져서 구덩이를 넓히는 것이 나을 것이야.”

그렇게 한참을 중얼거리던 양현은 양 손에 내기를 모아 방 가운데 방향의 흙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의 흙벽을 손바닥으로 때려서 다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양현이 손바닥을 흙벽에 때릴 때마다 손바닥 네 배 정도 되는 크기의 둥근 형태로 흙벽이 한 자씩 푹푹 꺼졌다. 그렇게 한참을 흙벽을 다져 원래 검강으로 파낸 구덩이보다 좌우로 각 한 자, 창 쪽으로 두 자 정도를 더 넓혀 전체적으로 사방 여섯 자 정도의 구덩이로 넓어지자 양현은 벽에 진흙으로 미장을 하듯 내기를 모은 손으로 흙벽을 평평하게 다듬었다.

적당히 흙벽을 다듬은 양현은 쪼그려 앉아 창 아래쪽 흙벽은 비스듬히 다지고 바닥도 계속 손바닥으로 때려 다졌다. 창 쪽 흙벽은 위쪽보다 아래쪽이 두 자 정도 더 깊이 들어가도록 비스듬히 넓혔는데, 구덩이 전체의 깊이는 일 장에 바닥은 너비가 가로 여섯 자, 세로 여덟 자의 직사각형 모양이 되도록 했다. 구덩이를 옆에서 볼 때 ㅣ\ 모양으로 다듬은 것이다.

양현은 손바닥의 내기를 거두고 바닥과 벽을 손으로 짚어 흙의 습기를 확인했다.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던데 물이 고이지는 않을지 모르겠구나. 일단 좀 말려볼까?”

말을 마친 양현은 양 손에 삼매진화를 일으켜 바닥과 사방 벽의 습기를 말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벽을 쓰다듬어 구덩이 내부의 습기를 적당히 말렸다고 생각한 양현은 구덩이 바깥으로 나와 아까 凹자 모양으로 만들어둔 장작들을 들고 구덩이 안으로 내려왔다.

“자, 습기는 이제 적당히 말렸으니 이제 이것들을 박아 사다리를 만들자. “

방 안쪽 방향 흙벽 가운데쯤에 자리를 잡은 양현은 천상제(天上梯)로 구덩이 허공 두 걸음 위에 올라섰다. 양 손에 凹자 모양의 굵은 장작의 뭉툭한 쪽을 잡은 양현은 중간을 연결하는 나뭇가지가 수평이 되게끔 맞추고, 굵은 장작의 뾰족한 부분이 약간 아래로 향하도록 기울여 방바닥에서 한 자 정도 낮은 곳에 손으로 잡은 부분이 네 치 정도 남도록 깊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맨 처음 박아 넣은 아래쪽으로 나머지 凹자 모양의 장작들 십 수 개를 반 자가 조금 넘는 간격으로 열을 맞춰 박아 넣자 흙벽에는 훌륭한 사다리가 만들어졌다.

벽에 박아 넣은 사다리들에 한 손과 발로 살짝 무게를 실어본 양현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구덩이 밖으로 몸을 날려 나왔다. 덮개를 덮어보려고 마음먹은 그는 창 밖에 두었던 덮개를 허공섭물로 들어 올려 구덩이에 맞춰 끼워 넣고 허공섭물을 거두었다. 그러자 덮개는 툭하고 구덩이 안으로 떨어져 버렸다.

“큭, 이런 이런. 이렇게 파고 나면 덮개를 받칠 것이 없다는 것을 깜빡했구나. 이 짓도 오랜만에 하니 정신이 없구나, 허허.”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다는 듯 고개까지 설레설레 저은 양현은 다시 부엌간 옆으로 가서 길이가 긴 나뭇가지들을 찾기 시작했다.

“흙벽을 다진 쪽은 길이가 넉 자는 족히 돼야 할 텐데. 연아! 연아!”

“예, 사부님.” (밥 하느라 바빠 죽겠고만 왜 불러?)

한참 부엌에서 저녁밥을 준비하던 설연은 양현이 부르자 부엌문을 열고 나오더니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혹시 못이나 길이가 넉자가 넘는 한 치 두께의 곧은 나뭇가지를 구할 수 있느냐?”

“아! 창고에 못이 있을 것이옵니다. 제가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몇 개나 필요하신지요?” (또 뭘 하려고 못을 다 찾지?)

“못은 여덟 개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예, 지금 곧 가져오겠습니다.” (야채 볶다가 나왔는데, 에고, 바쁘다 바빠.)

“그래 부탁하마.”


잠시 뒤 설연이 반쯤 녹이 슨 대못 여덟 개를 들고 와 양현에게 건네주자 양현은 장작더미 아래에서 굵은 통나무 같은 장작을 하나 집어 들고 다시 설관의 방으로 향했다.

구덩이 앞에 선 양현은 구덩이 위쪽 바닥 나무판 좌우 네 귀퉁이에 적당한 자리를 잡아 설연에게서 받아온 대못을 하나씩 던져 박았다. 양현의 손을 떠난 대못은 텅텅 소리를 내며 두꺼운 나무판에 쑥쑥 박혀 들었다.

그렇게 못을 박아 넣은 양현은 챙겨온 굵은 장작을 가로로 눕혀 가운데를 잘라 반 토막을 내고, 다시 반 토막 난 두 개의 장작을 세로로 반으로 쪼개 네 개의 조각으로 만들어 들고는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천상제로 구덩이 중간쯤에 내려선 양현은 반으로 쪼갠 장작조각의 둥근 면을 아래쪽으로, 평평한 면은 위쪽으로 향하도록 잡고 구덩이 입구 쪽으로 장작조각이 두 치 길이로 튀어나오도록 위치를 잡은 후 왼팔을 뻗어 박아둔 못의 머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고 못의 아래쪽 뾰족한 부분에 장작조각을 끼워 넣었다.

장작조각이 바닥 나무판에 밀착되도록 장작조각을 다 끼워 넣은 양현은 튀어나온 못 끝을 꺾어 장작조각의 둥근 쪽에 붙이고, 이번에는 장작조각 쪽에서 처음 박아 넣은 못과 한 치쯤 떨어진 자리에 엄지손가락으로 못을 박아 넣고 방바닥 나무판 위로 튀어 나온 못 끝을 꺾어 바닥에 붙였다. 나머지 세 귀퉁이에도 같은 방식으로 장작조각에 못을 박아 고정시킨 양현은 구덩이 안에 떨어져 있던 덮개를 들고 구덩이 밖으로 나와 구덩이 위에 걸쳐보았다. 이번에는 덮개가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않았고 방바닥에 깔린 나무판과 수평도 잘 맞았다.

그렇게 덮개를 구덩이 위에 덮은 양현은, 설연이 침상 밑으로 팔을 뻗어 손가락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가늠해 보더니 지풍(指風)을 날려 덮개 한쪽에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에 손가락을 걸어 덮개 한쪽을 들어 올리고 다시 안쪽을 살펴본 양현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행히 물이 고이지는 않았음을 확인했다.

“물은 고이지는 않지만, 통기가 안 될 테니 안에 오래 들어가 있으면 질식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양현은 덮개와 창문 쪽 벽 사이의 나무 바닥에 지풍을 연달아 날려 십여 개의 구멍을 뚫었다.

“이렇게 해두면 되겠지. 이제 구덩이는 다 되었으니 덮개를 가리고 기척을 지우는 진식을 설치해야겠구나.”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양현은 오른손 검지에 삼매진화를 일으켜 나무 바닥과 덮개 주변에 환허미혼진(幻虛迷魂陣)을 축소시켜 그리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영향을 끼쳐 상세한 실체를 숨기고, 그 주변의 기척을 지우는 진식(陣式)이었다. 양현은 덮개를 들어 올렸다가 닫아도 진식이 훼손되지 않고 다시 발동되도록 꼼꼼히 진식을 그렸다.


진식까지 다 그린 양현은 방 밖에 내놓은 침상을 다시 허공섭물로 들어 올려 원래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침상 밑을 확인해보았다.

“흠, 진식까지 설치해놓으니 눈에는 확실히 안 띄는군. 손으로 직접 더듬기 전에는 찾기 힘들겠구나. 침상의 높이도 꽤 되니 연이 혼자서 덮개를 밀어 올리고 밖으로 나올 수도 있겠고 말이야. 그런데 구덩이 안이 깜깜할 텐데 그 어린 것이 안에서 불편해 하면 어떡한다? 야명주라도 넣어줘야 하나?”

침상 반대편으로 걸어가 자신의 봇짐을 뒤져 밤톨만한 야명주(夜明珠)를 하나 꺼내 온 양현은 덮개를 열고 안으로 던져 넣었다.

“역시 환기를 위해 뚫은 구멍들하고 손잡이 구멍으로 빛이 조금 새는군. 환허미혼진을 설치했어도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까지는 어쩔 수가 없구나. 구덩이 안에서 아래쪽에 천이라도 대야 하나.”

다시 봇짐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온 양현은 침상과 나무판을 허공섭물로 들어 올리고는 구덩이 안으로 뛰어 내린 뒤에 허공섭물을 거두었다.

구덩이 바닥에서 살짝 뛰어 올라 두 자 높이 허공에 천상제로 멈춰선 양현은 왼손에 손수건을 들고 기를 불어넣어 빳빳하게 펴서 좀 전에 자신이 지풍으로 구멍을 뚫어둔 곳에 댔다. 손수건이 구멍들을 잘 가리는 것을 확인한 양현은 오른손 검지 손톱으로 손수건의 양쪽 끝을 나무판에 살짝살짝 밀어 넣어 고정시키고 다시 구덩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흠, 덮개에 뚫린 구멍은 어찌한다? 옳지, 그게 있구나.”

양현은 바닥에서 야명주를 집어 들고 다시 바닥을 뒤져 지풍에 구멍이 뚫리면서 반대편으로 밀려나온 나뭇조각 하나를 찾아 다듬고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덮개에 뚫린 구멍에 반쯤 밀어 넣었다.

“되었다. 나중에 제대로 천으로 덮어야 하겠지만 일단 임시변통은 되겠다.”

사다리 중간에 올라선 양현은 덮개를 그대로 수직으로 들어 올리는 허공섭물을 시전했다. 허공섭물에 들어 올려진 덮개는 침상 밑바닥에 달라붙더니 침상을 천장 밑까지 들어 올렸고, 그 틈에 구덩이 밖으로 몸을 날려 나온 양현은 덮개와 침상을 원 위치에 내려놓았다.

“휴, 일단 이 정도면 되었다.”

(6/5 두 번째 연재분)


한 시진에 조금 못 미치는 짧은 시간 동안 설연이 숨어 있을 곳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양현은 손으로 툭툭 옷을 털며 우물가로 향했다.

“이제 손을 씻고 저녁을 먹어야겠구나. 대체 얼마 만에 이런 구덩이를 파는 것인지. 그러고 보니 갓 성혼했을 때, 부인 성화에 못 이겨 구덩이를 팠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네 그려. 그 때는 그리도 하기 싫었던 것이, 제자를 지키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즐겁게 하게 되는구먼. 역시 사람은 무엇을 하던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즐거운 법인가. 허허허.”

이처럼 자신의 손으로 흙구덩이를 파는 일은, 그 옛날 부인 강씨와 막 성혼했을 때, 창고 지하에 식재료 보관을 위한 저장고를 겸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한 도피처를 만들었던 것이 전부였던 양현이었다.

비록 지방의 현승(縣丞)에 불과했다고는 하나, 적지 않은 녹봉을 받는 관인(官人)이자 학사(學士)였던 양현은 흙을 다루는 일을 할 이유가 없었고, 또 집안에 공사를 할 일이 있으면 부인 강씨가 인부들을 사서 했던 것이다. 게다가 강호에 출도한 이후로는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흙을 파고 숨는다는 것은 그 자신은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사부님,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사부님 방으로 대령하겠습니다.” (아빠 방으로 들고 갈 테니까 그리로 오라구, 사부.)

보자기를 씌운 커다란 쟁반을 양손에 든 채로 부엌문을 밀고 나오던 설연이, 옛일을 회상하며 우물로 가고 있던 양현을 보고 말했다.

“그래그래, 방에서 같이 먹자꾸나. 내 금방 손을 씻고 가마.”


설연은 아비의 방 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 식사를 차려 놓고 한쪽 의자에 앉아 양현이 오기를 기다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디다가 비밀장소를 만들었다는 거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 바닥에도 먼지 한 톨 없는데, 어디다가 뭘 만들었다는 거야? 히잉, 궁금하네.)

“흠흠, 오래 기다렸느냐?”

“아, 아닙니다, 사부님. 어서 드시지요.” (연이가 엄청 고생해서 만든 거니까 군소리 말고 먹어야 해, 사부.)

“그래, 어서 들자꾸나. 향기가 좋구나.”

탁자 위에는 밥과 야채볶음 두 가지, 고기볶음 한 가지와 정체 모를 국물 요리 하나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고, 방 안에는 향긋한 냄새가 가득했다. 양현은 침상 옆에 놓인 등불에 불을 붙여 탁자 위로 옮겨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난 며칠 간 장을 보지 못해 차린 것이 별로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래도 있는 거 탈탈 털어서 열심히 만들었어, 사부. 좀 봐줘, 알았지?)

“하하, 아니다. 이 정도면 훌륭하구나. 그리고 이 사부는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양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설연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양현에게 권했다. 이를 본 양현은 설연이 대견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설 훈장이 정말 잘 가르치긴 했구나. 저 어린 것이 주인으로 객을 대하는 법도(法道)를 다 알고 있다니. 하지만 나를 객으로 대하니, 살짝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군. 아직 낯설어서 그런 것인가?)

“허허, 연아. 이 사부가 객(客)으로 느껴지느냐? 찬을 권하다니.”

“예? 그, 그, 그것이” (아빠가 손님한테 이렇게 했다구. 사부가 원래 우리 집 식구인 건 아니잖아?)

전에 설관이 집에 온 손님(客)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권하던 것을 흉내 내려던 설연은, 양현에게 지적 아닌 지적을 당하자 살짝 못마땅했다.

“이 사부는 이제 네게 아비와 같지 않겠느냐? 연이 너와 이 사부는 이제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이니 부담 갖지 말고 편히 먹자꾸나.”

“예, 사부님” (흥, 어디서 울 아빠랑 같다고 그래? 아빠는 아빠, 사부는 사부라고! 뭐, 나도 편하면 좋긴 하지만.)

밥과 요리들을 맛 본 양현이 젓가락을 내리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연이 네가 음식 솜씨가 꽤 뛰어나구나. 밥도 알맞게 뜸이 들었고, 볶음 요리와 국물 요리도 전체적으로 다 맛이 훌륭해.”

“감사하옵니다, 사부님.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헤헤, 뭘 이 정도 가지고. 재료만 충분하면 더 잘할 수 있다구.)

“아니다, 아니야. 연이 네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더니 요리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구나.”

“그것이, 제 어미가 죽고, 아비마저 병이 들어 누운 뒤로 연이가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다시피 하였던 터라.” (요리솜씨는 다 그 동안 연이가 피땀 흘려 고생한 결과라구, 헤헤헤.)

“그래, 어린 네가 고생이 참으로 많았겠구나. 마저 들자꾸나.”

“예, 사부님” (그래, 연이가 고생한 걸 어찌 말로 다 하겠어, 흑. 그냥 밥이나 먹자구, 사부.)

그 뒤로 한참을 식사에 열중하던 양현은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설연에게 말했다.

“연아, 사부에게 밥을 한 그릇 더 주겠느냐?”

“예, 사부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쫌만 기다려, 사부. 반찬은 별로 없어도 밥은 많아, 헤헤헤.)

양현이 내려놓은 밥그릇을 집어 든 설연은 방 한쪽에 놔둔 쟁반으로 걸어가 밥을 한 가득 퍼서 들고 오더니 양현 앞에 내려놓았다.

“사부님께서 고된 일을 하시더니 배가 고프셨나 봅니다.” (맛이 좋다고 말해!)

“아니다, 연이 네 음식 솜씨가 좋아 이 사부가 오랜만에 식욕이 돋아서 그러니라, 하하.”

“호호, 사부님께서 연이의 기분을 다 맞춰주시네요.” (헤헤헤, 왠지 모르지만 기분은 되게 좋네.)


화기애애한 저녁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탁자 위를 치운 후에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화로를 들고 나가 숯을 채워 온 것은 양현의 몫이었고, 화로 위에 주담자를 얹어 찻물을 끓인 것은 설연이었다.

“침상 밑에 구덩이를 파두었으니 사부가 돌아올 때까지 거기 머물거라.”

“침상 밑에요?” (침상 밑에? 아까 봤을 때는 아무것도 안보이던데?)

침상 밑에 구덩이를 파두었다는 양현의 말에 설연은 고개를 돌려 침상 밑을 살펴보았다.

“하하하, 네 눈에 보이면 그것이 어디 비밀장소겠느냐?”

“예? 눈에 안보이다뇨?” (뭐야? 어떻게 눈에 안 보이게 만든 거야?)

“침상 밑, 바닥 나무판을 잘라내고, 그 밑에 일장 깊이의 구덩이를 팠느니라. 잘라 낸 나무판을 덮개로 삼아 다시 끼워 넣고, 덮개 주변에 시선을 속이고 기척을 지우는 진식까지 펼쳐두었으니 덮개를 열고 안에 들어가 있으면 웬만해서는 들키지 않을 것이야.”

“예, 사부님” (그새 구덩이를 판 것도 대단한데 진식까지 펼쳐 놓은 거야? 사부, 정말 대단하네. 점심때까지만 해도 변태색마 영감탱이인 줄 알았는데, 헤헤헤.)


두 사람이 차를 마시는 동안 해가 완전히 졌고, 양현은 이제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자, 이제 해가 졌으니, 이 사부는 나가 봐야겠구나. 너는 저 안에 들어가 있거라.”

“예, 사부님.” (구덩이 안이면 깜깜하고 답답할 텐데.)

“안이 춥고 바닥이 찰 테니 옷가지를 두텁게 입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예, 옷가지를 챙겨오도록 하겠습니다.” (솜옷! 솜옷! 맞다, 이불도 챙기자.)

“내 야명주를 챙겨 줄 것이니 아까 내어준 비급이라도 들고 오도록 하여라.”

“예, 사부님.” (야명주! 사부, 야명주도 있어? 그거 비싼 거라던데!)

대답을 마친 설연은 탁자 위의 찻잔과 주담자를 챙겨 부엌에 가져다 두고는 급히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 비급과 솜옷을 챙기고, 옷장 맨 밑 칸에서 이불을 꺼내 들더니 요강까지 챙겨 들고 설관의 방으로 돌아왔다. 설연이 요강을 들고 온 것을 본 양현이 물었다.

“그건 웬 것이냐?”

“그, 그것이 안에 있다 보면 소변을 해결하기가···” (아이, 부끄럽게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척 보면 알아야지.)

“그래, 이 사부가 생각이 짧았구나. 아무래도 이 사부가 한두 시진 안으로 돌아오기는 힘들 것인데 말이야, 하하. 자, 사부가 침상을 들어 올려줄 테니 어서 들어가거라, 물건들은 이 사부가 내려주마. 안에 사다리가 있으니 나중에는 너 혼자서라도 나올 수 있을 것이야. 자, 여기 야명주다.”

“예, 사부님.” (이야, 처음 본다. 이게 야명주구나. 신기하네, 빛이나.)

설연이 들고 온 짐들을 한편에 내려놓고 양현이 내어준 작은 야명주를 받아 들자, 양현은 설연이 들어갈 수 있도록 침상과 덮개를 허공섭물로 들어 올려 주었다.

한 손에 야명주를 든 설연은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타고 구덩이 안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바닥에 내려선 설연은 야명주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좌우 여섯 자에 세로는 여덟 자가 넘는 구덩이는 체구가 작은 설연에게는 상당히 넓어 보였다.

(우와, 한 시진 만에 이렇게나 깊고 넓게 팠단 말이야?)

“어떠냐? 바닥에 물이 고이지는 않았느냐?”

“예, 사부님. 어찌된 영문인지 습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게 땅 속이라 습할 줄 알았는데 뽀송뽀송하네.)

“하하, 아까 이 사부가 삼매진화로 바닥과 벽을 말려 두었느니라.”

“아!” (삼매진화! 그거 물기를 말릴 때도 쓰는 거구나. 히히, 좋은 거 알았네.)

“자, 이제 짐을 내려줄 테니 잘 받도록 하여라.”

“예, 사부님.” (요강 안 깨지게 조심해, 사부.)


양현은 설연이 챙겨 온 짐을 내려주고는 덮개를 덮고 침상을 제 자리에 내려놓았다.

“사부는 이제부터 객점으로 가서 위일구 일당을 상대할 것이니 연이 너는 사부가 돌아올 때까지 그 안에 있거라.”

“예, 사부님. 연이 걱정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사부, 어떤 놈들인지 꼭 밝혀내야 해.)

“그래, 그럼, 내 다녀오마.”

‘혹시 누가 들어오더라도 등불을 끄고 화로를 치워 둬야 이 방에 사람이 없었다고 여길 테지. 연이야 누가 오면 자연스레 기척을 느끼게 될 테니 조용히 있으라고 미리 얘기할 필요도 없을 테고. 그나저나 복면을 해야 하는 것인가? 오랜만에 이런 일을 하려니 헷갈리네. 뭐, 이제 그자들에게 굳이 내 정체를 숨길 이유는 없을 것이니 그냥 가도 될 테지.’

등불을 끄고 화로를 집어 든 양현은 아침부터 입고 있던 흑의경장 차림새 그대로 신을 신고 방을 나섰다.


설연은 사다리 옆으로 요강을 옮겨 놓고, 그 반대편 비스듬한 벽 아래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솜옷을 걸친 후라 춥지는 않았으나, 흙바닥에 그냥 앉기는 싫었던 것이다. 나중에 이불을 빠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 이불은 따로 놔뒀다가 날이 풀린 다음에 사부에게 부탁해서 빨 생각이었다.

야명주를 발치에 던져놓고 이불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설연은 잠깐 사이에 이렇게 아늑하고 멋진 은신처를 만들어낸 양현에게 감탄했다.

“사부가 손재주가 있긴 한가 보네. 잠깐 사이에 이렇게 멋진 은신처를 만들어 내다니 말이야. 나중에 집을 수선하거나 할 일이 있으면 전부 사부한테 부탁하면 되겠다. 헤헤헤”

이때의 설연의 다짐으로 인해 양현은 후일 집터 정비, 연무장 조성, 변소 신축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사에 동원되어야만 했으니, 그에게는 참으로 안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흙구덩이를 파서 이렇게 깔끔하게 마감까지 하고 습기까지 제거해놓다니, 사부가 의외로 꼼꼼한 면이 있단 말이야.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직까지는 모든 남자를 비교하는 기준을 아버지로 삼고 있는 설연이었다.

“그럼 어디 비급을 좀 읽어 볼까나.”

이불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설연은 비급을 양 다리 위에 펼쳐 올리고 야명주를 집어 들어 비급의 첫 장을 잃기 시작했다.

‘무릇 단(端)이라 함은, 끝과 한계(限界)를 의미하니 무(武)의 끝을 보고자 하는 나의 욕심에 이 무공을 단공(端功)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단(端)이라 함은 처음과 시초(始初)를 의미하는 것이니 단공은 무(武)의 처음과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는 법도를 의미할 것이며, 단(端)이라 함은 모든 것의 까닭과 원인을 뜻함이니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


양현은 들고 나온 화로를 부엌간 옆에 내려놓으며 설연과 대화를 할 때마다 문득문득 느껴지던 어색함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가만 보니 연이는 항상 자신을 말할 때, 나나 저로 칭하지 않고 이름으로 칭하는구나, 어쩌다 그런 말버릇이 들었는고. 아니야, 원래 계집아이들 말투가 전부 그런 것일 수도 있음이야. 그러고 보니 내가 그 긴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소소 이외에는 어린 계집아이들을 가까이 접해본 적이 거의 없구나, 허허허.’

수십 년 동안 지방 현의 행정을 보던 현승(懸丞)으로 살았고, 자식도 없이 제자도 사내인 손건 하나 만을 키운 것이 전부인 양현은 자신이 이백 년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여자아이를 접한 적이 거의 없었음을 깨달았다. 제자 손건이 가끔 딸 소소를 데리고 자신의 거처를 찾았을 때와 오 년 전에 설연을 치료하던 한 달 남짓한 기간 외에는 여자아이는 가까이 대한 적도 없었고, 또 기르거나 가르쳐 본 적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내가 연이의 자질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구나. 계집아이인 연이에게 필요한 것들 중에는 학문과 무공, 강호 경험 외에도 내가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이 많을 것인데···’

사내아이와 여자아이를 키우는 것이 다르고 또 많은 면에서 가르쳐야 할 것들도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 양현이었다.

‘크, 그렇게 순하던 건이 녀석이 사춘기를 겪을 때 했던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오륙 년 후에 연이가 사춘기를 맞을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구나. 그것도 연이는 건이와 달리 계집아이가 아닌가, 허허.’

나이 예순 다섯에 현승 자리에서 물러나 상처(喪妻)까지 하고 난 후, 보통 사람들은 벌써 죽었을 여든이라는 나이에 강호에 첫발을 디뎠던 양현이었다. 그 덕에 처음으로 제자로 받아들인 손건을 기르고 가르치는 데에도 양현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제는 열 살내기 어린 여자아이를 기르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양현은 순간 막막해졌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계집아이가 적당히 크면 월경을 하기 시작하면서 사내와 교접하여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몸이 변한다는 것뿐, 그 밖에 여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 당장 연이를 데리고 아미산 거처로 들어가 십 수 년 간 학문을 가르치고 무공을 수련시킨다면, 여자로 살아가기 위해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을 연이가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겠구나. 그것도 저리 미색이 출중한 연이가 여자로서 배우고 갖춰야 할 덕목을 못 배운다면, 허허, 이거 달리 방편을 마련하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연이에게 큰 죄를 지을 수도 있겠구나. 허, 이것 참 어떡하면 좋을꼬.’

그렇게 화로를 내려놓은 자리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생각을 이어가던 양현은, 자신이 위일구 일당들을 잡으러 나선 길이라는 사실은 어느새 까맣게 잊은 채, 아예 부엌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설연을 가르칠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강호에서 은퇴한 뒤로 백수십 년 동안 단공을 연구하면서 무엇 하나에 생각이 미치면 다른 것들은 돌아보지 못하는, 또 그 긴 세월을 급할 것 없다는 식으로 유유자적 살아오다 보니 생긴, 양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버릇이었다.

‘흠, 십 수 년 간 겪어본 무림의 여인네들을 보면 확실히 여염집 규수들과는 달리 자유분방하고 사내 같은 면이 없지 않았지. 그렇다고 해도 여인네들만의 특유한 무엇이 분명히 있었음이야. 몸가짐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야. 그리고 그것들은 여인네들끼리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들임이 분명할 게야. 이것 참, 내가 그것들을 배워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천상 연이한테 나 외에 다른 여자 스승을 함께 붙여 주어야 하나? 아니야, 그럴 순 없지, 학문과 무공은 내가 가르쳐야지. 저토록 뛰어난 연이를 다른 누구와 함께 가르칠 수는 없지, 암 없고말고. 그럼 대체 누가 있어 여아에게 필요한 것들만 연이에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극상의 자질에 초감각까지 가진 설연을 제자로 독점하고 싶은 욕심과, 또 여자로서 배워야 할 것들은 빠트리지 않고 설연에게 가르치고 싶은 욕심에 양현의 고민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여아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가르친다. 여아들에게 필요한 것만, 여아들, 필요한 것, 여아, 여자, 여자들, 여자들만 모인 곳, 여자들만 모인 곳! 무산 신녀궁? 보타암? 아냐, 그 둘은 멀기도 하거니와 무림 문파이니 연이의 자질을 보고 나면 어떻게든 연이를 제자로 삼아 무공을 전수하려고 난리를 칠 것이야. 그런 곳에 연이를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럼 또 여자들이 많은 곳이 어디? 황궁? 흠, 지금 원 황실은 좀, 그리고 연이가 황실의 일원도 아니니 황실에 넣어 봐야 기껏 방중술 같은 것만 배울 게고. 또 연이 정도의 미색에 황제가 연이를 가만히 놔둘 리도 없고 말이지. 그럼 또 여자들이 많은 곳이 어디지? 기루? 에이, 무슨 생각을, 연이를 어찌 기루에. 아니야, 아니다! 기루다! 홍루, 홍루야!’

홍루(紅樓)에 생각이 미친 양현은 탁하고 무릎을 쳤다.

홍루(紅樓)와 청루(靑樓) 둘 모두 기루(妓樓)로 취급되고는 있었으나, 홍루는 몸을 파는 기녀들이 대부분인 청루와는 달리, 주로 기예(技藝)가 출중하고 미색(美色)이 뛰어난 여인들이 시(詩), 서(書), 화(畵), 음(音)과 가무(歌舞)를 파는 곳이었다. 양현도 관인이었을 때나 강호 생활을 할 때에 홍루에는 몇 번 걸음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 연이를 홍루에 맡겨서 여자가 갖춰야 할 소양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야. 전에 홍루에 몇 번 갔을 때, 그 곳에서 기품(氣品)이 있고 재지(才智)가 뛰어난 재녀(才女)들을 내 여럿 보았지 않은가. 그리고 그토록 뛰어나 보이던 재녀들이 자기들 입으로 자신들은 수준이 낮은 편이고 더 빼어난 재녀들이 수두룩하다고 하질 않았던가 말이야. 거기다가 내가 연이 옆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무공과 학문을 가르친다면 만에 하나라도 연이에게 불상사가 벌어질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래, 홍루다, 홍루야! 하하하.’


그렇게 설연을 홍루에 맡기기로 정하고 나서야 양현은 정신을 차렸다.

“아니, 어느새 시간이 반 시진이나 지났나. 서둘러야겠구나.”

고개를 들어 별자리를 확인하니 시각이 유시 말에서 술시 초(19시)로 넘어가고 있었다. 양현은 자신이 방에서 나온 지 벌써 반 시진이 넘었음을 깨닫고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엉덩이를 툭툭 털고 몸을 날렸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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