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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르미의 서재입니다.

금발마녀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녀르미
그림/삽화
Copilot GPT
작품등록일 :
2024.02.19 17:43
최근연재일 :
2024.05.06 20:1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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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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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3장. 부정만리.

DUMMY

3장. 부정만리(父情萬里)


“연아, 연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연이는 엄마 같은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야, 아빠”

“현모양처? 연이는 왜 현모양처가 되고 싶은데?”

“연이는 나중에 아빠한테 시집갈 거니깐 아빠가 좋아하는 엄마처럼 현모양처가 되야지.”

“하하하, 커서 아빠한테 시집 올 거야?”

“그러엄, 당연하지. 연이는 세상에서 아빠가 쩨에일 좋으니까 아빠한테 시집가야 해. 헤헤헤.”

객점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이제는 양현의 방이 되어버린 설관의 방 원탁에 마주앉아 차를 마셨다. 양현은 이번에도 일각이 안되어 화로에 숯을 채워 들고 들어왔고, 양현이 숯을 채워온 화로 위에 설연이 걸쇠를 걸고 주담자를 얹어 물을 끓이고 차를 준비했다.




“사부님, 제자가 사부님께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영감탱이, 이제 정체를 좀 밝혀 줘야겠어.)

“그래, 물어보거라.”

“좀 전에 객점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남서쪽으로 사백여 리 떨어진 곳에 거처가 있다고 하시었으니, 사부님의 거처는 아미산 중턱에 있는 것으로 보이옵니다. 혹 저희 사문이 아미파인지요?” (아미산에 산다고 다 아미파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아미파가 제일 유명하잖아? 맞다, 사부는 남자에다가 중도 아니구나. 하긴 저 변태색마 영감탱이가 아미파일리가 없지. 쳇, 실수했네.)

“하하, 사부의 거처가 아미산 중턱에 있는 것은 맞다. 방향과 거리만으로도 이 사부의 거처가 아미산에 있음을 짐작하다니 네 지혜가 보통이 아니구나. 허나, 네 사문은 아미파가 아니다. 아니, 이 사부와 너는 사문이 없다.”

“예? 사문이 없다니요?” (잉? 이건 또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사문이 없다니? 그럼 난 사문도 없는 영감탱이의 제자인거야? 켁, 그럼 강호에 나가서 문파 위세도 못 누리는 거야? 그런 거야?)

사문이 없다는 양현의 말에 설연은 대경실색했다. 아무리 임시로 맺은 사제관계라고는 하지만, 사문이 없다는 말은 그녀가 기댈 사문이 없다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부가 네게 해주지 못한 말이 많구나.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오늘은 이 사부의 내력을 네게 들려주마.”

“예, 사부님.” (빨리 불어봐. 대체 사문이 없다니 뭔 말이야?)

“이 사부는 원래 무림인이 아니라, 송(宋)의 관리, 그것도 무관(武官)이 아니라 문관(文官)이었다.”

“예? 사부님께서 문관이셨다구요? 하온데 어찌 그리 고강한 무공을?” (잉? 영감탱이 원래 서생이었어? 그럼 무공은 어찌 배운 거야?)

“하하, 이제부터 내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예, 사부님” (누가 늙은이 아니랄까 봐 자꾸 뜸을 들이고 지랄이야. 얼른 요점만 말해, 이 영감탱이야.)

“가만 보자. 이 사부가 무공에 처음 입문한 때가 송 태조, 건륭(建隆) 원년(960년)이었으니 햇수로는 벌써 삼백 년이 조금 넘었구나.”

“예? 삼백 년이요?” (허걱, 삼백 년! 이 영감탱이 진짜 괴물인 거 아냐? 아빠한테 영감탱이가 백 살도 더 먹었다는 얘기는 듣긴 했지만 사람이 어떻게 삼백 년을 살아? 글구 생긴 것도 아빠보다 젊게 생겼는데.)

양현의 말이 계속될수록 설연은 놀라움과 호기심을 금치 못했다. 사문도 없고, 문관이 무공을 배워 삼백 년이 넘게 살았다니, 설연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하하, 어쩌다 보니 이 사부가 조금 오래 살았다. 중간에 백여 년은 사정이 있어 헛되이 숫자만 늘은 것이니 정확히는 이백 년이 조금 더 되는 세월을 산 것이지만 그래도 오래 살긴 했지. 연이 너도 이 사부가 알려주는 공부들을 열심히 배워 대성하고 나면 이 사부처럼 오래 살게 될 것이니라.”

“하오나, 사람이 어찌 그리 오랜 세월을 살 수 있는 것인지 연이는 이해가 가질 않사옵니다. 사부님께서는 사실 신선이 아니신지요?” (정체를 밝혀! 영감탱이 당신, 사람 아니지? 그런데 연이도 오래 산다고?)

“하하하, 어찌 이 사부를 신선 나부랭이와 비교를 하겠느냐? 이 사부는 그런 것이 아니다. 흠, 네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 이야기부터 해야 하겠구나.”

“혼원일기공이요?” (내공심법이지? 그렇지?)

현재 최고 관심사가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배우는 것이었던 설연은 혼원일기공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며 양현에게 되물었다.

“이 사부가 나이 열여덟에 얻은 공부(工夫)이니라. 천지(天地) 간의 이치와 조화를 이해하고, 사람의 몸에 그 기운을 받아들여 종국에는 사람의 틀까지 벗을 수 있게 해주는 공부지.”

“사람의 틀을 벗는다는 말씀이 왠지 사부님께서 그리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옵니다.” (그 혼원일기공이라는 게 영감탱이 같이 삼백 년이나 살게 해주는 거야? 연이도 그걸 배우겠구나, 히히히.)

“하하, 그렇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사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지고(至高)한 공부지. 내가 이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고 또 강호에서 행세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혼원일기공을 대성할 때까지 익힌 덕분이니라.”

“혼원일기공이 정말 대단한 신공인가 보옵니다.” (영감탱이! 연이한테도 꼭 가르쳐 줘야 해, 히히히)

“내가 방금 전에 사문이 없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예, 사부님.” (진짜! 사문도 없는데 영감탱이는 어디서 그런 신공을 배운 거야. 궁금해 죽겠네.)

“그것은 이 사부가 혼원일기공의 비급을 서방에서 돈을 주고 사서 얻은 후에 혼자서 비급을 보고 익혀낸 것이기 때문이고, 아직 내가 문파를 개파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아!” (허걱, 전에 잡서에서 보니 혼자서 비급만 가지고 무공을 익히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던데. 말이 안되잖아. 이 영감탱이 혹시 사기치는 거 아냐? 아! 진짜, 여태껏 이 사기꾼 영감탱이한테 속은 거야? 혼원일기공? 이름만 그럴 듯해가지고. 아씨, 짜증나. 삼매진화를 하는 것 같아서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배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속은 거네.)

서방(書房)에서 돈을 주고 산 비급에 적힌 무공을 사부도 없이 혼자서 익혀내고, 그 덕에 삼백 년을 살았다는 양현의 말은, 가끔 저잣거리에서 사기를 치는 야바위꾼들이 하는 말들과도 일맥상통했기에 설연은 이제 양현이 사기를 치고 있다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혼원일기공의 비급을 얻은 것은 어찌 보면 우연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야.”

“사부님께서 그리 대단한 신공을 얻으신 일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하늘의 인연이 사부님께 이어진 것이겠지요.” (흥! 사기꾼이 우연이네 뭐네 말만 그럴 듯하게 하고 있네. 어디 다음엔 뭐라 말할 건데?)

“네가 사부의 기분을 띄워주는 재주가 대단하구나, 하하. 그래, 네 말마따나 천연(天緣)이라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늘의 인연이라는 말이 나오자, 양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보니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듯하기도 했지만, 양현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자신이 양현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는 설연은 양현이 둘러댈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썩을 영감탱이, 이제 할 말이 궁한 모양이네. 어디 뭐라고 하나 좀더 기다려 보자.)

입을 다문 양현을 속으로 욕하며 계속 구시렁대면서도 설연은 가만히 자기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려 주었다. 양현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부가 과거를 치기 위해 한참 공부에 열중하던 열여덟 나이 때였느니라. 그러고 보니 그 때도 정월 초였구나. 일전에 서방(書房)에 주문해 두었던 서책 몇 권이 들어왔다는 연통을 아침 나절에 전해 듣고는 부랴부랴 서방으로 달려갔더니 못 보던 노인장 한 분이 내가 미리 주문해놨던 그 서책들이라며 책보에 싼 꾸러미를 하나 내주시더구나. 평소 서방 주인은 서책만 내어주고는 했었는데 그 날 따라 책보에 싸주기까지 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만, 못 보던 노인장이 새로 와서 그런가 하고 말았단다.”

“그리구요?” (흥! 그래서 어찌 됐다는 건데? 말해봐, 말해봐!)

“당시 이 사부는 처음 보는 서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서책광이었던지라, 한시라도 빨리 그 서책들을 읽고 싶은 욕심에 급히 셈만 치르고는 집에 돌아와 책보를 풀어 보았단다. 그런데 왠 걸, 내가 주문했던 서책이 아니라 표지에 제목도 적히지 않은 고서만 다섯 권이 있더구나.”

“서방에서 미리 책보를 풀어보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흥! 물건을 살 땐 꼭 미리 물건을 확인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구, 이야기를 꾸며 내더라도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지. 바보! 사기꾼 주제에 그런 것도 모르냐.)

자신이 장을 볼 때의 경험을 되살려 본 설연은, 물건도 확인하지 않고 셈을 치렀다고 말하는 양현의 바보같음을 내심 비웃었다.

“맞다. 이미 수차 왕래하며 서책을 샀던 서방이었던지라 당연히 내가 주문했던 서책일 것이라 믿었던 게지.”

“그럼 그 제목이 적히지 않은 고서들이 혼원일기공이 적힌 서책이었습니까?” (흥! 그 서책이 혼원일기공이라고 하는 얘기해야 이야기가 구색이 맞지, 분명히.)

“그래, 그 고서들이 혼원일기공의 비급들이었고, 제목도 없는 고서에 대한 호기심에 못 이겨 그 비급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이 사부가 혼원일기공을 처음 접한 것이야.”

“서책광이셨다니 오죽하셨겠습니까. 제자, 상상이 되옵니다.” (그래, 사기꾼 영감탱이 머리에서 나오는 말이 뻔하지. 풋, 그 정도는 나도 지어낼 수 있겠다.)

양현의 이야기가 너무 뻔하다고 여긴 설연은 점점 양현의 이야기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하하하, 그래그래. 꽤 오래 되어 보이고 심지어 표지에 제목도 없이 각 권에 일부터 오까지 숫자만 하나씩 적혀 있던 고서들에 대한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었지. 그리고 그 호기심에 못 이겨 표지에 일 자가 써진 고서의 첫 장을 읽기 시작한 뒤로는 시간이 어찌 가는 줄도 모른 채 다섯 권의 비급들을 무려 일곱 번을 내리 읽고 나서 끝내 기절하고 말았단다.”

“예? 대체 얼마나 오래 비급들을 읽으셨길래 기절까지 하신 것입니까?” (뭐야? 어디서 기절씩이나 했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그래? 흥! 누가 믿어 줄까봐.)

설연은 가뜩이나 양현이 사기를 치고 있다고 여기는 터라, 비급을 읽다가 기절까지 했다는 양현의 말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나중에 어머님께 여쭸더니, 무려 칠 주야를 내리 그 비급들만 읽었고, 기절한 뒤로도 이틀이나 죽은 듯이 자더라고 하시더구나. 마치 그 비급들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심지어 몸에 손을 대고 흔들어도 아랑곳 하지 않았고, 가끔 비급을 한 손에 든 채로 변소에 다녀올 때를 빼고는 칠 주야 내내 서상(書床) 앞에 앉아서 그 비급들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하시더구나.”

“예? 사람이 칠 주야를 내리 굶고 잠을 자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런 일이?” (일곱 밤이나 지나도록 안 먹고, 안 잤다고? 그렇게 안 먹고 안 자면 죽어, 이 영감탱이야. 진짜 거짓말도 좀 정도껏 하지. 이건 다섯 살짜리 애도 안믿겠다.)

“하하, 칠 주야를 내리 굶지는 않았단다. 내가 비급을 한 손에 들고 변소에 다녀오는 것을 보신 내 어머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겨다 서상 한쪽에 내려 놓으니 내가 알아서 먹고 마시더라고 하시더구나. 눈은 비급에 고정한 채로 계속 그 비급들을 읽으면서 말이다. 하하하.”

“사조모께서 참으로 지혜가 깊은 분이셨던 듯합니다.” (흥! 그렇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군, 아주 맹탕 사기꾼은 아니었나 보네.)

“그래, 참으로 현숙하고 어진 분이셨지.”

“연이도 장래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꿈이옵니다.” (아! 갑자기 엄마 보고 싶다, 엄마!)

“하하하, 네 꿈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라고?”

“연이가 네 살 때부터 가져온 꿈이옵니다.” (왜 웃어? 써글 사기꾼 영감탱이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랑은 달라, 진짜라구.)

자신의 꿈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양현이 웃음을 터트리자 설연은 기분이 굉장히 나빠졌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와 약속한 자신의 소중한 꿈을 기껏해야 사기꾼에 불과한 양현이 무시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그래, 알았다. 일단 이 사부가 혼원일기공을 얻은 이야기를 마저 하자구나.”

“예, 사부님. 경청하겠사옵니다.” (계속해, 영감탱이. 그래서 그 담엔 또 뭐라고 지어냈냐구? )

“그렇게 뜻하지 않게 혼원일기공의 비급들을 접하게 된 나는 잠에서 깬 다음날 몸을 추스르자마자 다시 혼원일기공의 비급들을 책보에 싸들고 서둘러 서방으로 갔단다. 그 비급을 내게 준 노인장을 찾아간 것이지.”

“왠지 그 분은 못 만나셨을 듯합니다만?” (흥! 보나마나 못만났다고 하겠지. 이야기가 뻔해도 너무 뻔하다구, 영감탱이.)

“그래, 맞다. 서방에 가서 그를 찾았더니 서방 주인이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하더구나. 심지어 내가 주문했던 서책은 아직 들어오지도 않았고 내가 서방에 왔었다고 하는 열흘 전에도 그 노인장이 아니라 서방 주인이 자리를 지켰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었지.”

“참으로 기묘한 일이로군요. 그래서 사부님께서는 어찌하셨습니까?” (역시 연이 짐작이 맞았네, 히히. 그래서? 그 담엔 어쨌는데?)

“그 비급들을 서방 주인에게 내밀었단다. 원래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게지.”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열흘 전에 셈을 치르셨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그 때 돈 냈잖아. 어찌 됐든 셈을 치렀으면 내 건데, 뭐 하러 돌려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주지.)

수 년째 직접 장을 보고 살림을 해온 터라 벌써 오래전부터 돈과 물건에 관해서는 자신만의 투철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는 설연이었다.

“하하하, 연이 네가 그 때 그 서방 주인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예? 그럼?” (당연하지. 돈 냈으면 내 거라구. 그런데 서방주인도 그 얘기를 했다고? 이상하네. 이거 이 영감탱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거야?)

“나는 그 비급들이 내가 주문한 서책이 아니었기에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 비급들을 서방 주인에게 내놓고는 이 서방에서 잘못 판 것들이니 열흘 전에 셈을 치른 은자를 돌려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서방 주인이 말하기를, 자기는 이런 고서들은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서방의 서책 장부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니 자기 물건이 아니라서 받을 수 없고, 또 누가 되었든 간에 서책을 넘겨준 사람한테 내가 셈을 치른 게 맞다면 결국 그 비급들은 내 것임이 분명하니 나더러 그냥 가져가라고 하더란 말이지.”

“호호호, 서방 주인이 꽤 고지식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응? 진짜 그랬다구? 뭐야? 이야기가 진짜라는 거야?)

“아니다. 그 때의 서방 주인은 진짜 서방 주인이 아니었다.”

“예? 그럼?” (엥? 뭐야? 무슨 소리야? 이야기가 이상해지잖아. 설마 지금하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얘기야?)

계속되는 양현의 이야기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자, 설연은 왠지 양현의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도 그 일이 있은 뒤로 두 달이 더 지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비급은 돌려주지도 못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정확히 두 달 뒤에 서방에서 또 연통이 왔더구나. 전에 내가 주문했던 서책이 들어왔다고 말이다.”

“그래서요? 또 서방에 가신 건가요?” (또 주문했던 서책이네. 이번엔 또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랬지. 연통을 받자마자 서방으로 갔지. 그런데 서방 주인이 이번에는 진짜 내가 전에 주문했던 서책들을 내놓으면서 처가(妻家)에 큰 일이 있어 지난 석 달 동안 서방을 닫아 두었던 터라 서책을 늦게 전해주게 되었다고 송구하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처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연통을 넣은 것이니 해량해 달라고 하면서 말이야.”

“헉! 그럼 두 달 전의 서방 주인은?” (그래서 서방 주인까지 가짜였다는 말이구나.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래, 결국 내가 비급들을 가지고 다시 서방으로 갔을 때 만났던 서방 주인은 진짜 서방 주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야. 아마도 처음에 그 비급들을 내게 준 그 노인장과 같은 사람이거나 그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을 게야.”

“아! 그럼 사부님께 비급을 전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거 진짜 그런 거 같은데. 그런데 이 영감탱이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런 비급을 주고 갔을까?)

“그래, 나도 아마 그랬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다만, 사부가 비급들을 얻은 뒤로 지금까지도 그 때 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또 왜 나에게 비급들을 전해 주었는지 알아내지 못하고 있단다. 사부가 후일 강호에 나와 혼원일기공에 대해 십수 년간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까지 해보았다만, 어디에서도 혼원일기공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정말 꿈 같은 이야기네요. 신비한 사람들이 신분을 가장해서까지 사부님께 혼원일기공의 비급을 전해 주고 사라지다니요. 그 때 비급을 전해주신 그 노인 분이 혹시 신선이셨던 게 아니었을까요?” (신기하긴 하네. 근데 설마 진짜로 신선이 주고 간 건 아니겠지?)

“하하하, 신선도 아니었다. 중원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혼원일기공에 대해 아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이 사부가 선계에까지 건너가서 확인한 일이니라.”

“예? 사부님께서 선계에 가셨었다구요?” (이 영감탱이가 어디서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어. 선계에 갔었다고?)

“그렇다. 오 년 전에 내가 이 집에 묵었을 때가 선계에서 막 돌아온 직후였느니라. 선계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그만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여기 시간으로 백여 년이 지나 버렸더구나. 해서 백여 년 동안 바뀐 세상에 적응도 하고, 당시 너의 병도 고쳐줄 겸 해서 네 아비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이 집에 잠시 묵었던 것이지.”

“아! 그런데 선계에서 나오시는 길에 백 년이 넘게 걸리셨다니 제자는 신기하기만 하옵니다.” (거짓말! 뻥도 적당히 쳐야지. 길에서 백년을 보냈다는 게 말이 돼?)

“백 년을 길을 헤맨 것이 아니라 길을 잘못 들어 현세에 도착할 때의 시간축이 달라져서 그런 것이다만, 어려운 이야기이니 자세한 건 이야기 해도 네가 모를 것이야.”

“예, 사부님”(에효, 이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설마 진짜 선계에 갔다 온 거야?)

“혼원일기공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야기가 엉뚱한 데서 길어졌다만, 기왕에 선계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마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구나. 연이 네게 사형이 하나 있다.”

“사형이요?” (연이가 첫 제자는 아니라는 소리네.)

“그래, 내 나이 구십이 되던 해에 얻은 첫 제자로, 손건(孫乾)이라는 녀석인데, 이 녀석이 내가 선계에 간 사이에 어디로 가버렸는지 소식을 알 수가 없구나. 내가 선계에 들어가기 훨씬 전에 혼원일기공을 대성한데다가 네 번의 환골탈태까지 한 아이라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아직 살아있을 텐데 말이야.”

“와! 정말 대단한 사형이네요.” (제자가 네 번이나 환골탈태를 했다고? 우와! 장난 아니다. 그럼 이 영감탱이는 더 대단할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럼 연이가 이 영감탱이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얘기야? 선계에도 진짜 갔던 모양이네. 이 영감탱이 사기꾼 아닌거야? 그럼 혼원일기공이라는 것도 진짠가 보네. 에헤헤, 진짜였구나.)

설연은 손건이라는 사형에 대한 얘기를 듣는 순간, 양현이 그저 예상 외로 뛰어난 고수인 정도가 아니라 진짜 대단한 고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 혼원일기공에 관한 이야기도 진짜일 것 같다고 여기게 되었다.

“오 년 전에 너희 집을 나선 이후로 근 오 년 동안 전 중원을 뒤져봤는데도 결국엔 그 녀석을 못 찾고 말았는데, 더 안타깝게도 그 녀석 외동딸의 후손들까지 대가 다 끊겼더구나, 쯧쯧.”

“저런, 어쩌다가 그런 일이?” (뭐야? 후손들은 왜 다 죽었어?)

“다들 무가의 자식들이다 보니 몇몇은 젊어서 자손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더구나. 사손들이 속해 있던 가문에 확인을 해보니 건이 녀석 삼대 손까지는 어찌어찌 이어졌던데 말이야.”

사손들의 대가 끊겼다는 말을 하고는 가슴이 답답한지 양현은 찻잔을 들어 쭉 들이켰고, 그 모습을 본 설연은 문득 양현의 자손들은 없는지 궁금해졌다.

“사부님, 그럼 사부님의 자손들은 혹시?” (영감탱이는 자식 없나?)

“내가 자식 복이 없더구나. 스물다섯에 성혼을 했는데 끝내 자식을 못 보았으니.”

“아! 제자가 괜히. 송구하옵니다, 사부님.” (에고, 실수다. 말 잘못했네.)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고 하면서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양현을 본 설연은 자신이 그에게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현이 다시 한 동안 침묵하자, 설연은 가만히 눈치를 살피다가 양현의 찻잔이 빈 것을 보고는 다시 찻물을 부어주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양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연이 네가 나중에 강호에 나간 후에 혹시라도 사형의 소식을 듣거든 꼭 이 사부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사부님. 제자 각골명심하겠사옵니다.” (흠, 이 영감탱이가 사형이란 사람한테 정이 많이 들었나 보구나.)

“그래그래.”

“사부님께서는 문관이셨다고 하셨었는데, 그럼 강호에서는 전혀 활동을 안 하신 건가요?”

“아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나이 팔순이 다 되서 혼원일기공을 대성하고 나니 내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혼원일기공의 출처에 관해 수소문도 해볼 겸 강호에 나가 십사 년 정도 활동을 했었지. 건이도 그 때 제자로 거두었고 말이다.”

“아!” (뭐야? 팔순? 혼원일기공이라는 걸 대성하는데 육십 년씩이나 걸린 거야? 헉! 연이도 그렇게 오래 걸리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관부에서 관인으로 수십 년 동안 생활하다 보니 강호의 관습을 몰라 처음 강호에 나가서는 고생도 꽤 많이 했지. 허나, 십 년쯤 지나고 나니 강호의 동도들이 천무황(天武皇)이라는 거창한 무명(武名)도 지어주고 어딜 가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었단다.”

“처, 처, 천무황!”

천무황이라는 무명을 양현이 언급하자, 설연은 깜짝 놀라 크게 외쳤다.

“음? 뭘 그리 놀라느냐?”

“그, 그, 그, 그것이.” (설마, 설마, 말도 안돼. 저 변태색마 영감탱이가 어떻게 천무황일 수가 있어.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말도 안돼.)

“허허허, 이것 참.”

설연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천무황이라는 자신의 무명을 외치고는 넋을 잃어 버리자, 양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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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마녀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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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비정기 연재입니다. 24.03.28 21 0 -
35 10장. 화월루주 24.05.06 4 0 17쪽
34 10장. 화월루주 24.05.01 9 0 22쪽
33 9장. 인과응보 24.04.29 15 0 20쪽
32 9장. 인과응보 24.04.26 13 0 16쪽
31 9장. 인과응보 24.04.24 16 0 19쪽
30 9장. 인과응보 24.04.22 13 0 17쪽
29 9장. 인과응보 24.04.19 19 0 21쪽
28 9장. 인과응보 24.04.17 14 0 19쪽
27 9장. 인과응보 24.04.15 21 1 18쪽
26 8장. 내공입문 24.04.12 25 1 20쪽
25 8장. 내공입문 24.04.10 21 1 15쪽
24 8장. 내공입문 24.04.08 22 1 16쪽
23 8장. 내공입문 24.04.05 27 0 14쪽
22 8장. 내공입문. 24.04.03 25 1 17쪽
21 8장. 내공입문. 24.04.01 31 0 17쪽
20 8장. 내공입문. 24.03.29 29 0 16쪽
19 8장. 내공입문. 24.03.27 33 0 15쪽
18 7장. 단서포착. 24.03.25 27 0 14쪽
17 7장. 단서포착 24.03.22 30 0 13쪽
16 7장. 단서포착 24.03.20 32 0 13쪽
15 6장. 금선탈각. 24.03.18 32 0 18쪽
14 6장. 금선탈각 24.03.15 38 0 17쪽
13 5장. 만찬전후. 24.03.13 34 0 36쪽
12 4장. 내공심법. 24.03.11 41 0 22쪽
11 4장. 내공심법. 24.03.08 39 0 15쪽
10 3장. 부정만리. 24.03.06 39 0 13쪽
» 3장. 부정만리. 24.03.04 41 0 23쪽
8 2장. 소리장도. 24.03.01 48 0 26쪽
7 2장. 소리장도. 24.02.28 50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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