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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르미의 서재입니다.

금발마녀전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녀르미
그림/삽화
Copilot GPT
작품등록일 :
2024.02.19 17:43
최근연재일 :
2024.05.06 20:15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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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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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2장. 소리장도.

DUMMY

설연은 어제 저녁, 양현이 자신을 추궁과혈할 때부터 그가 어린 여아들을 노리는 변태색마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설연의 이런 착각은 그녀의 아버지인 설관이 그녀에게 읽도록 했던 무림에 관한 잡서(雜書)들 때문이었다.

설관이 몸이 아파 미처 그 내용을 다 확인하지 못한 채로 설연에게 잡서 몇 권을 넘겨준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잡서들 중 일부에 실려있던 강호의 색마(色魔)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은 그녀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강호의 색마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지금 양현을 변태색마로 오인하고 있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왜 그러느냐?”

“욕간까지 거리가 꽤 되어 연이가 거기까지 물을 옮기다 보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니 물이 다 식을 듯하여 그렇사옵니다.” (저 많은 물을 욕간까지 어떻게 옮겨! 힘들어, 안 해! 아니 그리고 누구 좋으라고 수욕을 해? 안해, 못해!)

몸 안에 사 갑자 기운을 가진 설연이 힘이 없어 못한다는 말을 하자 양현은 의아해졌다.

‘전신에 퍼져 있다고는 하지만 사 갑자 기운이면 이 정도 물동이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거침없이 들어 올려야 정상이다. 삼매진화야 내공을 운기할 줄 모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팔다리의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하구나. 아직 힘을 제대로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런가.’

“흠, 네가 아직 어리니 그럴 듯도 싶구나. 그래, 욕간이 어디더냐? 오 년 전 거기가 맞느냐?”

“예, 저쪽, 저기 작은 창고 같은 것이 욕간이옵니다.” (아휴, 이 영감탱이가 정말 끈질기네.)

설연이 팔을 뻗어 우물에서 서쪽으로 다섯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창고 같은 건물을 가리키자, 양현은 물동이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욕간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설연은 자신은 절대로 하지 않을 힘 자랑을 하는 양현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헉, 저 큰 물동이를 그대로 들어올리다니. 어제 저녁에 화로를 들어올릴 때만 해도 만만치 않아 보였는데, 이제 보니 저 영감탱이가 힘 자랑에 맛들였구나.)

“연아, 어서 와서 욕간 문 열거라.”

“예, 사부님.” (에효, 어쩔 수 없네.)

설연은 괜히 양현에게 책을 잡힐까 싶어 얼른 뛰어가 욕간 문을 양쪽으로 열어 젖혔고, 열린 문 안으로 물동이를 들고 들어간 양현은 물동이를 욕간 한구석에 내려놓더니 다시 양손을 물동이 속에 집어 넣고 물을 더 뜨겁게 데웠다.

‘객점 주인과 숙수도 어제 저녁에 본 위일구라는 자와 같은 종류의 무공을 비슷한 경지까지 익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자들이 모두 연이와 관계가 있을 듯하니, 연이가 수욕을 마치고 나면 점심 때 연이를 데리고 같이 가서 좀 살펴봐야겠구나.’

물동이에 양손을 담근 채, 이번에는 설연을 데리고 객점에 가보기로 양현이 그렇게 마음먹고 있을 때, 설연이 말을 꺼냈다.

“이렇게 사부님께서 손수 물까지 데워 주시니 연이는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영감탱이가 정말 집요하네, 어떡하지, 도망갈 방법이 없네, 히잉.)

“흠흠, 사부가 제자 챙기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그럼 편히 씻고 나오너라. 점심은 가까운 객점에 가서 먹을 것이니 따로 준비할 것 없다.”

(큭, 연이 알몸을 미리 잘 봐두려고 수욕도 오래하라는 말이구나. 그런데 객점에 간다고?)

“예? 객점이라니요?” (설마 객점에 가서 덮치려는 거야?)

“오늘은 나가서 먹자꾸나.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네게 일러줄 것이 많으니 그리 알거라.”

(영감탱이가 아침을 굶더니, 배를 채우고 덮치려나 보다, 흑.)

“예, 사부님” (맞다, 객점에 가면 용삼 아저씨도 있고, 장 숙수 아저씨도 있으니 어찌 되겠지. 정신 바짝 차리자.)

양현이 욕간 문을 닫고 나가자, 설연은 양현의 기척에 집중하였다. 그런데 왠 일인지 양현은 설관의 방으로 가버리더니 방안에서 움직이질 않았고, 설연은 뜻밖에도 양현이 데워준 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수욕을 할 수 있었다.

(문틈으로 엿볼까 걱정했더니 아빠 방에 가만히 있네. 하긴 어차피 객점에 가서 덮치면 볼 텐데 미리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작년 가을에 아빠가 몸져누운 뒤로는 물을 긷거나 데우기도 귀찮고 해서 제대로 수욕을 했던 기억이 없는데, 이럴 땐 영감탱이가 편하네. 히히. 아! 개운해라.)

(그나저나 어떻게 손으로 물을 이렇게 뜨겁게 데우지? 신기하네. 방금 전에 영감탱이가 물을 데울 때 쓴 게 전에 잡서에서 본 삼매진화라는 건가? 참, 삼매진화를 쓸려면 내공을 운용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영감탱이도 제대로 된 내공심법이 있는 모양이네. 그럼 내공심법을 다른 사부한테 따로 배울 필요도 없잖아, 키키키.)

(영감탱이한테 내공심법을 제대로 배우고 나면 연이도 삼매진화를 쓸 수 있을 테니 한겨울에도 수욕 걱정은 없겠네. 좋아좋아, 미인은 피부관리가 생명이니 연이도 얼른 물 데우는 법을 배워야지.)

평소에는 팔다리의 근육이 불거지는 것이 두려워 물도 잘 긷지 않던 설연이, 수욕할 물을 데우기 위해 삼매진화를 배우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반 시진 후, 수욕을 마친 설연은 옷을 갖춰 입고 개운하다는 표정에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설관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사부님, 제자 연이옵니다.” (영감탱이, 밥 먹으러 가자고.)

“들어오너라.”

(영감탱이가 나오면 좀 좋아?)

양현은 막 방으로 들어오는 설연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수욕을 마친 설연의 얼굴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미색이 출중해 보였던 것이다. 밝은 데서 자세히 보니 계란형의 갸름한 턱선에 분을 바른 듯 뽀얗고 발그레 한 피부, 적당히 큰 눈 위에 자리잡은 살짝 휘어진 눈썹도 선명했고, 아담하지만 곧게 뻗은 콧날 아래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입술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지금 그대로만 자란다면 나중에는 우물(尤物) 소리를 듣게 될 것이 확실했다.

‘저런! 저 어린 나이에도 화용월태라니. 어제는 정신이 없어 연이가 그저 조금 예쁘장한 정도에 자질만 최고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미색까지 출중하구나. 연이 어미도 미색이 출중하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설연의 모습을 보고 양현이 속으로 다시 한 번 설연에 대해 감탄을 하는 동안, 양현이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을 본 설연은 내심 변태색마건 성인군자건 간에 남자는 다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영감탱이, 아예 정신줄을 놓았구만. 히히히, 역시 연이가 한 미모(美貌)하지.)

“흠흠, 가자. 가까운 객점에 가서 식사나 하자꾸나.”

“예, 사부님.” (히히, 외식이다, 외식! 얼마만의 외식이냐.)

오랜만에 외식한다는 것에 생각에 들떠, 설연은 객점에 가면 양현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둘은 객점에 가기 위해 대문을 나섰다. 어제 저녁에 만두를 샀던 객점 방향으로 길을 잡고 한참을 걸어가던 양현은 자신의 두세 걸음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자신을 뒤따라 오는 설연을 뒤돌아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연아, 사부랑 나란히 걷지 않고, 왜 뒤 따라 오는 것이냐? 어제 추궁과혈을 할 때 보니 전족(纏足)을 한 것도 아니던데 사부의 걸음을 따라오는 것이 힘들더냐?”

(영감탱이랑 나란히 걸어가는 걸 보고 사람들이 뭐라 말할지 모르니 떨어져 갈 수 밖에.)

그러나 이런 속마음과는 달리 설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성현의 도리를 얘기하고 있었다.

“옛 성현의 말씀에 이르기를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기에 사부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사옵니다.”

“허허, 그 말이 과연 그 뜻이더냐?”

“배운 것을 행하지 않으면 그 배움은 헛된 것이라 하였고, 연이가 배우길 그리 배웠으니 따를 뿐이옵니다.”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영감탱이)

“아니다. 그것은 연이 네가 잘못 안 것이니라.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것은 스승을 마음으로 존경하라는 의미인 것이지. 빛이 있어 자연히 생기는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그런 형식적인 의미는 아닌 것이다. 그런 형식적인 의미로 새기게 되면 빛의 방향이 바뀌면 그때마다 제자는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것인데, 성현들께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이니라.”

“예, 알겠사옵니다, 사부님.” (그 말이 그런 뜻이었어? 영감탱이 은근히 많이 아네.)

“자, 어서 가자.”

“예.” (그래 배고프니 후딱 가자구.)



‘큭, 접근금지 명령인데’

“어서 옵쇼.”

화향촌에 하나 밖에 없는 객점인 화향객점의 주인이자 은영일조의 이호인 용삼(勇三)은 어제 저녁 늦게 만두와 소채를 사갔던 양현이 설연과 객점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기함(氣陷)을 치면서도 입으로는 큰 소리로 인사했다.

“어제 저녁 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자리로 부탁 드립니다.”

어제 저녁 늦게 만두와 소채를 사갈 때 객점 주인이 바구니를 챙겨주었던 것이 생각난 양현은 전낭에서 중통초(中統鈔) 한 장을 꺼내 용삼에게 건네 주었다.

양현은 자신이 모르거나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과 있을 때에는 항상 자신의 생김새에 맞게 말과 행동을 바꿨는데, 방금도 겉보기에 자신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용삼에게 자연스럽게 공대를 하였다. 양현이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용삼에게 자연스럽게 공대를 하는 것을 본 설연은, 양현처럼 그때그때 사람을 가려 말과 행동을 바꾸는 것은 자신도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감탱이가 저런 건 참 잘한단 말이지, 어제 위말종한테도 그렇고. 변태색마라서 그런지 자신을 감추는 데는 도가 텄나 보다. 잘 봐뒀다가 연이도 나중에 써먹어야지.)

“예, 이쪽으로 오시지요.”

겨울이라 길손이 많지 않고 또 정초가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객점 안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맞다, 밥먹고 나면 영감탱이가 덮칠지도 모른다는 걸 깜빡했네. 용삼 아저씨랑 미리 아는 체를 해둬야지.)

“안녕하세요, 용삼 아저씨.”

설연은 용삼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며, 반갑게 인사했다.

“어, 연이구나. 그래, 훈장어른 장례는 잘 치렀고? 어제는 객점에 손님이 들어 훈장어른 발인(發靷)에도 못 가봤구나.”

“예, 덕분에 아버님을 잘 모실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용삼 아저씨.” (코딱지만한 객점, 손님도 별로 없을 텐데 하루쯤 쉬어도 되잖수, 아저씨.)

“이 자리가 좋습니다, 손님.”

용삼은 양현과 설연을 남쪽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계절이 겨울인지라 창은 닫혀 있었으나 종이를 바른 창이어서 그런지 은은한 볕이 들어 생각보다 따뜻한 자리였다.

“용삼 아저씨, 오늘은 왠일인지 손님이 별로 없네요.” (오늘은 아미파 쪽에 가는 사람이 별로 없나 보네.)

“그러게나 말이다. 점심 손님도 드물구나.”

설연이 탁자에 양현과 마주 앉으면서도 용삼과 이야기를 계속하는 모습을 본 양현은 역시 객점 주인과 숙수, 위일구라는 자가 그 동안 의도적으로 설연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음을 직감하고는 두 사람이 말을 주고 받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연아, 같이 오신 분은?”

“예, 제 사부님이십니다.” (앞으로 연이가 몇 년간 뜯어 먹고 살 영감탱이야.)

“아! 연이 사부님이시라고?”

‘사부라고? 망했다!’

용삼은 설연이 양현을 사부라고 소개하자 속으로 비명을 토했으나,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양현 쪽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길게 읍했다.

“아이고, 사부님, 우리 연이 좀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설연의 말에 놀라던 용삼의 표정과 설연을 잘 부탁한다고 말할 때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용삼의 눈빛이 급격히 변화하는 것을 양현은 놓치지 않았다.

“연이와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예, 삼 년 전에 소인이 훈장님 내외분께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지요.”

“은혜라니요?”

“마을에 돌림병이 돌았을 때, 제 안사람과 아들 놈이 훈장어른 사모(師母)님 덕에 목숨을 건졌습니다요.”

‘설연의 어미가 돌림병 환자들을 돕다가 세상을 떴다고 하더니 그 때의 인연이라고 우기는 건가? 그래도 역시 수상한데?’

양현은 지난 밤에 설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전후사정을 짐작하면서도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작년 가을 제 아비가 앓아 누운 이후로 여기 용삼 아저씨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용삼아저씨가 먹을 건 자주 챙겨줘서 연이가 고생을 덜하긴 했지.)

‘설관이 앓아 누운 뒤로 많이 도와줬다고?’

“제자의 어려움을 보살펴 주셨다니 저도 감사 드립니다.”

여전히 용삼을 의심하는 속마음과는 달리 양현은 용삼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요, 소인이 훈장어른 내외분께 입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요.”

설연은 양현과 용삼의 대화가 길어지자 그만 대화를 끊고 음식을 주문하고 싶었다.

(배고프다구, 언제까지 얘기만 할거야, 이 영감탱이야.’)

“용삼 아저씨, 사부님께서 아침식사를 못하셨는데, 사부님 드실 음식은 특별히 신경을 좀 써주세요, 네.”

“허허, 녀석, 네가 그리 말하면 여기 주인장께서 부담스러우시지 않겠느냐.”

“예, 사부님.”(용삼 아저씨는 그 정도는 그냥 해준다고, 이 영감탱이야.)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연이 사부님이시라는 말에 손님을 모셔놓고 주문도 안받고 있었네. 저, 음식은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깝쇼?”

‘이런, 저자 앞에서 내가 너무 긴장했구나. 손님한테 주문도 안 받고 있었다니.’

용삼은 자신이 주문을 받는 것을 깜빡하고 있을 정도로 양현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고, 용삼의 그런 모습을 보고 그가 은근히 긴장하고 있음을 눈치챈 양현은 이번에는 숙수에게 관심이 있는 척 물었다.

“특별히 잘하는 것이 있습니까? 제가 연이를 제자로 얻은 것을 기념하여 오늘은 조금 푸짐하게 식사를 했으면 합니다.”

(왠 일이래? 어제는 기껏 만두나 소채만 사오더니, 이번엔 비싼 걸 시킬 모양이네. 아! 연이가 용삼 아저씨랑 잘 아는 것 같으니까 이 영감탱이가 꼴에 사부라고 체면을 차리고 싶은 거구나.)

“숙수가 여러 요리를 고루 잘하기는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오향장육하고 마파두부를 제일 잘합니다요. 그리고 아침에 멧돼지 고기가 새로 들어온 것이 있는데 신선한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요. 이것으로 오향장육을 해 올리면 어떻겠습니까?”

(꿀꺽! 장 숙수 아저씨 오향장육, 진짜 맛있는데.)

“예, 그럼 그것과 마파두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잡량주(雜糧酒) 같은 백주도 한 단지 주십시오.”

(두 가지나 시켜? 그리고 대낮부터 왠 술? 백 년 묶은 변태색마라도 맨 정신으로는 덮치기는 좀 그런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양현이 주문을 마치자 주방으로 가서 주문을 넣은 용삼은 주담자를 가져다 설연과 양현에게 엽차를 한 잔씩 따라 주고는 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어이, 장씨, 오향장육이랑 마파두부 특히 신경 써줘. 연이 사부님께서 드실 거니까 양도 푸짐하게 하고.”

[삼호, 어제 그 양현이라는 자가 목표의 사부다. 전서구 준비해.]

“연이 사부님? 연이한테 사부님이 계셨어?”

[진짜? 목표한테 사부가 생겼어?]

“그래, 연이 사부님께서 연이를 데리고 오셨어.”

[그래, 진짜야.]

“하하. 연이한테 사부님이 계신 줄은 몰랐네. 그럼 확실히 솜씨 발휘를 해야겠구먼. 맡겨 두라고.”

[알았어, 전서구 준비하지.]

‘역시 연이에게는 용담호혈이었군. 이쯤 되면 연이 부모의 죽음도 의심해 보는 게 맞겠지?’

귀에 내공을 집중하고 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용삼과 장씨라는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양현은 내심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하고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속마음과는 정반대의 말을 꺼냈다.

“참으로 인심이 좋은 곳이구나.”

“예, 사부님. 제 아비도 마을 사람들의 정이 각별하다고 누누이 말하곤 했습니다.” (연이가 인기가 좀 많아서 그래, 영감탱이.)

‘연이를 노리는 자들이 있는 이 마을에 남아 있으면 아니되겠구나. 그래, 연이를 데리고 아미산 거처로 들어가야겠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양현은, 더 이상 설연을 이 마을에 계속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설연과 자신의 주변에 강기막을 친 그는 설연에게 거처를 옮기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연아, 이제 조만간 네 거처를 옮겨야 할 것이다.”

“예? 거처를 옮기다니요?” (응? 어디로 가게?)

“여기서 남서쪽으로 사백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사부의 거처가 있느니라. 연이 네가 이제 내 제자가 되었으니 이 사부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냐?”

(잠깐! 여기서 남서쪽으로 사백여 리면, 아미산 한복판이잖아. 안돼! 땔감 대주는 송씨 아저씨가 산에서 살면 고생만 죽게 한다고 그랬단 말이야.)

“그리 하오면, 이곳에 있는 집과 전답은 어찌하는 것이 맞겠습니까?” (집도 전답도 여기 있는데 여기가 살기 편하지 않겠어? 그냥 여기서 살지?)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맡기는 것도 좋겠지만, 연이 네가 이곳에 피붙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앞으로 최소한 십수 년은 내 밑에서 여러 공부들을 수련하여야 할 것이니 아예 이 참에 처분하는 것이 나을 듯싶구나.”

(뭐야, 결국 팔아버리자는 얘기잖아. 그리고 십수 년? 어이 영감탱이 연이 계획은 최대 육 년이었다고. 아무리 내공심법까지 영감탱이한테 배울 수 있다지만 십수 년 뒤면 노처녀잖아, 안돼!)

“제자의 집이 꽤 크니 사부님께서 거하시거나 제자가 수련을 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고, 또 전답은 소작을 주면 되오니 이 곳에서 지내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부모가 물려준 집과 전답을 처분한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아서 그렇사옵니다.” (영감탱이, 그냥 우리 집에서 살자. 전답도 꽤 되니 먹고 사는 데도 지장 없잖아. 연이가 암만 초극 미소녀라고 하지만 고아라서 지참금 마련해 줄 사람도 없다구. 집하고 전답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연이도 나중에 좋은 데로 시집을 가지.)

‘연이 이 아이가 총명하기는 한데 꽤 고집이 세구나. 앞으로 잘 다뤄 고집스러운 성격을 고쳐줘야겠구나. 그리고 일단 이 곳은 떠나야 한다.’

설연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처를 옮기는 것에 계속 반대하자, 양현은 설연의 고집이 보통이 아님을 깨닫고는 더 이상의 반대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쐐기를 박았다.

“연이 너의 효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앞으로 네가 접하게 될 공부들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수련하여야 하는 것들이 많으니라. 이 곳에서는 정상적인 수련이 불가능하니 그리 알고 이 사부의 뜻에 따르거라.”

“예, 사부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하오나 가더라도 아비의 사십구제까지는 치르고 갔으면 하온데 사부님 뜻은 어떠하신지요?” (망할 영감탱이, 무조건 끌고 가겠다는 거네. 일단 버틸 때까지 버텨 보다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영감탱이, 대체 뭘 가르치겠다는 거야? 삼매진화 쓸 수 있는 내공심법하고 그 뛰어오르는 기술, 그리고 은신술 정도 배우는 데 왜 사람들이 없는 데서 해야 하는데? 그리고 인적 없는 곳으로 연일 데려가서 뭘 어쩔 건데?)

“그래, 자식 된 도리로 아비의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 말릴 수야 없겠지. 그럼 네 아비의 사십구제를 치를 때까지만 여기 머물기로 하자꾸나.”

‘제사를 치른다는데는 정말 어쩔 수 없구나. 위일구 그 자한테도 써먹는 걸 보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 그럼 일단 오늘 밤부터 위일구 놈하고 객점 놈들을 족쳐 보자.’

그렇게 거처를 옮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두 사람이 탁자에 앉아 엽차를 마시며 좀더 기다리자, 용삼과 숙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접시 두 개, 크고 작은 술단지 두 개와 술잔을 챙겨 들고 와서 탁자 위에 내려 놓았고, 용삼은 큰 술단지를 양현 앞으로 밀었다.

“이건 저희 객점에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내놓으려고 소인이 고이 모셔두었던 모태주이옵니다요.”

(헉, 모태주! 저거 비싼 술 아냐?)

주문하지도 않은 모태주(茅台酒)를 용삼이 내밀자 양현은 깜짝 놀라는 척하며 물었다.

‘이 자들이 나를 꽤 의식하고 있구나.’

“아니, 왜 이런 귀한 것을?”

“부족하나마 우리 연이의 사부님께 제가 올리는 선물이옵니다요. 그럼 맛있게 드십쇼.”

(변태색마한테 뭐하러 선물까지 줘! 용삼 아저씨 실수하는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연이 덕분에 호강을 합니다, 그려.”

(뭐, 연이 덕에 호강하는 거는 잘 아네, 키키.)

용삼과 함께 음식을 들고 나온 숙수는 왼손을 설연의 어깨에 살짝 짚으며 아는 체를 했다.

“연이도 많이 먹거라. 이 아저씨가 특별히 솜씨 좀 부렸으니 말이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장 숙수 아저씨.” (연이가 장 숙수 아저씨랑도 잘 안다고 해둬야, 이 변태색마 영감탱이가 여기서 날 덮치지 못할 거야.)


용삼과 장 숙수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자, 양현은 요리들은 제쳐 두고 모태주부터 술잔에 가득 따르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양현이 빈 술잔을 탁자에 내려 놓자 모태주의 독특한 향이 탁자 주변에 가득 퍼졌다.

‘오향장육하고 마파두부는 연이도 같이 먹을 테니 깨끗할 테고, 모태주에도 독은 없군.’

“크으, 좋구나. 역시 모태주야. 연아, 먹자꾸나.”

“예, 사부님.” (이 영감탱이 완전 술꾼이었구만. 밥보다 술이 먼저라니. 우와! 근데 무슨 술 냄새가 이렇게 향긋하지? 신기하네.)

장 숙수가 한껏 솜씨를 부려 만들었다는 오향장육을 자기 몫의 접시에 덜어낸 설연은 그 중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고는 조심스럽게 고기조각을 입 안으로 집어 넣고 입술을 꼭 다물고 한참을 씹어 삼켰다.

“아! 요리가 정말 맛있어요. 사부님도 어서 드셔보세요.” (녹는다, 녹아! 장 숙수 아저씨, 최고!)

“연아, 사부 앞에서 너무 예의를 차릴 것 없으니 그냥 편하게 먹거라.”

“예, 사부님.” (히히히, 그 말을 기다렸다고.)

편하게 먹으라는 양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설연은 쩝쩝하는 소리까지 내가며 정신 없이 고기와 마파두부를 집어 먹기 시작했고, 양현은 그런 설연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더니 요리접시에서 오향장육 한 조각을 집어 들어 맛을 보았다.

‘저렇게 먹는 모습을 보니 조숙하다고는 해도 아직 아이는 아이구나. 그런데 이거 정말 맛있군.’

장 숙수가 내온 오향장육과 마파두부가 꽤 푸짐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깔끔하게 요리접시를 비웠다. 양현이 술 한 잔에 고기나 두부 한 점을 안주 삼아 먹는 동안, 설연이 양현보다 많이 먹어버린 것이다.

“네가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나.”

“아, 사부님. 제자가 그만 음식 맛에 취하여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윽! 오랜만에 고기를 봤더니 잠시 정신을 놓았네.)

“그래, 오향장육 같이 흔한 음식으로 이런 맛을 내다니 숙수 분의 솜씨가 정말 뛰어나구나. 다 먹었으면 이만 집으로 가자꾸나. 차는 집에 가서 마시도록 하자.”

‘확인할 건 다 확인했으니 연이를 계속 여기 둘 필요는 없지. 저 녀석들은 해가진 뒤에 다시 보도록 하자.’

양현은 위일구, 객점의 주인과 숙수가 설연에게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는 의도를 가지고 수년 간 의도적으로 접근한 무림인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설연을 객점에 계속 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예, 사부님” (용삼 아저씨랑 장 숙수 아저씨 눈치가 보여서 여기서는 안 덮칠 모양이네, 킥킥킥.)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양현은 셈을 치르기 위해 용삼에게 다가갔고, 설연은 조용히 일어나 그 뒤를 따르다가 독한 술을 두 단지나 마시고도 전혀 걸음걸이가 흐트러지지 않는 양현을 보고 속으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술꾼이구나. 그렇게 마시고도 취하지도 않나 보네. 나중에 술 심부름 시킬 텐데, 귀찮게 됐네.)

“주인장, 정말 잘 먹었습니다. 술 맛도 좋고 요리 맛은 더 좋더군요.”

“아이고,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요.”

“셈을 치르겠습니다. 얼마인지요?”

“헤헤, 그냥 가십시오. 오늘은 제가 연이 사부님과 연이한테 점심 한 끼 대접한 것으로 하겠습니다요.”

(이야, 용삼 아저씨 오늘 무리하네.)

“아닙니다. 좋은 요리에 모태주까지 얻어 마시고 그냥 갈 수는 없지요. 여기 받으십시오.”

그렇게 말한 양현은 전낭에서 지원보초(至元寶鈔)(고액권, 중통초 5장과 같음) 한 장을 꺼내더니 용삼의 손에 쥐어주었다.

(영감탱이, 용삼 아저씨가 그냥 가래잖아. 왜 돈을 쓰고 그래? 헥! 지원보초다, 지원보초! 그거 연이 주지!)

“아이고, 사부님. 이러시면 안됩니다요.”

용삼은 양현이 쥐어준 돈을 다시 돌려주려 했으나, 양현은 극구 사양하며 몸을 돌렸다.

“하하, 주인장과 숙수 분 덕에 오랜만에 정말 좋은 술과 요리를 맛보았으니 셈은 제대로 치러야지요. 셈이 오히려 부족한 듯하니 사양치 마십시오.”

(영감탱이가 말은 잘하네. 아이고, 아까운 지원보초오! 차라리 연이 주지.)

“에고, 이런, 고맙습니다, 사부님.”

“그럼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용삼 아저씨, 잘 먹고 갑니다. 장 숙수 아저씨께도 인사 전해주세요.” (두 아저씨 덕분에 연이가 저 변태색마한테서 몸을 지켰네요.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

“그래, 연이 잘 가라. 나중에 또 오고.”

이호 용삼은 객점 문밖에 서서 설연이 뒤돌아볼 때마다 손을 흔들어 주며 양현의 기색을 살폈고, 삼호 장 숙수는 객점 뒤쪽에서 급히 전서구를 띄웠다.



작가의말

오늘도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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