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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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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6.07 16:49
연재수 :
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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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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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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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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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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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곰과 여우 (1)

DUMMY

곰과 여우


---


자네도 알다시피, 내 아들이 찾아왔었네. 고향에 두고 온 아들 말일세.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그 아이가 맞아.


사실 아들을 본 건 그날이 처음이야. 비유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로 처음이었어. 임신한 아내를 두고 떠났었으니까. 하지만 난 녀석을 처음 본 순간 내 아들이라는 걸 확신했네. 아주 쏙 빼닮았거든. 푸른 눈에 황금빛 머리칼이며 당돌한 눈빛까지. 고작 열여섯이었어. 짐작 가나? 고작 열여섯 살인데 그토록 멀고도 험한 길을 지나 날 찾아왔잖은가. 그래. 너무 기뻤네. 너무 기뻐서 아들의 손을 부여잡고 겅중겅중 뛰었다네. 내 직위와 책임까지 잊고 말일세.



난 직감했네. 아들은 또 하나의 나였어. 핏줄로 이어진 영혼. 또 하나의 분신. 내가 죽으면 날 대신할 존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나 그 자체···



그래··· 내가 간과했네. 아들이 내 야망까지 닮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다니···


모두 내 잘못이야. 아들의 손에 고삐를 쥐여주면 안 되었네. 안되었고 말고···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겠지.


내 아들이 자신의 불타 죽지 않았겠지.


---



흰점박이 암사슴이 고개를 쳐들었다.



암사슴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콧방울을 움찔거리며 흑진주 같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수풀이 무성히 자란 호수에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울고, 바람이 파릇파릇한 이파리를 흔들고, 산딸기는 덤불 속에 숨어 고개만 겨우 내밀었다. 암사슴은 물을 마시려다가 다시 귀를 쫑긋 세웠다. 숲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 겁 많은 산짐승은 무언가를 느꼈다.



암사슴은 가느다란 다리를 모으며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청둥오리가 갑자기 꽥하고 울자,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암사슴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관목을 스치듯 지나고, 둥치와 뿌리를 뛰어넘고, 비탈길을 날렵하게 올랐다. 멈출 생각은 없었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달릴 거야. 절대 멈추지 않아. 몸을 숨길 구덩이를 발견할 때까지. 그때까지만.



항상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나무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내려와 암사슴을 덮쳤다. 암사슴은 새끼고양이처럼 울며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숨죽여 지켜보던 산새들만이 요란하게 날아오를 뿐이었다.



“나도 알아. 무섭고 두렵겠지.”



그림자가 조용히 말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사슴은 끈질긴 본능을 발휘해 다리를 휘젓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으나 그림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푸른 머리칼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림자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날 원망하지는 마. 배고파 죽겠는 걸 어쩌겠어.”



---



관목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얀 트로엘은 산짐승을 짊어지고, 내장을 제거하느라 피에 흠뻑 젖은 모양새로 걸음을 재촉했다. 끔찍할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날고기로 배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 이왕 먹을 거면 익히는 게 나았고, 어차피 날이 저물고 있어 마땅한 곳에 불을 피워야 했다.



“망할 벌레 새끼들··· 맥주라도 가져오던가···”



얀은 벌레들을 떼어내려 애쓰며 하늘을 유심히 살폈다. 북극성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별이 뜨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 듯했다. 그래도 헛된 짓은 아니었다. 별보다 더 값진 것을 찾은 것이다. 연기였다.



연기의 발원지는 좁은 산길을 외로이 지키는 오두막이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얀은 잠시 고민했다. 아주 잠시만.



얀이 다가가자 보더콜리가 더 크고 빠르게 짖어댔다. 오두막 창문 너머로 주름진 눈과 마주쳤다. 눈이 금세 사라지더니 곧 한 노인이 문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집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노인의 얼굴을 검게 물들였다.



“용건을 말하시오. 더 다가오지 말고, 그 자리에서 말이오.”



노인이 얀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숲을 헤맸습니다. 사슴을 잡았는데, 배를 채우기는커녕 밤을 지새울 곳도 못 찾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얀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문을 조금 더 열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얀을 노려보았다.



“요즘 같은 시기에 그런 부탁은 사치라는 걸 아시오?”



“시기와 상관없이 사치일 겁니다, 어르신.”



“어디서 왔소?”



“옐사렘에서 왔습니다.”



노인이 짧은 고민 끝에 떠보듯 말했다.



“그 고기면 우리 가족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 같소.”



“나눠 먹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겁니다.”



“좋소. 들어오시오. 리틀! 그만 짖어라, 개자식아!”



보더콜리가 입을 꾹 다물더니 칭찬해 달라는 듯 노인에게 다가가 헥헥거렸다. 노인은 침묵했지만, 리틀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리틀은 컹하고 짖더니 이번에는 암사슴 고기에 관심을 보였다. 얀은 오두막으로 향하다 말고 살코기가 튼실히 달린 뼈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노인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



오두막에는 노부부와 손녀딸뿐이었다. 동그란 안경에 하얀 머리도 동그랗게 묶은 할머니는 입술 끝이 살짝 삐뚤어졌는데, 목소리만큼은 온화했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손녀딸은 얀과 산짐승을 보곤 의자 뒤로 숨었지만, 눈빛만큼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에탄이라는 이름의, 주름진 얼굴과 달리 건장한 할아버지는 한쪽 귀가 찢어지고 뺨에 끔찍한 상처가 있었다.



옥수수 수프와 딱딱한 빵이 식탁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저녁 식사를 방해한 게 분명했는데도 할머니는 얀을 위해 씻을 물을 준비해 주었다. 얀은 그녀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건 할아범이 소싯적에 입었던 옷이에요. 딱 맞을 듯싶네요.”



할머니가 주머니가 많고 허리띠를 두를 수 있는, 오래된 가죽옷을 건넸다. 얀이 망설이자 거실에서 고기를 준비하던 에탄이 말했다.



“내게 더는 맞지 않는 옷이오. 아들 녀석에게 물려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고 말이오. 주인 없는 옷이나 마찬가지지.”



따듯한 물에 피를 모두 씻어낸 얀은 에탄의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 겸 거실로 쓰는 방으로 돌아왔다. 수수했던 작은 식탁은 어느새 구운 고기 냄새로 알찼다.



“파란색이야! 파란색! 하늘이야, 하늘!”



손녀딸이 조그마한 손으로 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대단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얀은 손녀딸에게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며 노부부의 눈치를 살폈다. 노부부는 손녀딸에게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반응이 없자 손녀딸도 흥미를 잃고 고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옷은 어떻소? 보기에는 맞아 보이는데, 그래도 움직여봐야 알지 않겠소?”



에탄이 고기를 씹으며 물었다.



“잘 맞습니다, 어르신. 몸에 딱 맞아요.”



“다행이구먼.”



에탄이 끌끌하며 웃더니 난로 안쪽으로 침을 퉤 뱉었다.



“입고 온 옷을 빨긴 했는데, 내일까지 마를지 모르겠네요.”



할머니가 잘게 찢은 고기를 손녀딸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말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로 떠날 거예요.”



“왜요? 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날도 어두워졌는데.”



“그런 건 아니지만··· 신세만 질 순 없으니까요. 맥주도 한잔하고 싶고요. 근처에 가까운 마을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이 앞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페사로라는 마을이 있소.”



에탄이 말했다.



“이곳도 행정구역상 페사로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리로 가는 건 헛수고요. 도둑질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만··· 왜 그렇죠?”



얀이 천천히 고기를 씹으며 물었다.



“아무도 없소. 촌장은 물론이고 노인네도, 젊은이도, 아낙네도, 심지어 멍청한 닭 한 마리조차 없소. 다시 생각해 보니 훔칠 것도 없을 거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에탄과 할머니가 동시에 얀을 슬쩍 보더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손녀딸도 옥수수 수프를 먹으려다 말고 눈치를 살폈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나 보네요.”



할머니가 손녀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니까··· 론드가 전쟁을 선포했어요. 그게··· 저번 주였나요?”



“6일 전이었소. 마을에 소식이 온 건 그다음 날이고.”



에탄이 크흠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무책임한 것들이지. 마을을 버리고 도망치다니. 집안 남자들이 모두 군대로 불려 갔는데 말이야. 남작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겠소?”



“걱정돼서 그렇죠. 국경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까···”



할머니가 측은한 눈으로 손녀딸을 바라보았다.



“전 이해해요. 론드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잖아요? 우리 미르셸라라도 지켜야죠.”



“그러니까 남쪽으로 내려가래두.”



“당신이 남겠다고 고집부리잖아요.”



“누군가는 마을에 남아야지. 남작님이 올 수도 있는데.”



“저번에도 말했지만, 다시는 당신과 떨어져 지내지 않을 거예요··· 에휴, 얘길 하면 뭐하나. 항상 제자리걸음인데.”



할머니가 숨김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부 사이에 대화가 끊기자 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지금 전쟁 중이라는 말입니까? 소문만 무성한 줄 알았는데요.”



“소문? 너무 안일한 생각이오. 오히려 진즉에 터졌어야 할 전쟁이 이제야 일어난 것이지.”



에탄이 수프에 빵을 찍다 말고 말했다.



“론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국경을 넘으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소. 아직은 서로 탐색 중이지만, 지금껏 양국이 쌓아온 증오를 생각하면 앞으로 더 치열해지겠지. 어쩌면 아주 길어질지도 모르고.”



“전쟁 얘기는 이제 그만 하세요. 애가 듣고 있는데.”



할머니의 걱정과 달리 미르셸라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아무 관심 없어 보였다. 지루한지 나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것이다.



“피곤할 거요. 오늘은 산봉우리까지 갔다 왔거든. 그것도 할아비 도움도 없이 말이야.”



에탄이 손녀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젊은이, 남은 이야기는 나가서 하는 게 좋겠소. 작은 요정이 푹 쉴 수 있도록 말이오. 날씨도 좋으니 여독 풀기 좋을 거요. 주무시고 가시오. 이 늙은이를 야밤에 온 손님 돌려보낸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오.”



---



“맥주까지 있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아쉽구먼.”



에탄이 알차게 차오른 달을 올려다보며 흉한 뺨을 일그러뜨렸다.



“보통은 지하에 맥주를 보관하는데, 상인들 발길이 끊겨서 벌써 바닥나 버렸지 뭐요. 하루만 일찍 왔다면 맛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맥주를 위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입니다.”



얀과 에탄은 나무그루터기와 통나무에 앉아 아쉬운 대로 밤공기를 술 삼아 사슴 고기를 씹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달빛과 밤소리와 침묵을 즐겼다. 이파리가 부스스 흔들리고, 멧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보더콜리 리틀은 사슴 뼈를 연인처럼 꼭 안고 열심히 핥았다.



“혹시 국경을 넘을 생각이오?”



에탄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당연한 얘기를 하듯 물었다. 얀은 깜짝 놀라 에탄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 아··· 네.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뭐, 왠지 그럴 것 같았소.”



노인이 특유의 깊은 눈으로 얀을 훑어보고는 끌끌 웃었다.



“어르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지금은 국경을 넘기 힘들겠죠?”



“당연히 힘들지.”



에탄이 말했다.



“안될 거야 없겠지만 쉽지 않을 거요. 도로나 얕은 강변 쪽은 이미 군대가 가득할 테고, 늪지나 산등성이 쪽은 군대보다 더한 장애물이 있으니 말이오.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당신은 군인이 되긴 힘들어 보이는구먼.”



“그런가요? 왜 그렇죠?”



“당신, 머리가 파랗지 않소?”



얀은 흥미롭다는 듯 물어놓곤 깜짝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왠지 모를 배신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본인이 더 잘 알지 않소?”



“그러니까 지금··· 제가 마녀라서 그렇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다면 사람 잘못 보신 겁니다. 저는 마녀가 아니니까요.”



얀이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려 애썼으나, 떨리는 목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마법사의 피가 흐르는 건 사실이지 않소?”



얀은 아무 말 못 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에탄은 양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숲에서 부엉 부엉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의 피가 머리를 파랗게 물들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오. 요즘에는 몇 잘난 체하는 놈들이 마법사의 정체는 머리색과 상관없다고 떠벌리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지 않소? 본래 색은 파란색일지라도, 어차피 마법사들은 스스로 머리색을 바꾸니 말이오.”



“그렇다면··· 왜 제게 호의를 베푸신 겁니까? 제가··· 마법사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마법사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오? 난 마법사들이 세상을 망친다는 같잖은 개소리를 믿을 만큼 멍청하지 않소. 그리고 당신은 어차피 마법도 못 쓰지 않소?”



에탄은 미심쩍은 기색조차 없이 물 흘러가듯 말했다. 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또 어떻게···”



“마법사는 이런 작은 숲에서 헤매지 않을 거요. 온몸에 피를 적셔가며 사슴을 잡지도 않을 테고, 론드로 넘어갈 방도를 고민하지도 않겠지. 뭣보다도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마녀가 아니라고.”



에탄이 어찌나 당연하게 말하는지 얀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였다. 에탄이 계속해서 말했다.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당신은 군에 들어가기 힘들 거요. 이건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오. 세상은 편견투성이니까. 편견은 편견을 낳고, 편견이 편견을 뒤덮어버리지. 군대는 그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거요. 그들에게 당신은 ‘얀 트로엘’이 아니라 마녀일지도 모르는 ‘파란 머리’일 뿐이니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오. 당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기 전까지는 말이오.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소.”



얀은 말없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에탄은 보더콜리 리틀을 쓰다듬으며 고기를 씹었다. 밤새 우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그 모든 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얀이 감명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나이가 되면 많은 걸 알 수 있소. 군인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지.”



“그럼 제가 론드로 갈 것도···”



“그저 지레짐작한 거요.”



“벌거벗은 기분이네요. 속이 시원할 정도예요.”



얀이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근심을 털어내듯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맞춰볼까요? 어르신이 누군지 말이에요.”



“나? 버림받은 마을의 늙은이일 뿐이지.”



에탄이 허허 웃더니 딱히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재미는 있을 것 같소. 한번 해 보시오, 젊은 친구. 안 그래도 혼자 떠드는 것 같아 신경 쓰이던 참이었으니.”



얀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차분히 말했다.



“제 생각에는 말이죠. 어르신은 사냥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냥꾼? 너무 뻔하지 않소? 그게 전부요?”



“그럴 리가요. 평범한 사냥꾼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아주 특별한 사냥꾼이었던 게지요?”



얀이 상체를 기울여 적극적으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소.”



“아마도 괴물을 사냥하셨을 것 같은데요. 괴물 사냥꾼.”



에탄이 짧게 코웃음 쳤다.



“근거라도 있소?”



“흉터 말입니다.”



얀이 노인의 흉진 얼굴 대신 자기 얼굴을 훑었다.



“꽤 깊어 보이네요. 토끼나 사슴을 잡았다면 그리 큰 흉터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가슴 쪽에도 상처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얀은 이어서 노인에게 받은 가죽옷 가슴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날카로운 발톱 같은 것에 긁혀 두꺼운 실로 꿰맨 자국이 선명한 부분이었다.



“질긴 가죽을 단번에 뜯었네요. 이럴 수 있는 산짐승은 몇 없습니다.”



“몇 없긴 하지. 곰이나 늑대 정도를 제하면 말이오. 혹시 곰 쓸개가 비싼 값에 팔린다는 건 아시오? 늑대 가죽도 마찬가지지. 남들은 반년을 일해서 벌 돈을 단번에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값지다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겠지. 충분히 잘 접근했소. 훌륭하다면 훌륭하군.”



에탄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



얀이 마당을 뒹구는 리틀을 바라보았다.



“사냥꾼들은 혼자서 사냥하지 않는 걸로 압니다. 대부분은 사냥개를 데리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얘는 보더콜리네요. 양치기 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네 말은··· 보더콜리가 양치기 개라서 내가 산짐승이나 잡는 사냥꾼이 아닐 거라 보는 거요? 보더콜리라고 사냥개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소?”



“그런 법은 없지요. 보더콜리처럼 똑똑하고 온순한 아이를 굳이 사냥개로 키우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굳이 법으로 만들 필요도 없을 겁니다. 다른 좋은 품종이 많지 않습니까?”



“가정이 조금 지나치지만··· 흥미로운 의견이오. 하지만 그 모든 가정이 흉터에서 나온 것이지 않소? 그렇다면 만약 내가 군인이었다면 어떻겠소? 흉터 없는 군인은 풋내기에 불과하니 말이오.”



“어르신께서는 군인이라면 결코 알 수 없는 경험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저 평범한 사냥꾼도 마찬가지겠죠.”



에탄은 신경질적으로 콧등을 움찔거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처럼. 노인은 그렇게 말없이 푸른 머리 젊은이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껄껄 웃기 시작했다. 흡족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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