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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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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6.07 16:49
연재수 :
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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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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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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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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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마녀의 아들 (4)

DUMMY

“젠장··· 다들 내가 한가로운 줄만 알지...”



라 포이 호수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50분 거리 떨어진 작은 마을 비고트의 주민들이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촌장 레돌바르는 등불에 기름을 채우고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에는 안경과 찻잔, 깃펜, 잉크통, 할 일을 적어둔 메모장, 그리고 공고문이 놓여 있었다. 레돌바르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닭이 알을 낳질 않아요’, ‘누가 기름을 낭비하는 것 같아요’, ‘조제가 여태 집에 안 들어와요’, ‘비가 며칠째 내리질 않아요’, ‘나무 그림자가 무서요’··· 제기랄,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해?”



촌장이 화풀이하듯 메모장을 책상 한구석에 툭 던져 놓았다. ‘내가 이러려고 촌장이 되었나··· 제기랄··· 괜히 글공부를 해서 이게 무슨 고생이람···’ 유독 허탈한 밤이었다.



아내가 끓여준 차는 맛은 없어도 오묘한 신맛 덕분에 정신 차리기 효과적이었다. 레돌바르는 반쯤 남은 찻잔을 치우고, 전날 들어온 공고문을 집어 들었다. 동전 모양의 밀랍 봉인이 인상적인 공고문이었다. 시골 마을까지 공고문이 내려오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레돌바르는 밀랍 인장이 부의 도시 옐사렘을 상징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촌장은 봉인을 뜯고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촌장의 눈이 놀라움과 의외성 그리고 불신으로 움찔거렸다.



“여보?”



아내 파케니아가 문틈 사이로 고갤 내밀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무슨 일 있소?”



“그게··· 그 사람이 돌아왔는데···”



“그 사람? 누구?”



“아까 그 이방인···”



“이방인? 얀 트로엘? 벌써? 들어오라 해요.”



파케니아가 얼른 물러서자, 얀이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서재로 들어왔다. 촌장 레돌바르는 저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청년은 어깨부터 배 아래까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또···



“얀···? 자네 맞나? 이런 젠장··· 도대체 무슨···”



얀이 핏기 없는 얼굴을 내저었다. 레돌바르는 청년의 목과 뺨에 덜 닦인 핏자국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자네 피가 아니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도대체 무슨 일이... 누굴 벤 건가? 설마···”



레돌바르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한 것을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얀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레돌바르는 젊은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듣고 싶지만··· 어떤가? 씻고 나서 얘길 하겠는가?”



“바로 떠날 거예요.”



얀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 날이 늦었네, 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휴식이 필요해 보여.”



“알아서 하겠습니다.”



얀이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레돌바르는 얀에게 눈을 떼고 빈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앉게나.”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말해보게. 무슨 일이 있었지? 혹시··· 정말 괴물이라도 있던가?”



“예.”



“괴물이 있었다고?”



의외의 대답에 촌장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레돌바르가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는데, 얀은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 싸움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레돌바르가 답답한 마음을 드러내려는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시 파케니아였다.



“여보? 집 앞에 누가 있는데···”



“또? 이번엔 누구요?”



“모르겠어요. 물어도 대답도 없고···”



“그럼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주겠소?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이라서 말이오.”



“하지만··· 낌새가 좋지 않은데··· 이상한 냄새도 나고··· 당신이 쫓아내 줬으면 좋겠어요.”



“알겠소. 내가 알아서 하겠소. 얼른 얘길 나누고 내려갈 테니까 방에 들어가 계시오. 수고했소.”



파케니아는 불안한 기색으로 레돌바르를 쳐다보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레돌바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바라는 것도 많지··· 별일도 아니면서 말이야. 얘기 좀 계속해 보게. 무슨 괴물이었지? 아니지. 자네가 무슨 괴물인지 어찌 알겠나. 그럼··· 어떻게 생겼던가? 흉측한 놈이었나? 그래서 자넬 공격하던가?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다.”



얀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니?”



“소심한 겁쟁이였습니다.”



“겁쟁이?”



레돌바르는 인상을 한껏 구겼다. 얀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런··· 괴물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원···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했지? 괴물을 죽였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스스로? 누가? 괴물이? 지금 괴물이 자살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당신이 죽인 거나 마찬가집니다.”



“이 무슨 수수께끼 같은 얘긴가?”



레돌바르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이상하게 분위기나 잡으면서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한다는 말이, 내가 괴물을 죽여? 온종일 마을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간 적 없는 내가? 내가 무슨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난 신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고, 하다못해 괴물 사냥꾼도 아니야! 그런 내가 어떻게··· 젠장,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고. 그래서? 괴물이 있었다는 증거는 있나? 말 잘해야 할 걸세, 트로엘! 아직 마을은 자네가 술집에서 한 일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호수에 작은 오두막이 있습니다. 오두막 마당에 묻어주었습니다.”



“묻어줘? 자네 정말 괴물을 말하는 게 맞···나?”



레돌바르의 한껏 찌푸려졌던 눈살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는 얀의 말을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깨우치고 있었다. 괴물? 겁쟁이? 자살? 괴물이라 불리는 겁쟁이가 자살? 수수께끼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레돌바르는 안경을 벗고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마 끝이 시리고, 어지러웠다.



“그래. 오소트리...”



“정말 몰랐습니까?”



“자이드가 호수에 살고 있던 걸 묻는 건가? 아니면 문둥병을 앓았던 걸 묻는 건가?”



레돌바르는 혼자 묻고 대답했다.



“아이가 문둥병 때문에 밖에 나다니지 못한다는 건 알았네··· 근데 난 정말 그 아이가 죽은 줄만 알았어. 어떻게 알았겠나? 어떻게··· 나도 이렇게 되길 바란 건 아니야.”



“이제 죽었으니 당신 생각대로 죽은 사람이 되었군요.”



“날 비난하지 말게. 모두 마을을 위한···”



레돌바르는 말하다 말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책상 구석에 던져둔 메모장에 적힌 글이 눈에 들어왔다. ‘조제가 여태 집에 안 들어와요’ 촌장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오소트리 가족을 쫓아낸 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 젠장··· 그냥 그렇게만 알아주게나, 얀 트로엘. 고생 많았네. 칼 가져가게.”



레돌바르는 책상 아래에 두었던 얀의 칼과 허리띠를 돌려주었다. 얀은 칼날을 확인하고 허리띠를 둘러맸다.



“미안하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저도 마찬가집니다.”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고 수습하겠네. 바로 갈 건가?”



“예.”



“동쪽으로··· 글렘이라고 했나?”



“맞습니다.”



“조심히 가게나. 잠깐, 가기 전에··· 자네가 알아둘 소식이 있네.”



레돌바르가 옐사렘에서 온 공고문을 집어 들었다.



“방금 온 소식이네. 부의 도시 옐사렘에서 마녀가 잡혔다더군. 자경단이 직접 처형한 모양이야. 근데 놀랍게도··· 머리가 검은색이라는군. 자네처럼 파란색이 아니라.”



레돌바르를 바라보는 얀의 눈이 일순 커졌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았냐고? 자네가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정신 좀 차리게나. 자네 머리가 삐져나왔거든.”



레돌바르가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하늘빛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얀이 조심스럽게 모자를 고쳐 쓰며 물었다.



“아무렇지 않기는. 당황스럽네. 파란 머리는 처음 보거든. 하지만 그저 낯설 뿐이야. 내가 방금 소식을 말해주지 않았나? 발견한 마녀가 검은 머리라고 하잖은가? 그렇다는 말은 마녀라는 존재는 머리색과 상관없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자네는 마녀일 리가 없네. 난 그렇게 생각하네.”



레돌바르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의 머리카락만 보고 마녀라고 한다면, 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머저리가 되는 거겠지··· 지금은 괜찮지만 마을을 나갈 때는 조심하게. 마을 사람들은 자네가 마녀인 줄 알거야. 아직 소식을 전하지 않았거든.”



레돌바르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은 고맙고, 미안하네. 이렇게 돌려보내는 게 미안할 정도로··· 그러니 내가 부탁 좀 하겠네. 씻고 가게나. 옷도 새것으로 갈아입고. 냄새가 나거든. 조금 많이 지독한··· 잠깐, 이 냄새는 뭐지?”



“여보!!”



파케니아가 이번에는 노크도 없이 뛰어 들었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떨었다. 위험을 알리려 파케니아는 필사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충격과 공포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러나 얀과 레돌바르는 문제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검은 연기가 서재 안으로 물밀듯 밀려들었다.



“불? 제기랄! 오늘 무슨 날인가? 목욕은 없던 일로 하세!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여보! 얼른 나갑니다! 얼른!”



레돌바르가 찻잔에 남은 물을 작은 손수건에 적셔 파케니아에게 쥐여주었다. 그녀는 손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었다.



“아만다! 아만다가 위층에 있어요!”



파케니아가 겨우 말했다. 말보다는 비명에 가까웠다.



“아만다! 내 딸!”



레돌바르도 비명을 질렀다.



검은 연기가 서재를 가득 채우는 데에는 한순간에 불과했다. 불길이 벽을 관통해 들어오더니 보이는 모든 것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책장과 책들, 찻잔, 깃펜, 잉크통, 메모장, 그리고 옐사렘에서 온 공고문까지. 불길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레돌바르와 파케니아, 그리고 얀은 순식간에 불길에 둘러싸인 신세가 되었다.



악몽 속을 떠도는 듯 한 기분에 사로잡혀있던 얀은 검은 연기에 눈을 찔리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젠장! 파케니아! 우선 밖으로!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얀! 자네도-”



레돌바르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방 안에 굉음이 울리더니 순식간에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얀의 눈앞에서 레돌바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보!!”



“아아악! 제기랄!! 얼른 나가! 얼른!”



레돌바르가 고통에 짓눌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대한 대들보가 레돌바르의 허리를 깔아뭉갰다. 핏발 선 촌장의 얼굴에 가망 없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얀은 결국 파케니아만 데리고 서재를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불길은 서재에 남은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복도도 서재 안과 다를 바 없었다. 온통 검은 연기로 가득했고, 불길이 액자와 벽을 끊임없이 핥았다. 불길을 겨우 뚫고 나오자 현관과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현관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얀이 파케니아를 현관 쪽으로 떠밀며 말했다.



“나가세요! 저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해요!”



“아만다도 찾아야-”



“데리고 갈게요! 어서 가요!”



“왼쪽 방! 올라가서 바로 왼쪽 방이에요!”



얀은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계단을 얼른 뛰어올랐다. 층계참에 오르는 순간, 계단이 버티지 못하고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만약 층계참까지 오르지 못했다면 불길 속으로 떨어졌을 터였다. 얀은 층계참을 떠받드는 기둥을 붙잡아 겨우 버틸 수 있었다.



불길이 2층 복도의 서까래까지 치솟아 들보와 천장을 마구 헤집었다. 얀은 서둘러 왼쪽 방을 부수듯 밀어 열었다. 불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들 속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만다?”



여자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바닥이 무너져 아래층 서재와 이어져 있었다. 서재에서 불꽃이 폭발하듯 치솟았고 검은 연기가 연신 피어올랐다. 불타버린 종잇조각들이 연기를 타고 흩날렸다. 얀은 불이 옮겨붙은 이불을 치워버리고 외투를 벗어 여자아이에게 덮어주었다.



다시 복도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들보가 무너지더니 복도 바닥을 부수고 불길 속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복도 바닥이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졸지에 방 안에 갇히게 된 얀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거대한 구멍을 뛰어넘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2층 창문의 아래는 현관 쪽으로 이어졌는데, 멀리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는 게 보였다. 물을 길어오는 모양새였다. 파케니아는 보이지 않았다.



얀은 아이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아이를 안고 뛰어내리는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얀은 감옥에서 빠져나올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정확히 착지했고, 아이도 다치지 않았으며 돌담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얀은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단단한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섬광이 눈앞에 번쩍였고 얀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욱! 우욱! 씨발! 개새끼!”



얀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보호하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미친 노인이라 불리는 오소트리 노인의 검은 형체가 불타는 집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노인 옆으로 얀이 낮에 끌었던 수레와 여러 통들이 보였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기름과 타르였다.



노인이 몽둥이를 쳐들며 거침없이 휘둘렀다. 얀은 얼른 피하려 했지만, 어지러워서 잘되지 않았다. 몽둥이가 어깨를 후려쳤고, 얀은 이를 꽉 물어야 했다.



“개새끼들!”



노인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얀은 벌레를 생각했다. 왜 갑자기 벌레가 생각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꿈틀거리는 벌레, 그 혐오스러운 것이 불길 속에서 춤을 추었다. 얀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피가 쏟아졌다. 박달나무 몽둥이가 하얀 손에 매달린 채 맥없이 떨어졌다. 노인은 자기 팔을, 절단되어 피가 쏟아지는 팔을 바라보았다. 가래 끓는 목에서 비명도 쏟아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청거리며 촌장의 집 현관으로, 불길 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노인은 무언가를 밟아 나자빠지고 나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그를 넘어뜨린 것은 몽둥이에 머리가 깨진 파케니아였다. 노인은 얼른 일어나려 했지만 잘린 팔 때문에 허우적거리다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지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현관이었던 것이 불똥과 검은 파편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얀은 이 모든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검은 연기, 불꽃, 비명, 불타 죽은 벌레 그리고 자기 손에 들린 칼까지. 눈이 따가웠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파란 머리! 저기 파란 머리! 마녀야!”



누군가 소리쳤다. 얀이 돌아보았을 때, 물통을 든 마을 사람들이 얀을 쳐다보고 있었다. 공포와 혐오로 일그러진 눈동자들. 까마귀의 눈동자들.



“마녀야! 마녀라고! 저 자식이 한 짓이야!”



얀은 피에 젖은 외투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아만다를 보았다. 공포로 물든 아이의 눈이 벌건 불길로 반짝였다. 얀은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도망쳐야만 했다.

시골집 화재.jpg

---



검은 연기 사이로 달빛이 겨우 비집고 나왔다. 마을 밖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얀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걷고 또 걸었다. 메케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쑤시지 않는 곳이 없건만, 얀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훤히 드러난 푸른빛 머리카락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하루가 없던 일이 될 수 있었는지를.



“어이!”



얀은 고갤 들었다. 불꽃들이 두둥실 떠 있었다. 타오르는 다섯 개의 불꽃들. 그것이 횃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 누구지?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시나? 응?”



조제였다. 그는 한 손에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등 뒤로 숨긴 채 얀에게 다가왔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잘나신 외지인이구만? 기다린 보람이 있네.”



얀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조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혹시 촌장에게 괴물과 마녀를 잡았다고 말했나? 아이고. 내가 당연한 얘길 했네. 그러니까 네가 여길 올 수 있는 거겠지. 결국 레돌바르 촌장이 속은 거야. 그치? 넌 거짓말이 몸에 뱄잖아.”



조제가 무언가를 얀의 발 앞에 휙 던졌다. 머리였다. 피와 흙을 뒤집어쓴 백발에 주름진 얼굴.



“마녀는 내가 잡았지. 네가 아니라 내가! 너 때문에 머릴 자르는 데 애먹었다고. 네가 내 칼을 훔쳐 가지만 않았어도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야. 개자식. 이제 내 칼을 내놔. 어서!”



얀은 노인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내장에 걸린 눈에 검은 연기로 가득한 하늘 속 심연이 비쳤다.



“시발··· 말이 존나게도 안 통하네. 야! 칼 하나 줘 봐.”



조제는 그의 패거리 중 한 명에서 칼을 받았다. 조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말했지? 널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지금이 딱 좋은 순간인 것 같은데. 맞지? 자! 얼른 칼을 뽑으시지!”



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조제의 곰보투성이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개새끼가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얼른 칼을 뽑아! 얼른!”



조제가 찢어지게 고함을 지르며 다가오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을린 얼굴과 검은 밤하늘에 어울리지 않게 푸르른 머리카락이 붉은 횃불 빛과 뒤섞여 기묘하게 일렁였다.



“시발··· 이 새끼··· 너··· 설마··· 진짜···”



조제는 물러서려다가 동료들을 힐끗 보고는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차라리 잘 됐어··· 덤벼, 이 마녀 새끼!”



조제가 단숨에 달려들었다. 얀은 무방비 상태였으며, 피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칼을 뽑아 들었다. 칼 부딪히는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횃불이 떨어졌다.



“아아악! 씨발!!”



조제가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형편없는 울부짖음이었다.



얀은 걸었다. 조제의 무리 속으로 제 발로 찾아가는 셈이었지만, 패거리에게서 용감한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물러서기만 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얼굴만이 횃불에 둥둥 떠 있었다. 조제가 피를 토하며 다시 울부짖자,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함께 마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조제를 돕지 않았다.



얀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걸을 뿐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와 이그니스가 자꾸만 생각났다. 왜 그들이 생각나는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들이 보고 싶었다.


작가의말

일러스트는 Midjourney에서 생성한 AI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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