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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수 님의 서재입니다.

아르마노 기사단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심문수
작품등록일 :
2022.08.17 19:05
최근연재일 :
2024.06.07 16:49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1,038
추천수 :
49
글자수 :
339,124

작성
22.08.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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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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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20쪽

끝 그리고 시작 (2)

DUMMY

온 세상이 어둠이었다.



얀이 눈을 뜨고 처음 마주한 것은 끔찍한 악취 덩어리였다. 부드럽고, 딱딱하고, 물컹거리는 것들이었다. 얀은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극심한 고통에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허리가 어찌나 아픈지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들기는 것만 같았다. 신음이 목구멍에 걸리는 순간 마른기침으로 변해버렸다. 치아 사이로 돌조각들이 씹혔다.



"어쩌다가..."



덩어리들이 요동치더니 일순 빛줄기가 쏟아졌다. 빛이 눈동자를 찔러댔다. 기와지붕과 푸른 하늘, 그리고 어딘가 낯익은 남자가 빛줄기 너머로 어렴풋이 보였다. 얀은 그제야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여관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



행색이 남루한 남자가 늘어지게 하품하고는 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자네 마녀이지 않은가? 파란 머리가 다 그렇듯이 말일세. 불쌍한 것··· 그런데 남자도 마녀라 부르나? 아니면 마남? 남자 마법사?”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세요··· 제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죠?”



얀이 팔꿈치를 딛고 겨우 일어서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벌레가 기어다니는지 온몸이 견딜 수 없이 가려웠다.



“글쎄··· 시계가 없어서. 지난주에 팔아버렸거든. 영 쓸모가 없더라고.”



“하루를 넘기지는 않았죠?”



“하루는 무슨. 그랬다간 쥐새끼들 간식거리가 되어버릴 걸세. 놈들이 마녀고기를 편식하지 않다면 말이야.”



남자가 히히거리며 웃더니 액체가 담긴 병을 건넸다. 얀은 얼른 받아마셨다가 컥컥 기침을 쏟아냈다. 보드카였다.



“도대체 이런 걸 어디서···”



“이번에 돈 좀 벌었거든.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남자가 딱 잘라 말하고는 보드카로 입을 헹구었다. 얀은 본능적으로 바지 주머니를 매만졌다. 텅 비어 있었다.



---



골목은 썩고 부패한 것으로 넘쳤다. 잿가루와 썩은 채소, 깨진 기왓장, 삭아서 걸칠 수 없는 옷가지, 하얀 가루가 묻은 숟가락 그리고 노숙자까지.



고대 도시의 기조 위에 세워진 옐사렘이 큰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지리적인 특성 덕분이었다. 동쪽으로는 기후가 좋은 ‘헤네타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수도 ‘궨디렌’으로, 남쪽으로는 질 좋은 철광석이 나오는 광산 단지로, 북쪽은 계곡과 우림의 나라 ‘론드’로 이어져, 나이폴 상인들에게 있어 옐사렘은 없던 도시도 만들어야 할 최적의 장소인 셈이었다.



상인들 덕분에 도시는 빠르게 성장했고, 동시에 병들었다. 마약 유통과 범죄, 그리고 노숙자가 쥐새끼처럼 급격히 늘었다. 평범한 시민들은 이를 아주 불쾌하게 여겼지만,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돈이 모이는 곳에는 마약이 숨어들기 마련이고, 마약은 노숙자를 잉태하는 법이었다.



얀은 누가 보아도 노숙자나 다름없는 행색이었다. 지독한 냄새가 행인들의 미간을 일그러뜨렸고, 아픈 허리 때문에 불편한 걸음걸이는 마약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괴물의 존재를 믿는다면, 오염된 무덤을 들쑤시고 다니는 괴물 ‘플라트마울’로 오해할 법했다. 자신이 그렇게 보인다는 걸 잘 알았던 얀은 머리만이라도 드러나지 않도록 외투에 달린 모자를 꾹 눌러썼다.



“거기! 멈춰봐!”



운이 좋지 않은 날인 게 분명했다. 얀은 곁눈질로 경비병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멈춰 보래두!”



경비병이 얀을 붙들었다가 인상을 구기며 얼른 손을 뗐다.



“어후 젠장··· 검문 중이다. 얼굴을 보여라. 똑바로. 얼른!”



얀이 미친 척이라도 해야 하나 싶은 순간이었다. 지나가던 남자가 소리도 없이 불쑥 끼어들었다.



“경비병! 잠깐만요!”



“뭐야?”



경비병이 남자를 쏘아보며 허리에 찬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지금 위대하신 페리안 3세 국왕 폐하와 위대한 나라 나이폴, 그리고 위대한 도시 옐사렘을 위해 공무를 집행 중이다. 급한 일 있거든 다른 경비를 찾아라.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았어요, 알았어. 그렇게 바쁘신 줄 몰랐네.”



남자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한 손을 들어 경비병 눈앞에 천천히 흔들었다.



“그래도 잠깐 저를 봐주시겠어요? 잠깐이면 돼요. 잠깐이면···”



의심으로 가득하던 경비병의 눈빛이 남자의 손끝에 닿자 갑자기 빛을 잃고 흐려졌다. 미치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경비병은 남자가 손을 치우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경비병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우리는 아무 문제 없네. 그렇지 않나?”



남자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비병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남자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근엄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는 지금 바쁜 몸을 붙들고 있는 걸세, 경비병. 이만 가보는 게 어떻겠나?”



경비병이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아아···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넓은 아량으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셔도 좋습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경비병은 예를 갖추어 고갤 숙이고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왔던 길을 돌아갔다.



“하, 움브라··· 진즉에 나타날 것이지···”



“네가 미친 척하기 전에 나타난 게 어디야?”



얀이 투덜거리자, 움브라가 코를 움켜쥐며 맹맹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쫓아왔어?”



“네가 그 말도 안 되는 꼬락서니로 나섰을 때부터?”



“진즉에 나타날 것이지···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얀은 침을 퉤 뱉고는 옐사렘의 서쪽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근데 어떻게 한 거야? 뭘 어쨌길래 경비병이 날 놓아준 거지?”



“표적을 바꾸었지. 간단한 속임수랄까.”



움브라가 뒤쫓으며 대답했다.



“속임수? 젠장, 야바위꾼들도 마법사라 불러야겠네.”



“마법과 속임수는 종이 한 장 차이야. 겉으로는 신비해 보여도 어디선가 등가교환의 법칙이 일어나고 있는 거니까. 능력만 되면 저 경비병이 널 감자라고 믿게 할 수 있어.”



“속임수로는 날 감자로 만들 수 없어. 비슷하게도 못 만들고. 그리고 어차피 나는 너처럼 못할 거 아니야?”



“당연히 못 하지.”



움브라가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말하더니 더는 못참겠다는 듯 콧김을 훅 내쉬었다.



“근데 너 좀 씻으면 안 되냐? 너무 지독한데?”



“그 잘난 마법으로 어떻게 해주던가.”



“내가 몇 번을 말하냐. 마법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대체할 힘이 필요한데-”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잘난 척 좀 그만해.”



얀은 콧김을 흥 불어내고는 주변을 살폈다. 곧 옐사렘의 서쪽 출구였고, 행인은 거의 없었다. 얀은 등에 들러붙은 미끈거리는 무언가를 떼어내려 애쓰며 말했다.



“이게 다 리아 때문이야. 날 두고 먼저 가버렸다고. 아이고 허리야··· 정신 좀 차리면 좋겠는데.”



“지금 리아를 걱정할 때가 아니야, 얀··· 야글로스 님께서 널 찾고 계신다고···”



“젠장. 또 시작이구만.”



“소란이 있었으니까.”



“그게 내 잘못이야?”



얀이 등에서 떼어낸 물컹거리는 무언가를 축 늘어진 덤불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돈에 눈멀어서 발기부전용 미약이나 만들어 팔다 걸린 애를 데려오라더니, 이제 와서 내 책임이라고? 날 두고 냅다 도망친 리아가 아니라? 젠장! 자칫 잘못했으면 내 머리통이 깨질 뻔했다고!”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옐사렘 서쪽 출구를 빠져나오자 짙은 갈색 머리에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얀의 앞을 막아섰다. 사내 옆에는 키가 크고 날씬한, 또래의 남자가 함께였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도록 산산조각이 났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얀은 차분히 숨을 돌렸고, 곧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 됐네, 리프. 내 머리통이 튼튼해서 말이지.”



“그럼 얼마나 튼튼한지 확인해 볼까?”



갈색 머리 사내, 리프가 눈을 치뜨며 말했다.



“부수는 김에 머리통 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확인도 하면 좋겠지.”



“뭐가 들었는지 안 봐도 훤하지. 냄새만 맡아도 알잖아, 리프? 역겨운 인간 냄새가 오늘따라 더 심하다고.”



키 큰 남자, 보아레스가 코앞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확인해서 나쁠 것 없겠지. 정말 궁금해. 어찌 보면 정말 참신한 머리통이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망칠 수 있지?”



“난 잘못한 것 없어.”



얀이 리프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심이야? 온 도시가 난리라고! 마녀가 소동을 일으켰다고 다들 떠들어 대잖아?”



“그 얘기는 리아에게 물어봐. 하는 김에 책임도 묻고.”



“리아에게? 너 지금 잘못을 떠넘기려는 것 같은데··· 인간 주제에 개수작 부리지 마. 날 자극하지도 말고.”



리프가 검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얀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잠그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했다. 그렇다고 참은 건 아니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섰을 뿐이었다. 얀이 번개처럼 빠른 일격으로 리프의 입술을 밟혀 죽은 곤충처럼 터뜨렸다.



리프가 욕설을 내뱉으며 물러섰다. 얀은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허리 통증이 말썽을 부린 것이다. 일격이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이 망할 새끼가!”



리프가 손을 앞으로 뻗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얀의 복부를 강타했다.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이더니 얀은 거의 5미터를 날아가 나뒹굴었다. 허리통증이 정수리까지 퍼져나갔다. 모자가 벗겨지며 얀의 푸른 머리칼이 훤히 드러났다.



“이 개자식이! 일어나 새끼야! 당장 네 머리통을 부숴줄 테니까!”



“젠장! 리프! 멈춰!”



움브라가 둘 사이를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비켜! 저 인간 새끼는 그만 감싸라고! 둘 다 한꺼번에 터뜨려서 누구 시체인지도 못 알아보게 만들기 전에!”



“리프. 진정하고 네 머리 좀 봐.”



보아레스가 리프를 붙들고는 손에 거울을 띄워주었다. 리프가 조그맣게 욕설을 내뱉었다. 짙은 갈색이었던 머리칼이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보아레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흥분해서 마법이 풀리고 있잖아. 이러다 인간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나도 알아··· 젠장. 저 비겁한 자식··· 저런 개자식이 파란 머리라니···”



리프는 움브라의 부축을 받는 얀을 노려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리프의 머리카락이 다시 짙은 갈색으로 돌아갔다.



“누군들 원해서 파란 머리로 사는 줄 알아?”



얀이 짓씹듯 말했다.



“그렇게 잘났으면 이 개같은 파란 머리 좀 바꿔주지 그래? 될 수 있으면 영원히 말이야!”



“뭣 하러 바꿔줘? 부숴버리면 그만인데!”



“이쯤 했으면 충분해.”



보아레스가 말했다. 그는 리프를 완전히 떼어놓고는 얀에게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부탁을 하는 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례한 게 뭔지는 아는 모양이구나?”



얀이 비웃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아레스는 표정 변화도 없이 얀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얀은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썼다. 더는 지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보아레스가 말했다.



“야글로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당장 눈앞에서 꺼져.”



---

불타죽은 벌레2.jpg

벌레가 앵앵거렸다.



옐사렘 서쪽 외곽 보루의 오두막은 사각 탁자와 두 개의 협소한 침대가 겨우 들어갈 만큼 비좁았다. 한쪽으로 기울어졌는지 창문이 묘하게 뒤틀려 이상한 소리가 났다. 삐그덕 삐그덕. 얀은 그 불편한 소리가 혹시 자기 허리에서 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천장에 달라붙은 벌레의 눈에 마법사 비밀 협회 수장, 야글로스의 하얀 대머리가 비쳤다.



“트로엘, 따로 연구라도 하는 건가? 오늘은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어떻게 해야 내 심기를 건드릴지, 무얼 해야 협회를 망가뜨릴지 준비라도 하는 건가? 노력이 가상하군. 아주 효과적이고. 넌 천재가 분명해.“



야글로스가 마주 앉은 얀을 노려보며 말했다. 얀은 간지러운 등허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변명거리를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그럼 의도한 게 아니란 거냐? 그렇다면 놀라우리만치 운이 좋고... 멍청하다는 뜻이네. 그것 나름대로 비극이구나.”



“제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건 여전하시네요. 당신이 자식처럼 아끼는 마법사들에게도 그렇게 말해보시죠. 리프와 보아레스, 특히 리아에게 말입니다. 갠 자기가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를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색욕에 눈먼 사람들에게 미약이나 팔려 들겠죠.”



“요점이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질 못하는구나. 아무래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겠네, 트로엘. 말할 때마다 네가 멍청하다는 사실만 상기시키잖나?”



야글로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곧장 말을 이었다.



“나이폴 전역으로 마법사를 향한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세뇌와 살인, 괴물 양산 등 온갖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들먹이며 고문하고, 불태우고 있단 말일세. 이 나라와 멍청한 민중의 광기 속에서 우리 마법사들은 서로를 지켜야 해. 고양이가 꼬리를 감추듯, 우리의 마법과 새파란 머리카락을 숨겨야 한단 말일세.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질리다 못해 전부 외울 지경이군요.”



“이해할 수 없으면 부디 외우기라도 바라네.”



야글로스가 목을 가다듬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나이폴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만 하지. 예를 들면, 마법사들은 머리카락이 파랗지 않다던가.”



“차라리 마법사가 안전한 이웃이라고 홍보라도 하시지 그럽니까? 사제들처럼 말입니다.”



“페리안 2세가 마법사 탄압에 앞장선 이후로 지금껏 그러한 시도가 없진 않은 걸 이미 알 텐데. 그리고 단상에서도, 음지에서도 애써온 우리 마법사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도 외웠겠지?”



“잿가루가 되었죠. 어찌나 슬픈지,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네요.”



“빈정거리는 것도 정도가 있다, 트로엘.”



야글로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달라. 우리는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실행하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오늘 네가 저지른 짓 때문에 그간 우리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어. ‘파란 머리 마녀가 수감 중인 마녀의 탈옥을 돕다’··· 이보다 최악은 없겠군.”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리아를 꺼내오라며 나를 감옥으로 보낸 건 당신이에요!”



얀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저 혼자서는 어렵다고 분명 말했는데도 당신은 리아의 도움을 받으면 괜찮다고 했죠! 그런데 리아는 혼자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탈옥을 도운 내 잘못이라고요?”



“파란 머리를 드러내고 소동을 일으킨 것이 문제였지. 그것도 고작 사람 하나 구하려다 말이야.”



야글로스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왜 그랬지? 리아의 고객이었다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나? 그래서 백마 탄 기사가 되고 싶었나? 그녀가 네 앞에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라도 해줄 줄 알았나? 당장은 겁에 질려 도망가더라고, 언젠가 네 고귀한 행동에 감사함을 잊지 않고 네 침대 안으로 들어올 거라고 기대했어? 대단해, 트로엘. 삼류 동화나 쓰는 건 어떻겠나?”



야글로스는 조소를 띠며 얀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얀이 입을 열었다.



“내게 맡기길래 그렇게 중요한 일인 줄 차마 몰랐네요. 네. 제 불찰입니다. 마법사가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게 맡긴 건 분명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겠죠. 참 아쉽게 되었네요. 근데 당신이 직접 했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마법사는 대머리라고 여겼을 테니까요. 혹시 마녀들과 침대에서 뒹구느라 시간이 없던 건 아니겠죠?”



야글로스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꼭 고집스러운 늑대 같구나. 도무지 길들일 수 없는 늑대··· 늑대들은 현실과 그림자를 구분하지 못하지. 얀 트로엘, 넌 정말 네가 그 여자를 구했다고 생각하나?”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그 여자를 감옥에 내버려두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는 뜻일세.”



“죽게 내버려두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전 제 선택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같은 순간이 내게 온다면,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세상일은 모를 일이지.”



야글로스가 허리를 곧게 세우며 얀을 내려다보았다. 같잖다는 그 눈빛이었다.



“당신은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하나 봅니다.”



“널 예뻐하려야 할 수가 없군.”



야글로스가 등받이에 등을 붙이며 신경질적으로 앵앵거리는 벌레를 눈으로 좇았다.



“당신이 절 미워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머리카락은 파란 주제에 마법사가 아닌 것.”



“내가 문젯거리인 널 지금껏 곁에 두는 이유를 생각해 보는 건 어떻겠나?”



“얼굴조차 모르는 어머니와, 이그니스 누나 덕분이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멍청하진 않은가 보군. 그럼 자네의 친모도, 널 업어가며 키운 이그니스도 이젠 네 곁에 없다는 건 아나?”



야글로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벌레가 휘청이더니 탁자로 고꾸라졌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고소하게 타는 냄새가 났다.



“그놈의 ‘우리’는 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얀이 타버린 벌레에 눈을 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누구겠나. 나이폴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가여운 마법사들이지.”



“아. 그렇군요. 처음부터 전 안중에도 없었군요. 처음부터, 내가 마법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말입니다! 젠장! 조금만 더 일찍 알려주시지 그랬습니까, 레온하르트?”



“더 일찍 알려줬다면 달라지는 거라도 있나, 트로엘?”



얀은 순간 말문이 막혀 침을 꿀꺽 삼켰다. 야글로스가 코를 긁적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음··· 달라지는 게 있었을 수도 있겠군. 이별의 순간이 더 빨랐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얀 트로엘?”



“지금··· 무슨 말을···”



“드디어 이별의 순간이 왔다는 뜻이지.”



“저보고··· 나가라는 겁니까? 고작 이런 식으로?”



얀이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전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당신이 시킨 온갖 더러운 일을 해왔고요! 그것도 혼자서 되도 않는 수련을 하면서!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가라고요?!”



“도대체 무얼 바라는 건가, 트로엘? 그렇게 불만이더니 이제 와서 아쉬운가? 난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의미한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전 여기서 도대체 뭘 한 겁니까? 전 그동안 무얼 위해서 제 삶을 여기에-"



"그게 뭐가 중요한지 전혀 모르겠군. 알고 싶지도 않고."



야글로스의 목소리는 가볍다 못해 활기가 넘쳤다. 얀은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시당했다는 열패감이 뱃속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얀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죠.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장 꺼지도록 하죠.”



“아주 현명한 결정이로군.”



야글로스가 얀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하게도 아주 같잖다는 눈빛이었다.


작가의말

일러스트는 Midjourney에서 생성한 AI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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