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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스타 님의 서재입니다.

라라랜드 (자고 일어나니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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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스타
작품등록일 :
2020.05.11 11:41
최근연재일 :
2020.06.12 04:18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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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1
추천수 :
634
글자수 :
144,965

작성
20.06.11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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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6화. 이야기의 시작

DUMMY

쩔뚝... 쩔뚝...


쩔뚝거리며 걸어가는 미소의 뒷모습이 보였다. 소희 걸음과 같았다. 미소는 소희를 카피하기 시작했다. 걸음걸이부터 머리 길이까지 모두다.

오디션장에서 소희가 되어 김민수 감독 앞에 나타나기로 했으니까.


광화문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 연극치료를 마치고 의사들과는 더 이상의 대화나 치료는 없었다. 연극치료 과정에서 모든 걸 말하고 모든 걸 해소했으니까.


미소는 김민수에 대해 쏟아낸 말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의사들은 비밀로 해 줄 것이 분명했고 세 명의 환자들도 쉽게 소문을 내지 않겠지만 낸다고 해도 어차피 김민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폭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세상은 김민수에 대해 알게 될 테니까.


미소는 광화문부터 대학로 집까지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버스를 타고, 길을 걸으며 소희 캐릭터를 떠올렸다. 소희가 왜 가족에 대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는지, 왜 나쁜 기억을 찾으려 하는지, 왜 그곳에 가려는지, 연극치료를 통해서 소희에 대한 모든 걸 알게 된 사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이제 김민수가 채워 넣지 못한 시나리오의 마지막 부분이 영화를 보는 듯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소희가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감정인지, 어떤 욕망인지 모두 알게 됐으니까.


김민수도 모르는 시나리오의 마지막 부분이 명확해지자 내일 김민수와 만남이 기대됐다.



*



미소는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생기자 알람을 맞춰놓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옷을 입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5, 60대 아주머니로 특수분장을 해야 했으니까.


특수분장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얼굴에 화상 자국이 가득한 대표가 걸어왔다. 미소는 좀비 분장을 했을 때 놀란 경험 때문인지 놀라지 않았다. 아니면 김민수 감독 집에서 목격한 끔찍했던 화상 입은 남자가 떠올라 놀라지 않는지도 몰랐다.


대표는 아침 일찍 스튜디오를 찾아온 미소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미소는 웃을 수가 없었다.


“뭐야? 저 표정은? 재미없게 놀라지도 않잖아!”

“대표님! 내 친구 좀 그만 장난쳐요.”


미애가 커다란 특수분장 가방을 낑낑대며 들고 왔다.


“분장 테스트해 봐야 할 거 아냐 이놈아.”


미소가 미애 가방을 같이 들어주면서


“대표님은 왜 자꾸 자기 얼굴에 특수분장하는 거야?”

“배우들 불편한 게 있는지 직접 체크해 봐야 한다며 저러고 있다.”

“열정적이시네.”

“너무 열정적이어서 문제지.”


대표가 미애에게 사진기를 내밀면서


“뭘 그렇게 구시렁거려? 자, 사진 좀 찍어봐. 김감독한테 빨리 보내 줘야 돼.”

“김민수?”

“그랴, 대표가 이렇게 직접 분장하는 거 보여주면 좋아하지 않겠냐? 나같이 열심히 하는 대표가 어딨냐?”

“암요, 우리 대표님만 한 분은 없지요, 있어서도 안 되고요.”

“말이 어째 걸쩍지근하다?”

“아침부터 말싸움하기 싫고요, 그 영화 제작비가 얼마래요?”

“얼마 안 되더라.”

“왜요? 김민수 감독인데?”

“시나리오가 마이너한 내용이래. 그래서 투자사에서 꺼린다는 소문이 있더라. 엎어질 수도 있을 거란 소리까지 들려와.”

“와, 말도 안 돼, 김민수인데?”

“김민수 할애비가 해보라, 마이너한 영화에 누가 통 크게 투자하겠냐?”

“근데 왜 지금까지 대중적인 영화 하다가 갑자기 마이너 영화래?”

“작가주의 병 도졌나 보지 뭐.”

“계약했어요?”

“아직 시나리오도 안 나왔는데 뭔 계약이냐?”

“그럼, 이건 왜 해줘?”

“먼저 이렇게 잘 보여야 점수 따 놓지 이놈아!”

“화재 영화예요? 웬 화상?”

“몰라, 화상 입은 남자가 나온단 말만 들었어.”

“아이, 포즈 좀 다양하게 취해 봐요. 이왕 하는 거 잘 좀 찍어보게.”

“이건 어떠냐?”


대표가 앙증맞은 표정과 웃는 표정, 멋진 표정을 지어 보이자


“얼굴에 화상 입은 사람이 그런 표정 짓겠어요?”

“그런가?”


하면서 우는 표정, 분노하는 표정,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소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대표와 미애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미소는 대표가 왜 화상 특수분장을 아침부터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김민수가 왜 화상 분장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또한 미소는 알고 있었다. 김민수 감독은 정말로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폭로할 계획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미소는 김민수의 영화가 개봉되면 어떤 반향을 불러올지 생각하자 온몸이 떨리면서 전율이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흘러내렸다.


“자, 아줌마로 둔갑할 준비 됐지?”


미애가 리퀴드 라텍스 재료와 드라이기를 양손에 들고 수술을 시작하는 의사처럼 말했다.


“준비는 진작 됐은께, 빨리 혀, 이것아!”


미소가 걸쭉한 아주머니 말투를 내뱉었다.

미애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미소가 반포 자이 아파트에 도착한 건 2시간의 특수분장과 긴장된 표정으로 빈자리에도 앉지 못한 지하철 이동 시간을 합해서 3시간 후였다.


김민수와 토요일 점심 약속 시각이 이제 30분 앞으로 다가왔다. 30분 동안 아파트 단지를 계속 걸었다. 걷다 보면 떨리는 입술과 손을 진정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만약 김민수와 대화 도중에 말실수라도 한다면, 아무리 영화 특수분장으로 둔갑을 했어도 김민수가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제 시간이 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15층 버튼을 눌렀다. 입술과 손은 계속 떨렸다. 어쩔 수 없이 기술을 쓰기로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술을... 하지만 지금은 가장 강력한 기술을...


나는 능력이 있다.

나는 집중할 수 있다.

나는 최고의 연기자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지금부터 50대 아줌마가 된다.

.

.

.

1501호 앞에 도착해서 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미소 손은 떨지 않았다. 입술도 떨지 않았다. 이미 50대 아줌마로 완벽히 둔갑한 상태가 됐으니까.


벨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민수 감독이 거실에 서 있었다. 김민수는 카라가 있는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동안 차갑게만 느껴졌던 모습 때문인지 따듯한 색감의 니트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특히나 입가에 머금고 있는 환한 미소는 더 어울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동안의 차가운 표정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안녕하셔유, 처음 뵙겠네요?”

“네 반갑습니다. 헬퍼님,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김민수가 손을 뻗은 쪽으로 걸어갔다. 이 집에 들어오면 시선은 언제나 서재를 먼저 향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미소는 깜짝 놀랐다. 평범했던 우드 식탁을 김민수가 직접 고급 레스토랑 테이블로 꾸며놨다.


‘뭐... 뭐야 저건?’


칙칙했던 식탁에는 흰색과 살구색 실크천이 깔려있다. 그 위에 크리스털 와인잔과 가지런히 놓인 나이프, 포크, 숟가락 세트, 아르데코 스타일의 접시까지.


이렇게 멋지게 꾸며진 테이블 만찬 세팅을 보자 미소는 과거에 스쳐 간 남자들이 집에서 작업을 걸 때가 떠올랐다. 식탁에 촛불만 켜면 그때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무난한 버섯 와인 스테이크를 준비했습니다.”


‘스테이크면 스테이크지, 버섯 와인은 또 뭐냐?’


“별로 안 좋아하세요?”

“아이구 아녀유, 안 좋아하긴유, 고기면 지가 환장하는디, 내장에다 돼지 껍떼기까정 다 좋아하쥬.”

“다행이네요, 일단 옷을 벗고 편히 계세요. 고기 바로 구워드릴게요.”

“자꾸 옷 벗으란 말 하징 마셔유, 얼굴 빨개징게.”

“네?”


모든 게 불편했다. 음식도 불편했고 테이블도 불편했고 살갑게 말하고 표정 짓는 김민수도 불편했다. 질식될 것 같았다. 이럴 땐 유머가 최고 보약이었다.


“농담이유, 뭘 그렇게 놀랐았어유?”

“아 네, 하하하”


김민수가 환하게 소년처럼 웃었다.

미소는 혼란스러웠다. 어떤 모습이 진짜 김민수의 모습인지가 가늠이 안 됐다. 차갑게 독설을 뱉는 모습이 김민수의 진짜 모습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소년의 환한 미소가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러웠다.


지글지글 프라이팬에서 구워지는 큼직한 스테이크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종일 긴장한 미소의 공복을 자극했다.


“배고프시죠? 빨리해 드릴게요.”


김민수는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움직였다. 짝사랑하는 여자를 집으로 초대해서 요리를 해주는,


“근데 왜 지한테 감독님 이야기를 한다고 하셨슈?”


미소는 김민수와 마주 보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그 이야기를 했다가는 목구멍에서부터 체할 것 같아 미리 묻기로 했다.

김민수가 돌아서서 답하기 시작했다.


“제 이야기인지 감으로 아셨다고 하셨는데...”

“아, 네, 지가 그랬쥬.”

“헬퍼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도움을 받을 거 같습니다.”

“무슨 도움이유?”

“시나리오 끝부분을 아직 채워 넣지 못했어요. 끝부분을 채워 넣을 것 같습니다.”

“아이고, 제까짓 게 뭘 안다고요. 많이 배우신 감독님이 알아서 잘 하시것지유.”

“단 한 명도 제 이야기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어.”

“......?”

“모든 걸 가진 내가,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 이야기를 쓸 거란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헬퍼님 감을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하이고, 나 참, 그럼 한 번 믿어보슈.”

“역시 시원시원하시군요.”

“사실 지가 아는 사람 중에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슈.”

“......!”

“젊은 처자인디, 어찌나 참하고 이쁘던지, 근디 그 애가 사고로다가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슈. 웃기는 게 뭔지 아슈? 감독님이 쓴 시나리오처럼 나쁜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슈. 웃기쥬? 근디 갸가 죽을 둥 살 둥 해싸며 나쁜 기억을 되찾겠다고 발버둥을 쳤슈, 그래서 어찌 된 줄 아슈?”


김민수는 바로 뒤에서 타들어 가는 스테이크 따위는 귀에도 눈에도 코에도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든 오감이 지금 말한 미소의 입에 쏠려있었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채워줄 것 같은 헬퍼의 입에 온통 쏠려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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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화. 당신과 나, 우리 이야기 +7 20.06.12 127 8 11쪽
» 26화. 이야기의 시작 +8 20.06.11 51 10 10쪽
26 25화. 악마와 손을 잡았으니까 +8 20.06.10 56 9 10쪽
25 24화. 비밀이 숨겨진 곳 +6 20.06.09 52 11 11쪽
24 23화. 반갑다, 소희야 +8 20.06.08 109 11 12쪽
23 22화. 욕망이, 그렇게 이끌었다. +13 20.06.05 166 14 14쪽
22 21화. 마지막 통과면 완벽하다 +11 20.06.04 154 15 9쪽
21 20화. 당신은 나랑 작업하게 될 거야. +10 20.06.03 151 17 11쪽
20 19화. 완벽히 속여넘길 수 있는 +13 20.06.02 146 13 11쪽
19 18화. 판타지 속 판타지 +18 20.06.01 146 18 9쪽
18 17화. 판타지가 시작됐다. 두 번째 +28 20.05.29 169 24 14쪽
17 16화. 판타지가 시작됐다 +19 20.05.28 182 18 14쪽
16 15화. 만들어진 기억 +13 20.05.27 165 18 15쪽
15 14화. 이젠 내가 당신보다 갑이야 +24 20.05.26 161 23 13쪽
14 13화.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10 20.05.25 159 16 10쪽
13 12화. 김민수 감독과 한판 대결 +11 20.05.22 155 17 13쪽
12 11화. 잠실에 있는 100평짜리 펜트하우스 +15 20.05.21 163 16 16쪽
11 10화. 다시 기어오르면 돼 +11 20.05.20 158 20 12쪽
10 9화. 미소를 캐스팅하기 위해서 +31 20.05.19 168 24 8쪽
9 8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29 20.05.18 172 24 13쪽
8 7화. 남자 주인공의 등장 +15 20.05.17 202 25 10쪽
7 6화. 욕망 +19 20.05.16 227 22 18쪽
6 5화. 레디, 액션. +24 20.05.15 262 24 10쪽
5 4화. 만남의 시작 +22 20.05.14 280 33 11쪽
4 3화. 무명 여배우들의 무덤 +28 20.05.13 349 31 12쪽
3 2화. 미소야, 너에게 기회가 왔어. +27 20.05.12 434 35 10쪽
2 1화. 자고 일어나니 스타 +23 20.05.11 756 47 15쪽
1 프롤로그 +21 20.05.11 861 91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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