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생(監生)
"그래 병기야, 너의 생각이 확실히 그렇다면 그리 해야 되겠지. 그러나 너의 생각을 내게 한번 털어나 보아라. 왜 관을 버리고 상을 택한다는 것이냐?"
"저도 올해로 경사에서 감생을 한지가 4 년째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요, 관인이 되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관인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되더군요."
"그래, 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 좀 더 자세히 말해보거라. 어떤 점이 어려울 것 같더냐?"
"관인이 된다는 것이 다름아닌 황제의 종이 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에 참 당황했습니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는 일이라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해야 합니다. 옳다 또는 그르다 하는 판단도 허용되지 않고요, 그것이 종이지요. 아니다 싶은 황제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절망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 날은 밤이 새도록 북경성 밖을 나가서 정처 없이 헤매다가 돌아왔습니다."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만성들이 모두 황제의 종이 되어 살고 있단다. 다만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쩌다가 한번씩 느끼고는 하게 되지. 누구든지 그렇단다. 관인은 그 사실을 자주 아니 거의 매일 느끼며 살게 되지. 그러나 본인이 아니 누구든지 간에 그것을 자주 느끼느냐 아니면 어쩌다 한번씩 느끼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황제의 종인 것에는 변함이 없단다. 황제는 자기의 종들인 만성들 중에서 누구라도 마음대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으니 그래서 만승천자(萬乘天子),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고 한다. 이 땅에 살고 있다면 천자의 종이 안 되고는 버틸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적이 되고, 어지를 거스른 죄, 곧 반역죄로 추쇄를 받고 잡혀서, 형장에 끌려가고 만다. 넌 어떻게 할테냐?"
"......"
"역적이 될테냐? 아니면 천자의 종이 될테냐?"
문 밖에서 듣고 있던 진원성은 잘 모를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왔다. 무엇인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긴 한데,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진원성은 이런 것을 들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지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진원성은 범대인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들어오라는 말에 세숫물과 면포를 놓아두고 되돌아 나왔다. 문을 닫은 후에 진원성은 잠시 그 자리에 더 서 있었다. 이병기가 한 말과 범대인이 한 말 모두를 진원성은 기억해두었다. 언젠가 그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기억만 해두어도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숙소로 돌아왔다. 범대인의 밤에서는 그 이후로도 상당한 시간 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국자감에서는 감생들 사이에 많은 이야기들이 오갑니다. 관리 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이야기 들이 가장 많지요. 그리고 무사안일로 자리만 지키고 앉아있는 대신들이 담화의 꺼리가 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주인인 황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이게 제대로 되는 나라 꼴 입니까? 그런 저런 이야기들이 감생들 사이에서 수 없이 나열되는 담화꺼리입니다. 감생 들 중에서 지방관으로 나갔다가 심지어 1 년도 못 채우고 쫓겨나는 그런 소식이 감생들 사이에서 돌면, 감생들 모두가 한숨을 쉽니다. 관리의 길을 가겠다고 감생을 들어왔는데, 1 년도 못되어 탐관오리의 낙인이 찍혀 관에서 쫓겨나면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
"그런데 더욱 기절초풍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대부분 다 광감세사 들과의 다툼에서 생기는 불상사이기 때문이지요. 탐관오리의 낙인이 찍혀 모가지 당한 관리의 정작 모가지 잘린 그 이유가 광감세사들에게 밉보여서 그리 되었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관직에 남아있는 것이 탐관오리 들이고요, 청렴한 관리들이 우선해서 쫓겨난다고 하니 이것은 정말 큰 문제일 것입니다. 아무리 악랄한 탐관오리 짓을 해도 광감세사들에게 뇌물만 많이 주면 오히려 능력이 뛰어난 관리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작금의 관장(官場 = 정계)이란 말이지요. 지방관 중에서 만성들의 살림살이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지요? 악착같이 세금만 거둬가면서 뒷일은 나 몰라라 입니다."
"......"
"이래도 관인의 길을 계속 나아가야 되겠는지요? 회시(會試)에 붙으려면 백은 만 냥을 내면 된다고 그러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회시에 붙은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돈을 들여서 지방관이라도 되어, 들인 밑천 만 냥 찾으려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어야 하는 흡혈충이 되어야 한다면 그게 사람이 할 도리 이겠습니까?"
"......"
"지방관이 되어 내려가면, 예나 지금이나 그 지방에 있는 향신 호족들이 가장 먼저 문안 인사를 온다고 합니다만, 문안 인사의 뜻은 크게 다르다 합니다. 예전에는 만성들의 어려움을 같이 힘을 모아 잘 처리해보자는 뜻이었으나, 지금은 만성 들은 이미 거덜난 살림 들 뿐이라, 지방 호족 향신들 중에서 돈이 있는 사람들을 세금의 호구로 삼아 거덜 내려고 하니, 서로 지방관들에 줄을 대어 호구를 피해보자고 하는 것이랍니다. 즉 이제는 향신들끼리 서로 눈에 불을 켜고 쌈박질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합니다. 이제 만성들이 아니라 향신 들까지, 죽기살기로 서로 물어뜯는 아귀다툼을 벌리는 세상이라니, 이래도 관인의 길을 택해 나아가야 하겠는지요?"
"......"
"......"
"말이 그친 것을 보니, 이제 할 말을 다하였느냐? 자 나의 질문에 답을 해보아라. 역적이 될테냐? 아니면 천자의 종이 될테냐?"
"......"
"나의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나도 너의 물음에 답을 해줄 수가 있구나. 대답해보거라."
"전 정말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역적이 될 수도 없고, 천자의 종이 될 수도 없습니다."
"병기야, 내 말을 잘 듣고, 잘 생각을 하여라. 지금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있어서, 곳곳에서 난리고, 기근이고, 역병이다. 지금 관이나 상이나 모두 다 역적이 될 수도 없고, 천자의 종이 될 수도 없는 그런 강팍한 세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관이 되나 상이 되나 그 세상이 다른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네가 욕하였던 그 많은 조정 대신들이나 지방관들도 몰라서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 다 역적이 될 수도 없고, 천자의 종이 될 수도 없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는 말이다. 나도, 너의 부친 역시 상인이지만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예, ......"
"부디, 마음 속에 중용심을 채우고, 세상을 잘 살펴서, 세파를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내가 너한테 해줄 말은 이말 뿐이다. 혹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글로 써서 북경 회관에서 소주회관으로 가는 인편에 보내거라. 그러나 네가 겪어가는 그런 고통스러운 마음은 나중에 너의 앞 날을 열어나가는 데에 훌륭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신중하게 잘 생각하고, 결국은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 앞길을 잘 열어 나가야 하리라."
"예, 숙부님 ......"
"이제 밤이 늦었다마는 살펴가거라. 그리 멀지는 않으니..."
"예, 가보겠습니다 숙부님. 금번 요동 길, 무탈하게 잘 다녀오시길 빌겠습니다."
이병기가 떠난 후로 범대인은 이관주에게 서신을 두 장을 작성하고서야 침대에 들 수 있었다. 한 장은 이관주의 차남 이병기와의 대화를 간략하게 전하는 사신(私信)이었으며, 다른 한 장은 심양성 길 장사내용에 대한 요약편지였다.
"이관주님, 북경 건은 원안대로 잘 진행되었고, 심양성 건 간략하게 적습니다. 금번 상행(商行)은 소주 회관과 북경 회관의 반분, 합작으로 하였습니다. 물목은 비단 2000 필, 도자기 5000 점, 중품 잎차 4000 근, 철제품으로 작도, 거도, 가위, 식도, 바늘 등 또 일상용품 삼천 점 등 7500 근, 물가(物價)는 백은 3000 량이며, 표행은 조천표국(朝天驃局)에 의뢰하였습니다. 표두 대보당(戴保堂) 이하 표사 18 인, 마부 7 인, 각부조수(脚夫助手) 7 인, 쌍두마차(雙頭馬車) 6 대이며, 목적지는 요동도사(遼東都司 요동도지휘사사의 준말) 심양성 내 휘주회관 입니다. 표국에서 표사들 수를 기대한 것보다 많이 붙여주는 것이 퍽 마음 든든합니다. 출발은 만력 30 년 6 월 11 일 진(辰) 시입니다."
[그림 표행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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